주일 설교(Sunday 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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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이어의 교훈 (렘 23:1-6, 요 6:1-15)

1. 렘 23장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양떼를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이방나라로 흩어지게 한 악한 목자인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혼내고 때가 되면 다윗의 후손 가운데 한 의로운 자를 왕으로 세워 공정하고 옳은 일을 하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으로 와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할 것을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렘 23:5) 예수님은 이 약속대로 공정하고 의로운 구원의 주님으로 오셨습니다.(렘 23:6) 양의 문이 되는 예수님은 양들이 그 문을 드나들며 풍성한 꼴을 얻게 합니다. 양으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합니다.(요 10:9-10) 자기 양을 위해서 목숨까지 내놓는 참 목자인 예수님은(요 10:14,15) 목자를 잃고 헤매는 양과 같은 죄인들을 품어주시고 긍휼을 베풀어 구원해 주십니다.(막 6:34)

2. 오늘 본문은 말씀을 듣다가 때를 놓친 배고픈 군중을 배불리 먹인 이야기입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기적을 베풀어 오천 명을 먹인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먹는 문제에만 관심을 갖고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만류했습니다. 제자들에게 성만찬을 제정해 주실 때에도(눅 22:14-20) 먹는 문제를 언급하지만 그것은 영적인 문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희생짐승의 피로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는 유월절의 의미를 알고 있는 제자들은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며 기념하는 성만찬이 유월절과 같은 구원을 의미한다는 것을 쉽게 이해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가 영생을 얻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요 6:57에서는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라고 했습니다.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그 안에 거하는 것이며 지속적으로 교통하는 것입니다.

3. 그러므로 오병이어의 기적이야기도 먹는 문제보다는 기적을 행하는 주체이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영적체험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공관복음서에 빠지지 않고 기록된 오병이어 이야기는 예수님이 세상을 구원하는 메시아로 오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눅 9장의 기록을 보아도 12제자를 보내 전도하게 한 일과 요한의 죽음을 언급한 후에 오병이어 이야기와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교회설립에 관한 말씀과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이야기를 연결시킵니다. 앞뒤의 이야기를 보면 오병이어 이야기는 제자들을 훈련하여 복음을 전하게 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주신 기적사건입니다. 빌립은 많은 사람을 먹이려면 200데나리온이나 되는 큰 금액이 필요하다고 걱정했지만 예수님은 적은 음식으로 많은 사람을 먹였습니다. 제자들의 무능함과 예수님의 능력이 대조됩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지만 주님에게는 불가능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마 19:26)

4. 엡 2장은 이방인과 유대인을 불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하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은 하나님의 약속에서 제외된 소망이 없던 사람들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림으로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가 되게 하고 화목하게 만들었습니다. 십자가는 이렇게 나누어진 둘을 하나 되게 합니다. 하나님과 죄인을 하나 되게 하고 사람과 사람사이도 화목하게 합니다. 성령 안에서 교회를 하나 되게 하고(엡 2:14-18) 그리스도와 상관없던 세상을 교회와 하나 되게 합니다. 하나 된다는 것은 서로 용납하고 교통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다.”(요 10:14, 15)라며 거룩한 교제를 말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가 하나이며 친밀한 관계에 있는 것처럼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게 받아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특권입니다.

5. 베드로는 주님께서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하여 예수님께 칭찬을 들었습니다.(마 16:16) 이 신앙고백 위에 주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세웁니다. 교회가 주님께 속한 것이기에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이런 신앙고백을 하는 교회에게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행 2장에서 성령 충만한 제자들을 술 취한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을 분명하게 전하여 그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 믿게 했습니다. 그 천국 열쇠를 사용하여 천국의 문을 열었던 것입니다.(행 2:14-40) 이 권한은 베드로에게만 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믿는 성도들에게도 주셨습니다. 천국 열쇠를 사용하여 또 다른 사람들을 구원받게 하는 영적 사역의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런 은혜가운데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6. 오천 명을 먹이던 현장에서 함께 일하던 제자들의 희열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축사한 후에 떼어 준 음식을 받아 사람들에게 나눠주던 제자들은 자기 손에 들려진 음식을 나눠주고 또 나눠주어도 줄어들지 않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적은 양의 음식으로 오천 명이나 되는 남자들을 배불리 먹인 것도 기적이지만 주님께서 행하는 그 기적에 함께 했다는 것이 제자들에게는 큰 기적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주는 힘으로 주고 또 나누어 모두를 배부르게 한 사역의 감격이 컸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에 감사하는 자리에 멈추지 않고 구원의 감격과 능력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이유입니다. 교회를 통하여 함께 일하는 우리들이 복음을 전하며 예수 사랑을 나눠주고 또 주어도 우리에게는 더 많아지는 풍성한 기적을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주시는 능력을 체험하고 그것으로 하나님 나라를 넓혀가는 사역의 감격을 누리기 바랍니다.(빌 4:13)

7. 광야에서 만나를 먹여주신 하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영적인 존재임을 알게 했습니다.(신 8:3)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제자들을 훈련했고 영생을 주시는 주님을 확신하고 전하게 했습니다. 단지 눈에 보이는 먹고 사는 문제에만 관심을 두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배우게 했습니다. 그렇게 훈련받은 제자들이 복음을 전해주었기에 오늘 우리들도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시대의 교회도 동일한 주님의 명령 앞에 있습니다. 무엇을 먹고 마실까보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추구하는(마 6:33) 생활을 통하여 또 다른 사람을 새롭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더 많은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날마다 인도하고 보호해 주십니다. 사역하는 감격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개인과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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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새로워지는 교회 (마 28:19-20, 행 2:38-47) 교회창립 37주년 기념주일

1. 오늘은 교회 창립 37주년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우리를 만나주시고 인도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교회를 섬기느라 염려하고 땀 흘리며 수고한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하고 하나님께서 위로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다양한 배경과 전통을 가진 교회들이 여기저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미국에는 어느 마을이든지 중앙에는 센터 스트릿이 있고 그 옆에는 처치 스트릿이 있습니다. 마을 한 복판에 여러 교단의 교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봅니다. 같은 신앙고백을 하지만 교단마다 강조하는 부분이 조금씩 다릅니다. 시대마다 사람들의 생각도 바뀌고 교회들의 신앙색깔도 변합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돌아가려는 시도들이 때마다 일어났고 그때마다 새로운 교회가 태어났습니다.

2. 중세 카톨릭교회가 타락하자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세워진 개신교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복음전도보다 교회운영을 우선하다 보니 생명력을 잃어 18세기 영국교회는 세상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때 성공회 신부였던 웨슬리가 일어나 거룩한 생활과 신자의 책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홀리 클럽을 만들어 날마다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봉사하는 생활을 얼마나 철저하게 점검했던지 사람들은 그들을 원칙론자라고 비웃으며 메소디스트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감리교회는 19세기 초반까지 미국교회와 세계선교를 선도하는 교단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감리교회마저 세속화되고 힘을 잃게 되자 다시 성결한 생활과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는 오순절교단들이 생겨났습니다.

3. 한국교회를 생각하면 처음 복음을 들었을 때의 감격과 열정이 그립습니다. 천막치고 가마니를 깔고 예배드리는 가난한 교회에서의 신앙생활도 부끄럽지 않을 때가 있었습니다. 자기도 배고프면서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려 했고 복음을 전하는 열정도 대단했습니다. 88년 올림픽이후에 한국이 세상에 알려지고 경제도 발전하고 교회도 해외선교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교회의 문제점들도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시설과 프로그램이 있는 대형교회를 선호하게 되었고 교회의 힘은 외형적으로 보이는 성도수와 헌금액수에 있었습니다. 성경적인 가르침을 실천하는지는 판단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4. 교회는 가난한 사람에게 부자가 되는 길을 가르쳤고 열심히 기도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한(마 5:3) 성도의 생활이나 서로 섬기고 낮아지는 것을 실천하는 일에는 게을렀습니다. 이웃을 돕거나 선교후원의 일에도 자기 이름을 내고 자랑할 수 있어야 동참했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마 6:6) 주님 앞에서 일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부자가 되고 형통하게 되는 일에는 관심이 컸지만 정작 그것이 필요한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일에는 인색했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신앙생활은 열심이었지만 가정이나 일터에서의 삶은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이런 교회는 더 이상 세상의 응원을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이미 부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5. 우리시대의 교회는 다시 세속화의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다원화된 가르침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오직 예수로만 구원을 받는다(행 4:12)는 것은 매력이 없습니다. 가정의 질서가 깨지고 전통적인 개념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아빠 엄마라는 칭호는 사라지고 그들이라는 표현이 부모에게 붙여지고 있습니다. 소수라도 차별당하지 않게 보호하려는 차별금지법이 오히려 대다수를 차별하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돈이 하나님 자리를 차지한 물질만능시대에 돈 버는 일 앞에서 신앙생활은 우선순위에서 밀립니다. 전염병 때문에 몸에 베어버린 영상예배의 편안함도 쉽게 떨쳐내기 어려운 일입니다. 운전하는 사람이 없이도 움직이는 자동차가 나오고 우주정거장도 세었습니다. 달라진 세상만큼이나 성경의 가르침은 세상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순교를 각오해야 하는 말세의 징조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6. 교회의 사명을 새롭게 하고 각자의 역할을 새롭게 해야 할 때입니다. 사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자랑하는 일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선택하고 불러 세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 죄인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고후 5:18) 우리들도 십자가 복음을 믿고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는 자녀가 되었습니다.(롬 8:15)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따라 같은 신앙고백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을 모시고 머릿돌 삼아 성도들이 함께 주의 몸인 교회를 세웁니다. 성령을 모신 거룩한 처소가 되고 교회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엡 2:20-22)

7. 오순절 성령강림을 경험한 사도들은 부활의 복음을 담대하게 전했고 성령의 능력으로 기적을 행했습니다.(행 2:43)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성도들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서로 섬기고 사랑하며 복음을 실천하는 삶으로 살아냈습니다. 자기 소유를 팔아 필요한 사람들과 나누었고 교회는 그것으로 구제하며 사회정의를 실천했습니다.(행 2:44-45) 사람들은 교회를 통하여 구원을 받고 묶인 문제들을 해결 받았습니다. 교회의 소문은 빨리 펴졌고 믿는 자의 수가 날로 증가했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가서 세례를 베풀고 가르치고 전하여 제자 삼으라는 예수님의 명령(마 28:19-20)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의 수고와 헌신 때문에 복음은 확장되었고 오늘 우리들까지 복음의 능력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8. 제자는 한 번의 교육으로 되지 않습니다. 삶을 나누는 지속적인 관계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변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지속적으로 성장해 가는 것을 말합니다.(엡 4:13) 교회는 이것을 위해서 모이기에 힘씁니다.(히 10:25) 함께 모여서 예배하고 함께 배웁니다. 그리고 각자 흩어져 배운 대로 생활하며 복음을 전하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이것을 모이는 교회, 흩어지는 교회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교회는 공동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하고 가 기관과 구역과 소그룹에서 경험한 것을 서로 나누고 점검받습니다. 다음세대를 세우는 일에 힘쓰고 문화센터와 선교협력을 통하여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것을 배웁니다.

9. 교회는 군인들의 훈련장과 같고 생명을 구하는 구조대원들의 임시거처와 같습니다. 거기는 허리띠를 풀지 못하는 긴장감이 있고 자기욕심과 안일함과 싸우는 땀 흘림이 있고 그래서 조금은 소란한 곳입니다. 교회에서 휴양지나 유람선에서 느끼는 편리함이나 느긋함을 찾는다면 생명을 살리고 새롭게 하는 영적 생명력이 상대적으로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구원의 감격과 능력을 나누는 생동감과 기쁨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들의 교회생활이 시간을 더할수록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교회로 더욱 새로워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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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할 때 강함이 되는 주님 (고후 12:1-10)

1. 바울은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에는 딴 사람으로 변하여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세운 고린도교회가 거짓교사들의 영향을 받고 또 자신의 사도로서의 권위마저 의심받게 되자 부득이하게 자기를 변호하게 됩니다. 갖은 어려움을 참으며 표적과 기사와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섬기던 일을 언급하며 거짓교사들처럼 잠깐 어리석은 자가 되어 자기 자랑을 하겠다며 사도로서의 입장을 밝힙니다.(고후 11:1,16) 거짓교사들은 뱀이 하와를 꾀듯 다른 복음을 전하여 교인들을 현혹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죄인들을 위해 대신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정치 혁명가, 육체가 아닌 영, 도덕적인 신으로의 예수를 가르쳤습니다.(요일 4:1) 그들은 바울이 교회로부터 사례도 받지 못하는 자격미달자라고 비방했습니다.

2. 바울은 거짓 선생들의 잘못된 가르침으로부터 교회를 바로 세우려는 마음에서 부득이하게 자신을 변호했습니다. 그리고 거짓선생들에 비해 자신의 영적 경험이 모자라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에게는 세상적으로도 자랑할 것이 많았습니다. 정통 유대인의 혈통을 갖고 태어났고 율법에 비추어 완전했으며 학문적으로도 당시 훌륭한 선생인 가말리엘 밑에서 공부했으며 로마 시민권을 가진 특권층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영적으로도 하나님이 거하는 셋째하늘을 경험하고 특별한 계시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14년 전에 경험한 환상과 계시를 자랑하지 않고 간직해 오다가 교회를 바로잡기 위해서 부득이하게 그것도 남의 말을 하는 것처럼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고후 12:6)

3. 바울은 자기 약점을 하나님의 은혜로 해석했습니다.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12:7) 자기가 경험한 영적 체험과 계시가 너무 커서 교만해질까봐 하나님께서 찌르는 가시로 사단의 사자를 남겨두셨다고 말합니다. 그를 힘들게 하는 가시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간질이나 안질과 같은 고질병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영과 육을 힘들게 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해결해 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하게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바울에게 주신 은혜가 이미 족하다고 대답했습니다.(고후12:7-9) 자기가 기대한 것과 다른 응답이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수용하는 바울의 겸손함을 봅니다.

4. 교만은 망하고 넘어지게 되는 지름길입니다.(잠 16:18)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처럼 되려는 교만한 마음이 있었기에 사단의 유혹을 수용했고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다윗도 사울의 칼을 피하여 망명 다닐 때는 겸손하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했지만 그가 성공하고 많은 것을 갖게 되자 느슨해져서 밧세바를 범했습니다.(삼하 11장) 더 이상 직접 전쟁터에 나가지 않아도 충성스런 부하들이 전쟁을 해주던 형통하고 안전할 때였습니다. 죄는 자만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할 때 슬며시 들어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난한 마음과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만 바라보는 사람을 기뻐합니다.(마 5:3) 이것이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며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진정한 헌신입니다.(롬 12:1-2) 바울에게 찌르는 가시는 겸손하게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게 하는 은혜의 수단이었습니다. 약한 자신을 벗어버리고 강한 그리스도로 옷 입는 길이 되었습니다.(롬 13:14)

5. 행 3장에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앞에서 구걸하는 걷지 못하는 사람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는 가난했지만 성령으로 충만한 하나님 나라의 부자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자 걷지 못하던 걸인이 걷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약함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드러내는 길이 됩니다.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삿 6:15)라고 말하던 겸손한 기드온을 하나님께서 사사로 세워 미디안을 물리치게 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고후 12:10)라는 말은 약할 때일수록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의 강함을 의지했다는 말입니다.

6. 십자가는 죄인을 매다는 사형 틀이었습니다. 수치스럽고 더럽고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짊어지고 죄인들을 위해서 대신 죽음으로 십자가는 구원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었습니다.(고전 1:18)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세상에 오셨고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 죄를 벌해야 하는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켰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을 얻고(요 3:16) 그를 영접하는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했습니다.(요 1:12) 믿는 자들을 사망에서 생명을 옮겨주십니다.(요 5:24) 거짓교사들은 자기들의 영적 경험을 자랑하고 부요함을 자랑하고 유대인의 전통을 가르쳤지만 바울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고 오직 그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 순전한 복음을 전했습니다.(롬 1:16-17)

7. 자신의 무능함을 깨달을 때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때입니다. 어려움 속에서 자신이 누구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점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가진 성도는 고난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뜻을 묻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고난이 오히려 복이 됩니다.(시 119:71) 야곱이 하란에서 21년을 살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형을 속이고 장자가 받을 복을 훔친 것으로 인해 항상 형의 보복을 두려워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갈 때 얍복 강가에서 철저하게 회개하며 밤새워 기도했는데 성경은 그것을 천사와 씨름했다고 표현했습니다. 형의 칼로부터 보호받고 화해할 수 있기를 위해서 자신을 내려놓고 간절하게 기도한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형의 환대도 받게 했습니다.(창 32장) 자신에 대하여 죽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8. 전염병을 조심해야 하는 때에 우리가 지냅니다. 이럴 때 마냥 활동을 자제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병에게 지지 않고 이겨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점검해 보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다면 이때가 오히려 유익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다음 주일은 교회창립 37주년을 감사하는 주일입니다. 과거에 우리 교회가 강할 때도 있고 약할 때도 있었지만 그 어느 때이든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셨습니다. 앞으로도 겸손하게 엎디어 주님을 구하는 교회가 된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또 우리를 계속 사용해 주실 것입니다. 갈 6:14에서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했는데 우리들도 이런 겸손한 자세로 주님을 자랑하는 교회로 자리매김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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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대하는 자세 (막 6:45-52, 시 23)

1. 우리들은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약한 존재입니다. 누구든 예외 없이 삶의 버거운 문제를 만납니다. 자신의 약함 때문이든지 아니면 시대의 아픔이든지 우리 모두는 고난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엊그제 플로리다에서는 12층짜리 콘도가 무너져서 수백 명이 다치고 죽었습니다. 전염병에서 속히 벗어나기를 바라지만 변이 바이러스가 생겨 아직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온라인으로 공부하고 일하며 많이 지쳤고 젊음의 시간 한 부분을 잃어버렸다고 안타까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6.25 전쟁이 일어난 지 71년이 되지만 아직도 그 전쟁은 끝나지 않은 채 시간만 지나가고 있습니다.

2. 믿음으로 사는 우리들도 고난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때로 의인이 고난을 당하고 악인이 승리하는 것을 봅니다. 의롭게 살던 욥이 왜 고난을 당해야 했는지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고난을 이겨내야 하는지는 분명하게 배울 수 있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원망하기를 기대한 사단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욥에게 고난을 주었지만 욥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습니다. 재물과 자녀를 다 잃고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는 형편에서도 욥은 하나님을 오히려 찬양했습니다.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가장 처참한 상황에서 욥은 주신 분도 하나님이고 취하는 분도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욥 1:21) 하나님께 복을 받았으니 재앙을 받을 때도 있지 않겠느냐며 입술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욥 2: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고백했습니다.(욥 23:10)

3. 이것이 문제를 만날 때 가져야 할 믿음의 자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아래 있는 피조물이기에 주권자가 하는 일에 대하여 따질 수 없습니다.(사 45:8-13) 쉴만한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심을 감사하고 해를 당하지 않도록 지켜주실 것을 믿고 감사할 뿐입니다.(시 23) 어려움도 하나님이 주관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우리가 평안할 때 오히려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겸손하게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선 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질까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이 당한 시험은 모든 사람들이 다 당하는 시험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므로 여러분이 감당할 수 없는 시험당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여러분이 시험을 당할 때에 피할 길을 마련해 주셔서 감당할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고전 10:12-13)라고 했습니다.

4. 예수님은 들에서 말씀을 듣던 배고픈 오천의 군중을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였습니다.(막 6:44) 난생 처음 이런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은 먹는 문제에서 해방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습니다. 제자들도 떡과 고기를 나누어주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보람을 느꼈고 주께서 새 세상을 열면 한자리 얻을 수 있겠다는 기대를 했습니다.(막 10:37) 그런데 그런 즐거움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오병이어의 기록에 이어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기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평소 활동하던 곳이고 잘 아는 갈릴리바다였지만 그 날은 밤새 바람과 싸웠지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도와주려고 옆으로 걸어왔지만 제자들은 그를 유령으로 알고 두려워했습니다. 성공과 출세의 기회를 꿈꾸며 어깨에 힘을 주던 조금 전의 제자들과는 너무 다른 모습입니다.

5. 예수님은 전날 밤 서둘러 제자들을 바다 건너편으로 보내고 자신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군중들을 해산시킨 후 산으로 기도하러 갔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세워 정치해방을 이루고 먹는 문제도 해결해 주기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도 명예와 영광을 주겠다고 시험했는데(눅 4:1-2) 지금도 명예와 권세를 취하라고 군중들을 사용하여 시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대속물로 주어 십자가에서 죽으려는 사명(마 20:28)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전도의 사명을 함께 감당할 제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했습니다. 제자들이 한껏 마음이 부풀어 주님이 세울 나라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밤새 거친 바람과 싸우고 있습니다. 다행인 것은 힘든 싸움 때문에 세상 권력이나 명예를 꿈꾸던 조금 전의 일들은 까맣게 잊었다는 것입니다.

6. 예수님은 제자들이 바른 믿음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막 6:51-52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예수님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잔잔해졌습니다. 이전에도 광풍을 잠재우던 예수님을 보았지만(막 4:35-41) 이날 제자들은 예수님이 창조주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겁에 질린 제자들을 위로하며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막 6:50)고 위로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출 3:14)라고 자신을 알려준 것처럼 말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이 세상에 빼앗겨 둔해졌지만 이번 고난을 통하여 전능자이신 예수님을 바로 알게 되었으니 고난이 오히려 복이 되었습니다.

7. 주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뿐 아니라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바른 기도를 하지 못할 때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해 주십니다.(롬 8:26) 그러기에 어떤 형편에 있더라도 주님을 의지하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우리는 정금같이 단단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을 깨달은 시편 기자는 시 119: 67, 71에서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고난을 통과하며 겸손해지고 주님 앞에 엎디어 도움을 청하게 되니 힘든 과정이 오히려 감사의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가나안까지 가는 한 달 거리의 길을 40년이나 걸려 통과했습니다. 힘든 광야생활을 견디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8. 잠 17:3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주님의 부름에는 결코 후회나 실수가 없습니다.(롬 11:29) 그는 우리를 만드신 분이며 우리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아는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창 17:1)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분입니다.(롬 8:28) 이런 주님이 우리를 불러 함께 하자고 초청합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마 11:28)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누구든지 이 부름에 응답하여 예수님을 모시면 영혼의 쉼을 얻습니다. 구원을 얻고 평안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어떤 문제가운데 있을지라도 주님의 손을 붙드십시오. 주 안에서 어려움이 변하여 복이 되는 기쁨을 누리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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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다시 새롭게 (애 3:19-26, 막 5:21-43)

1.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라고 불립니다.(렘 9:1)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할 즈음 암울하고 소망이 없는 때에 눈물로 활동한 선지자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다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것 때문에 바벨론의 포로가 될 것이며 70년이 지나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애굽과 바벨론 사이에서 눈치를 보던 사람들은 친 바벨론적인 예언을 하는 그를 반민족적인 선지자로 낙인찍고 강대국과 내통하고 있다고 핍박하고 옥에 가두기까지 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는 그가 예언한대로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에 슬픔을 노래한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을 때에만 행복합니다. 약속 관계에 있는 사람은 그 약속을 지킬 때에만 특권도 유지됩니다.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들이 성령의 인 치심의 은혜를 유지하려고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성전에서 제사하면서 하나님과 관계를 유지했었는데 성전이 무너지자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들것은 뻔 한일입니다. 애 1:1,4 “아, 슬프다. 예전에는 사람들로 그렇게 붐비더니, 이제는 이 도성이 어찌 이리 적막한가! 예전에는 뭇 나라 가운데 으뜸이더니 이제는 과부의 신세가 되고, 예전에는 모든 나라 가운데 여왕이더니 이제는 종의 신세가 되었구나. 시온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쓸쓸하다니! 명절이 되었는데도 순례자가 없고, 시온 성으로 들어가는 모든 문에도 인적이 끊어지니, 제사장들은 탄식하고, 처녀들은 슬픔에 잠겼구나. 시온이 이렇게 괴로움을 겪는구나.”

3. 세 차례의 바벨론의 침입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포로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은 거주민의 수가 줄어들어 적막해졌습니다. 성벽도 성전도 무너져버렸습니다. 마치 남편과 사별한 부인의 쓸쓸함과 같습니다. 여러 나라들 중에서 여왕같이 대접받더니 이제는 시녀처럼 학대를 당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뛰어노는 소리도 들을 수 없습니다. 명절이 되어도 잔치의 즐거움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성전을 찾아 예배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유다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혀 쇠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렘 39:7) 종교와 정치가 타락하면 나라가 망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 유다백성들이 우상을 섬겼습니다. 제사장들은 기득권세력과 결탁하여 자기 배를 채웠습니다. 이방 신인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정치인들은 약자들을 보호해주지 못했습니다. 힘 있는 자들은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았습니다. 죄를 지적하는 예레미야를 잡아 가두기도 했습니다.(렘 37:11-15)

4. 하나님께서는 그가 택한 백성들을 끝까지 사랑하는 분입니다. 채찍을 드는 것은 그들을 바로잡기 위함이지 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회개시켜 다시 평안을 누리고 소망을 갖게 하려는 것입니다. 렘 29: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선지자는 “지나온 길을 돌이켜 살펴보고, 우리 모두 주님께로 돌아가자.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열고, 손을 들어서 기도하자.”(애 3:40-41) 라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회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고 부름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의지하는 믿음의 결단입니다. 회개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자비와 신실함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그의 자비와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애 3:22-23) 하나님은 기도하고 잠잠히 기다리는 사람에게 응답하시고 구원해 주십니다.(애 3:24-26)

5. 예레미야는 70년을 기다리면 분명 하나님께서 그들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고 소망을 제시했습니다. 렘 30:17-22 “내가 너의 상처로부터 새 살이 돋아나게 하여 너를 고쳐 주리라. 내가 야곱 장막의 포로들을 돌아오게 할 것이고 그 거처들에 사랑을 베풀 것이라. 성읍은 그 폐허가 된 언덕 위에 건축될 것이요 그 보루는 규정에 따라 사람이 살게 되리라. 그들에게서 감사하는 소리가 나오고 즐거워하는 자들의 소리가 나오리라. 내가 그들을 번성하게 하리니 그들의 수가 줄어들지 아니하겠고 내가 그들을 존귀하게 하리니 그들은 비천하여지지 아니하리라. 그의 자손은 예전과 같겠고 그 회중은 내 앞에 굳게 설 것이며 그를 압박하는 모든 사람은 내가 다 벌하리라. 그 영도자는 그들 중에서 나올 것이요 그 통치자도 그들 중에서 나오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애 5:21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키셔서 우리가 다시 주께 돌아가게 하시며 우리를 새롭게 하셔서 다시 옛날처럼 되게 하소서.”

6.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은 여인은 12년이나 끝없이 괴롭히던 질병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부정한 몸이기에 다른 사람과의 교제도 불가능했고 치료를 위해 재산도 다 탕진했습니다. 예수님은 절망가운데 있던 그 여인을 완전하게 치료해 주었습니다.(막 5:29,34) 회당장 야이로의 딸도 예수님이 도착하기 전에 죽었지만 예수님은 죽었던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켜 걷게 했습니다.(막 5:42) 오직 믿음만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려고 가난에 처했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고후 8:9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그 안에 거하는 사람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 어떤 문제를 만나도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7. 대면 예배를 준비하지만 회복되기 까지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해 보입니다. 두려움과 편안함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이러스나 모이지 못하는 어려움보다 더 심각한 것은 믿음이 약해지고 교회 공동체의 결집력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주님과의 교제의 끈이 느슨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고(막 9:24)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 할 때입니다. 믿음은 형편에 따라 달라지거나 자기 생각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믿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대면이든 비 대면이든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처음 믿음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8. 오늘은 아버지날입니다. 각 가정의 아버지들이 이런 절대 믿음으로 가정을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를 대물림하기를 축복합니다. 아버지는 가정을 위한 복의 통로입니다. 정직하고 흠 없이 사는 의로운 아버지를 모신 자녀는 복이 있는 자입니다.(잠 20:7) 의로운 아버지들이 자녀를 위해서 믿음으로 복을 빌고 또 주의 말씀으로 예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다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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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확장. (막 4:26-34)

1.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여러 비유로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들을 귀가 있는 사람만이 그 말씀의 의미를 듣고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는 따로 그 비유의 말씀을 설명해 주기도 했습니다.(막 4:33–34). 오늘 말씀에는 작은 생명체인 씨앗이 땅에 뿌려져 싹이 트고 자라는 것을 잘 알지 못해도 땅이 그것을 키워내고 결국 큰 그늘이 되어 생명체가 쉬어갈 수 있을 만큼 자라게 되는 것처럼 천국도 그렇게 영적 생명력을 통하여 확장된다는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구약에서 강대국의 세력이 하늘에 닿을 정도가 되어 주변 나라들이 도움을 청하게 되는 것을 말하려고 심겨진 나무가 크게 자라서 공중의 새들이 날아와 깃든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겔 31:6)

2. 씨앗은 땅속에 들어가 죽어야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습니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이것이 영적인 일에도 적용됩니다. 예수님은 한 알의 씨처럼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가 죄인들을 위해 죽음으로 믿는 사람 모두를 살게 하는 생명나무가 되었습니다.(창 3:22-24, 계 22:1-2) 죄 짐을 지고 탄식하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자유를 얻고 참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마 11:28) 누구든지 그 안에 깃들면 보호를 받고 새롭게 됩니다.(고후 5:17). 이 땅에서의 문제도 해결되고 죽을 때에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으로 옮겨집니다.(고후 5:1) 예수님은 구원을 위한 씨앗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늘권세를 버리고 낮고 천한 세상에 오시어 자기 몸을 둘 곳 없는 나그네로 지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거하며 목마름과 피곤함을 경험했습니다. 오직 아버지만을 드러내고 그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죄인들을 위해 죽어 영원히 사는 생명나무의 싹을 틔웠습니다.

3.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자기들 생각대로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메시아가 힘 있는 군주로 등장하여 정치해방을 이루고 태평성대를 이루어 주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는 메시아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꿈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의 도움으로 천국의 기쁨은 다시 확산되었습니다. 죽은 후에 가는 천국만이 아니라 날마다 주님과 함께 하는 동행의 즐거움을 배웠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부활하여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했습니다. 그들의 희생은 또 다른 씨앗이 되어 많은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땅을 넓혀가는 것보다 주님과 동행하는 관계의 성숙함입니다. 믿음이 자란다는 것은 얼마나 주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4. 천국은 장차 완성될 것이지만 이미 우리가운데 임한 것이기도 합니다.(눅 17:21)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습니다.(갈 3:13) 그의 대속의 죽음을 통하여 죄인들이 변하여 천국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변화된 사람들의 생활간증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성장하고 확장되어 갑니다. 성령강림으로 태어난 신약교회는 일상생활 속에서 구원의 감격을 나눈 보통사람들 때문에 날마다 흥왕했습니다.(행 2:44-47) 사도들에게 복음을 배운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가르치고 전했습니다. 날마다 모여 예배하고 기도하며 서로 돌보았습니다.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소문이 났고 그 천국복음은 확장되어 오늘 우리에게까지 들어왔습니다. 작게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가 크게 확장되었습니다.

5. 천국은 하나님이 계시는 영광스런 곳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과 보좌 앞에서 찬양하는 천사들을 보고는 그 거룩함과 대조되는 자신의 죄를 보았습니다. 죄를 용서해 주시는 은혜를 경험하고는 부름에 즉각 응답했습니다.(사 6:1-8) 사도요한도 천군천사의 찬양소리로 가득한 빛나고 높은 보좌가 있는 천국을 보았습니다. 제한된 언어로 다 설명할 수 없기에 요한은 벽옥이나 수정 같이 맑은 보석으로 꾸며있고 해나 달의 빛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찬란하게 빛나는 곳이라고 설명했습니다.(계 21:23-26) 천국은 하나님의 임재와 그의 영광이 있는 곳입니다. 눈물도 없고 아픔이 없는 곳입니다. 생명나무 과실에 열매가 풍성하고 생명수 강물이 흘러넘치는 곳입니다.(계 22:1-2) 우리는 장차 들어갈 천국을 오늘 여기서 맛보며 삽니다. 성령께서 내주하는 거룩한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는 천국의 모형입니다.(엡 2:22)

6. 복음을 믿고 천국의 기쁨을 누리던 선배들을 통하여 37년 전에 보스톤중앙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교회를 통하여 복음의 능력을 맛보았습니다. 예수를 믿고 새 생명의 능력을 삶으로 살아내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인내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넓혀왔습니다. 이민 환경이 예전 같지는 않지만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는 구원의 길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분이며 택한 성도들을 사용하여 일하는 분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따르며 성령의 감동에 순종하는 교회입니다. 먼저 경험한 은혜를 삶을 통하여 전하고 가르치기를 힘씁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계속될 것이고 더 많은 사람들과 다음세대를 말씀으로 새롭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소그룹에서의 진솔한 나눔과 성령으로 충만한 예배를 더욱 사모합니다. 문화센터를 통하여 이웃을 섬기고 선교사님들과 함께 멀리 있는 주님의 백성들과도 함께 일할 것입니다.

7. 우리의 노력으로 천국을 만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자라고 열매 맺는 일은 전적으로 씨앗에 있는 생명력과 땅과 환경을 주장하는 하나님의 몫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 되게 하는 것이 모든 사역보다 우선이라는 것을 압니다. 작은 씨가 자라고 적은 양의 누룩이 밀가루 속의 반죽을 부풀게 하듯이 우리 안에 거하는 성령께서 우리로 자라게 하고 천국을 소망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성령과 함께 하기를 노력합니다. 성장을 멈춘 나무는 말라버립니다. 아니 생명이 없는 씨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모양과 크기는 달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우리에게 있고 하나님 나라의 생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살아있는 생명은 반드시 자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아는 일에 충만한 분량에 이르도록 성장하고(엡 4:13) 우리 안의 천국도 더 성장하고 확장될 것입니다.

8.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고후5:17) 우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 28:19)는 복음전도의 명령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책임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씨앗이 언제 자라는지 모르지만 그 결과로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들의 생활간증을 통하여 이웃이 죄에서 자유하게 되고 소망을 얻고 치유와 회복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을 자랑하기만 하면 주님께서 친히 사용하실 것입니다. 주님이 힘주시는 은혜로 우리 모두가 이 일에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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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이 주는 유익(고후 4:16-18)

1. 요일 4:10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택한 자기백성을 끝까지 사랑하는 분입니다. 아담이 사단의 꾀에 넘어가 죄를 짓고 죽게 되었을 때에도 그냥 내치지 않았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으로 구세주를 약속해 주셨습니다.(창 3:8-15) 그 약속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은 사람의 아들이 되어 여자의 몸을 통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 피 흘려주셨습니다. 마귀를 결박하고 율법의 저주와 사망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도록 묶인 것들을 끊어주셨습니다.(막 3:27) 죄의 결과는 죽음이지만 하나님의 선물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주는 영생입니다.(롬 6:23)

2.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부활의 승리를 이해하면 우리가 겪는 어려움들에게 지지 않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을 새로운 존재로 회복시켰고 부활의 능력과 소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와 일하심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이 믿음이 모든 시험과 어려움들을 인내하고 극복하게 합니다. 고난을 통과하며 정금같이 단단한 믿음으로 단련됩니다. 고난 때문에 재림 때에 받을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더욱 바라보게 되고(벧전 1:3-7) 시험을 극복하도록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고난을 통하여 얻는 유익이 있다는 것입니다.

3. 바울은 복음을 생활로 실천한 사람입니다.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 복음을 전하는 자로 부름 받았다는 것을 항상 감사했습니다. 사도로 부름 받은 것이 사람들의 권면이나 부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갈 1:1) 그러기에 자신에 대하여는 날마다 죽고 자기 안에서 예수께서 대신하여 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갈 2:20) 자기는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간직한 질그릇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고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겸손한 자세를 취했습니다.(고후 4:7) 그는 복음 때문에 고난을 받았지만 그것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복음이 전해지기에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고백했습니다. 살고 죽는 것보다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일에 삶의 이유를 두었습니다.(빌 1:19-21)

4. 고난은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겉 사람이 약해지는 만큼 속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배우는 긍정적인 은혜가 있습니다.(엡 4:15) 아버지의 재산을 챙겨 집을 나간 탕자에게 실패와 배고픔은 아버지 집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는 복된 기회가 되었습니다.(눅 15:17-18) 우리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철저하게 자신에 대하여 무너지는 때가 하나님의 구원을 얻는 때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고 인격 모독을 당하기도 했습니다.(행 16:23) 교인들로부터 사도로 인정받지 못하는 가슴 아픈 일도 있었습니다. 거기에 자기 몸에는 찌르는 가시 같은 지병이 있었습니다. 이런 어려운 처지에서 바울은 하늘 소망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장차 받을 영광을 생각하면 지금 받는 고난은 오히려 가벼운 것이라고 역설적인 고백을 했습니다.(고후 4:17-18)

5. 욥이 당한 고난도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의인이 가족과 재산과 건강을 다 잃고 고통 가운데 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욥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23:10)고 하나님에게 마음을 두었습니다. 고난을 불평하지 않았고 인내하고 감사했습니다. 우리가 약할 그때가 바로 주님의 강함을 경험할 수 있는 때입니다. 자신에 대하여 죽어야 부활하신 주님이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고난은 주님의 법도를 배우게 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체득하게 합니다.(시 119:71)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앞에 무릎을 꿇게 합니다.

6. 믿음은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섭리는 하나님 아버지가 자녀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 돌보고 다스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섭리를 믿는 성도는 신실한 부모의 돌봄을 받는 아이처럼 하나님의 자상한 보호와 인도를 받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의지하고 마음이 한결같은 자에게 완전한 평안을 주십니다.(사 26:3)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신 주인이기에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혹 테스트가 필요할 때에라도 피할 길을 주어 그것을 감당하도록 도와주십니다.(고전 10:13) 요셉은 형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와 온갖 고난을 당했지만 하나님께서 자기를 미리 애굽으로 보내 가족을 구원하게 한 것이라고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습니다.(창 50:15-21)

7. 송병주 목사의 <오후 다섯 시에 온 사람>이라는 책에 한 어머니의 간증이 나옵니다. 청년 시절 선교사를 꿈꾸던 그녀가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 셋이 모두 중증장애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 어머니는 ‘내가 사명을 다하지 못해서 벌을 받는 것인가?’라는 생각으로 괴로웠습니다. ‘하나님께서 벌하는 것이라면 어린 아이들에게는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답니다. 어느 날 기도 중에 이런 생각을 주셨답니다. “미안하다 내 딸아. 이 세상에 꼭 보내야 할 약한 세 영혼이 있는데 너라면 잘 맡아줄 것 같아서 네게 보냈다. 네게는 참 미안하구나 하지만 잘 부탁한다.” 이 음성을 듣고는 한 없이 울고 또 감사했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믿어주셔서 누군가에게 와야 할 세 천사들을 내게 선물로 주셨구나.’하고 말입니다.

8. 고난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무엇을 먹고 마시며 어떻게 인생을 즐길까를 고민하는 세상과 어울려 살지만 우리는 그것보다는 어떻게 주님을 기쁘게 할 것인지를 고민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의 깨닫게 해주시는 은혜가 있었기에 주님을 믿게 되었고 그 성령의 동행과 인도하심이 있었기에 오늘까지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삶의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는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이 달음질을 계속해 갑시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 자이신 예수님을 한 눈 팔지 말고 바라보면서 말입니다.(히 12:1-2) 어려운 때이지만 그러기에 더욱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경험하는 복된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복음은 두 가지 결론에 도달합니다. 믿는 자에게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지만 거부하는 자에게는 영원한 형별이 됩니다.(롬 1:16,24) 어려움 속에서 오히려 더 진솔하게 감사할 수 있는 영적 훈련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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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을 수행하려면(사 6:1-13, 요 3:14-17)

1. 나라를 위해 사명을 감당하다가 죽은 사람들을 추모하는 메모리얼데이를 맞습니다. 그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기에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일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국가가 이날을 공휴일로 정하고 그들을 추모하는 것도 그들의 수고에 감사하며 우리의 책임을 감당하여 오는 세대도 자유와 평화를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의 희생이 나의 삶에서 아름다운 열매로 맺어지게 하는 것이 보답하는 일일 것입니다. 영적군사로 사는 우리들이기에 하나님이 요구하는 사명을 바로 알고 수행하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 일하기 전에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맛보고 자신의 죄를 용서받는 과정이 있었음을 살펴보며 우리에게 말씀하는 주의 음성을 듣기 원합니다.

2. 이사야는 높은 보좌의 영광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긴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했고 거기에는 세상의 어떤 왕들에게서 볼 수 없는 영광과 권위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는 크신 왕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환상이었습니다. 이사야가 이런 환상을 본 것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였습니다. 웃시야는 왕이 되어 52년간을 유다의 왕으로 일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보기에 정직하게 행했고 그 결과 경제와 군사력이 막강해졌습니다. 그러나 교만한 마음이 생겨 제사장이 주관하는 제사를 직접 드리려고 했습니다.(대하 26:16) 그것을 만류하는 제사장에게 화를 냈다가 이마에 문둥병이 생겼고 그 이후 줄곧 격리생활을 하다 죽었습니다.(대하 26:21) 급변하는 시대에 큰 지도자를 잃고 불안해하는 때에 여전히 세상을 다스리는 왕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이사야에게 보여주었습니다.

3.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을 감히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하늘의 천사들이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발을 가리고 두 날개로 날면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천사들의 찬양 소리로 성전이 흔들렸고 그 안에 연기가 가득했습니다.(사 6:4) 하나님의 거룩함은 인간이 가까이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본질이며 성품입니다. 그 거룩한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보여줄 때에는 그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시 57:5) 라고 경배한 선배들처럼 말입니다. 레 11:45에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라고 요구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는 죄의 용서와 거룩함의 회복이 절대 필요합니다.

4. 천사들이 찬송할 때에 문지방의 터가 요동했습니다. 하나님이 나타날 때는 항상 그런 위엄과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시내 산에 강림하실 때에도 땅이 요동했습니다. 산에 연기가 가득했는데 마치 옹기가마 연기같이 떠올랐고 땅이 크게 진동했습니다.(출 19:18) 구름과 연기는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것이며 거기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려주는 표시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날 때에 하나님은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했고 성막을 봉헌할 때도 구름으로 나타나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한 것을 알게 했습니다.(출40:34) 이사야는 바로 그 영광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5.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은 신비로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운 일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자 자신의 죄가 더 크게 보여서 죽을까봐 두려웠습니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사 6:5) 하나님의 완전무결한 거룩함과 영광 앞에서는 누구든지 그렇게 엎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삼키는 소멸하는 불이며 질투하는 하나님이기에(신 4:24)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는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출 33:20) 그러나 그 하나님을 만나야 인생의 가치가 새로워지고 질 수 있습니다.

6, 이사야는 자기 입술의 부정함을 그렇게 탄식하며 회개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영화롭게 했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멀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들은 말을 흉내 내는 것일 뿐이었습니다.(사 29:13) 그런 형식적인 신앙생활이 만연한 백성들과 어울려 살던 이사야이기에 자신도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하나님을 떠나 죄로 가득해진 우리시대의 불신앙을 가슴치고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도 어느 사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거룩함에서 멀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용서 받지 않고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금식하고 슬퍼하는 마음으로 마음을 찢어야 합니다. 세상으로 향하는 우리의 관심과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며 우리를 불쌍히 여겨서 재앙을 거두기도 하기에(욜 2:12-13) 우리 자신과 시대의 죄를 철저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7.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사야에게 천사가 핀 숯을 가지고 와 그의 입술에 대어 죄를 깨끗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겠는가’ 하고 묻자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십시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런 마음은 그가 하나님을 만나고 죄로부터 자유하게 되었기 때문에 생겼습니다. 은혜를 경험하고 나니 자신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나라가 멸망한다는 절망적인 소식을 전해야 했습니다. 성읍이 황폐하게 되고 사람들은 죽고 땅도 황폐해지고 적국의 포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루터기처럼 남은 소수의 사람들을 사용한다는 실 날 같은 소망이었습니다.(사 6:13) 사명을 감당하는 용기는 죄 용서의 확신에서 나오며 그것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음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맡겨 주셨습니다. 삶의 간증을 통해 또 다른 사람들도 화목의 은혜를 누리게 하라는 것입니다.(고후 5:18-19)

8.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달려 죽은 그리스도를 다시 살려냈고 높이 세워 만유의 주가 되게 했습니다.(빌 2:9-11)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 구원의 길을 여셨고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했습니다.(요 3:16-17) 그리고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시어 교회에 충만하게 했습니다.(행 2:23-24, 33) 우리에게도 성령을 충만하게 주시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심을 알게 합니다. 그리고 이 타락한 시대에서 살며 예수 생명의 능력을 전하게 합니다. 오직 성령께서 주는 힘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행 1:8) 우리 모두가 죄의 용서와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고 성령께 순종하여 복음전도의 사명을 담대하게 수행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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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께서 하는 일 (행 2:1-4, 겔 37:1-14) 성령강림주일, 맥추감사

1.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나 시내산 앞에 진을 쳤을 때에 하나님은 모세를 산으로 불러(출 19:2-3) 이스라엘이 지킬 법과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모든 나라들 중에서 특별한 존재로 세워 거룩한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출 19:5-6)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 아니라 먼저 은혜를 베풀어 선택해 주셨습니다.(신 7:6-8) 창 1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복이 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전적인 은혜이며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근거한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후의 사람들이 연약하고 실수가 많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의 약속 때문에 그들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2. 하나님의 구원은 그들이 율법을 잘 지켜서가 아니었습니다. 율법을 주기 이전에 이미 유월절 희생짐승의 피로 그들을 구원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주신 생활지침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먼저 선택하여 구원해 주셨기에 가나안에 들어가 거룩한 제사장 나라로 살며 하나님을 바로 섬기도록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출 19:5, 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그들이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법대로 살면 제사장 역할을 하게 될 것이고 법을 어기면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을 지키지 못한 이스라엘의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의 부름과 약속이 흔들리는가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초대교회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가르침보다 율법도 준수해야 한다는 유대주의자들의 잘못된 가르침 때문에 흔들렸습니다.

3. 사도 바울은 이 문제로 갈라디아 교인들을 책망했습니다. 갈 3;5-8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는 근거는 율법을 지키는 의로운 행위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는 믿는 믿음 때문입니다.(갈 3:5)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얻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공로나 행위를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엡 2:8)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결코 후회가 없으며 하나님은 그 어떤 경우에도 택한 백성을 버리지 않습니다.(롬 11:29)

4. 하나님께서는 이 은혜를 주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대신 죽게 했습니다. 그는 율법이 요구하는 죄의 값을 십자가 죽음으로 대신 갚아주셨고 죄의 결과로 오는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귀의 일을 멸하고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 나라를 소망하게 했습니다.(요일 3:8) 율법 앞에서 모든 사람은 불완전한 죄인이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는 존재입니다. 죄로 죽어야 할 존재이기에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자랑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롬 3:23)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믿음을 보고 구원하고 생명을 누리게 합니다.(요 3:16) 그리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를 들어주십니다.(요 14:13–14)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힘입어 오늘 우리가 여기에 있게 되었습니다.

5. 제자들의 연약함을 아는 주님은 그들과 영원히 함께 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보혜사요 진리의 영인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요 14:16–17) 성령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시고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할 때라도 우리를 위하여 안타까운 마음으로 대신 기도해 주십니다.(롬 8:26)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요 15:26) 그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고 믿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인정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가 주시는 능력을 힘입기 위해서 성령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하나가 되도록 묶는 생활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자신에 대하여 죽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곧 예수 충만 입니다.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이라고 믿고 생활로 드러내는 것이 전도입니다. 복음전도는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증거이고 전도와 성령 충만은 분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6. 사도행전은 성령강림을 가시적으로 설명하고 교회를 세워 사용하는 성령의 주도적인 사역을 소개합니다. 연약한 사도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일했던 것처럼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에게도 성령께서 함께 해주십니다. 믿는 자의 수가 늘어나고 하나님이 행하는 구원을 만방에 알게 한 것처럼(행 2:6, 11, 17) 오늘 우리 교회와 성도들의 생활에도 함께 일하십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은 우리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과 모든 피조물도 함께 회복되게 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롬 8:19에서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죄로 사탄의 굴레에 빠지게 되자 피조물들도 주인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죄에서 벗어나 하늘영광으로 옷 입게 될 때 모든 피조물도 바람직하고 행복한 상태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성령 안에서 영적 생활을 하는 것은 우리들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 자연 만물까지도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게 하는 일입니다.

7. 에스겔은 어느 날 환상을 보았습니다. 환상 중에 골짜기에 쌓인 마른 뼈 무더기를 보았습니다. 말라빠진 뼈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말씀대로 명령했더니 그 뼈들에게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생기에게 명령하자 사방에서 생기가 모여 뼈들에게 들어가고 그것들이 움직여 큰 군대를 이루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꿈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마른 뼈처럼 소망을 잃었지만 다시 살아나게 하고 구원하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겔 37:14) 죄를 짓고 거룩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죽은 존재가 되었습니다.(엡 2:1)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살려주셨고 성령을 보내어 그가 주시는 능력으로 살게 합니다.

8. 성령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은 구원의 기쁨을 누리고 마귀의 일을 멸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게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파송을 받아 구원의 일을 한 것처럼 이제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면서(요 20:19-21) 그가 하던 생명 살리는 일을 위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하게 했습니다.(행 1:8) 오늘 우리 안에도 동일한 성령께서 거하십니다. 그 성령께서 우리의 가정과 일터에서 가족과 친구들을 믿음으로 살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은 구원을 감사하고 노래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여 이 시대의 사람들을 살리고 복되게 하려고 부를 때에 성령의 능력으로 그 일을 감당하는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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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으로 얻는 복 (행 10:1-23)

1.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결단하는 것을 보면 참 기쁩니다. 죄 용서를 확신하고 주님과 교제하는 법을 배우고 기뻐하는 것을 보면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이런 영적 변화들은 자기 힘으로 보다는 성령께서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행 10장에는 베드로가 부정한 것을 집어먹으라는 음성을 세 번이나 듣고 고민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먹을 수 없다고 항변하는 베드로에게 하나님이 깨끗하게 한 것을 더럽다고 하지 말라는 음성이 들립니다. 한편 고넬료도 기도하다가 성령의 지시를 받고 베드로를 청하여 말씀을 듣게 됩니다. 베드로가 성령의 지시에 순종하여 이방인의 집에 가서 설교하자 그 곳에 성령께서 임하셨고 고넬료의 모든 식구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2. 베드로와 유대인 신자들은 이방인에게도 동일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유대인은 물론이고 이방인도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고넬료의 식구들에게 성령의 임하자 그들도 방언을 하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같은 성령을 주신다고 믿고 그 가정의 모든 식구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 일로 예루살렘 교회가 논쟁을 하게 되고 교회는 심사숙고한끝에 이방지역의 교회에게 이렇게 알렸습니다. 행 15:28-29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더 이상 유대인들이 지키는 율법이나 할례의식을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강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성령께 순종하여 이방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을 경험했고 고넬료의 순종은 가족구원을 이뤘습니다. 교회의 순종은 이방선교의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3. 예수님은 제자들을 훈련하여 파송할 때 그들만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병 고치는 능력과 귀신을 쫓는 권세를 주어 복음을 전하게 했습니다.(눅 9:1-2) 그가 승천하실 때에도 제자들을 고아처럼 버리지 않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요 14:16) 이 약속을 믿고 기다리던 제자들은 오순절 날에 임한 성령을 충만하게 받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은 지상에 계실 때는 물론이고 지금도 성령을 통하여 교회를 사용하여 일하고 계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주님이 함께 하겠다고 약속한대로(마 28:18-20) 주님은 성령으로 그들 가운데 오셨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며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회개의 복음을 전하게 합니다.(눅 24:47) 비록 우리가 주님의 몸을 만져보거나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교회가 전하는 복음의 열매와 교회가 행하는 세례와 성찬을 통하여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4.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고 그를 교회의 머리로 삼았습니다.(엡 1:20-23) 그리고 우리로 그의 몸을 이루는 지체가 되게 했습니다. 그의 능력의 손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이어갈 후사로 삼으셨습니다.(롬 8:17) 복음을 전하여 죄인들이 회개하고 영생을 얻게 하는 증인의 일을 맡겨주셨습니다.(행 1:8) 계시록에서는 성도들이 예수님과 함께 왕 노릇하게 될 것을 말했습니다.(계 20:4-6) 주님은 지금도 교회를 사용하여 죄인들이 회개하고 의롭게 되는 구원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우리를 불러 사용하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며 예배하는 것입니다.

5.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기 전날 밤에 제자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제자들도 주님과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악에 빠지지 않도록 보전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요 17:11,15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주님은 진리이신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짐으로 자신을 거룩하게 구분했습니다. 그와 같이 제자들도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진리 안에서 거룩하게 되기를 기도했습니다.(요 17:17-19) 그들의 사역을 통하여 믿게 될 미래의 신자인 우리들을 위해서도 그런 은혜가운데서 보전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6.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알려주고 태초부터 말씀으로 계시던 자신을 믿게 했습니다.(요 1:1)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마 11:27)고 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는 영생이 있다는 것을 알게 했습니다. 요일 5:11-13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사도들은 이 복음을 믿고 전했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여 듣는 자들이 말씀을 이해하고 믿게 되었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함께 모여 한 몸을 이루고 같은 신앙고백을 했습니다.(엡 4:4)

7. 성령께서는 거듭난 성도들과 함께 하십니다. 다락방에 모였던 백여 명의 사람들은 급하고 강한 바람소리 같은 것을 들었고 각 사람위에 임한 불을 보았습니다. 술에 취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을 만큼 기쁨으로 충만했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각 지역의 말로 복음을 말했습니다.(행 2:2-4) 베드로의 자상한 상황설명과 설교를 듣고 사람들의 마음에 찔림과 회개가 일어났습니다. 그날에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믿는 자가 삼천 명이나 생겼습니다. 교회는 날마다 모여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서로 사랑하며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었습니다. 사람들은 교회를 주목했고 광고하지 않아도 자기발로 찾아와 사도들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새롭게 되었습니다.(행 2:43-47)

8. 성령께서는 죄인을 불러 회개시켜 예수를 주로 믿게 합니다. 거듭난 자에게는 구원받은 자답게 순종하며 살도록 믿음과 힘을 주십니다. 다시는 자기욕심이나 유혹에 넘어지지 않도록 지켜주십니다. 완전무장하고 싸움터에 나가는 군인처럼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영적인 싸움을 지속하게 합니다.(엡 6:11)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여 주님을 모신 거룩한 성전으로 살게 합니다.(엡 2:21) 머리이신 주님을 모시고 주의 몸을 이루는 지체로 살게 합니다. 복음으로 변화된 생활을 하여 또 다른 사람이 변하도록 사용합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이며(빌 4:13) 순종할 때에만 누릴 수 있는 영적 복입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의 인도에 순종하여 영과 육이 잘되고 성령과 함께 일하는 복을 누리기 바랍니다.(요삼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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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가정생활 (엡 6:1-4) 어버이주일

1. 요즈음 사무엘서를 묵상하며 사무엘의 출생이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으로 이루어진 것을 봅니다. 엘리 제사장과 그의 아들들이 타락하여 점점 하나님의 눈 밖으로 밀려날 때에 사무엘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으며 자라고 있었습니다. 사사시대의 사람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자기들 보기에 좋은 대로 살 때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믿음의 사람을 준비시키고 있었습니다. 노아시대에도 하나님을 거부하고 죄를 짓던 사람들은 심판받았지만 의롭게 살던 노아의 가족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항하려고 바벨탑을 쌓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흩어버리고는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새 나라를 세우려고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땅의 모든 민족들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섬기며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창 12:1-3)

2.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난 아들을 통하여 이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이 늙어 생물학적인 능력이 없어질 때쯤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아들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인도하심에 의해 이삭이 태어납니다. 이삭에게 인간적인 연약함과 모난 것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주었던 약속을 기억하고 그를 사용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이 대를 이어 아브라함의 약속을 붙들었고 하나님은 그들을 계속 사용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한 생명이 세상에 태어나고 부모세대의 믿음과 약속을 이어가는 것은 특별한 은혜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부모를 사용하여 자녀들이 세상에 태어나게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녀들은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들은 자식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가정 안에서 권위에 복종하고 서로 용납하고 사랑하는 것을 배우고 연습하게 했습니다.

3. 아버지의 수치를 가려준 노아의 아들은 복을 받았지만 그것을 들추어낸 아들은 저주를 받았습니다.(창 9:25-27). 룻은 늙고 가나해진 시어머니를 무시하지 않고 끝까지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어머니가 섬기는 하나님을 함께 섬기다가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복을 누렸습니다. 레 19:3에서는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행해야 할 거룩한 일들 곧 안식일을 지키고 우상을 피하고 하나님께 제사 하는 거룩한 일들을 하기 전에 먼저 부모를 경외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부모를 때리거나 저주하는 자식은 죽이라고 했고(출 21:16-17) 부모를 거역하고 술 취하고 방탕한 아들은 돌로 쳐 죽여 공동체 안에서 악을 제거하라고 했습니다.(신 21:18-21) 예수님도 십자가를 질 때에 어머니를 걱정하며 제자에게 부탁했습니다.(요 19:27) 바울도 부모 공경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요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엡 6:1-3) 부모를 존경하고 공경하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입니다.

4. 누군들 부모 없이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모를 통하여 생명을 태어나게 하기에 모든 부모는 하나님의 대행자입니다. 자녀들은 부모를 통하여 세상살이를 배우고 또 예수 믿는 제자로서의 영적 생활도 배웁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가정에서는 신 6장의 말씀이 가정생활의 기준이 되게 해야 합니다. 신 6:5-9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의 말씀이 삶의 기준이 되도록 본을 보이고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흐름이나 부모의 개인적인 경험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본을 보이고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5. 창 22장의 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들 이삭의 관계를 보십시오.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해서 아버지와 함께 산에 오르는 이삭의 눈에 번제로 사용할 어린 양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버지 번제로 사용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요?” “응, 하나님이 준비해 주실거야.‘ 이삭은 아버지가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을 옆에서 보고 배웠기에 제사를 어떻게 드리는지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이렇게 부모를 통하여 생활 속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늦게 얻은 아들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을 받고 순종하려는 아브라함의 마음이나 아버지 손에 꽁꽁 묶여 제단에 올려지면서도 반항하지 않는 아들 이삭의 하나님 신뢰는 참으로 대단합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신뢰하고 믿을 수 있다면 살고 죽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떻게 세상에서 성공할 것인지를 더 이상 염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만 절대 신뢰하는 사람을 사용합니다.

6. 하나님은 부모들에게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막중한 권한을 위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제사장의 마음으로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창 28:6) 마치 제사장들이 백성들을 위해서 중보하며 기도하는 것을 들어주신 것처럼 부모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민 6:23-27) 그러니 부모들은 자녀들을 위해서 주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예언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창 49:1) 하나님은 하나님만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과 그의 후손 천대까지 은혜를 베풀겠다고 약속했습니다.(출 20:6)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에게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는 복을 약속했습니다.(엡 6:1-3) 그러므로 부모들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청지기의 마음으로 자녀를 양육해야 합니다. 화내지 않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권면하는 것이 믿음의 자녀를 만드는 길입니다.(엡 6:4) 그것이 빛과 소금으로 사는 것이고 생명의 길과 방향을 제시하고 교육하는 일입니다. 부모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자녀를 양육하고 자녀들은 하나님께 하듯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입니다.

7. 딤후 3: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초기 교회 때부터 이미 사람들의 마음은 자기만을 위한 교만한 삶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사는 지금 세상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동안 지켜오던 전통과 형식과 권위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지도자들에 대한 존경은 물론이고 부모의 권위조차 사라진 때입니다. TV나 인터넷과 같은 미디어는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자기 개성이 있다고 부추깁니다. 결과적으로 세상은 자기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게 합니다. 부모공경을 방해하고 권위에 순종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을 인정하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둔 가정을 만들어야 합니다. 잠 23:22,25 “너를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부모공경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는 가정들이 되어 기쁨을 대물림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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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맺는 열매 (요 15:1-12)

1. 날이 풀리고 농사철이 되었습니다. 선교관에는 포도나무도 있고 여러 종류의 베리 나무도 있습니다. 올 봄에는 대추나무와 감나무 묘목을 추가로 심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아직 새싹도 나오기 전인데 제 머리에는 주홍색 감과 주먹만 한 대추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나무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농부의 마음이 이런 것인가 봅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 비유의 말씀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탐스런 포도열매를 기다리는 농부로 표현했습니다. 자신을 원줄기로 그리고 예수 믿는 우리들을 거기에 붙어 열매를 맺는 포도나무 줄기로 설명했습니다.

2. 이사야서 5장을 보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좋은 포도원이 있어 땅을 파서 돌을 없애고 제일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다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가 그 곳에 망대를 세우고 포도즙 짜는 틀도 만들고 좋은 포도가 맺히기를 기다렸지만 쓸모없는 들 포도가 맺혔다고 한탄합니다. 그래서 울타리를 헐어버리고 짐승들에게 짓밟히는 풀밭이 되도록 내버리겠다고 합니다. 가지치기나 거름 주는 것을 더 이상 하지 않고 가시가 나고 황무지가 되도록 버려두고 비도 오지 말라고 구름에게 말하겠다고 그 답답한 심정을 노래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의 배반과 열매 없음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사 5:7 “이스라엘은 전능하신 여호와의 포도원이며 유다 사람은 그가 심은 포도나무이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공의를 행하기를 바랐지만 그들은 살인을 일삼았으며, 여호와께서 선한 일을 기대하셨으나 고통당하는 자들의 부르짖는 소리뿐이었다.”라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불러 세우고 극상품 포도나무 열매를 기다리는 농부처럼 열방을 구원하는 일에 함께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인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기며 온갖 죄를 지으며 들 포도와 신 포도를 맺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버려 황무지가 되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옛 포도나무인 이스라엘을 버리고 다시 참 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속의 일을 이루셨습니다. 더 이상 율법을 지킴으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믿음으로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가 구원에 이르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참 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양분을 흡수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요 6:48), 세상의 빛(요 8:12), 양의 문(요 10:7), 선한 목자(요 10:11), 길과 진리와 생명(요 14:6)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에게 붙어있을 때에만 생명의 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가 이루신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그와 하나 될 수 있습니다.

4. 2-4절을 보면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농사의 기본적인 조치입니다. 죽은 가지는 잘라내고 건실한 가지도 더 좋은 열매를 위해서 가지치기를 합니다. 구약 성도들은 율법을 목숨처럼 여겼지만 지키지 못했습니다.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와 연합되어 있을 때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 공로 때문에 죄 없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책망 받을 것이 없는 온전한 성도로 인정받습니다.(골 1:)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모든 죄를 덮어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하며 그에게 붙어있어야 할 이유입니다.

5. 7절은 어떻게 붙어 있을 수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예수님과의 영적인 교제가 없으면 그것은 이미 원줄기에서 끊어진 것이고 버려질 존재가 된 것입니다. 예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 것입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함께 하는 예수님을 날마다 인정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내 문제를 해결해 줄 도움이 필요해서 예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그분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쉽지 않은 결정입니다. 예수 믿고 세례를 받고도 이런 헌신이 두려워 뒤로 물러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밭에 감추어진 보물을 발견한 농부는 자기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그 땅을 소유하는 것입니다.(마 13:44-46) 예수님만 소유하면 그 안에 있는 모든 보물을 소유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의 교제를 추구하지 않으면 모양만 갖춘 신앙생활을 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기보다 열매에 대한 부담과 중압감으로 형식에 매인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6.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셨습니다. 아들을 화목제물로 희생시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로 막혔던 담을 허물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 아들을 희생시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롬 5:8) 그의 대속의 죽음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심판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 오히려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히 4:16)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심판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합니다. 요일 4:15-16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 기쁨을 주려고 우리를 불러 여기 있게 하셨습니다.

7. 우리 힘과 노력으로 이것을 터득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께서 우리로 이 사실을 믿게 도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하였음과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을 믿고 고백하게 도와주셨습니다.(요 16:13)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았기에 예수 안에 살기를 원하고 그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한 피 받아 한 몸을 이룬 형제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다는 증거요 열매입니다.(요일 4:2, 7, 13) 이것이 주님의 제자가 된 증거입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성령으로 함께 하십니다. 그의 몸과 그의 피가 우리의 육체와 영혼에 들어와 우리와 한 몸이 되어 거하십니다. 성령을 모신 거룩한 성전이 된 우리들은 이제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갈 2:20)

8. 열매는 우리가 맺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거하는 성령께서 맺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상당히 당황스럽습니다. 우리의 삶에 세속적이고 주님이 기뻐하기 어려운 연약함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에게 붙어 있다면 뿌리에서 양분을 빨아올려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의 사람은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입니다. 성령으로 살면 성령의 열매를 거둡니다.(갈 5:24-25) 우리의 일은 다만 그에게 붙어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영적인 전쟁을 치룹니다.(엡 6:11) 포도나무는 포도를 맺고 감나무는 감을 맺습니다. 예수 안에 살면 그 열매는 당연히 예수의 열매입니다.(요 15:3-5) 우리 모두가 성령이 주시는 열매를 풍성하게 맺어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그가 주시는 평강과 기쁨을 누리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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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 10:1-18)

1.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했습니다. 세례요한이 옥에 갇혀서 제자들을 보내 그가 오기로 약속된 메시아인지를 확인할 때에(마 11:2-6) 예수님은 소경이 보고 앉은뱅이가 걷고 문둥병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듣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있다고(사 61:1) 말하여 자신이 메시아임을 알렸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들을 고치고 천국복음을 전하며 제자들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권세로 일하며 구약의 예언을 성취시켰습니다. 영적 소경인 유대 지도자들에게 자신의 메시아 되심을 알게 하고 소경의 눈을 고쳐 보게 하고 천국복음을 전했습니다.

2. 요 10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양의 문’과 ‘선한목자’라고 말했습니다. 들에서 임시 거처에 거하며 방목을 하던 목축현장을 생각하면 양의 문은 양들이 들고 나는 출입문입니다. 목자는 아침에 양들을 밖으로 불러내고 저녁에 그 문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리고 목자는 그 문을 가로막은 채 잠을 잡니다. 다른 짐승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의 문으로 오셨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라고 했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가 친히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3. 양들 앞에서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인도하는 목자의 자상한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양들은 목자 음성을 구분합니다.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 인도합니다. 이렇게 목자의 음성에 길들여진 양은 목자의 소리를 분별할 줄 압니다. 안다는 것은 하나가 된 것을 말합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그를 온전하게 아는 것처럼 선한 목자인 주님은 그의 양인 성도들을 온전하게 압니다.(요 10:15) 양들은 타인의 음성은 알 수 없기에 절대 따르지 않습니다.(요 10:3-5) 혹 목자의 음성을 외면하거나 잘못 오해하면 곧 죽음으로 연결됩니다. 타인으로 지칭한 거짓 선생들과 외식하는 자들과 삯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합니다. 양의 문이 되는 선한 목자가 양들의 생명을 지켜준다면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는 통로이고 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얻게 하는 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죄의 용서와 영생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4. 예수님은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요 10:9)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상관없으면서도 양들을 미혹하고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잘못된 선생들을 말합니다.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같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여기 속합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목자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소경(요 9:40-41)이었고 절도요 강도(요 10:1)였습니다. 양의 문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자기들의 율법적인 지식과 외식적인 행위를 통해서 구원을 얻으려 했고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양의 우리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결국 자기들의 이익과 욕심을 채우는 삯군이었습니다. 도둑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망하게 하지만 예수님은 양으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누리게 합니다.(요 10:10)

5.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절도와 강도와 같은 짓을 하면서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먼저 부름 받고 선택받은 특권의식은 강했지만 그들을 불러주신 하나님의 계획을 알지 못했습니다. 귀신의 힘을 빌려 소경을 낫게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과 변론을 자주했고 또 심하게 꾸짖었습니다.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 23:27)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절도와 강도로 부른 것은 그들이 진리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교회역사에 많은 거짓 스승들이 일어나 잘못된 가르침을 가르쳐 성도들을 미혹했습니다. 지금도 성행하는 이단의 가르침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바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 구원을 위해서 예수 이외에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습니다.(행 4:12)

6. 예수님은 선한목자입니다. 양들을 이리 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선한목자입니다.(요 10:11) 예수님은 많은 사람의 생명을 얻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고 버린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 10:17-18) 이것은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 죄의 용서를 주시고 부활하여 죽은 자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실 것을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이 일을 기뻐했습니다. 양들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참되고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그렇게 자신을 내놓아 아버지께서 주신 대속의 사명을 이루었습니다.(요 10:17-18)

7. 예수님은 태초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영원하신 말씀(요1:1-2)입니다. 말씀이신 그분이 육을 입고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요 1:9, 3:19) 그를 믿는 자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고(요 4:14) 배부르게 하는 생명의 떡을 줍니다.(요 6:35) 믿는 자 모두를 영생에 이르게 합니다.(요 3:16) 그를 믿는 자들은 진리이신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며 진리이신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 참 자유를 줍니다.(요 8:32) 예수님은 천국에서도 성도들을 생명수 샘으로 인도해 주는 영원한 목자입니다.(계 7:17)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고 영생의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이미 얻었고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시편 121:7-8)는 말씀을 믿고 붙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8. 예수님은 유대교 울타리에 속하지 않는 다른 양들에게도 관심이 있었습니다.(요 10:16) 이방인의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는 것을 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마음을 알고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헌신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고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음을(엡 3:6) 전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일을 맡기며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마 28:20) 성부 하나님께서 구약 성도들을 제사장 나라로 세워 가나안으로 보내면서 약속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신 31:6) 주님은 지금 보혜사 성령을 통하여 교회인 우리들과 함께 계십니다. 그러니 주님이 주는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품으십시오. 두려워하며 힘든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주신 참 평안과 기쁨을 나눠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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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얻는 특권(눅 24:36-49, 행 3:12-19)

1.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을 확신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베푼 은혜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법적인 변화로 설명했습니다. 엡 3: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우리의 신분이 바뀌었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께 입양된 아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일에 함께 참여하고 또 하늘기업을 누리는 후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힘입어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 사도요한은 이것을 거듭남으로 설명했습니다. 요일 3:1-2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푸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의 자녀라 일컬어 주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와 같이 될 것임을 압니다.” 이단의 위협가운데 있던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녀가 되었음을 알게 했습니다. 장래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할 때에 그와 같이 영광스럽게 변화될 것이기에 그 소망을 가진 자답게(요일 3:2) 죄와 상관없는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 거듭남의 열매를 요구한 것입니다. 당시의 영지주의 이단들은 영적 깨달음을 얻으면 육체는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다며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것을 경계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바른 이해와 인식이 없으면 자기 생각대로 살게 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기대를 알면 거기에 합당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3. 하나님의 용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할 때에 죄의 용서만이 아니라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했습니다.(요일 3:1) 그가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 흠 없고 책망 받을 것이 없는 거룩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골 1:22) 이것이 우리가 믿는 복음이며 우리가 누리는 특권입니다.(요일 3:3,5) 거듭난 성도는 빛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빛의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요일 1:5-7) 죄 없는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셨기에 죄와 상관없이 살게 되고 그리스도의 순결함을 따르고 그의 의로움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성도와 함께 거하시는 성령의 내주하심과 인도하심의 결과입니다.

4. 요일 3: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 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하나님이 씨라는 표현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분명하게 말해 줍니다. 어떤 씨인가에 따라 열매의 종류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씨가 성도 안에 존재하기에 하나님의 생명이 거기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고 실천하며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거한다.‘ ’머물러 있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성도의 생활을 통해 나타나는 것을 말했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한 주님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 안에 거하기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5. 예수님의 제자들은 삼년 동안이나 함께 생활하며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배우고 실습했지만 자기들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그만두고라도 베드로마저 위기의 순간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했던 것은 인간 한계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모든 사람이 스스로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밝혀주는 것입니다.(롬 3:23) 그러나 부활을 경험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이후에는 자기 힘이 아닌 성령의 힘으로 사역할 수 있었습니다.(행 1:8) 이것이 우리가 영적 승리를 하기 위하여 날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이유입니다. 그가 우리 삶의 주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6.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두려워하던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들에게 평안을 주시고 죄를 용서받게 하는 회개의 복음을 세상 모든 나라 사람들에게 선포하도록 명령했습니다.(눅 24:46-47) 그들의 약함을 아는 주님은 세상 끝 날까지 그들과 함께 하며 그들 가운데 함께 거하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마 28:20)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자기 모습대로 살던 제자들을 사도로 불러주셨고 그 모습 그대로 주님과 함께 일하게 했습니다. 제자들에게 연약함이 있었지만 오순절 성령 충만을 경험한 후에는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를 통한 죄의 용서와 부활의 복음을 어디서나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약속한대로 주님께서는 성령으로 그들과 함께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담대하게 예수 이름의 권세를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힘으로 가능했습니다.

7. 성전 문 앞에 앉아있던 걷지 못하는 걸인에게 베드로와 요한은 자기들을 바라보게 하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자 걷지 못하던 사람이 발과 발목이 힘을 얻어서 뛰고 걷고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걷지 못하던 걸인이 걷고 뛰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자기들의 권능과 경건으로 그 사람을 걷게 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권세가 그를 걷게 했고 그를 믿는 믿음이 그를 완전히 낫게 하였다고 설교했습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 3:16) 사도들은 유대인들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 곧 그들 조상들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내 영화롭게 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라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8. 예수님은 귀신들린 자를 고침으로 공생애를 시작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 이름을 선포하여 걷지 못하던 자를 걷게 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대로 그것은 자기들의 힘이 아니라 사도들의 입을 통하여 선포되는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권세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제자들을 통하여 계속 일하셨고 지금은 구원받은 우리를 통하여 일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성령으로 제자들과 함께 하신 것처럼 지금은 교회인 우리들과 함께 하십니다. 누구든지 마음을 다해 믿고 의지하면 온전한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갑니다. 성령과 함께 예수 이름의 권세를 선포하여 또 다른 사람을 살려내는 사역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이 믿음으로 누리는 특권입니다. 주의 임재의 능력이 여러분의 생활에 분명하게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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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평안 (요 20:19-31)

1.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 그들이 더 이상 무서워하거나 염려하지 않고 평안을 누리게 했습니다. 낙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제자들에게 말씀을 풀어주어 다시 소망을 갖게 했고 부활을 의심하는 제자들에게는 자신의 상처를 만져보고 부활을 믿게 했습니다.(요 20:19-20) 사실 주님은 고난 이전부터 제자들이 어려움을 이기고 평안을 누리기를 원했습니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6:32-33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2. 험한 세상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하였기에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보혜사 성령님과 함께 하면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 능히 환란을 견디게 하고 평안을 누리게 합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성령께서는 연약한 우리가 말씀 안에 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때로는 격려하고 때로는 책망하며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게 합니다. 우리들을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고(요 14:18) 영원토록 함께 해주시고(요 14:16)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진정한 평안을 주십니다.

3.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도자로 파송하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마귀의 권세를 무너뜨리고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성령으로 충만하게 했습니다. 주님께서 몸으로는 떠나 있지만 성령으로 그들과 영원히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요 20:21-23) 믿음은 말씀을 듣고 생기는 것인데 먼저 믿은 자들이 전해주지 않으면 죄인들이 용서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먼저 믿은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아주 중요합니다.

4. 교회는 사도들이 전하고 가르쳐준 복음을 듣고 예수께서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고백합니다. 이런 고백은 지나간 옛 성도들과 함께 주님 안에서 거룩한 교제와 사귐을 갖도록 연결시켜 줍니다. 우리들의 사귐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거룩한 사귐입니다.(요일 1:3) 그래서 교회는 영적 사귐은 물론이고 서로의 필요도 채워주고 함께 짐을 나눠지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서로 돌보며 믿음으로 행한 선한 일을 보십시오. 행 4:32에 보면 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거기에는 가난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자기 소유를 팔아 기쁨으로 헌납했고 교회는 그것을 필요에 따라 고루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서로 돌아보는 선한 행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5. 바울과 실라는 옥에 갇혀서도 기뻐하고 찬송하고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몸은 부자유했지만 영으로 함께 하는 주님을 모셨기에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렸습니다. 그들이 찬송할 때에 지진이 일어나고 옥문이 열리고 묶인 것도 풀어졌습니다. 죄수들이 탈출했을 것이라고 생각한 간수는 자기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고 여기고 자살하려고 했습니다. 바울일행은 오히려 그를 말렸고 간수는 놀라서 질문했습니다. 선생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왜 도망치지 않고 여기 있었습니까? 이제 나는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당신들처럼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까? 바울과 실라의 영적 자세가 간수의 마음을 이미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시오. 그리하면 당신과 식구들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행 16:31)라고 전도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이 평안이 다른 사람을 변하게 합니다.

6. 요셉은 평탄하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형에게 팔려 노예가 되었고 강간범으로 몰려 억울한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그러나 항상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믿음으로 사는 요셉은 주님의 평안을 누렸습니다. 감옥에서 정치인들의 꿈을 해석해 준 일로 왕에게 발탁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니 옥살이가 출세를 위한 통로가 되었습니다. 형들에게 당한 배신도 이집트 이민생활을 먼저 시작하게 하여 식구들을 가뭄에서 구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위하여 모든 상황을 사용하여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롬 8:28) 그러기에 우리 생각대로 되지 않는 형편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두려워하거나 흔들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고백합시다. 고후 4:8-9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7. 질병관리본부에서는 코로나 시대에 늘어나는 스트레스 때문에 나타나는 병적 증상들을 발표하고 정신건강 관리를 잘하도록 안내하고 있습니다. 무서움, 노여움, 슬픔, 걱정, 무감각증, 좌절감. 집중장애, 수면장애, 신체적으로 나타나는 병적 증상들, 약물 남용들은 물론이고 우울감이 생기고 삶이 무의미하다고 생각되거나 심지어는 죽고 싶다는 충동까지 느끼는 경우가 많아진답니다. 젊은 학생들도 집에서 공부하는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고 모든 연령대에서 이런 어려움이 고루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부정적인 뉴스를 너무 많이 듣지 말고 대신 지인들과 서로 안부를 묻고 가벼운 운동을 하고 신앙생활을 하라고 권유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서로 돌보고 기도하고 안부하며 교회 공동체의 사랑을 나눠야 할 때입니다.

8. 민수기에 제사장들이 백성들을 축복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민 6:24-26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께서 제사장의 기도를 듣고 백성들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 받은 성도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주님의 평안을 주변사람들에게 나눠줄 때입니다. 더 적극적으로 문안하고 서로를 돌보며 기도하여 어려운 때를 잘 극복해 나가기 바랍니다. 롬 15:13의 말씀을 우리 교회 공동체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습니다. “희망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믿음으로 기쁨과 평안을 마음껏 누리게 하셔서 여러분의 희망이 성령님의 능력으로 넘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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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을 믿는 믿음(고전 15:1-15) 4/4/21 부활주일

1. 부활의 날 아침에 예수님의 시신이 있는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전해 준 이야기는 그들이 찾는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그 소식을 접한 여인들은 놀라움과 두려움이 섞인 감정으로 제자들에게 달려가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전했습니다. 제자들도 뛰어가 무덤을 확인해 보았습니다. 부활의 소식은 이렇게 여러 사람들을 놀라게 한 실제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성령강림 이후의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님이라는데 초점을 맞춰 설교했습니다. 베드로도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고 자기가 그 일을 목격한 증인이라고 말했습니다.(행 2:32)

2. 고전 15장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일이 성경대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했던 메시아의 구원약속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라고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열두제자, 오백여형제, 야고보와 모든 사도를 거론하고 자기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말합니다.(고전 15:3-8) 부활이 없다면 사도들의 수고도 헛것이고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고 여전히 죄의 노예로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라는 것인데 그것처럼 절망적인 것이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 믿음의 핵심입니다.

3.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를 미워하고 심판해야 하는 하나님의 공의와 독생자까지 희생시키며 우리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우리의 죄를 덮어주셨고 부활을 통하여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주인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죄의 결과로 오는 죽음의 권세를 깨뜨렸고 죽은 자들의 첫 열매가 되어(고전 15:20) 부활소망을 주셨습니다. 그가 재림하시는 날에 믿는 자들은 생명의 부활로 일어나고 다른 모든 사람들도 심판을 위해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고전 15:23)

4.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고 하나님의 숨을 받아 생령이 되었지만 죄를 범하여 하나님과 끊어지고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에덴에서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루신 완전한 구원이며 우리가 부활을 기뻐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노래한 이사야의 글을 보십시오. “이곳 시온 산에서 세계의 모든 민족을 위해 전능하신 여호와께서 가장 맛있는 포도주와 음식으로 잔치를 베푸실 것이며 온 인류를 덮고 있는 슬픔의 구름을 걷어 버리시고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실 것이다. 주 여호와께서 모든 사람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며 온 세상에서 자기 백성의 수치를 없애 버리실 것이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다. 그때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그를 의지하므로 그가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는 우리가 의지하는 여호와이시다! 그가 우리를 구원하셨으니 이제 기뻐하고 즐거워하자.’”(사 25:6-9)
5.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을 찢고 피를 흘려주신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기 위함입니다. 죄로 얼룩진 것을 없애버리고 아담을 처음 만들고 기뻐했던 그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그의 보혈로 죄를 덮어 주셨고 부활로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사는 소망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성령께서 함께 거하며 이런 기쁨과 감격을 누리고 전하게 합니다. 이사야가 말한 특급 포도주와 최고의 요리로 잔치를 배설해 주신 것과 같은 기쁨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세례를 통하여 주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옛 성품은 십자가에 못 박고 다시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오늘 이 감격과 기쁨이 다시 샘솟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6. 부활절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끝없는 잔치를 즐기는 것입니다. 출애굽 당시에 유월절 양의 피를 문에 발라 죽음을 모면했던 사람들이 가진 감사와 감동으로 부활을 기뻐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희생당하고 피흘려주신 대가로 얻은 것이기 때문입니다.(고전 5:7)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로 출애굽의 기적을 경험한 모세가 하나님을 노래한 것을 보십시오. “내가 여호와께 찬송하리라. 그가 영광스럽게 승리하셨으니 말과 마병을 바다에 던지셨음이라. 여호와는 나의 힘, 나의 노래, 나의 구원이 되셨네. 그가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양할 것이요, 그가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라. 여호와는 용사이시니 여호와가 그의 이름이시다.”(출 15:3-5) 부활 승리하신 주님에게 우리도 같은 노래를 부릅니다. ‘주님은 나의 힘이요. 나의 노래요. 영원히 의지할 구원자이십니다. 아멘.’

7. 주님은 실망한 제자들 앞에 나타나 자신의 몸을 보여주었습니다.(행 10:39-41) 믿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 몸을 만져 확인하고 믿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부활 소식의 증인이 되도록 격려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세우셨으니 그를 믿으면 죄에서 자유하게 되고 영생을 얻게 된다는 복음을 전하게 했습니다.(행 10:42-43) 낙심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던 제자들에게 말씀을 풀어 설명해 주시고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도와주셨습니다. 그들의 눈이 열리고 가슴이 뜨거워져 가던 길을 돌려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 제자들과 합류하게 했습니다.(눅 24:27) 주님은 제자들을 탓하지 않고 기다리고 도와주셨습니다. 오늘도 성령께서는 성도들과 함께 하며 부활을 믿고 전하며 그 능력과 기쁨으로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8.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편지하며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한다.”(빌 1:21)고 했습니다. 갈 2:20에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오늘 부활절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의 마음과 눈도 열어주시고 부활을 확신하도록 도와주시기를 원합니다.(눅 24:35) 그가 베푸는 식탁에서 함께 먹고 마시며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며(고전 15:31) 부활의 소망으로 능력 있게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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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회복을 주시는 하나님 (겔 36:22-28) 종려주일

1. 아틀란타에서 일어난 총기 사건으로 인해서 아시안들에 대한 혐오범죄에 대해서 많이들 생각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우리 교단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총회차원의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총기사고를 저지른 청년이 한 미국 교회에 출석하는 청년이라는 소식을 듣고 교회 안의 청년들을 말씀으로 바르게 양육하지 못했음을 함께 아파하고 피해자들에게 주께서 위로해 주시기를 기도한다는 내용입니다. 또 교회가 상처받은 사람들의 안식처가 되기를 바라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기에 인종차별을 반대한다는 내용입니다. 시대가 어렵고 암울할수록 위로부터 주시는 은혜와 격려가 필요한 때입니다.

2. 이스라엘이 나라를 잃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을 때에도 하나님의 손은 여전히 그들과 함께 했습니다. 이미 예레미야를 통해 새 언약을 약속했던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하여 그 일을 구체적으로 선포하게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주전 6세기경 유다가 멸망할 때쯤에 활동했습니다. 우상숭배와 죄에 빠져 있는 백성들에게 나라가 망하게 될 것과 때가 되면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을 눈물로 예언했습니다. 에스겔은 제사장의 아들로 성전에서 봉사하다가 바벨론에 끌려갔고 거기서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는 주변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했고 포로생활의 아픔과 절망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회복과 구원을 선포했습니다.

3. 에스겔 36장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약속이고 37장에서는 골짜기의 뼈들이 살아나는 환상을 통하여 그 회복을 확신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라를 잃어버린 백성들의 상한 마음을 위로하고 그들의 자존심을 세워주겠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가나안이며 이스라엘의 반역으로 잃어버린 가나안 땅이 여전히 하나님의 마음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을 공격했던 이방인들은 수치를 당하고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포로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거기서 풍요를 누리게 될 것을 말합니다.(겔 36:5-8) 그리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모든 이방나라들이 알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4.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땅을 더럽혔고 하나님을 배반했고 그 이름을 욕되게 했기에 심판을 받았습니다. 부름에 걸맞지 않게 사는 이스라엘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더렵혀졌습니다. 겔 36:19-20 “그들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여 각국에 흩으며 열방에 헤쳤더니 그들의 이른바 그 열국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인하여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라.” 하나님은 고난과 시련을 주어서라도 택한 백성들이 죄에서 돌아와 하나님 안에서 복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부름에 합당하게 살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것이 바른 순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할 존재이기에 그렇습니다.

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는 이유는 그들을 사랑해서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위한 것이고 그 이름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겔 36:22-23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하려고 하는 까닭은 너희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너희가 여러 나라에 흩어져서, 가는 곳마다 더럽혀 놓은 내 거룩한 이름을 회복시키려고 해서다. 너희가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면서 내 이름을 더럽혀 놓았으므로, 거기에서 더럽혀진 내 큰 이름을 내가 다시 거룩하게 하겠다. 이방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너희에게 내가 내 거룩함을 밝히 드러내면,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도,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 이스라엘의 타락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욕먹고 이방인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는데 이제 그들을 회복시켜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는 분이며 약속을 지키는 신실한 분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겠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이 잘못하면 하나님이 욕을 먹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고난을 주어 회개하게 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6. 하나님이 주는 회복은 이스라엘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마음과 행동이 철저히 변하게 하는 근본적인 회복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내가…할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어차피 사람들에게서는 거룩함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맑은 물로 정결하게 씻어주시고(25) 하나님의 영과 새 마음을 주시어 이스라엘이 내면으로부터 변하게 하십니다. 성령을 주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가치관을 갖게 합니다.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바꿔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수 있게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합니다.(28) 또 하나님께서 직접 무너진 곳을 건축하여 거주지로 바꾸고 황폐해진 곳을 에덴처럼 바꾸어 경작지가 되게 합니다. 그리하여 이방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알게 합니다.(33-36)

7. 27절에 성령을 주어 그들이 율례와 규례를 지켜 행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물로 씻어 정결하게 하고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어 새롭게 되었는데 여전히 옛 율례와 규례를 지켜야 한다는 것인가요? 이것은 율법 준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새 언약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는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회복시켜 주자 그들이 비로소 죄를 미워하게 되고 그들의 행위를 부끄러워하고 한탄하게 됩니다.(31-32) 성령의 도움으로 거룩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실 때는 사람들에게 거룩하라고 명령만 하지 않고 친히 그들의 중심에 들어와 자신의 거룩함을 친히 보여주십니다. 눅 22:20에서 예수님은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을 말씀한 것도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죄에서 자유하게 되는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주께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거룩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며 도와주기에 거룩한 주님처럼 우리도 거룩하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8. 종려주일이며 수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온전한 구원을 주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러 예루살렘에 들어간 날입니다. 사람들은 환성을 지르며 메시아에 대한 자기들의 기대를 드러냈지만 예수님은 겸손하게 새끼 나귀를 타고 볼품없는 모습으로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주간을 불의와 싸우고 성전을 깨끗하게 하고 마지막 가르침을 주고 기도로 십자가 죽음을 준비했습니다. 율법을 완성시키기 위해 오신 주님은 스스로 제물 되어 피 흘려주심으로 우리에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주는 온전한 회복과 구원의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수난주간 묵상과 기도를 통하여 온전한 회복을 누리게 하는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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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언약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렘 31:31–34, 히 8:7-13)

1. 하나님은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 아담에게 생령을 주시고 짐승의 이름을 짓게 하는 동역자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사단의 꾀에 넘어가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을 피하여 숨은 아담에게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셨고 살길을 주셨습니다. 가죽옷을 입히고 사람의 아들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언약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단의 권세가 무너질 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 약속 때문에 하나님은 시대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을 찾았습니다. 노아시대의 죄를 심판할 때에도 노아의 식구들을 선택하여 구원의 약속을 이어갔습니다. 바벨탑을 쌓고 하나님을 거부하는 인간을 흩으면서도 아브라함을 불러 약속을 주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나라를 만들게 했습니다. 이삭과 야곱 요셉의 시대를 거치며 약속대로 민족을 이루었고 모세를 통하여 약속한 땅 가나안으로 인도했습니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며 광야를 지났지만 약속을 붙들지 못했습니다. 우상을 섬기고 음행하는 가나안 원주민들을 진멸하고 하나님의 법이 통하는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도록 이스라엘을 불러 제사장 나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죽자 가나안 사람들과 통혼을 했고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사사시대는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보기에 악한 일을 반복했습니다. 다윗 왕 시대에 태평성대를 이루지만 그의 아들 솔로몬은 이방여인들을 가까이 하다가 하나님이 주신 영광을 잃어버립니다. 솔로몬의 아들 때에 나라는 둘로 나뉘고 주변 강대국의 괴롭힘을 당하다가 결국 나라를 잃고 맙니다. 바벨론 포로기를 거치며 소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약속을 기억했습니다. 70년이 지나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나라를 회복시켜줄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3. 예레미야는 새 언약에 대해 예언합니다.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라고 하나님을 배반한 이스라엘을 남편과 아내의 깨어진 관계로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돌 판에 기록한 계명을 주고 매 안식년마다 큰 소리로 낭독하여 백성들이 기억하고 준수하도록 했습니다.(신 31:9-13)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출 19:5-6)고 약속했습니다. 백성들도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과 율법에 순종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출 24:3).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 언약을 깨버렸기에 하나님은 다시 새 언약을 주겠다고 합니다.

4. 인간에게는 율법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광야백성들을 보면 문제가 생길 때마다 불신앙과 불평불만이 나타났습니다. 왜 여기까지 끌고 와서 죽게 하는지 따지고 모세와 하나님께 불평했습니다. 하나님의 요구가 자신들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필요했고 새 언약이 필요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성령으로 그들 안에 친히 거하며 새로운 마음을 만들겠다고 합니다. 새 언약을 주는 이유는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다시 기억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대제사장이 한해에 한번 대 속죄일에 희생짐승의 피를 들고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뵙고 죄의 용서를 받던 것에서 이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직접 나갈 수 있게 한 것입니다.

5.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알려주시는 은혜가 있기에 죄인들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약속의 성취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 고난을 자초했습니다. 짐승의 피로 죄를 용서받던 것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했습니다. 더 이상 죄 때문에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나뉘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고 하나님의 원래 계획인 ‘나는 너의 하나님, 너희는 내 백성.’이 가능하게 했습니다. 옛 언약에서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반복하여 제사를 드려야 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드린 완전한 제사로 영원한 죄의 용서가 주어졌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먹으로 돌비에 새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마음 판에 새긴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고후 3:3)

6. 예수님이 성만찬을 제정할 때에 잔을 주시며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들을 구속하기 위해 흘리는 대속의 피요 새 언약의 피라고 했습니다. “내가 친히 그들의 죄를 사하고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리라.”고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했던 그 약속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8장은 예레미야의 말을 인용하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중보자로 소개합니다. 그리고 새 언약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굳은 의지를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가 새 언약을 맺으리라”(히 8:8),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될 것이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될 것이다.”(10절), “내가 나를 그들 모두에게 나타내겠다.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 것이다.”(11절)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길 것이다. 내가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할 것이다.”(12절)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7. 예수 믿는 우리들은 법조항에 얽매여 순종하기보다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자발적인 복종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마음에 계셔 하나님을 알게 하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으로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씀에 순종합니다.(빌 1:6)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도 언약을 지키지 못하던 이스라엘과 별반 다르지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영으로 거하며 우리를 도와주기에 그 약속을 붙잡고 삽니다.(요 1:9-12)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이 나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믿습니다. 그 믿음 때문에 영생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요 3:16)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친히 십자가를 졌습니다. 그가 고난을 받음으로 고난 받는 자를 위해 친히 중보 할 수 있는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보좌에 담대하게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히 5:8-10) 한번 용서한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않는 영원한 사죄의 은혜가 새 언약 안에 있습니다. 이 언약은 변하지 않는 영원한 약속입니다.

8.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성령의 인도를 따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십자가는 죄인을 구원하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치 광야에서 뱀에 물린 자들이 장대에 달린 놋 뱀을 보고 다시 살게 된 것처럼 보혈을 의지하고 믿는 사람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엡 2:14,15)” 십자가에서 단번에 드린 그리스도의 희생이 우리를 완전한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니 새 언약의 성취로 오시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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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고난과 믿는 자의 승리(민 21:1–9 요 3:14–21)

1. 가나안을 향한 이스라엘의 여정은 마치 천국을 향해 살아가는 성도의 세상살이와 비슷합니다. 약속 받은 땅에 대한 확신을 가진 지도자와 그를 따르던 백성들이 함께 광야생활의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과정을 통하여 오늘 우리들이 배워야 할 신앙생활의 바른 자세를 가르쳐 줍니다, 광야생활 막바지에 가나안까지 빠르게 도달할 수 있는 길이 있었지만 에돔이 자기 영토를 지나가도록 허락해주지 않아서 그들은 다시 먼 광야 길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한편 이런 소식을 들은 가나안의 아랏 족속은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몇 사람을 사로잡아 갔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께 합심하여 기도하고 공격하여 아랏을 파멸시켰습니다.(민 21:1-3)

2. 외부에서 오는 공격은 마음을 합쳐 기도하고 싸워 물리쳤지만 내부에서 생긴 불평과 원망은 또 하나의 넘어야할 산이 되었습니다. 38년의 광야생활을 마쳐가는 때이고 약속의 땅이 눈에 보이는 그곳에서 다시 광야 길로 우회하게 되자 사람들은 길로 인해서 마음이 상했고 쌓인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왜 우리를 애굽에서 데리고 와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여기는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다,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한다.’고 불평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주신 만나를 ‘이것이 무엇인가’하며 경탄했던 것이고 광야생활동안 주로 먹던 음식인데 이제 그 마음이 변하여 감사를 잃어버렸고 만나를 하찮은 것이라고 평가하며 불평했습니다. 음식에 대한 불만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모세를 향한 원망이었고 모든 것을 부정하는 불신앙의 처사였습니다.

3. 지도자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불평불만 하는 죄를 범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불 뱀을 보내 그들을 물게 했습니다. 광야에 흔한 뱀이고 그들도 잘 아는 독사였지만 하나님께서 그 뱀을 사용하여 그들을 다루셨습니다. 한번 물리면 고열이 나고 불에 덴 것처럼 뜨거운 고통을 당하다가 죽게 되기에 불 뱀이라고 불렀습니다. 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그들은 잘못을 바로 깨닫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잘못을 곧바로 돌이킬 수 있는 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를 회유하고 권면하고 때로는 채찍을 사용하여 죄에서 돌아서게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놋 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고 뱀에 물린 사람들이 그것을 바라보게 했습니다. 불 뱀에 물렸을지라도 놋 뱀을 바라보면 살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민 21:4-9)

4. 하나님은 죄와 죽음의 권세를 무력화 시킵니다. 장대에 높이 달린 뱀을 바라보고 다시 생명을 얻고 살 수 있는 생명의 길을 내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고 그를 바라보고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한 것은 세상을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를 믿고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요 3:14-19) 어둠에 속한 죄인들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거역하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은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장대에 달린 뱀을 보고 생명을 얻었듯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은 지식적인 동의나 일시적으로 그를 인정하는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만이 생명을 주시는 유일한 주님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5. 우리가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떠나 죽음에 처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먼저 사랑해 주셨습니다. 죄를 회개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게 하여 깨끗함을 얻게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다시 살리셨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혀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모든 사람들과 오는 세대에게 전하게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은 새 생명을 널리 자랑하게 했습니다.(엡 2;4-6) 로마서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려고 그리스도를 맏아들로 삼았다고 설명합니다. 롬 8:29-30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사람들이 자기 아들의 모습을 닮게 하시려고 그들을 예정하시고 그리스도가 많은 성도들 가운데 맏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고 인정하시고 의롭다고 인정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현대인의 성경)

6. 그러기에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목적을 갖고 삽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의 은혜를 힘입어 구원을 얻었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 대단한 인물도 아니고 가진 것도 변변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된다는 것으로 어깨를 펴고 담대하게 세상을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확신하기는 자기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해서 내어주신 하나님이 그 아들과 함께 다른 모든 것들도 아낌없이 주실 것을 믿습니다.(롬 8:32) 우리의 약함을 아는 주님은 성령으로 성도들과 함께 하며 그리스도를 닮는 신앙여정을 바로 걷도록 도와주십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며 기쁨을 누리게 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며 배려입니다.

7. 사도 요한도 우리를 사랑하여 먼저 불러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말했습니다. 요일 4:9-10 “하나님은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가 그를 통해 살 수 있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제물로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고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게 해주셨습니다.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하고 그 아들을 믿고 죄 용서와 구원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는 성도는 문제를 만나더라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 살기 때문입니다.

8.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 안에 계시고 그 사람도 하나님 안에서 살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과의 영적 교제이며 자녀의 특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믿는 사람은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뜻대로만 구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요일 5:14) 하나님은 자녀의 기도에 가장 좋을 것으로 응답하는 분이며 성령을 주시는 아버지입니다.(눅 11:13) 그러니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어둠의 세력에게 지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대적하고 물리치십시오.(약 4:7) 또 다른 사람들의 묶인 것까지 풀어 자유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를 넓혀가는 사역의 기쁨을 맛보십시오. 우리를 구원하여 생명 살리는 기쁨을 함께 맛보게 하려고 주께서 고난을 당했습니다. 사순절 기도를 통하여 이런 기쁨과 감격이 새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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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요 2:13-22, 고전 1:18-24)

1.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성전만 있던 솔로몬 성전과는 달리 부속 건물이 있었고 규모도 컸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주전 1000년경에 지어졌다가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바벨론 포로기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사람들은 스룹바벨과 함께 무너진 성전을 재건했지만 솔로몬 성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500년이 지난 후 헤롯대왕은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주전 20년부터 예루살렘 구시가지의 20%나 되는 넓은 면적에 부속건물과 뜰을 갖춘 성전을 지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이후까지도 공사를 계속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주후 70년에 로마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그 후에 성전이 있던 장소에는 이슬람 사원이 들어섰고 성전의 서쪽 벽만 일부 남아 있어서 성지를 찾는 순례자들의 방문지가 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은 완전하지도 않고 영원하지도 않습니다.

2. 헤롯 성전에는 할례 받은 유대인 남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유대인의 뜰과 유대인 여자들이 들어 갈 수 있는 여인들의 뜰이 있었고 바깥쪽에는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을 위한 이방인의 뜰이 있었습니다. 이 이방인의 뜰에서 멀리서 온 사람들을 위해서 희생 제물로 바칠 짐승들을 팔았고 제사장들은 상인들과 결탁하여 폭리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을 보고 분을 내었습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짐승들을 내쫓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엎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며 영광을 돌려야 할 성전을 장사하는 소굴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요 2:16-17)

3. 예수님은 오랜 동안 습관처럼 해오던 일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사람들은 무슨 권세로 그렇게 하는지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했고 예수님은 성전을 헐면 사흘 만에 세우겠다고 했습니다. 성전에 대한 자부심이 컸던 사람들이기에 성전을 헐라고 하는 말에 크게 저항했습니다. 사십 육년이나 걸려 세워진 성전을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거룩한 분이기에 하나님을 모신 성전이 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을 드려 십자가에서 죽고 무너지지만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여 세워질 것을 말한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하는 집입니다. 거기서 희생제물을 드려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던 곳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불의를 행하고 담을 높이 쌓아 사람들을 구분하고 원래 목적에서 벗어났으니 이미 자기 기능을 잃은 것입니다.

4. 하나님은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에게 성막을 세우고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죄 용서를 받고 거룩한 백성으로 살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막은 모든 생활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전 짓기를 원했지만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았고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성전을 짓게 했습니다. 솔로몬은 아름다운 성전을 지어 봉헌하면서 그 어떤 경우에 누구라도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들어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의 눈과 마음을 그곳에 두고 그들의 기도를 듣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다윗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면 왕위를 견고하게 하겠지만 이방인들이 섬기는 우상을 숭배하면 선택한 백성들의 뿌리를 뽑아버리고 또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지은 성전이라도 버려서 이방인들의 비웃음거리가 되게 하겠다고 경고했습니다.(대하 7:11-22)

5.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물로 드려 모든 믿는 자들이 구원을 받게 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요 2:17-21) 믿는 자 모두를 구원에 이르게 했습니다. 죄에 빠져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목 하는 길을 내셨으니 그는 참 성전입니다. 그가 자신의 몸으로 완전한 제사를 드릴 때 성전 휘장이 찢어지고 더 이상 모형인 성전에서의 제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갈 수 있게 했습니다. 십자가는 죄를 벌해야 하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고 또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지만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고전 1;18) 세상적인 안목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고 지혜와 계시의 영인 성령의 도움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6. 교회는 참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그를 배우고 전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이 근본 목적이 약해지면 성전의 외모에만 관심을 두고 성전 기능을 바로 하지 못하던 유대인들과 같이 됩니다. 그리되면 기도하고 예배하며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영적인 일보다 형식적인 종교행위와 외형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교회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 세상의 죄악이 관영하고 세속화는 더 빠르게 진행될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실 때에만 생명의 능력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의 도움을 날마다 구하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주인으로 일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전의 기능을 바로 하는 거룩한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고전 3:16)

7.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오늘을 사는 성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모본입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여(출 20:2) 거룩한 제사장나라로 살게 한 것은 우상을 섬기며 죄 가운데 있는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함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도 하나님을 알고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이방인들이 섬기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3-6)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아내의 마음을 차지하고 싶은 남편의 마음이나 자식의 마음을 얻고 싶은 부모의 마음과 같은 사랑에서 나오는 질투입니다.

8.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성도들은 거룩해야 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참 성전인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성도는 생명을 구원하는 예수님의 사역을 대신하는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들을 찾아가 구원을 베푸는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성전의 기능을 계속하는 사람들입니다. 성전을 통하여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게 했던 하나님은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우리들을 사용하여 또 다른 사람들이 죄에서 해방되고 구원의 감격을 누리게 합니다. 사순절 기도를 통하여 성전으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공급받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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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증표 (창 17:1-14 롬 5:1-11)

1. 아브람이 99세가 되었을 때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타나 하나님 앞에서 흠 없이 행하라고 하며 그에게 언약을 주시고 번성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창 17:1-2) 아브라함이 75세에 고향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는 가나안에 도착한지 24년이 지난 때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평가를 받는 아브라함이지만 그도 우리와 같이 평범하고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생각으로 행할 때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같은 약속을 지속적으로 주셨고 그를 격려하여 결국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세웠습니다.

2. 하나님은 창 12장에서 아브람을 불러 땅의 많은 민족이 복을 얻게 하겠다는 약속을 하며 고향을 떠나게 했습니다.(창 12:1-4) 그에게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이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조카 롯과 함께 새로운 곳에 정착하여 살던 중 번성하여 짐승먹일 땅이 부족하게 되자 넓은 땅을 찾아 서로 헤어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의 티끌같이 많은 자손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또 그의 눈으로 바라보는 땅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창 13:14-17) 그리고 창15장에서도 그 약속을 반복하여 주십니다. 아들이 생기지 않자 종으로 자란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겠다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그의 몸에서 나오는 아들이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늘의 별을 바라보게 하며 별처럼 많은 자손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아브람은 그것을 믿었고(창 15:4-7)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3.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아브람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지만 자신의 처지를 생각할 때마다 회의가 생겼던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주려고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냈다고 말하지만 아브람은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창 15:8) 가나안에 이주하여 점점 늙어가는 현실 앞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고민한 흔적들이 보입니다. 그의 솔직한 질문에 하나님은 탓하지 않고 당대의 사람들이 서로 언약을 체결하는 방법대로 제물을 쪼개놓고 횃불로 그 사이를 지났습니다.(창 15:17) 그것은 언약을 파기하면 쪼개진 짐승처럼 죽게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약속 체결 방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을 바라보고 믿을 수 있도록 훈련했습니다.

4. 하나님은 참으로 선하고 그의 백성을 사랑하는 분입니다. 마치 갓난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어 대화하고 새끼손가락을 걸어 약속하는 엄마처럼 아브람을 대했고 그가 믿음을 갖게 했습니다. 별처럼 많은 자손을 약속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브람이 믿을 때 그를 이미 의롭다고 여겨주셨습니다.(창 15;6) 그의 완전하지 않은 믿음을 탓하지 않고 다시 횃불 언약을 통하여 확신시켜주셨습니다. 약속은 쌍방 간에 하는 것이지만 아브람과 맺은 횃불언약은 하나님 혼자 쪼갠 제물 사이로 지나간 일방적인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맺었으니 약속이행의 의무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구원을 위해서 다른 것 필요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믿음으로 받는 것과 같습니다. 아브람에게는 약속 이행 능력이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아셨기에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약속을 맺은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사랑입니다.

5. 하나님은 전능하신 주권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약함 때문에 뜻을 접거나 포기하지 않았고 인내했으며 그들의 이름을 바꿔 새로운 존재가 되게 했습니다. 존귀한 아버지라는 의미의 ‘아브람’에서 많은 사람의 아버지라는 의미의 ‘아브라함’으로 바꿔주십니다. 공주라는 의미의 ‘사래’에서 많은 나라의 어머니라는 ‘사라’로 바꿔주십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정체성이며 존재이유와 목적을 말해줍니다. 자기만을 위하여 살지 말고 열방을 복 받게 하라고 주신 새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번성하게 하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겠으며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겠다고 약속합니다(창 17:7-8) 비록 그는 자기 방법대로 여종에게서 이스마엘을 얻었고 또 말씀을 들으면서도 믿어지지 않아 속으로 웃었지만 하나님은 그것까지 아시고 태어날 아들의 이름을 웃음이란 뜻을 가진 ‘이삭’이라고 지어줍니다.(19절) 하나님은 열방을 복되게 하려는 뜻을 위하여 꾸준히 일했습니다.

6.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식솔들에게 약속 받은 백성이라는 증표로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게 합니다. 태어나는 남아도 생후 팔일이 되면 할례를 받았습니다.(10절) 집에서 난 자나 돈으로 산 자나 대를 이어 행했으며 이 증표가 없으면 백성 중에서 끊어지게 되었습니다.(13절) 이것은 아브라함 뿐 아니라 대대로 오는 그의 후손 사이에 세우는 언약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며 또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표시였습니다.(7절) 할례를 행하다가 적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고 일도 해야 했을 텐데 일시에 모든 남자들이 표피를 베어낸 것을 보면 말씀에 순종할 만한 믿음의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23절)

7.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합니다.(딤전 2:4) 그래서 아브라함을 선택했고 그가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훈련했습니다. 결국 이삭을 번제로 드릴 만큼 하나님을 신뢰했고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주실 분으로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의 아들인 이삭에게 전수되었고 그 다음 후손들도 여호와를 신뢰하는 사람이 되어 약속을 이어갔습니다. 마태가 유대인 독자들에게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 것도 이 약속을 강조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 (창 22:18)고 했고 다윗에게는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 7:12-16)고 한 약속을 성취하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뜻을 십자가에서 이룬 것입니다.

8. 우리에게도 약속의 증표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음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음을 믿고 받은 세례가 그 증표입니다. 구원받은 우리들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살다가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롬 5:1-2) 하나님은 우리들이 아직 죄 가운데 있을 때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함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롬 5:8)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일 때에도 그랬다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우리들에게는 더욱 성령의 능력과 천국생활의 기쁨을 주시고 그것을 이웃과 나누게 할 것입니다.(롬 5:9-10)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열방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는 자세로 살며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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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을 성취하는 하나님 (창 22:1-19)

1. 사순절이 되면 교회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깊이 생각합니다. 우리를 구원하려고 고난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의미를 묵상하고 우리의 신앙생활을 점검합니다. 바울은 고후 5:21에서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때문에 우리가 의롭게 되었고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되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응답하는 관계 안에서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고후 6:2) 올해도 함께 기도하고 말씀에 비추어 자신을 점검하며 주님을 더 깊이 배우는 사순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창 22장에는 아브라함이 늦게 얻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1절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려고 이런 명령을 내렸다고 말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사단이 하나님의 나라를 방해하기 위해서 주는 유혹이나 하나님의 사람을 더 강하게 만들려는 검증을 위한 시련을 다 시험이라고 번역했지만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은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기 위한 검증작업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이나 뜻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일하는지를 묻기보다는 이 일을 통해서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이해나 협조를 필요로 하는 분이 아니고 우리는 피조물로서 창조주이며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행하는 일에 순종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3. 아브라함이 위대하게 평가 받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희생시켜야 하는 아버지에게 어찌 고민이 없었겠습니까? 밤새 씨름했을 것이지만 하나님께 향한 절대 신뢰와 경외하는 믿음이 있었기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2절에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라는 표현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자기 것으로 여겼음을 말합니다. 늦은 나이에 그것도 25년이나 기다려 얻은 아들이고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갈 아들이니 귀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말씀에 순종하여 고향을 떠났지만 이제 가장 소중히 여기는 아들을 포기해야 하는 시련을 맞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소중한 것을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조차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라는 것을 결단하게 훈련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보다 귀하게 여기는 것들을 우상이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선한 것이라도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여기거나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빼앗아 간다면 그것은 우상이 됩니다.

4.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결정한 후에는 다시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죽은 자를 살리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분으로 믿었습니다.(롬 4:17 히 11: 17-19) 그리고는 신속하고 단호하게 움직였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번제에 쓸 나무를 준비하여 출발했습니다. 모리아 산까지는 사흘 거리였으니 아들의 손을 잡고 가면서 얼마나 많은 갈등과 질문이 있었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일관했습니다. 번제에 사용할 양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이삭에게 하나님이 준비하실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마음에서 나오는 대답입니다. 한 번의 결단은 쉬울 수 있지만 끝까지 순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자기를 정당화시키고 쉬운 길을 선택하려는 유혹을 물리쳐야만 가능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주권자로 신뢰하는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5. 하나님이 지시한 장소에 이르러 아들을 묶어 제단에 올리는 아브라함의 자세는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말씀을 따르는 순종의 모범이 됩니다.(창 22:6,9) 하나님께서는 그의 순종을 확인하고는 번제에 사용할 희생양을 준비해 주셨고 약속도 새롭게 해주셨습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12절)며 만족해했습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창 22:17-18)라고 하시며 창 12장에서 했던 약속을 다시 확인해주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순종한 이삭이나 하나님이 이삭 대신 준비한 여호와 이레의 양은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시킨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합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되는 약속을 성취했습니다.

6.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며 요한에게 세례를 받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라는 것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성령에게 이끌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려고 광야로 나갔습니다.(막 1:12-13) 시험하는 마귀를 말씀으로 이기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사역의 문을 열었습니다. 이 시험을 이김으로 시험받는 사람들을 능히 도와주실 수 있는 주님이라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약 1:14-15“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욕심에 미혹되어 죄를 짓고 그 죄의 결과로 사망에 이르게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믿고 사랑하는 자들에게 시험을 이기는 승리를 주시고 생명의 면류관도 주십니다.(약 1:12) 그는 변함없이 신실하셔서 지금도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승리와 생명을 주십니다.

7.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우리 안에 거하며 믿음으로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힘으로 사는 것 같으나 사실은 은혜로 삽니다. 아브라함이 위대한 것 같지만 이삭을 통하여 약속을 이루어야 하기에 하나님은 그들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여 불러 구원하시고 구원받은 자답게 살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은혜가 바로 여호와 이레의 복입니다. 이삭을 살려 구원의 약속을 이루셨던 것처럼 우리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지속되게 하려고 복을 주십니다. 그러니 문제를 만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로마로 가던 죄수호송선이 풍랑을 만나 죽게 되었지만 로마에 가서 전도해야 할 바울 한사람 때문에 모두가 살았습니다.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 27:24-25) 믿음의 사람 하나가 많은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8.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 하시겠느뇨.”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우리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낼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서 모든 환경을 사용하여 약속을 성취하시고 선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전염병으로 인한 두려움도 이겨내고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신실하게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는 사순절 기도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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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결단하라 (히 11:23-26)

1. 코로나 백신을 접종하기 시작했는데도 백신이 항체를 만드는 과정에서 약간의 반응을 보이는 것을 염려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느 지역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백신을 맞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그날 남은 백신을 폐기하지 말고 대신 주사해 달라며 기다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백신 맞는 일에도 깊이 생각하고 내리는 결단이 필요한 때입니다. 인생은 결단으로 이루어집니다. 아무리 사소한 결단이라도 당사자에게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결단에 따르는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엄마 손을 잡지 않고 등교하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군대에 들어가고 배우자를 선택하고 직장을 정하는 일은 더 큰 책임이 따르는 결단입니다. 고향을 떠나 이곳에 와서 사는 우리들은 이미 큰 결단을 한 것입니다.

2. 앞으로도 결단해야 하는 순간들을 만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일의 결과를 모르는 채로 발을 옮겼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시어 믿음으로 내리는 우리들의 결단을 형통하게 인도하셨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이 반드시 존재한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그것들을 앞당겨 보는 것입니다.(히 11:1) 이것은 우리의 지혜가 아니라 성령께서 깨닫게 하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믿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아니고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도 없고 자신의 생각을 바로 세울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의 삶에 개입하여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분입니다.(롬 8:28)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에게 상주시는 아버지입니다.(히 11:6)

3.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선조들을 소개합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믿음으로 방주를 마련했습니다. 그 결과로 믿음을 따라 얻는 의를 물려받는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는 말씀을 듣고 목적지가 어딘지 모르면서 믿음으로 결단하고 발을 내딛었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도 수태할 수 없는 몸이었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더니 자식을 낳아 민족을 이루는 문을 열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다 보지 못했지만 그들의 시간을 나그네로 살며 하늘 고향을 그리워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들의 하나님이 되었고 그들을 위하여 하늘의 거처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결단하고 순종하는 선조들을 섭리가운데 돌보시고 사용하여 하나님의 일을 진행했습니다.

4. 모세는 히브리 민족을 말살하려는 바로의 정책이 시행되던 때에 태어났습니다. 바로는 산파들에게 태어나는 남자 아이를 죽이라고 했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산파들은 그리하지 못했습니다. 바로는 백성들에게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나일 강에 던지라고 다시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부모는 아이를 석 달 동안이나 숨겨 키었으며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기로 뜻을 정하고 섭리가운데 일하셨습니다. 가장 핍박이 심할 때 모세가 태어나게 했고 나일 강에 던져지게 했으며 공주의 마음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주어 모세를 건져내 왕자로 기르게 했습니다. 유모가 된 어머니에게서 여호와 하나님을 배우게 했습니다. 동족을 죽이는 실수를 하고 광야로 피신하여 젊음을 보냈지만 하나님은 모세의 교만과 패기가 사라지기를 기다려 그를 불렀습니다. 하나님이 주는 힘으로 일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5. 히브리서는 모세가 공주의 아들이라 불림을 거절했다고 말합니다.(24절) 왕궁에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고난을 택했다고 말합니다.(25절)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하나님의 상을 바라는 결단 (26절)을 했다고 평가합니다. 40년의 왕궁교육을 받아 언어와 일에 능하게 된 모세였지만 동족의 싸움에 끼어들어 애굽 사람 하나를 죽이게 됩니다. 이 일로 모세는 광야로 피신하여 40년을 지냅니다. 젊음을 허비한 것처럼 보이는 이 일을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해석합니다. 애굽에서의 안락함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결단한 일이 되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에서 떠나 하나님을 선택한 일이 되었습니다. 이집트의 재물보다 더 값진 것을 선택한 것이었고 이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이 되었습니다. 모세 스스로가 자기 인생을 결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함께 했으며 성경은 그가 믿음으로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6. 히브리서는 초창기의 고난당하는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서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있는 성도들에게 눈에 보이는 세상의 안일함보다 하나님이 주는 상급을 바라보게 했습니다. 이 땅에서의 형통을 약속하거나 고난이 곧 끝나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선조들처럼 하나님이 주실 상급을 바라보고 고난을 인내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히 12:1-2은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알려주기 위해서 사람이 되어 오셨고 자기의 모든 시간과 생애를 죄인들을 위해 내주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작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자기를 부인하고 따르라고 가르쳤습니다.

7.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하는 손에 들려지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 주님의 강함을 옷 입혀 주고 우리가 가난할 때 주님의 부요하심을 의지하게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믿음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선택하고 왕좌의 특권을 버린 모세의 결단은 더 값지고 보배로운 것을 선택하는 믿음의 결단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학식과 유대인 출신의 특권을 모두 버리고 평생을 복음 전도자로 살았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지 않기로 결단했습니다. 다른 신에게 기도하면 사자 굴에 던져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자 굴과 불 못에 던져졌지만 하나님께서 건져냈습니다. 그들의 믿음의 결단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믿도록 사용되었습니다.

8.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우리들은 매순간마다 믿음으로 결단하며 살아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하나님께 맡기는 일이며 우리보다 크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생을 한결같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넓고 쉬운 길보다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고난을 결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이 주는 즐거움보다 주님을 위해 수고하기를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나그네로 잠시 사는 중이며 장차 주어질 영원한 하늘 본향을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믿음으로 결단하는 천국백성들이 되기 바랍니다. 주께서 힘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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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 참여의 자세 (고전 11:17-29)

1. 요즈음 우리 부부에게는 새로운 기쁨이 하나 생겼습니다. 아침 9시 반쯤 되면 어김없이 걸려오는 딸의 전화 때문입니다. 캘리포니아에 사는 딸이 8개월짜리 손녀딸의 얼굴을 보여주기 위해서 거는 전화입니다. 해맑은 얼굴로 할아버지 할머니를 알아보고 웃어주는 아이를 만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두런두런 30분을 얘기하다보니 처음보다 얘기 소재도 많아지고 정도 쌓이는 것 같습니다. 얼굴을 알아보고 웃는 아이를 전화기로 만나는 즐거움도 있지만 어서 속히 왕래하게 되어 아이를 품에 앉아보고 싶습니다.

2. 전염병으로 인해 모이지 못하는 비상상황이다 보니 각 가정에서 영상으로 예배하거나 어떤 교회는 작성된 예배문을 돌려 가정에서 예배하기도 합니다만 함께 모여 드리는 공동체 예배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요즈음 영상으로 예배하는 일에 길들여 지다보니 성찬식을 온라인으로 해도 되는가를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실제로 어느 교회는 각자 준비한 성찬을 먹으며 성찬식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식탁에 함께 앉아 먹는 공동체 식사를 그렇게 대신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찬식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한 식탁에서 먹는 공동체의 예식이기 때문입니다. 비상시국의 편리함이 습관이 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하겠습니다. 전화로 사랑을 유지할 수 없는 것처럼 가상공간에서의 은혜로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몸으로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고 사랑을 확인해야 하는 것처럼 현장에서 역사하는 주님의 은혜를 속히 맛보기를 기도합니다.

3. 세례나 성찬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 하나님 앞과 그리고 교회 공동체 앞에서 죄의 용서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특히 성찬식은 주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대신 죽으신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예식입니다. 주께서 행하시는 구원의 일을 널리 선포하고 그 일에 참여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먹을 때마다 구원받은 자로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점검합니다. 그리고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하고 준비하는 기회로 삼습니다. 이미 3세기 때부터 말씀과 세례와 성찬은 교회의 핵심요소가 되었습니다. 거룩하게 구별된 빵과 잔을 먹으며 영으로 임재 하는 주님과 하나가 되고 또 한 식탁에 둘러앉은 형제들이 주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세례와 성찬은 교회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고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눈으로 보게 하는 것입니다.

4. 바울은 고전 11:26-28에서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합당하지 않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니 각 사람은 자기를 살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셔야 합니다.”라고 가르쳤습니다. 고린도교회가 성찬에 대한 오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념하고 주님과 하나 됨을 나누는 거룩한 교제인 성찬을 그저 당시 헬라인들이 행하던 하나로 파티로 생각했습니다. 각자 음식을 가지고 와서 함께 나누어 먹던 애찬 습관이 교회 안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먼저 온 사람들이 나중 오는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고 먼저 먹어버려서 음식이 모자라는 경우도 있었고 먼저 취하는 일도 생겼습니다. 그것이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별로 이어지고 교회 분쟁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5. 그래서 바울은 서로에 대한 배려 없이 욕심껏 먹고 취하여 공동체의 조화를 깨뜨릴 수 있는 애찬은 차라리 각자의 집에서 먹게 했습니다.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난한 자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고전 11:22) 그리고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성찬에 대한 의미를 가르쳤습니다. 합당하지 않은 자세로 성찬에 임하는 것은 주의 몸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고(고전 11:27)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고전 11:29) 가르쳤습니다. 그러니 각자 자신을 돌아보고 합당한 자세로 성찬에 임해야 했습니다. 성찬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고 구원해 주심에 감사하고 사명을 새롭게 하는 공동체 의식이기 때문입니다.

6. 주께서 잡히기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베푼 성만찬 의식은 일반인들이 먹던 유월절 음식 그것 이상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애굽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축제였습니다. 유월절 양의 피를 발라 죽음을 면했었는데 이것은 대속을 위해 흘린 예수님의 피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새 언약의 피(막 14:23-24)가 되었습니다. 구약의 옛 언약이 희생 짐승의 피로 맺은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피를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는 새 언약을 맺었습니다. 빵을 주시며 자신의 찢긴 몸이라 하고, 잔을 주시며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대신 흘린 피라고 말씀했습니다.(눅 22:19-20) 대속의 은혜를 주신 주님을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했습니다.(요 3:16)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염두에 두어야 하고 공동체의 위해 희생하는 마음도 있어야 합니다. 화목제물이 되신 주님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7. 우리는 성찬을 먹으며 주님의 대속의 죽음을 기념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로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음을 기억하고 감사합니다. 성찬을 먹으며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과 깊이 사귀고 하나가 됨을 경험합니다. 주님의 몸과 피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기에 주님처럼 거룩한 생활을 하려고 성령의 도움을 구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찬을 먹으며 성도의 거룩한 교제를 확인합니다. 주께서는 빵과 잔을 제자들에게 나눠주시고 함께 나누어 먹게 했습니다. 성찬은 주님이 주시는 몸과 피를 한 식탁에서 함께 나누어 먹는 예식입니다. 형제가 서로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기에(엡 2:21) 분쟁이나 나뉨을 피하고 주 안에서 한 몸이며 한 식구라는 것을 때마다 확인하고 점검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찬을 바로 먹는 것이고 재림을 기다리는 거룩한 교회공동체로 바로 서는 일입니다.

8. 구약의 회막과 성막과 성전에 거하던 하나님은 신약의 교회에 거하십니다. 그것은 공간적인 집의 의미보다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거룩한 교제를 말합니다. 교회는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지점입니다. 말씀과 세례와 성찬을 통하여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살며 주님의 다스림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식탁에서 영원히 먹게 되는 그날까지 성찬을 반복하여 먹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식구 된 성도들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주님의 승리를 삶으로 살아낼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일상을 살며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마음껏 자랑하고 전할 것입니다. 성찬은 하나님 나라를 맛보고 경험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성찬을 무시하거나 거를 수 없습니다. 한 식탁에서 함께 먹으며 주님을 기뻐하는 천국의 즐거움이 속히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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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누리는 자유 (막 1:21-28)

1. 신 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이 말씀은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 선지자들이 나올 것을 말한 것입니다.(신 17:15) 뿐만 아니라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한 약속입니다. 모세가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으로 일했던 것처럼 온 인류를 위한 대제사장이며 영원한 왕이며 참 선지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하신 것입니다.(행 3:22) 예수라는 이름의 의미처럼 주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모세의 말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입에 있으니 그에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은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오셨지만 모세나 선지자들보다 훨씬 크신 분이며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분입니다.(요 1:1)

2. 그러기에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권세가 나타났습니다.(막 1:22) 갈릴리지역의 가버나움에 있는 회당에서 설교할 때에 말씀에 나타나는 권세로 인해서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다른 서기관들이 가르치는 내용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나님이기에 그의 가르침은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과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었습니다.(요8:26)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를 설교했습니다. 말씀을 선포하는 중에 한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소리쳤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 1:24) 귀신은 이미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꾸짖어 잠잠하게 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도록 명령했습니다. 그 사람은 귀신에게서 풀려났고 참된 안식을 얻었습니다.(막 1:21-27)

3.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나타납니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 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 그래서 듣기 좋은 말만 들으려 하지 말고 지엄하신 하나님을 뵈옵는 자세로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묘하게 속이는 마귀가 우리 안에서 일하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설교함으로 마귀에게 묶인 자들을 자유롭게 했습니다. 요일 3:8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말합니다.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넓어지는 것을 방해합니다. 시험에 빠지게 하고 낙심하게 합니다. 좌절하고 분노하고 미워하고 분쟁하게 합니다. 기도하지 못하게 하고 믿음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의심하고 핑계하고 게으르게 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능력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그러나 사단의 권세를 깨부수고 죽음의 권세를 이긴 주님은 기록된 말씀과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4.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롬 14:17) 하나님의 법이 통용되고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에는 영적생명력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영적 존재로의 회복이 일어납니다.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일어납니다. 주님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왔습니다.(마 20:28) 그러기에 주님이 계시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구원이 일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참 자유와 기쁨과 구원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5. 예수님은 병자를 치료하고 죄 용서를 주셨지만 기득권 세력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병자들이 치유 받고 자유를 누리는 것보다 자기들이 지키던 전통이 깨지는 것을 더 염려했습니다. 결국은 예수께서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말한 것을 신성모독으로 간주하여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요 5:18) 이것이 영적능력을 경험하지 못한 인본주의적인 신앙생활의 한계입니다. 분명 하나님을 위하고 율법과 전통을 지키려는 것인데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과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들을 불쌍히 여겨 치료해 주셨고 귀신을 내쫓고 천국복음을 전했습니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수많은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32-34절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40-45절에서는 사회생활을 할 수 없는 불치병인 문둥병까지 치료해 주셨습니다.

6. 예수님에게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죄 용서와 자유를 주시고 병을 치료해 주고 마귀에게 눌린 사람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메시아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기대를 갖고 자기 문제 해결을 위해 찾아왔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탓하지 않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성령을 통하여 우리들을 격려하고 도와주십니다.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게 합니다.(살전 5:16-18) 형통할 때나 문제를 만날 때나 주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살게 합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 중보해주는 대제사장이며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대변해 주는 주님입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1서4:10)라고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했습니다.

7. 세상에는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지만 우리에게는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고전 8:6)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자비하셔서 그를 찾는 자들에게 외면하지 않고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약 5:11)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 백성들을 구원해야 할 당위성을 설명했습니다. 요나는 자기가 키운 것도 아닌 박 넝쿨이 그늘을 만들어주다가 말라버리자 아까워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요나에게 십이만 명의 사람들과 짐승들이 있는 니느웨를 어찌 아끼지 않겠느냐고 말씀했습니다.(욘 4:10-11) 자비와 긍휼이 풍성한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결코 외면하지 않습니다.

8. 그러니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고(벧전 5:7) 주님 주시는 평안을 누리십시오. 주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보다 더 넘치는 것으로 응답해 주는 분입니다.(엡 3:20) 시 17:8-9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시 111:5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 주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그의 품에 거하며 참 자유와 평안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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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감격을 누리십시오. (욘 3:1-10, 막 1:14-15)

1.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설교했습니다. 세례요한이 잡힌 후에 갈릴리에서 복음사역을 시작하면서 예언자들이 말한 메시아가 자신이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의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알렸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바라는 유대 나라의 회복을 기대했지만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그리스도이신 자신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부들을 불러 자기를 따르게 하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했으며 그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동참하게 했습니다.

2. 하나님 나라를 맛보기 위해서는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죄에서 돌이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진정한 회개가 있을 때 비로소 복음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니느웨를 회개시키려는 하나님은 요나에게 두 번째 말씀을 주셨습니다. (욘 3:1-3) 첫 번째 주신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도망치다가 풍랑을 만났고 바다에 던져진 요나는 고기 뱃속에서 사흘을 지나며 철저히 회개하고 다시 기회를 얻었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요나는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게 된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 그들 앞에 섰을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하며 높은 자나 낮은 자를 막론하고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행한 것 곧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고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않았습니다.(욘 3:10)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지상 사역의 초점은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하늘나라 혹은 천국으로 표현되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모든 영역을 말합니다. 나라가 존속되려면 주권과 국민과 영토가 있어야 하듯이 하나님 나라도 하나님의 왕권이 하나님께 속한 택한 사람들과 그들의 생활영역에 나타나는 것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죄에서 구원받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합니다.(딤전 2:4)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십자가에서 죽게 했고 그를 믿는 자들을 죄에서 구원하십니다. 이 복음을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단의 일을 멸하기 위해 세상에 왔으며 재림하여 끝낼 일도 사단과 사망을 멸하는(고전 15:23-28)일입니다. 주님은 구원받은 성도들을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가득한(롬 14:17)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할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인 것이면서 또한 미래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체로 세상에 와서 사역을 시작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는가를 묻는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 가운데 임했다고 말했습니다.(눅17:21) 씨앗이 땅에 뿌려지면 자라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예수 믿는 사람들 속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이 시작되어 자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권능가운데 다시 오시어(마 16:28) 사단을 영원한 불 못에 던지고(마 25:41) 온 세상 만물을 새롭게 회복하실 그 날에(마 19:28)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것입니다. 성도는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오늘 여기서 맛보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죄 용서 받고 거듭난 백성으로 거룩한 교회 공동체를 이루며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기 때문입니다.
5.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은 곧 제자들을 선택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을 불러 자기를 따르게 하여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했습니다.(막 1:17)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꿈을 나눈 제자들과 같이 일했습니다. 지금 우리시대에도 그 부름에 응답한 성도들을 불러 사용하십니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앞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 사이에 사는 성도들을 불러 복음을 삶으로 살아내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삶으로 경험하며 전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더 이상 사단의 구속을 받지 않고 예수이름의 능력으로 살며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날에 우리는 주님을 대면하여 볼 것이고 그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아직은 제한된 존재이기에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 기쁨을 키우고 간수하기 위해서 믿음의 싸움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6. 처음교회는 이것을 위해 자기들의 주도권을 과감하게 내려놓았습니다. 할례와 유대인의 전통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는 다른 교사들이 이방인 출신 교인들의 발목을 잡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은 그들이 유대인의 전통과 규례에 얽매이지 않고 십자가 복음을 믿을 수 있도록 큰 결단을 내렸습니다. 행 15:28-29 “성령과 우리는 꼭 필요한 다음 몇 가지 밖에는 더 이상 아무 무거운 짐도 여러분에게 지우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우상에게 바친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런 것을 삼가면, 여러분은 잘 행한다고 하겠습니다.” 구원은 어떤 행위나 훈련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감격과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전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이것이 큰 특권이며 기쁨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들은 세상재미에 매이지 않아야 합니다.

7. 사도바울은 주의 재림의 날을 기억하고 주님께 향한 마음이 나뉘거나 초점이 흐려지지 않도록 자신을 관리하라고 했습니다. 그날에는 지금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세상의 것들이 다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7:29-31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아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처럼 하고,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하고, 기쁜 사람은 기쁘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무엇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처럼 하도록 하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는 사라집니다.“ 결혼같이 중요한 일조차 주님을 섬기는 마음을 흐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고전 7:35) 그러기에 성도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고전 10:31) 주님 오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이 없도록 자신을 관리해야 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영생을 쟁취해야 합니다.(딤전 6:11-14)

8.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영적인 나라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고 알게 하는 땅에 세워진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구속사역과 성령의 일하심으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백성이 되었으니 그 감격을 사단에게 다시 빼앗기지 맙시다. 날마다 깨어 믿음의 싸움을 하며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교회생활을 함께 합시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의인이 누리를 복을(시 68:3) 받아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시절을 따라 열매를 맺고 잎이 마르지 않고 범사가 형통하게 되는(시 1:3) 하나님 나라의 감격을 누리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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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성장을 꿈꾸자 (벧전 2:1-3)

1. “버려지고 찢겨 남루 하여도 내 가슴 깊숙이 보물과 같이 간직했던 꿈, 혹 때론 누군가가 뜻 모를 비웃음 내 등 뒤에 흘릴 때도 난 참아야했죠…저 차갑게 서 있는 운명이란 벽 앞에 당당히 마주칠 수 있어요. 언젠가 나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날을 수 있어요. 이 무거운 세상도 나를 묶을 순 없죠. 내 삶의 끝에서 나 웃을 그날을 함께해요. 난 난 꿈이 있어요. 그 꿈을 믿어요. 나를 지켜봐요.“ 거위의 꿈이라는 노래 가사입니다. 날지 못하는 거위가 현실의 벽 앞에서 고민하지만 분명히 날 수 있다는 꿈을 믿는 내용입니다. 가수 인순이가 자기 이야기처럼 생각되어 불렀다는 노래입니다. 혼혈아로 자라며 정체성혼란을 겪었던 그는 다문화 가정에서 자라는 중학생들을 위해 대안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넘을 수 없을 것 같던 벽을 넘고 보니 다른 사람의 아픔을 돌볼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이지요.

2.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흑인들이 사람다운 대접을 받지 못할 때 이런 연설을 통하여 사람들을 계몽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자명한 진실로 받아들이고, 그 진정한 의미를 신조로 살아가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 옛 노예의 후손들과 옛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둘러앉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불의의 열기에, 억압의 열기에 신음하는 저 미시시피 주마저도, 자유와 평등의 오아시스로 변할 것이라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네 아이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그런 나라에 살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완벽하지 않지만 그 꿈은 이루어졌고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3.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성령을 받아 예언하고 꿈꾸고 환상을 보게 된다고 말합니다.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 2:17) 예언과 꿈과 환상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주는 수단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믿음으로 승리하는 것을 약속해 줍니다. 성령께서는 말씀에 눈이 열리게 하여 믿음으로 살게 합니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여 시절마다 열매를 맺는 의인의 형통을 누리게 합니다.(시1편) 자기 욕심과 불의한 세상과 악한 세력과 싸워 이기게 합니다.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에 관심을 갖게 하고 그 부름에 응답하게 합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꿈이 되게 합니다.

4.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꿈을 이루어냈습니다. 그의 나이 열일곱에 형들에 의해 노예 상에게 팔렸고 죄수가 되어 갇히기도 했습니다. 그런 중에도 요셉은 하나님을 두려워했고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자신을 거룩하게 지켰습니다. 그에게 각인된 하나님이 주신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형들의 곡식 단이 요셉에게 절을 하고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이었습니다.(창 37장) 비록 이 꿈 때문에 형들의 미움을 받아 팔려가는 신세가 되었지만 결국 그 꿈은 이루어졌고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 사용했습니다. 옥에 갇혀 있을 때에 술 맡은 관리와 빵 굽는 관리의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한 사람은 사형에 처하게 되고 한 사람은 복직이 될 것을 미리 알려주었습니다.(창 40장) 나중에 요셉은 왕의 꿈도 해석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주었습니다.
5. 요셉은 자기 재주로 꿈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요셉이 얼마나 하나님과 동행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셉은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은 요셉을 통하여 자기 계획을 모두에게 드러냈습니다. 일곱 좋은 암소와 일곱 좋은 이삭은 칠년 동안의 풍년을 의미하고 파리하고 흉악한 일곱 소와 동풍에 말라 속이 빈 일곱 이삭은 칠년의 흉년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풍년이 들었을 때에 앞으로 닥칠 흉년을 미리 준비하게 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을 세워 나라를 다스리게 하고 풍요로울 때에 세금을 더 걷어 어려울 때를 대비하게 했습니다. 왕은 하나님의 사람 요셉을 총리로 세워 나라를 다스리게 했습니다.(창 41장)

6. 요셉의 꿈이나 출세를 자기를 위한 야망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큰 나라 애굽의 총리가 된 이민자 출신 요셉은 분명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꿈은 하나님의 역사를 진행하기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라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복을 받게 하려는 하나님께서 그의 후손 이삭과 야곱과 요셉을 사용한 것입니다. 요셉은 큰 흉년으로 어려울 때 식구들을 애굽의 고센 땅으로 불러들여 살게 했고 그들은 거기에 정착하여 민족을 형성했습니다. 후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다음 왕이 그들을 핍박하자 하나님은 모세를 세워 가나안으로 이주시켰습니다. 거기서 제사장 나라로 살며 이방나라들에게 하나님을 알리게 했습니다. 요셉은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 사용된 것입니다.
7. “하나님이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크나큰 구원을 베푸셔서 형님들의 목숨을 지켜주시는 것이고 또 형님들의 자손을 이 세상에 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창 45:7-8) 이 말은 형들이 요셉 앞에서 두려워할 때에 요셉이 형들을 위로한 말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신뢰했고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겼습니다. 자기 야망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따라 살았습니다. 어느 경우에서도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새해에 여러분은 어떤 꿈을 꾸십니까? 건강하고 부자가 되고 자녀들이 잘 되고 형통한 생활을 바라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것이 속사람을 더 강건하게 하고 영적으로 성장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는 것으로 결론지어져야 할 것입니다.

8. 갈 2:20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우리 삶의 목적이 달라집니다. 더 이상 나를 위하여 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기에 그 이름의 권세를 일상에서 경험합니다. 복음의 능력으로 살며 다른 사람에게 그 능력을 나눕니다. 하나님을 모신 사람답게 거룩함을 추구합니다. 엡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벧전 2:2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처럼 올해에 주님을 더 깊이 경험하고 닮아가려는 영적성장을 꿈꾸어보지 않으렵니까? 영적 성장을 위한 신령한 젖인 말씀에 더 깊이 빠져보지 않으렵니까? 주의 도우심을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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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떡인 예수 그리스도 (요 6:25-40)

1. 요 6장에서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이고 물위를 걷는 일로 자신이 메시야임을 밝혔습니다. 사람들은 홍해를 건너고 만나를 먹었던 일을 기억하고 예수님을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믿었습니다. 떡을 얻어먹은 군중들은 자기 삶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자로 믿고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마땅하지 않게 여기고 그 자리를 피해 산으로 떠났습니다. 군중들은 다음 날도 가버나움까지 배를 타고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라고 하며 썩을 양식보다 영생하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표적을 통하여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 자신에 대하여 알기를 원했습니다.

2. 성경에 나오는 여러 기적들은 하나님을 알려주는 수단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잠깐 관심을 가졌다가도 자기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하나님을 잊곤 했습니다. 이집트 바로에게 행한 열 가지 재앙은 바로의 신들을 징계하는 하나님의 승리를 알려준 것입니다. 홍해를 마른 땅으로 건너고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보호한 것은 그 일을 행하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하는 도전이었습니다. 엘리야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제물을 태운 것은 하나님이 참 신임을 알게 하여 백성들이 우상숭배에서 떠나게 한 일입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이 표적을 보고 메시아이신 자신을 바로 알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세워 자기 유익을 도모하려고 했습니다.

3.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지를 물었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어떤 일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35절에서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생명의 떡인 예수님께 나오는 자는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도 않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또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가 주님 안에 거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생활은 자기문제의 해결이나 기적을 경험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사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4. 죄로 죽을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용서를 받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든 처음 사람은 죽지 않게 만들어졌지만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짓고 그 결과로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상태가 곧 죽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 생명을 다시 돌려주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고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 값을 치루셨습니다. 그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는 것은 그가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영생을 얻습니다. 사도요한은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고 했습니다.(요일 5:12)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 거하는 자가 영생하는 생명을 얻습니다.

5. 예수 믿고 구원받는 신분의 변화는 순간에 일어납니다. 어둠에 속한 자가 빛에 속하게 되고 마귀에게 속하여 살던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이 그에 합당한 생활을 하기까지는 지속적인 성장과정이 필요합니다. 날마다 음식을 먹고 필요한 에너지를 얻어 성장하는 것처럼 날마다 예수 안에서 살며 그와 교제하고 그를 닮아가는 계속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영적인 성장이라고 표현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배고픔이나 갈증을 느끼지 못한다면 심각한 병에 걸린 사람일 것입니다. 영적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알려는 배고픔이나 갈증을 느끼지 못하거나 매너리즘에 빠져서 영적인 감동이 사라졌다면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6. 골 3:1-3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가 세례 받을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옛사람은 죽었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더 이상 자기가 주인 노릇하는 인생을 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당한 사람답게 원줄기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꼭 붙어서 양분을 섭취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존재 의미가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들이 자기 생활을 잘해보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위의 것을 찾고 거기에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7. 성경은 이런 영적 사실들에 대하여 알려줍니다. 불신자들에게는 구원에 이르는 길을 알게 하고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하나님 안에서의 즐거움을 누리게 합니다. 구원의 확신이 필요한 사람은 요한복음을 먼저 읽는 것이 좋습니다. 감사와 찬양으로 가득한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 같은 시가서를 묵상하면 우리 삶에 관여하는 하나님을 마음 가득 채울 수 있습니다. 구원에 대한 도리를 바로 알고 싶다면 로마서와 갈리디아서를 공부하면 좋습니다. 교회생활에 대한 가르침은 에베소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으면 성령의 일하심을 함께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어느 경우라도 하나님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차근차근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만이라도 읽을 수 있다면 큰 의미가 있겠지요. 그러나 통독을 여러 번 했다 해도 다시 읽고 묵상해야 하는 이유는 영적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어제 배불리 먹었지만 오늘의 음식이 또 필요한 것처럼 우리의 영적 생활을 위해서도 날마다의 양식이 필요합니다.

8. 같은 성경을 다시 읽는 것은 같은 본문이라도 날마다의 상황에서 새롭게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그때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교제하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을 어느 한쪽으로만 이해하지 않고 전체를 보고 깊이 알기 위해서 성경 전체를 읽자는 것입니다. 예고편을 보면 영화의 줄거리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고편만 보려고 극장에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장면 하나 하나에 들어있는 감동을 느끼려고 전체 영화를 보는 것입니다. 내게 필요한 단편적인 말씀만 선택하여 읽거나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한다면 성경 전체가 주는 감동을 알 수 없습니다. 시편기자는 주의 말씀이 꿀 송이처럼 달다고 표현했습니다. 올해도 우리 모두가 말씀으로 다시 새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말씀을 사모하고 읽고 묵상하여 영적 성장을 이루기를 원합니다. 사랑에 푹 빠진 연인들처럼 온통 마음을 주님께 두고 주님 안에 거하는 기쁨을 새록새록 누리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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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받은 일군 (딤전 1:12-17, 롬 12:1-5) 신년주일 직원헌신예배

1. 예수 믿고 난 후에 깨닫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 나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선택하고 불러 자녀삼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엡 2:8) 어느 시대나 하나님은 당대의 사람들 모두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가인이 아닌 셋을 선택했고 노아의 아들 중에서 셈을 선택했고 셈의 후손 중에서 아브라함을 선택했습니다. 선택은 특별한 은혜이고 거기에는 책임이 뒤따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모태에서 조성되기 전에 그를 알았고 그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성별하여 선지자로 세웠습니다. 성도는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도 목자 잃은 양 같은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제자들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교회를 사용하려고 직분자들을 선택하여 일군으로 세우셨습니다.
2. 선택받은 제자들도 완전하지 못한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일상을 통하여 가르쳤고 준비훈련을 시켰습니다. 전도하기 전에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도 주셨습니다. 마 10:1을 보면 열두 제자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고 마을로 파송하여 전도하게 했습니다. 막 3:14-15에서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고 제자들을 세웠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거하며 배우고 전도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선택했습니다. 제자들은 그렇게 훈련을 받고도 영적 사역에 승리할 때도 있었고 실패할 때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고난당하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할 정도로 비겁하고 심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 사후의 제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사명을 버리고 흩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이후에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 성령의 도우심으로 사역했습니다.

3. 바울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 1:27-28)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처럼 연약하고 흠이 있는 사람을 선택하여 일하게 하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반대하고 교회를 핍박하던 자신이 복음을 전하게 되었으니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는 것이지요. 롬 16:25-26에서는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방인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오래된 계획이 자기를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 정체성과 사명을 파악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평생 자랑하고 전했습니다. 자기가 사는 이유조차도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산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선택하여 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책임을 감당했습니다.

4. 교회는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모인 공동체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모인 사람들입니다. 우리같이 약한 자들을 충성스럽게 여겨 주시고 구원받을 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려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모인 것입니다. 아직 완전하지 못하지만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여 주님을 자랑하고 선전하기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 닮기를 소원하고 자기를 포기하고 주님을 높이는 생활을 연습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받은 은사를 분명히 하고 직임에 전심전력하라고 권면했습니다.(딤전 4:15-16) 이것처럼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직분자들은 구원의 도리를 바로 알고 그 은혜에 감사하여 주어진 일에 전심전력하며 주님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는 구원의 확신에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선택하고 불러 구원하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에 대하여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핵심을 바로 알려줄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의 기초위에 자기 분야의 실력을 키워야 합니다. 예배 선교 교육 봉사 새가족 음악 재정 분야에서 협력하며 전문성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5. 바울은 갈 2:9에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과 같은 자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측근에서 더 많이 생각하고 경험하며 예수님을 섬긴 제자들입니다. 그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지탱했고 큰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우리교회의 직분자들은 우리교회를 세우는 기둥입니다. 이들의 수고와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 교회가 여기 있습니다. 주께서 여러분의 수고를 알아주시고 힘주시기 원합니다. 집사 권사 장로의 직임은 서열이나 계급이 아니라 주님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해 일을 분담한 것입니다. 기둥은 흔들리지 않아야 하고 자기 자리를 묵묵하게 지켜야 합니다. 서로 비교할 일도 없습니다. 집의 무게를 다 받쳐 들고도 견뎌내는 책임과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기둥이 흔들리면 집이 무너집니다. 우리를 보스톤중앙교회의 직분자로 세워주신 것은 교회를 든든하게 세워서 복음을 전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자리를 굳게 지키는 기둥이 되어야 합니다.

6. 교회는 협력으로 세워집니다. 롬 12장의 말씀처럼 많은 지체가 한 몸을 이룹니다. 이처럼 다양한 은사를 가진 성도들이 협력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엡 2:20-22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기초가 되고 우리는 그 위에 세워진 기둥으로 서로 연결되어 하나님이 거하는 집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공동체 훈련도 필요하고 서로에게 대한 책임도 중요합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행해야 합니다. 서로 존중하고 화목해야 합니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 합니다(롬 12:11) 교회를 위한 협력은 열심히 모이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모든 일에 주인의식을 가진 일군이 되어주십시오. 그리고 정성껏 헌금하여 사역의 필요를 채우는 것입니다. 그래야 말씀에 든든히 서는 교회가 되고 복음을 전하는 영적 사역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7.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분은 성령님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는 성령과 함께 살며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이 그래서 필요합니다. 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순종하여 우리와 함께 하는 성령님을 기쁘게 하는 신앙생활이 되게 합시다. 말씀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생기고 내 판단으로 신앙생활을 하기 쉽습니다. 올해 교회목표를 ‘말씀으로 다시 새롭게’라고 정한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인도해 가도록 자기훈련에 힘써 한 해 만큼 더 성숙해지고 성장하는 새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 라는 칭찬을 듣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주의 은혜가 함께 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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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점검 (딤후 4:7-8) 송년주일

1. 지난 주간에 선교사 훈련을 함께 받고 인도네시아로 나갔던 친구가 지역 교회를 순회하다가 코로나에 걸려 세상을 떠난 일이 있었습니다. 누구라도 한번 가는 길이지만 마음을 나눈 친구의 죽음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했습니다. 전염병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그리고 기본적인 방역수칙을 지키는 일이 최선의 방책이 된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또 하나는 전염병에 대해 조심하는 것처럼 영적생활에 대한 각성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바이러스처럼 소리 없이 들어온 죄가 하나님께 대한 관심을 무디게 하고 영적인 죽음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예배드리지 않아도 답답한 것을 모르는 영적 마비 증세나 게으름에 빠지게 합니다. 그래서 영화 구경하듯 예배하지 않고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서 평가 받을 것을 생각하고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는 것이 영적 생활을 위한 방역대책입니다.

2. 사도바울은 자기가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그 경주를 마쳤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길을 잘 달렸다는 것입니다. 개종한 이후의 바울은 예수만을 위하여 살았고 자기에게 위임하여 준 사역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온갖 어려움과 매 맞음을 견디면서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죽음 앞에서 담대했고 후배 디모데에게 선한 싸움을 잘 하기를 권면했습니다. 성도는 죄와 어두움과 맞서고 자기 욕심과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영적 전쟁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싸움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깨어있는 신자라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너무 약한 존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자기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게 된다고(롬 7:19) 고민할 때가 있었지만 결국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다고(롬 8:2) 죄에 대한 승리를 고백했습니다. 부모가 되어 자식을 양육하고 가정을 살피는 것도 중요합니다. 직장에서 최선을 다하여 고용주를 유익하게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열심히 일하여 경제력을 갖는 일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열심히 사는 것만큼 방향이 올바로 설정되어야 합니다.

3.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믿는 것은 바른 방향을 갖게 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불러 열방을 구원할 제사장 나라로 세워주신 하나님의 부름과 기대를 나의 것으로 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이스라엘을 사용하여 열방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을 통하여 구원의 일을 계속하십니다. 갈 3:7-9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4. 마 13장에서 천국은 밭에 감춰진 보화를 발견하고 자기 소유를 다 팔아 밭을 산 사람과 같고 진주 장사가 값지고 좋은 진주를 만나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산 것과 같다고 설명했습니다. 천국은 이처럼 모든 것을 투자하여 살만큼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우리들은 마지막 날에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 듣기를 기대합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소망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악한 영들과 싸우고 마귀의 궤계를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습니다.(엡 6:10) 시편 90편에서 모세는 땅과 세계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계신 영원한 하나님을 노래했습니다. 하나님께는 천년의 시간도 순간처럼 지나가지만 우리는 70-80년의 시간을 살면서도 죄로 얼룩진 피곤한 인생을 산다고 고백했습니다. 죄를 드러내고 심판하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지 못한 존재이기에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의지할 수밖에 없음을 말했습니다. 모세는 우리 일생이 얼마나 짧은지를 아는 지혜로운 마음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5. 한해를 마감하는 때에 우리가 가져야 할 지혜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사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성공했으면 성공한대로 혹 실패했으면 그런대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붙들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온전하고 거룩하다고 인정해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가 주시는 구원을 확신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겸손히 엎드려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고 기도해주시는 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히 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처음으로 돌아가 하나님을 인정하는 믿음을 점검하고 조정합니다. 장거리 여행을 위해서 차량 점검을 하듯 말입니다.

6. 삼상 7장을 보면 블레셋의 폭정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서 사무엘이 취한 조치는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었습니다. 흐트러진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했습니다. 방치되었던 언약궤를 아비나답의 집에 모시고 거룩하게 구분된 제사장 엘리아살을 세워 지키게 했습니다. 그리고 어쩔 수없이 섬기던 바알과 아스다롯 이방 우상들을 제거했습니다. 그리하여 전심으로 하나님께 마음을 드릴 수 있게 했습니다. 모든 백성이 미스바에 모여서 금식하고 회개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했습니다. 자기 필요에 따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하여 순종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고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어지럽게 흩어 이스라엘이 적을 물리치고 안정을 도모하게 했습니다.

7. 어려운 시대를 사는 우리들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죄는 모양이라도 버리고 거룩하게 살며 불의와 타협하지 맙시다. 우리 몸을 의의 병기와 깨끗한 그릇으로 하나님께 드리기를 노력합시다.(롬 6:13) 더 나가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소원을 품고 삽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합니다.(딤전 2:4) 죄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주시고 하늘나라에 함께 앉게 한 것은 그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게 하려는 것입니다.(엡 2:5-7)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우리들이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드리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바울처럼 우리도 최선을 다해 믿음의 경주를 했다고 말할 수 있게 오늘을 살아갑시다. 주의 은혜가 모두에게 함께 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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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의 기쁨 (눅 2:1-20) 성탄주일

1.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는 번 존스가 1884년에 그린 ‘코페투아 왕과 거지 소녀’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은 영국의 오랜 민요를 소재로 하여 그렸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코페투아라는 아프리카의 왕은 나라 일에 바쁘기도 하고 여자에 대해서는 통 관심이 없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거리에서 한 거지 소녀를 만난 이후 그녀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이 일로 궁에서는 대신들의 반발이 거셌습니다. 왕은 고민하다가 결국그녀와의 사랑을 위해 왕좌를 내려놓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그림을 보면 왕은 그의 신분을 나타내는 화려한 왕관을 벗어 자기 무릎에 내려놓고 무기도 들지 않은 채 그녀의 발치에 앉아 그녀를 올려다보며 사랑을 구하고 있습니다. 모든 권력을 가진 왕이 계단 아래에서 소녀를 올려다보는 구도를 사용하여 사랑을 원하는 그의 마음을 그려냈습니다.

2. 신분차이가 나는 여인과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왕은 현자들에게 자문을 구합니다. 그러나 모두들 왕의 권세로 그녀를 취하면 된다고 대답했습니다. 아무도 왕의 권위에 반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왕은 그런 일방적이고 힘에 의한 사랑이 아니라 그녀의 마음이 자기에게 끌려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원했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어느 날 밤 왕은 남루한 거지차림으로 궁궐을 떠납니다. 마음에 품은 그 여인에게 찾아가 청혼을 합니다. 그녀와 같은 남루한 차림으로 말입니다. 덴마크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이 이야기를 가지고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설명했습니다. 성탄절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날입니다. 죄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죄 없는 하나님이 죄인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날입니다.

3. 성탄절은 그래서 기쁜 날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밝히 들어난 구주께서 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눅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구주 탄생은 죄인들을 구하려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이루어지는 순간이기에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땅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에게 복과 평화가 됩니다. 은총을 입은 사람은 그 사실을 듣고 믿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그의 오심은 구원이며 영생입니다. 그러나 믿지 못한 사람에게는 화가 되고 심판이 됩니다. 헤롯은 태어날 이스라엘의 왕의 소식에 긴장하고 경계하다가 베들레헴의 두 살 미만의 남자아이들을 다 죽이는 포악성을 보였습니다. 그에게는 예수 탄생의 소식은 두려움이었지 결코 기쁨이 될 수 없었습니다.

4. 복음은 믿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롬 1:16) 복음은 죄인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의를 알게 하고 의롭게 되는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으면 복음 그 자체가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요 3:16-19(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이 세상을 무척 사랑하셔서메하나밖에 없는 외아들마저 보내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기만 하면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아들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보내셨다. 그를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기 때문에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 심판의 근거는 빛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바로 그것이다.”

5. 하나님은 주권을 갖고 일하십니다. 로마황제 아구스도가 로마 영토 안에 사는 모든 사람의 인구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유다 지파에 속한 요셉도 베들레헴에 가서 호적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가 살던 갈릴리에서 베들레헴은 200키로 정도의 거리이지만 당시의 교통수단으로는 열흘 넘게 걸리는 거리였고 더구나 임신한 마리아를 데리고 가야하는 긴 여행이었습니다. 요셉은 인구조사에 참여하려고 베들레헴으로 갔지만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탄생하기 전 700년 전에 미가 선지자는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을 예언했습니다.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메시아 약속을 이루려고 마리아와 요셉을 베들레헴으로 가게 했습니다.

6. 하나님은 천사를 통하여 마리아와 요셉에게 성령으로 잉태하게 될 예수에 대하여 알려주신 것처럼 들에서 양치는 목자들에게 천사들을 통하여 구주 탄생의 소식을 먼저 전해주었습니다. 부자나 권세 있는 사람이 아닌 평범하고 가난한 목자들에게 먼저 알려주신 것도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그들은 예물도 준비하지도 못했고 스스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지만 천사의 인도로 탄생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은혜입니다. 베들레헴에 도착한 목자들은 천사의 말대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를 보고 그리스도 주이심을 알아차렸습니다. 목자들은 천사들이 전해준 구주탄생의 소식을 들은 대로 전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약속인 메시아가 드디어 세상에 오셨음을 공개적으로 드러냈습니다.

7. 베들레헴은 빵집이라는 말입니다. 그 빵집에서 구주가 태어나 모든 사람으로 생명을 얻게 했다면 오늘 교회는 죄인들이 회개하고 다시 살게 하는 영의 음식을 제공하는 빵집이 되어야 합니다. 천사들이 전해준 복음의 기쁜 소식은 구주 탄생의 소식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이 약속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의 살과 피를 먹고 그가 주시는 영생을 얻었습니다. 이제는 생명을 얻게 하는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고픈 사람들과 함께 나눠야 할 차례입니다. 목자들이 구주 탄생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했듯이 우리도 구원의 감격을 공개적으로 들어내 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만나게 해야 하겠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8. 창세전부터 우리를 계획하신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요셉을 베들레헴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에 있게 했습니다. 이 교회를 통하여 주님을 알게 하셨고 구원의 기쁨을 맛보게 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용하여 이 시대의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을 구원하기 원합니다. 일상에서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나누는 일은 복음을 전하는 통로가 됩니다.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복된 성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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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기쁨을 누리자 (요 1:29-34, 살전 5:16-18)

1. 요 1:6-8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요한복음은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도록 하나님께서 세례요한을 보냈다고 소개합니다. 세례요한은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로 예수님보다 6개월 일찍 태어났습니다. 그는 자기가 제사장이 되어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고 광야로 들어가 살았으며 약대 털옷을 입고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금욕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서른 살이 되자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는 자기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2. 사람들은 요한의 사역을 보고 그가 메시아인가 하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은 메시아가 아니고 이사야가 말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말했습니다.(요 1:23)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뒤에 오시는 자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것이며 자기는 그분의 신을 들고 다닐 만한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고 자기를 소개했고 그리스도는 흥하여야 하고 자기는 쇠해야 한다(요 3:30)고 자기 자리를 지켰습니다. 요 1:31에서는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라고 말하며 자기가 세례를 베푸는 이유를 메시아를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대로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성령께서 그 위에 임재 하는 것을 보고 그가 메시아임을 확신하고 공개적으로 증거 했습니다.(요 1:32-34)

3. 세례요한은 1:29절에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출애굽을 가능하게 했던 유월절 희생양처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희생양이 되어 피 흘림으로 죄인들이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을 알렸습니다. 자기에게 세례를 명령하신 하나님이 누구에게든지 성령이 머무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성령으로 세례를 줄 능력의 주님이라는 것을 확신했고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메시아라는 사실을 증언했습니다.(1:34)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고 주님의 은혜의 해와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했습니다.(사 61:1-2) 이런 사역의 열매로 그가 메시아라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4. 창세기 3:15에서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는 메시아가 마귀의 일을 멸하고 죄인들을 구원해 주실 것을 약속했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포기하지 않았고 아들을 내주시어 구원을 받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긍휼과 자비가 풍성한 분이라는 것을 시내산에서 알려주셨습니다. 출 34:4-7 “모세가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그 두 돌 판을 손에 들고 여호와의 명령대로 시내 산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실새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5. 하나님은 죄를 묵인하지 못하고 반드시 벌해야 하는 공의로운 분이지만 죄인들을 위하여 자기 아들을 희생시켜 구원할 만큼 사람들을 사랑하는 분입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분입니다. 죄인들이 회개하고 용서 받기를 기뻐하십니다. 용서받은 죄인들이 하나님의 의에 참여하도록(롬 3:21-28) 허락해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의는 우리의 노력이나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 2:8)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의 죄를 깊은 바다에 던져버립니다.(미 7:19), 안개같이 사라지게 합니다.(사 44:22) 주님의 등 뒤로 던져버립니다.(사 38:17) 죄를 용서하고는 그 법조문들을 지우고 제하여 버리고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립니다.(골 2:14), 한번 용서한 죄는 다시 기억도 하지 않습니다.(히 10:17, 렘 31:34)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과를 옮겨버립니다.(시 103:12)

6. 하나님이 우리를 그런 자비와 사랑으로 돌보셨고 구원하여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신랑에게 영화로운 관을 씌워주고 신부를 패물로 단장시키듯이 우리를 그렇게 귀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사 61:10)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게 되었습니다.(롬 5:1-2)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이어받을 후사로 부르셨습니다.(갈 4:7) 어떤 두려움 앞에서도 하나님이 나의 힘과 구원이라고 노래할 수 있게 도와주십니다.(사 12:3) 그러니 우리가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그 은혜를 경험한 성도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정금보다 귀하고 꿀보다 달라는 것을 알고(시 19:10) 하나님을 더 깊이 알려고 힘써 노력합니다.(호 6:3) 쉬지 않고 기도하며 주님과 교제하고 모든 상황에서 항상 감사하며 기뻐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힘씁니다.(살전 5:16-18)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삽니다(고전 10:31) 그리고 하나님께 용서받은 사람답게 또 다른 사람들을 품고 화목을 이루고 서로 용서합니다.

7. 대림절 셋째 주일을 보내며 사무총회를 엽니다. 이 날은 무엇보다 교회를 통하여 경험한 구원의 기쁨을 다시 확인하고 감사하는 날입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주의 크신 은혜라는 것과 우리의 힘과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으로 한 해를 살았음을 돌아보는 날입니다. 어려운 시기이지만 오히려 더 뜨겁게 사랑하고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함께 모이지 못했지만 그러기에 더 예배의 필요와 교제의 중요성을 실감했습니다. 그러니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마음껏 누리고 감사하며 주 안에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새해에도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합시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을 흠이 없이 보전하여 주시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쁨으로 맞게 할 것입니다.(살전 5:23-24)

8. 시 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빌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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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기다리며 (사 40:1-11, 벧후 3:8–14)

1.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는 신실하신 분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자손과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은 이삭과 야곱과 요셉을 통하여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애굽에서 살며 민족을 형성했고 더 이상 그곳에 살 수 없게 되자 모세를 통하여 가나안으로 이주시켰습니다.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로 살지 못하고 우상을 섬기자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했습니다. 여호와의 날은 악을 심판하고 하나님의 뜻에 합한 소수의 남은 자를 구원하는 날입니다. 이스라엘을 심판하면서도 조상들과 맺은 약속 때문에 소수의 남은 자들을 통하여 구원 역사를 이어갔고 메시아를 보내 구원을 이루려는 계획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강림은 메시아의 약속의 성취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초림이나 앞으로 있을 재림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일이고 하나님이 정한 때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2.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아주 부드럽게 마음에 닿도록 말하고 백성을 위로하라고 합니다.(사 40:1-2) 하나님은 택한 백성들을 그렇게 존중하고 위로하며 회복시키는 분입니다. 죄의 대가를 충분히 치렀기에 이제 그들을 용서하고 포로 생활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여기 내 백성이라는 표현은 조상들과 맺은 언약관계가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회복시킬 때가 되었으니 이제는 소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바벨론 포로기 후의 회복을 약속하신 말씀이고 메시야를 통하여 주실 회복을 예언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의 행위가 완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메시아를 통해 주시는 은혜입니다. 우리들도 이런 은혜로 구원을 받고 영적회복을 얻었습니다.

3. 3절의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는 말씀은 거룩한 하나님이 일할 수 있도록 거룩함으로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누가는 이사야가 말한 주의 길을 준비하는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를 세례요한으로 연결시켰습니다.(눅 3:4-6) 우리들도 성령께서 거하는 거룩한 집이 되도록 몸과 마음을 거룩하게 관리해야 할 것입니다. 6절에서는 모든 육체는 풀과 같은 일시적인 존재이며 하나님만이 영원하신 주권자이고 그의 말씀이 영원하다는 것을 외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는 진리이고 영원합니다. 천지가 없어져도 변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질 그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 말씀을 적용해야 합니다. 9절에서는 높은 산에 올라가서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고 외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신실하게 행하시는 구원을 믿고 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강한 팔로 백성들을 다스리고 마치 어린 양을 품고 돌보는 목자처럼 그의 백성들을 보호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 말하는 자의 소리 여호와의 길을 준비하는 자가 누구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선지자들, 소수의 남은 자들, 세례요한, 이 시대의 구원받은 성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듣고 믿고 전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4. 계속되는 위로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사 40:28-31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예수 믿는 우리는 이런 위로와 약속가운데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신약 성도들에게 주시는 구원을 위한 약속입니다. 벧후 3;13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게 되는 그 날을 기대하고 준비하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들은 것처럼 우리는 재림을 통하여 완성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성경을 통하여 믿습니다.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의 모든 일들이 다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는 큰 두려움의 날이고 심판의 날이지만 준비된 성도에게는 기쁨과 소망의 날이 될 것입니다.

5. 재림이 없다고 가르치는 교회안의 거짓선생들에게 베드로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지었고 또 하나님이 홍수로 심판했다는 것을 애써 무시하는 것이라고 반박했습니다.(벧후 3:5-6) 재림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십자가 대속의 죽음이나 부활도 인정할리 없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시간이 우리의 것과 다르다는 것으로 설명합니다.(벧후 3:8) 이천년 동안 재림이 없었으니 앞으로도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면 우리의 좁은 시간 개념으로 하나님의 시간을 판단하는 것이 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 이천년은 순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높으며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기 때문입니다.(사 55:9) 그리고 재림이 지연되는 이유는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선한 목적 때문이라고 변증합니다.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딤전 2:4) 재림이 오늘까지 지연되는 것은 죄인들이 회개하여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요 3:16)

6. 그러므로 우리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워야 합니다.(마 24:32-33)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가 나오면 여름이 가깝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우리가 처한 재난과 전염병의 위협 속에서 하나님의 시간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배교하는 일이 생기고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성도들을 미혹합니다. 노아의 때와 소돔과 고모라의 때처럼 죄가 관영하고 사람들의 마음이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망하게 했던 하나님 외의 우상숭배가 성행하는 때입니다. 전쟁과 기근과 지진의 소식을 듣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아주 가까이 문 앞에 이르렀다는 신호들입니다. 이런 징조를 볼 때에 우리는 깨어서 그 날을 준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7. 화산이 폭발할 때에 예측을 믿고 대피한 사람은 목숨을 구하지만 거기 머물러있는 사람은 생명을 보장받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은 자기 선택에 딸린 일입니다. 메시아로 탄생하신 예수님을 멀리서부터 찾아와 경배한 사람이 있었는가하면 헤롯처럼 견제하고 죽이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세리와 창녀처럼 겸손히 은혜를 구한 자가 있었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자기의 의를 주장하며 예수님을 판단하고 죽이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주께서 권능가운데 오실 때에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 심판 받을 자와 상급 받을 자를 구분하실 것입니다.(마 25:32-33) 그래서 깨어있어야 합니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는(롬 12:11) 준비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해주실 주님을 기다리며 위로와 힘을 얻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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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성취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사 64:1-12, 막 13:32-37)

1. 이사야 64장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간절하고 구체적인 기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고 피로 약속했지만 지키지 못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상숭배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시리아와 북 이스라엘의 동맹으로 남 유다는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이사야는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결코 굳건히 서지 못하리라.”(사 7:9)고 설교했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선배들은 시 99:1-3에서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흔들릴 것이로다. 시온에 계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고 모든 민족보다 높으시도다.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니 그는 거룩하심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크고 두려운 분이며 주권을 가지고 다스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은 죄를 인정하고 그 하나님이 친히 강림하여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2. 사 64:1 “원하건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 앞에서 산들이 진동하기를 불이 섶을 사르며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로 주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 하늘을 가르고 산을 진동시킬 수 있는 창조주이며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원수를 향해 그런 능력의 손을 뻗어서 자기들을 구원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역사를 다스리는 분이라는 것을 이방나라도 알 수 있도록 간섭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자기들은 우상숭배 때문에 거룩함을 잃고 부정한 자가 되었으며 그들의 의는 더러운 옷처럼 퇴색해 버렸고 마른 잎사귀처럼 시들어버렸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죄의 결과로 나라의 주권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진노하셔서 얼굴을 감춘 것처럼 느꼈기에 속히 구원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사 64:5-6)

3. 토기장이의 손에 들려진 진흙과 같은 존재라는 표현에서 하나님의 선처를 바라는 간절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를 주장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뿐입니다. 혹 하나님 앞에 내세울만한 의가 있다면 그것은 바리새인들의 회칠한 무덤처럼 자신을 자랑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기에 이사야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여호와여, 너무 분노하지 마시오며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마시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사 64:8-9)

4. 하나님을 예배하던 성전이 무너져버리고 삶의 터전이 황폐해져 버린 것을 한탄하며 속히 도와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주를 찬송하던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불에 탔으며 우리가 즐거워하던 곳이 다 황폐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일이 이러하거늘 주께서 아직도 가만히 계시려 하시나이까. 주께서 아직도 잠잠하시고 우리에게 심한 괴로움을 받게 하시려나이까.”(사 64:11-12)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을 만날 때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은혜입니다. 겸손히 주의 은혜를 구하고 엎드리면 선하고 신실하신 하나님은 자녀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5. 그들의 간절한 기도는 시간이 흐르면서 메시아를 기다리는 믿음으로 발전했습니다. 후에 나라를 바벨론에 빼앗기고 포로가 되었을 때에도 메시아가 나타나 잃어버린 다윗 왕조의 영광을 되찾아 주기를 바랐고 선지자들도 그 회복을 예언했습니다. 이사야는 7장 14절에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미리 예언했습니다. 문제 속에서 두려워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친히 그의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을 약속하며 위로와 확신을 주었습니다. 사 40: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모든 문제의 해결은 죄의 용서와 회복과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 어떤 문제라도 임마누엘의 믿음으로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6. 마태는 약속의 성취로 오신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1-23) 예수 그리스도는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아이며 약속의 성취로 오신 분입니다. 그는 구원을 이루기 위해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 6-8) 그가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와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고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가신 것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려는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7. 히 7:25 “그러므로 그는 또한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끝까지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계셔 그들을 위하여 중보하심이라.” 우리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성도들을 위해서 중보하십니다. 요한복음 17장에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 옆에서 동일한 기도를 우리를 위하여 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중보와 성령의 일하심으로 우리가 은혜 안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능력으로 우리를 채워주시고(고후 12:9),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해주시고(요 17:15), 죄와 시험에서 지켜주십니다.(요 17:15)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할 때에 죄를 용서해 주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합니다.(요일 1:9) 복음의 증인으로 살도록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주십니다.(행 1:8) 하나님의 맏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합니다.(롬 8:29)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와주십니다.(히 2:18) 그리고 주님 안에서 영원히 거하게 해주십니다.(요 17:22, 엡 2:6)

8. 구약시대의 선배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며 그의 강림을 기다리며 한평생을 살았습니다.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릅니다. 그리고 그의 다시 오심을 기다립니다. 주께서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다시 오실 것이고 천사들을 보내어 택한 성도들을 사방에서 모을 것을 기다립니다(막 13:27) 우리들이 그 혼인잔치의 기쁨을 누리며 주님과 영원히 살게 될 것을 믿고 기다립니다.(살전 4:17) 대림절을 맞아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대속의 죽음을 통하여 이룬 구원에 감사하고 재림의 소망을 다시 점검하기 원합니다. 재림의 날과 시간은 하늘 아버지만 아는 것이고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때에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재림은 분명 우리의 기쁨이며 소망입니다. 주님을 대면하여 만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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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목제를 드리는 자세 (레 7:11-21, 신 16:13-17) 추수감사절

1. 레위기를 보면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화목제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번제나 소제가 아침과 저녁에 성소에서 의무적으로 드려야 하는 제사였다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목을 위해 드리는 화목제는 선택적인 제사였습니다. 화목제를 드리는 사람이 어떤 의미로 제사를 드리는가에 따라 감사제, 서원제, 자원제로 구분됩니다. 즉, 베풀어주신 복과 구원에 감사하여 드리는 감사제, 기도가 응답되었거나 이루어질 것을 믿고 믿음으로 드리는 서원제, 그리고 특별한 조건은 없지만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는 의미로 드리는 자원제(낙헌제)가 그것입니다.

2. 화목제로 드리는 제물은 소나 양이나 염소를 암수 구분 없이 드렸고 다른 제사와는 다르게 유교병도 드릴 수 있었습니다. 콩팥과 기름은 태워 하나님께 드리고 가슴과 우편 뒷다리는 제사장에게 주고 나머지는 제사하는 사람이 식구들과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습니다. 음식을 나누어 먹음으로 화해와 일치와 친교를 이루도록 하는 축제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화목제물로 드림으로(요일4:10)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고 교통하게 하신 것을 감사하게 됩니다. 화목제로 드린 제물은 정한 시간에 빨리 나누어 먹어야 했습니다. 제사의 종류에 따라 차이가 나지만 최대 삼일 안에 먹도록 했습니다. 남는 것은 불로 태워야 했고 기한을 넘겨 음식을 먹으면 그것이 죄가 되었습니다.(레 7:18)

3.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고 약속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세가 열두 돌을 취하여 기둥을 세우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립니다. 모세가 언약서를 낭독하자 백성들은 그 말씀대로 살겠다고 약속합니다. 모세가 화목제물의 피를 받아 반은 제단에 뿌리고 나머지는 백성들에게 뿌리며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피라고 선언했습니다.(출 24:4-8) 예수님이 성만찬을 제정하시며 “이것은 너희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마 26:28)라고 했습니다. 누가는 이것을 새 언약의 피라고 했습니다.(눅 22:20)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과 성도들을 새로운 언약관계로 이어지게 합니다. 성만찬은 우리가 주님의 식탁에서 함께 먹으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고 동시에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음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마치 화목제물을 나누어 먹던 구약 성도들처럼 말입니다.

4. 화목제물을 먹는 사람들은 정결해야 했습니다. 제물로 드린 고기가 부정한 것에 접촉되면 그것을 먹지 말고 불살라야 했습니다. 몸이 부정하거나 부정한 것을 만진 사람이 화목제물의 음식을 먹으면 그 사람은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졌습니다.(레 7:20) 하나님이 기뻐하는 거룩한 예배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는 거룩한 생활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그래서 중요하고 그 생활의 열매를 가지고 예배하고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신 16:13-17의 초막절 절기에 대한 말씀을 보아도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신 16:13)라며 이웃과 함께 기뻐하는 예배를 언급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물을 드려야 했고 욕심 부리지 말고 그것을 자기 식솔뿐 아니라 나그네와 소외된 이웃들과도 함께 나누어야 했습니다.

5. 거룩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기대에 맞게 구별된 것을 말합니다. 사회 약자들과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이 별것 아닌 것 같은데 하나님은 그것을 거룩한 행위로 구별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표시이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거룩한 일이며 하나님의 질서를 따르는 정의로운 일입니다. 자기 욕심대로 살지 않고 함께 나눔으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욕심과 교만 때문에 이 질서가 무너지자 하나님은 그들이 드리는 제사를 역겹게 여기고 더 이상 받지 않았습니다.(사 1:11-14) 초대교회 성도들도 성령으로 충만하여 자기 재산을 자기만을 위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서로의 필요를 따라 나누었습니다. 자기 재산을 팔아서 교회에 헌납했고 사도들의 발아래 갖다 놓았으며 사도들은 필요한 사람들에게 고루 나눠주었습니다. 이 일이 하나님께 향한 거룩한 일이 되었고 이렇게 거룩하게 구별된 헌신이 복음을 확산시키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6. 신 16:17은 “각 사람이 네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라고 가르칩니다. 이웃과의 나눔이나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자기 욕심을 포기하는 것이며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의 표시입니다. 하나님이 공급하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면 자기 수중의 것을 절대 나눌 수 없습니다. 성년이 된 유대인들은 일 년에 세 차례 유월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성전에 올라가 제사를 드렸는데 반드시 정성을 다하여 제물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는 바울의 가르침에서도 나타나듯이 억지로나 인색함으로 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드리는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고후 9:7) 하나님이 주신 것이 없으면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을 믿고 드리면 더 좋은 것을 받습니다. 예배는 우리를 먹이고 인도하는 좋은 아버지 하나님을 경험하는 신비입니다. 우리의 것을 나누어 다른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는 구제나 선교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입니다. 나누어줌으로 더 풍성하게 되는 하나님의 공급원칙을 배우는 길입니다.

7.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드린 믿음의 표시는 감사절을 지키는 우리들이 배워야 할 부분입니다. 강대국 앗수르와 애굽의 힘겨루기에 지쳤고 새롭게 등장하는 바벨론의 위협 앞에서 작은 나라 이스라엘은 풍전등화였습니다. 바벨론의 침공에 대항 할 수없는 비참한 현실 앞에서 선지자는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며 뼈가 썩는 것 같고 온 몸이 떨렸습니다.(합 3:16) 그런 가운데서 의지적으로 부르짖는 하박국의 기도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8)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 앞에서 두렵고 떨리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시키고 구원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표시한 것입니다.

8. 추수감사예배를 드리는 우리에게도 이런 고백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금가지 건강하고 풍요롭게 하신 은혜를 세어보며 감사합니다. 그렇지 못한 상황이라도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믿고 앞당겨 감사합니다. 영혼이 잘 되고 범사를 주 안에서 형통하게 했으니 감사합니다. 코로나로 많은 사람이 두려워하지만 하나님 안에서의 평강을 노래하고 감사하는 믿음을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그 감격과 기쁨으로 이웃을 섬기는 가정과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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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척도가 되는 감사 (신 8:1-10, 눅 17:11-19)

1. 예수 믿는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새 생명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합니다. 때마다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감사합니다. 우리가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게 하심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세례를 통하여 자신에 대하여 죽고 주님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교회 앞에서 고백하고 또 성찬을 먹음으로 주님과 하나가 되었음을 확인합니다. 예배와 절기마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합니다.

2. 레위기 23장을 보면 가나안에 들어가 정착하여 살 때에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 드리도록 했습니다. 첫 해만이 아니라 매년 그리고 대를 이어 지킬 규례로 정해 주셨습니다. 처음 것을 드리는 것은 그 뒤를 따르는 모든 것도 하나님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또 가을 추수가 끝나면 곡식을 다 저장한 후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수장절을 지키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절기를 통하여 하나님 백성으로의 정체성을 점검하고 감사하게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국교회의 맥추절이 잘못 제정되었다느니 추수감사절은 미국의 절기라고 비판하며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십일조도 구약의 율법이니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모임이나 예배까지도 필요하지 않게 됩니다.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으며 그 믿음을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공인하는 것이 감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3. 누가복음은 열 명의 문둥이가 예수님을 만나 치유 받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제사장에게 보내 깨끗하다고 인정받게 합니다. 그들은 가는 중에 병이 나은 것을 알게 되었고 그중의 한 사마리아 사람은 즉시 예수님께로 돌아와 감사를 표시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아홉 사람은 자기 길이 바빠 감사할 기회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머지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고 묻습니다.(눅 17:11-19) 그들에게서 감사를 원하신 것은 그들의 믿음을 점검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행하신 치유의 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공개적으로 자랑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기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돌아와 감사를 표시한 그 사람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라고 더 큰 복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치유와 구원을 확실하게 하는 선언이기도 하고 자기 삶의 현장으로 가서 복이 되라는 파송이기도 합니다.

4. 성도가 드리는 감사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믿음의 표시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을 배가시키고 다른 사람에게까지 나누어주는 통로가 됩니다. 성도는 먼저 경험한 치유와 구원을 선전하고 나누어 주는 사람입니다.(엡 2:7) 그러므로 감사는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풍성하게 채워준다는 것을(빌 4:19) 경험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의 감격을 맛보는 영적인 것은 물론이고 우리 삶의 필요를 위한 기도에 응답하시는 주님을 경험한 사람의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부요할 때나 궁핍할 때, 풍요로울 때는 물론이고 부족할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실하심을 바라보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옥에 갇혀서도 오히려 감사했고 어떤 경우에도 자족했으며 이런 능력을 주시는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했습니다.(빌 4:13)

5. 신명기 8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게 한 것은 그들을 겸손하게 낮추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게 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만나를 통하여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존재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신 8:3) 그러니 가나안에 들어가 풍요롭게 먹고 아름다운 집에 정착하며 지낼 때 하나님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독사와 전갈이 있는 무서운 광야에서 보호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고 바위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나가서 그들을 제사장 나라로 세워 열방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부름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6. 감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공개적으로 알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분명하게 하는 일입니다. 올 한해 우리 모두가 힘든 상황에서 여기까지 견뎌왔습니다. 자기 힘과 능력으로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일 것입니다. 스스로 건강관리를 하지만 이 극심한 전염병의 위험에서 우리를 지켜주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우리 주변에 수천의 사람들이 확진으로 판명되고 병원도 병상이 모자랄 지경입니다. 아직까지 우리들은 건강하고 문제가 없지만 그것도 장담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아래 겸손히 엎디고 우리의 내일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호흡하는 오늘에 감사하며 최선을 대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며 그 믿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7. 풍랑을 만나 고생하던 베드로가 주님을 만나서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마 14:28)”라고 소리쳤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오라고 하자마자 베드로는 물위로 뛰어내렸습니다. 풍랑을 바라보거나 의식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여전히 바람은 거세고 물결은 높았지만 주님을 바라보는 신뢰와 믿음이 그것들을 덮어버렸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번지점프를 하는 사람들은 높은 곳에 올라가 자신의 몸에 고무줄을 묶고 거침없이 뛰어내립니다. 안전장치를 신뢰하기에 위험한 그 일을 오히려 스릴로 만끽합니다. 어린 아이들이 부모의 품에 거침없이 몸을 던지는 것도 부모가 자신을 안전하게 받아 줄 것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이런 것입니다.

8. 그 어느 때보다 힘들고 어려운 때를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것도 지나갈 것이고 하나님은 이 시간도 다스리는 주권자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를 보호하고 인도하신 하나님이 그렇게 함께 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믿음을 점검하고 하나님의 기대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살며 그 믿음을 의지적인 감사로 표시해야 합니다. 다음 주일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오늘까지 보호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풍성한 감사로 우리의 믿음을 증명해 보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조금 버겁도록 최선을 다하는 감사를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스스로 확인하고 또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각오도 새롭게 하는 기회로 삼으십시오.

9.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사 26:4)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시 73:2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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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찾으라 (암 5:18–27, 마 25:1-13)

1. 아모스가 활동하던 때는 북 왕국 이스라엘이 여로보암 2세의 통치로 번영을 누리던 때입니다.(왕하 14:23-29). 그럼에도 하나님이 요구하는 정의와 공의는 찾아볼 수 없는 타락한 시기였습니다. 돈을 받고 의인을 팔고 신 한 켤레 값에 가난한 자를 매매하기도 했습니다(암 2:6). 약한 자를 짓밟는가 하면 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자를 취할 만큼 도덕적인 부패가 극에 달했습니다.(암 2:7). 여호와의 말씀을 저버리고 하나님이 만든 제도를 따르지 않았습니다.(암 2:12).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하게 된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암 2:13-16).

2. 그들은 먹기를 탐하고 물질과 세상적인 쾌락을 추구했습니다. 사치하고 무절제한 생활을 했으며 힘없는 자를 학대하고 가난한 자를 압제하고 술을 좋아했습니다(암 4:1-2). 물질적 번영에 취해 영적 판단력은 오히려 둔해졌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지 않았으며 외국인 체류자들의 한숨 소리가 가득했습니다. 벧엘은 아브라함이 희생제물을 드린 곳이고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장소이지만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을 위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지도자들은 사치와 허영으로 가득했고 권력을 남용하며 백성들의 피를 빨아 그들의 궁을 상아로 장식했습니다. 제사 드리는 일은 열심히 했지만 도덕적으로 부패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재난과 전염병과 전쟁을 통하여 그들을 깨우쳤지만 돌이키지 않았고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암 4:6-13).

3. 그러면서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암 5:14)라고 자위했습니다. 그들의 종교적 열심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장해 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십일조와 감사제물을 드리고 번제나 소제를 드리고 각종 절기를 지키며 예배했지만 그들의 생활에서는 불의와 불법을 함께 행하고 있었기에 하나님은 그들의 제사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5:21-27). 하나님은 그들의 절기를 미워하고 성회를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번제나 소제도 받지 않겠다고 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주변 강대국을 사용하여 그들을 깨뜨리려고 작정했습니다. 그들의 처소는 폐허가 되어 아무도 찾지 않을 것이고 들짐승이 기거하는 황폐한 곳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들이 기다리던 여호와의 날은 더 이상 구원의 날이 아니라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아모스는 그날을 빛이 없는 어둠의 날이라고 했습니다.(암 5:18, 20)

4. 하나님께서는 예배보다 순종을 원하셨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 15:22)는 것은 형식적인 예배보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삶의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암 5:25절)라고 되묻는 것은 광야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했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보호하셨다는 것을 기억하고 예배와 함께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라는 것입니다.(암 5:24) 자기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산 제물로 드리는 영적 예배(롬 12:1)를 요구한 것입니다. 악한 세대를 따라가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그래서 필요합니다. 성품의 변화와 생활의 열매는 없으면서 형식적인 예배행위로 자기의 불합리와 죄를 덮으려는 종교적인 열심을 경계해야 합니다.

5.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면서 악에서 떠나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외쳤습니다. 요엘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욜 2:32)고 말했고, 하박국도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고 했습니다. 렘 7:3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살게 하리라.” 했습니다. 아모스도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라며 하나님을 찾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외쳤습니다.(암 5:4, 6)

6.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으면서 자기 욕심을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는 종교적 허상을 깨뜨려야 합니다. 예배는 귀하게 여기면서 일상은 자기 욕심대로 사는 것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약자를 돌보며 정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마르지 않는 물처럼 정의로 가득하게 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의를 행하라고 했습니다.(암 5:24)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이웃과의 바른 관계에서 증명되어야 합니다. 이웃의 필요는 외면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가르친 요한의 말과 같습니다.(요일 4:20) 예수님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계명이라고 말씀했습니다.(마 22:37-39)

7. 마태복음에서는 신랑을 기다리는 비유를 통하여 재림에 대한 준비를 가르칩니다.(마 25:1-4) 구원받은 사람은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빛입니다.(마 5:14) 그 빛을 비추기 위해서 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넉넉한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기름이 떨어져 애원하는 처녀들은 뒤늦게 파는 자들에게 가서 사야 했습니다. 그렇게 수고하고도 정작 잔치 자리에는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기름은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이고 구원받은 자의 선한 행위이며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성령 충만한 생활입니다. 이것들은 누구에게서 얻어내거나 함께 나누어 사용할 수 있는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뒤늦게 어느 날 갑자기 준비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은혜의 선물이며(엡 2:8) 구원받은 감격으로 주님과 지속적으로 교제하며 주님을 닮아가는 훈련에서 얻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종교행위로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성령의 내주하심과 인도하심을 따라 기도하며 말씀대로 순종할 때 가능합니다. 오늘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이고 하나님을 찾고 결단해야 하는 은혜의 때입니다.(고후 6:2)

8. 하나님을 찾는 일에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고 영적 싸움을 하는 전투자세가 필요합니다.(엡 6:11) 형식적인 종교 활동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나 죄에서 떠나는 일이 싸움처럼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 영적 예배생활의 열매는 그리스도를 닮아 성품이 변하는 것으로 측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엡 4:13-15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닮는 일에 진전이 있도록 노력합시다. 이것이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어려운 때이지만 더욱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롬 12:11)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가정과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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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세워져 가는 교회 (엡 2:19-22 계 7:9-17)

1. 딛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는 일에 사용하는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 뿐 아니라 세상 나라와 불신자들의 생활까지도 주관하는 분입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로 죄를 범할 때에 주변 강대국을 사용하여 그들을 깨닫게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세상 나라와 왕들이 교만하여지면 하나님의 주권으로 그들을 다스렸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행하는 구원의 일을 세상에 알리려고 오늘도 성도들과 교회를 사용합니다.

2.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모였고 사도들이 가르치는 부활의 복음을 믿고 부흥의 열매를 맛보았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들은 날마다 모여 말씀을 배우고 서로 사랑하며 돌보았습니다. 교회생활이 얼마나 재미있었으면 주변 사람들이 부러워서 자기 발로 찾아올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불어 닥친 핍박은 성도들을 다른 이방 지역으로 흩어지게 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열정은 식지 않았고 새로 정착한 그곳에서도 성령에 이끌려 예배하고 생활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방 지역에 세워진 안디옥교회는 이렇게 해서 생긴 교회입니다. 아직 약하고 자기 교회를 위해서 일군이 필요한 상태였지만 성령의 지시하심을 따라 바울과 바나바를 이방선교를 위한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그 결과 소아시아 여러 지역에 이방인 개종자를 위한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3. 에베소는 25만 명이 사는 큰 도시였고 주변 나라의 사람과 생필품들이 모이는 소아시아의 관문역할을 하는 상업도시였습니다. 2만 명이나 들어가는 대형 극장이 있고 아데미 여신을 섬기는 신전도 있었습니다. 숙박시설과 위락시설이 생기고 마술과 같은 볼거리와 아데미 신전의 모형과 여신상을 만들어 파는 산업이 발달했습니다. 신전 창녀들이 많아서 우상숭배와 함께 음행이 성행했습니다. 바울과 그의 일행은 2차 여행 때 이곳을 잠시 방문했고 3차 여행 때 본격적인 사역을 펼쳤습니다.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한 채 신앙생활을 하던 에베소 교인들에게 기도하여 성령을 받게 했습니다. 두란노 서원을 세워 집중하여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우상을 만들어 수익을 올리던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힐 만큼 복음의 영향력은 대단했습니다. 성령의 능력과 말씀위에 에베소 교회는 성장했습니다.

4. 에베소와 인근 교회를 위해서 쓴 바울의 편지인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구원과 교회에 대하여 자상하게 설명합니다. 창세전에 우리를 선택하여 주신 하나님의 계획을 말하고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설명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기업(1:11)이고 그리스도의 몸(1:23)입니다. 하나님이 만든 작품(2:10)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사람들(2:15)의 모임입니다. 하나님의 가족(2:19)이며 하나님이 거하는 거룩한 성전(2:21)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여러 직분을 통하여 서로 협력하고 봉사하고 공동체를 이루어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갑니다.(4:12,16) 하나님나라의 상속자(3:6)로 그리스도의 신부(5:23-32)로 사단과 싸우는 하나님의 군사(6:11-18)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의 일을 선전하고 찬송해야 할 책임이 있는 존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5. 하나님께서 양자 삼아주시고(1:5) 구원해주신 은혜에 감사(2:8)하기에 교회는 각자의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기를 힘씁니다. 가정에서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며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합니다.(6:4) 직장에서는 눈가림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일하고 서로 존중하며 주님께 하듯 합니다.(6:7) 여러 직분과 은사를 가지고 섬기면서도 서로에게 원망이 없이 일하며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를 만들어 갑니다.(2:22)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답게 자기가 받을 상급이 무엇인지를 확신하고 삽니다.(1:17-19) 하나님의 일을 선전하고 자랑하며(2:9) 그리스도로 옷 입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성장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4:15)

6. 사도 요한은 계시록에서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의 수고와 인내를 칭찬했습니다. 가난과 핍박 속에서도 말씀대로 살기 위하여 순종했고 스스로 사도라고 하는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들을 경계하며 교회의 순수성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계 2:4)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살피고 회개하고 다시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했습니다. 그리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촛대를 옮기겠다고 경고했기 때문입니다. 계 2:5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7. 교회는 주님의 말씀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라 세워졌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함께 만들어 가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배들에게 배운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고 다시 가르쳐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엡 2:20-22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이것이 우리가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신앙생활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 교회도 머릿돌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성령께서 거하는 하나의 집으로 완성되어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주님이 주인이 되게 하며(마 28:20) 함께 성장해 가야 합니다.

8. 사도 요한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한 목소리로 찬양하는 천국의 장엄한 모습을 전합니다. 계 7:9-10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어린 양의 피로 옷을 씻어 희게 한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 보좌가 있는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입니다. 목자 되신 주님께서 함께 하며 친히 생명수 샘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거기는 눈물도 없고 배고픔도 없으며 목마르지도 않고 환란을 당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여기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들도 잠시 후에는 거기서 주님을 대면하고 먼저 간 성도들과 함께 찬송할 것입니다. 이 소망이 분명하기에 어려움도 참으며 스스로를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요일 3: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우리 모두가 성령의 능력과 말씀으로 더 성숙하고 더 거룩한 교회로 세워져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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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자유를 누리자. (요 8:31-36)

1. 32절의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은 구원의 핵심에 대하여 말해줍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과 남의 종이 되어본 적이 없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기에 예수께서 자유를 언급하는 것에 거부감을 표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종교적인 오만함을 지적하고 그들도 여전히 죄의 권세에 묶인 종이기에 자유를 얻어야 함을 말했습니다. 위로부터 오신 빛이며 진리의 본체이며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스스로 말씀하지만 유대인들은 그를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범죄자로 낙인찍었습니다.

2. 자유란 어떤 사람이나 환경에 얽매인 것에서 놓임 받는 해방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자유는 어디에 구속될 필요가 없는 진정한 자유이며 원천적인 자유였습니다. 하나님이 금지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지 말라는 것을 제외하면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이었습니다.(창 2:17) 창조주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제외한 피조물로서 누릴 수 있는 참 자유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함께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적극적인 관계에서의 자유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창조하신 것들에게 이름을 지어줄 수 있는 창조 권한의 일부를 위임해 주셨고(창 2:20)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며 그것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창 1:26-28)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과 함께 생각을 나누고 함께 일하며 살아가는 자유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3. 타락은 이런 자유를 제한했습니다. 사단의 꼬임에 빠져서 하나님이 금한 과실을 따먹었습니다. 동기는 하나님처럼 되려는 교만이었습니다.(창 3:5) 피조물로서 창조주의 자리를 탐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말할 때마다 인간이 타락할 것을 미리 아는 전능한 하나님이 왜 선악과를 만들었는지를 질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자유는 죄를 선택할 수 있는 것까지를 포함한 책임을 동반하는 자유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로봇으로 만들지 않고 책임 있는 존재로 만들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씨 에스 루이스는 하나님께서는 자연 질서나 자유 의지를 파괴하면서까지 하나님 자신의 전능함을 과시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타라가할 이유도 없고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자유 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선택할 필요도 없는 로봇과 같은 일방적인 존재가 아니라 비록 고통이 있지만 여전히 인간 스스로 선택하고 판단할 수 있는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유는 자기 선택에 따르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4. 하나님을 떠난 죄인을 다시 회복시키려고 하나님은 구원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창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타락한 인간은 죄책감으로 하나님을 피했고 자기가 벌거벗은 것을 알게 되어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을 먼저 찾아오셨고 금방 말라버리는 나뭇잎 대신 가죽옷을 입혀주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을 약속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단의 권세를 깨뜨려버릴 승리를 약속해 주셨습니다. 짐승을 희생시켜 가죽옷을 입혀주신 것도 죄로부터 자유를 주기 위해서 희생양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5.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 죄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했습니다. 아담이 타락하여 잃어버린 기쁨과 참 자유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눅 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회복을 위해 세상에 오시어 구원의 일을 완성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롬 8:1)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옷 입은 성도들을 더 이상 죄 없다고 인정하고 양자로 받아주셨습니다.(롬 8:15)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워 주셨기에(골 1:22) 그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히 4:16)

6. 이 자유와 자녀의 특권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습니다. 진리는 건물과 같은 구조물들이 무너지지 않도록 떠받쳐 주는 것을 말합니다. 요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본체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에게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생명을 주십니다. 갈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엡 2:8-10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7.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 성도는 마음껏 자유를 누리고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갈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하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참 자유의 가치를 알기에 이제는 죄를 더 미워하고 거룩한 생활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약함을 아는 성령께서 도와주시기에 항상 깨어 기도하며 성령의 감동을 따라 살기를 연습합니다. 세상을 이긴 주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해주시기에(마 28:20) 우리는 그 안에서 구원의 감격을 유지하며 영적 삶을 계속해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진리 가운에서 살며 구원의 감격을 누리고 나누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8. 오늘은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마틴 루터 당시 카톨릭 교회가 믿음으로 얻는 구원보다 종교적 업적을 강조하고 진리를 왜곡하여 돈을 내고 죄를 용서받는 면죄부까지 팔았습니다. 교황은 절대 흠이 없다고 믿었고 성직을 매매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때 루터는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과감하게 개혁을 외쳤습니다. 기득권 세력에게 핍박을 받았지만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성경으로 돌아가 교회의 순수성을 회복하려는 개혁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필요에 의해 이기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상업화된 교회의 세속화를 거부하고 교리와 전통보다 구원의 감격으로 성령과 함께 살기를 연습해야 하겠습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며 성경대로 믿는 성도가 되고 세상을 살리는 교회다운 교회가 되려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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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을 보이는 교회가 되라 (살전 1:1-10)


1. 바울과 그의 팀이 두 번째 전도여행을 할 때에 데살로니가에서 삼 주간 머물면서 유대인 회당에서 성경을 가르쳤습니다(행 17:1-4). 예수 그리스도께서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에 대하여 증언하고 가르쳤습니다. 이 부활의 복음을 듣고 많은 경건한 헬라인들과 귀부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따랐습니다. 사도행전 17장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시작에 대해 설명해줍니다. 바울의 일행은 야손의 집에서 모여 말씀을 가르쳤는데 시기하고 방해하던 유대인들이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여기도 왔다라고 말하며 바울 일행을 찾았습니다. 바울 일행이 이미 베뢰아로 피신했기에 야손과 형제들을 읍장 앞에 끌고 가서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고 다른 왕인 예수를 전한다고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야손은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고 교회는 이렇게 야손의 집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2. 천하를 어지럽게 한다는 표현은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는 말입니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훈련은 받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복음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서(롬 1:16) 사람들이 변화되었습니다. 복음은 죄와 사망에서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는 일입니다. 그들은 함께 모여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고 찬양하며 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로 가득한 교회”(살전 1:3)가 되어 소식을 듣는 바울을 기쁘게 했습니다. 그들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택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기에 우상을 숭배하던 과거의 생활을 청산하고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모범적인 교회가 되어 소아시아 지역의 소문난 교회가 되었습니다.(살전 1:9).

3.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말씀을 배울 때에 사도들이 전하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살전 2:13) 말씀에 대한 올바른 태도는 신앙성숙을 위해 필요합니다. 말씀을 바로 믿고 이해할 때에 하나님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자세로 말씀을 대하는지에 따라 성경지식을 배우기도 하고 능력을 경험하고 변화되기도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말씀 안에서 성장하고 교회 안팎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소문난 교회가 된 비결은 말씀을 통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살전 2:14) 동족으로부터 핍박을 받으면서도 믿음을 지켰고 재림을 소망하며 믿음의 본을 보이는 교회가 된 것은 그들의 삶의 중심에 부활하신 주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4. 초기 교회는 믿음을 갖게 되면 시련과 환난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일이 로마 황제의 왕권을 부정하는 일이 되어 정치적인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능력을 맛본 후로는 환란을 달게 겪었으며 다시 오실 주님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데살로니가교회에게 재림에 대한 혼란이 있었습니다. 재림 전에 죽은 자들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했습니다. 바울은 죽은 성도들이 재림 때에 먼저 부활하고 남아있는 자들과 함께 공중에서 주님을 뵙게 된다고 가르쳤습니다.(살전 4:16). 또 어떤 사람들은 현실적인 생활에 무관심하고 노동을 하지 않으면서 재림만을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일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 하고 거듭 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들으니 여러분 가운데는 무절제하게 살면서 일은 하지 않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명하며 또 권면합니다. 조용히 일해서 자기가 먹을 것을 자기가 벌어서 먹으십시오.”(살후 3:10-12) 바울은 내일 재림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오늘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라고 합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은 남의 것을 탐내거나 현재를 불평하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하며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5. 믿음은 지식적인 동의만이 아닙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환란을 견디며 주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이 삶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가치관을 갖게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약 2:26) 그러므로 주의 말씀이 우리 생활의 중심에 살아 있게 합시다. 그래야 말씀의 능력도 성령의 능력도 경험할 수 있고 변화도 가능합니다. 이런 믿음이 과거에 따르던 우상과 같은 것들을 버리고 살아계시고 참 신이신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합니다.(살전 1:9–10) 우상숭배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섬기고 의지하는 죄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에서도 하나님 이외의 것을 만들거나 섬기지 못하게 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하등한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어야 할 장소에 다른 것을 두는 것이고 하나님이 취해야 할 영광을 다른 것에게 바치는 행위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상이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든 우리 마음을 빼앗는 것은 다 우상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골 3:5)

6. 광야에서 불 뱀에 물려 죽어가던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모세는 놋 뱀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마다 다시 사는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왕하 18장을 보면 백성들이 그 놋 뱀을 우상처럼 숭배하고 거기에 분향했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 왕은 신앙회복운동을 펼치며 이방 산당을 헐고 주상과 목상을 찍을 때에 그 놋 뱀까지도 과감하게 부숴버렸습니다. 아무리 의미가 있고 좋은 것이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들은 우상입니다. 육체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도, 돈을 좋아하는 마음도, 성공을 위한 열심도, 자식이나 건강을 염려하는 마음도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는다면 바로잡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사업미팅이 있거나, 주님을 만나는 일보다 더 급한 용무가 있다면 우리의 우선순위는 이미 밀리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성장이나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는 이런 결단을 실행에 옮길 때에 가능합니다.

7.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 24:30)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 “내가 속히 오리라.”(계 22:7,12,20)는 말씀처럼 주님은 약속하신 대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은 신앙생활의 핵심 요소이고(살전 3:13), 성도의 소망이며(살전 2:19-20), 믿음의 경주를 계속하게 하는 힘이 됩니다.(마 24:44, 25:13). 행동이 따르는 믿음의 생활, 주의 사랑으로 서로 섬기며 교회를 세우는 사랑의 수고, 최종 평가와 상급을 준비하는 재림의 신앙으로 살아 주님을 기쁘게 하고 또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본을 보이는 교회로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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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소망을 나누는 교회 (골 1:1-12)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전도할 때에 에바브라가 믿게 되었고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 전도하여 생긴 자생적인 교회입니다. 골로새 교회는 복음을 믿었고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며 하늘 소망을 갖고 있는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골 1:4-5) 그러나 복음에 대한 체계적인 훈련이 부족했기에 당시 교회를 흔들던 영지주의나 율법주의에 쉽게 흔들렸습니다. 영지주의는 영적 깨달음만을 중요하게 여기고 육체는 썩어버릴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의 영이 세례 받을 때에 임했다가 십자가에서 죽기 직전에 떠났다고 가르쳤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하는 것이고 그의 몸으로 십자가에서 죽어 희생된 의미조차 격하시키는 심각한 이단이었습니다. 율법주의는 믿음으로 받는 구원이 아니라 할례나 안식일을 지키는 율법의 행위를 첨가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디모데는 골로새 교회가 믿음의 터 위에 굳게 서고 복음의 소망을 새롭게 하기를 기도했습니다. 교회를 욕하는 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교회의 정체성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1. 바울은 골로새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게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골 1:9 “그러므로 우리가 여러분의 소식을 들은 그 날부터, 우리도 여러분을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채워 주시기를 빕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신령한 지혜와 총명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가 지혜의 근원인 하나님을 바로 알아 그가 주시는 감동과 인도로 참과 거짓을 분별하고 진리위에 굳게 서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것입니다.(요 17:3) 구원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받는 것이며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선물입니다.(엡 2:8) 그러기에 교회는 다른 어떤 사역보다도 하나님을 바로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을 우선해야 합니다. 우리 일이 바빠서 영적인 일에 관심을 두지 못하는 우리들이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우선하면 우리의 필요는 아버지께서 공급해 주신다는 것입니다.(마 6:33) 이것의 순서가 바뀌면 수고하고도 남는 것 없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야곱이 아버지와 형을 속여 장자의 복을 가로챈 후에 삼촌 집으로 도망가 수십 년을 살았습니다. 거기서 가정도 이루고 부자가 되었지만 항상 형의 복수를 두려워했고 참 안식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네 명의 아내에게서 열두 자식을 얻었지만 질투와 갈등과 다툼 속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삼촌은 열 번도 넘게 그를 속였습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때 얍복 강가에서 밤새 드린 처절한 기도도 여전히 문제해결을 위한 자기 본위의 기도였습니다. “내가 주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나를 내 형 에서의 손에서 구해 주소서.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두렵습니다.”(창 32:11) 그러던 그가 정작 평화를 얻은 때는 그의 것을 다 내려놓을 때였습니다. 밤새 함께 씨름한 사람이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알고 그곳의 이름을 브니엘(하나님의 얼굴)로 부릅니다. 그의 이름이 야곱(발꿈치를 잡다, 속이다)에서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뤄 이기다)로 바뀝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야 형과의 문제도 해결되고 진정한 쉼을 누렸습니다.

야곱은 실수투성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그의 열두 아들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되었고 약속을 이룰 민족을 형성했습니다. 나중에 나라가 형편없이 타락했을 때도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회복을 약속했습니다. 사 41:8-10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택한 백성을 결코 손에서 놓지 않습니다. 실수투성이인 야곱을 택한 종이라 부르고 아브라함을 친구라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사는 것이 복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문제를 넘어설 수 있고 복음의 소망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와 평강과 희락을 주시려고 우리를 불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했으니 하나님을 더 깊이 아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하겠습니다.

2. 바울은 골로새 교회가 성숙한 교회가 되어 바로 쓰임받기를 기도했습니다.
골 1:10-11 “여러분이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써, 모든 일에서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고, 모든 선한 일에서 열매를 맺고, 하나님을 점점 더 알고, 하나님의 영광의 권능에서 오는 모든 능력으로 강하게 되어서, 기쁨으로 끝까지 참고 견디기를 바랍니다.” 주님께 합당하게 행한다는 것은 주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주님과 색깔이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 안에서의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기뻐하고 선한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 가는 일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자아를 죽이고 주님께 순종하며 참고 견뎌야 하는 일입니다.

사도요한은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고 그 형제의 필요를 채워주지도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했습니다.(요일 4:20)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정말 주님께 바로 쓰임 받는 교회가 되려 한다면 주님을 더 깊이 알고 그의 겸손과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빌 2:5-8) 우리의 신앙고백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의 평가로 확인되어야 합니다. 성품이 바뀌지 않은 상태로 열심을 내는 신자 때문에 교회가 어려움을 겪습니다. 자아를 죽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주님을 위해 수고하고도 당연히 할 것을 했을 뿐이라고 겸손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눅 17:7-10) 이런 사람이 복음에 합당한 사람이며 교회를 세우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계셨고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만든 창조주입니다. 그가 친히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의 주인이 됩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려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흠 없고 책망 받을 것이 없는 거룩한 존재로 만들어 주셨습니다.(골 1:22) 친히 부활하여 모든 잠자는 자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셨으며 빛의 나라에서 얻을 축복에 참여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먼저 주신 이 능력과 소망을 세상에 알리려고 교회와 일군을 세워 일하십니다. 우리가 이 믿음에 굳게 서서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 일이 힘 있게 진행될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우리가 먼저 경험한 복음의 소망을 나누어주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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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잔치 비유 (마 22:1-14, 사 25:1-9)

1. 한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를 준비하고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그런데 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일이 더 급하고 중요하여 초청에 응하지 못했습니다. 본문을 보면 그들은 돌아보지도 않았습니다. 깊이 따지고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갔고 한 사람은 자기 사업장으로 갔으며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였습니다. 임금은 노하여서 군대를 보내어 잔치에 합당하지 않은 자 곧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살라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네거리에서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누구든지 만나는 대로 초청하여 잔치 자리를 채웠습니다.(마 22:8-10) 잔치 자리는 손님들로 가득했지만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가 있었고 그 사람은 결국 손발이 묶여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져져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았습니다.

2. 눅 14:15-24에도 같은 내용의 말씀이 있습니다. 처음 잔치에 초청받은 사람들은 자기 일로 바빴습니다. 새로 산 밭에 나가 일해야 했고 새로운 소 다섯 겨리를 샀으니 시험해보아야 했고 장가들었으니 집에 있어야 했습니다. 결국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와 자리를 채웠습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마 22:14)는 말씀과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눅 14:24)는 말씀은 결국 먼저 된 자들이 나중 되는 결과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포도원 농부 비유(마 21:33-46)를 통하여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이 포도원 주인의 종들과 아들을 죽인 악한 농부이며 먼저 선택되었으나 결국 버림 받게 됨을 말씀합니다. 오늘의 혼인잔치 비유에서도 구원 초청에 응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들은 천국에서 내쳐진다고 경고합니다.

3. 예수님을 거절하고 죽이려 했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바리새인과 율법학자와 사두개인들은 먼저 부름을 받아 유대사회를 이끌던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잔치에 초대받았지만 자기 일이 더 중요해서 초청에 응할 수 없었습니다. 단순히 초청에 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종들을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이들은 선지자들을 죽이고 자기들의 배를 채우기에 바빴고 하나님 나라를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자기 생각과 전통과 기득권을 내려놓지 못해서 자기를 방해하는 메시아를 죽였습니다. 초청에 응하지 못한 사람들은 유대교 지도자들만이 아닙니다. 우리 시대에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바로 서 있지 못하거나 하나님의 마음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거나 믿는다 해도 자기본위의 생활을 하고 예복을 준비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4.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덥지도 않고 미지근했습니다. 모든 것이 풍족하고 부족한 것이 없었지만 정작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해야 했습니다. 열심을 내고 회개하도록 초청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인격적인 교제를 원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가운데 거하는 것이 곧 신앙생활이며 천국백성의 생활입니다. 그 임재의 기쁨이 사라지면 우리의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거나 세상재미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 임재의 상실은 곧 죽음이기에 회복이 필요합니다.

5. 이사야는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는지를 말했습니다. 사 25:6-8 “시온산에서 세계의 모든 민족을 위해 전능하신 여호와께서 가장 맛있는 포도주와 음식으로 잔치를 베푸실 것이며 온 인류를 덮고 있는 슬픔의 구름을 걷어 버리시고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실 것이다. 주 여호와께서 모든 사람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며 온 세상에서 자기 백성의 수치를 없애 버리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이렇게 구원하고 회복시킵니다. 그리하여 날마다 구원의 감격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합니다.(사 25:9) 이 구원의 감격은 행위나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기에 믿음으로 받으면 됩니다. 당시 잔치를 여는 주인은 참석자들이 입을 예복도 준비했다고 하니 은혜로 얻은 기회를 감사하고 즐기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6.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누구든지’(마 22:10),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눅 14:21)이 잔치 자리에 앉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불러 구원의 은혜를 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초청받은 사람은 그 부름에 응답하여 잔치를 즐기면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과를 담당해 주셨기에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벗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죄가 얼마나 많고 큰지를 계산하지 않습니다.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책망 받을 것이 없는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해 주십니다.(골 1:22) 예수 믿고 세례 받는 것은 예복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보혈로 씻음 받고 성령의 임재가운데서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누리고 전하는 것입니다.

7. 구원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통하여 믿음을 확증하고 성찬을 통하여 주님의 대속의 죽음을 전합니다. 성찬을 자주 행하는 이유는 구원의 은혜를 확인하고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자랑하기 위함입니다. 세계교회협의회가 펴낸 <세례, 성만찬, 그리고 사역>라는 책에서 성찬의 의미를 쉽게 설명하고 있어서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 LOOK UP – 위로 눈을 들어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 LOOK BACK – 뒤 돌아보아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 LOOK IN – 우리 안에 성령께서 충만히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 LOOK AROUND – 주변을 돌아보며 이웃과 공동체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 LOOK FORWARD – 앞으로 있을 영원한 천국잔치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8. 마 22:14절에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라고 결론을 맺었습니다. 천국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사는 곳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교제를 무시하거나 회피한다면 마치 초청을 거부하고 자기 일터로 나간 사람과 같습니다. 천국과 지옥사이의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속해있지 않으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세상입니다. 갈 5:24-25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삶을 얻었으니, 우리는 성령이 인도해 주심을 따라 살아갑시다.” 성령 안에서 구원의 확신과 천국의 기쁨이 더 분명하도록 자신을 관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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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기쁘게 (겔 18:30-32, 마 21:28-43)

1. 빌 2:13은 하나님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선한 소원을 주시고 실천하게 하는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결교회가 코로나 극복과 나라를 위한 기도시간을 갖는 것은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는 일에서 문제의 실마리를 찾자고 하는 것입니다. 전염병도 문제이지만 교회에 대한 불만을 거침없이 쏟아 내는 사회적 거부감을 깊이 반성하고 교회 본래의 거룩함을 회복하려는 긍정적인 몸부림이라고 생각합니다. 차제에 우리들도 믿음을 점검하고 영성을 회복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개인과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은 하나님과 멀어진 죄인들이 돌아오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짓고 숨어 버린 아담에게 먼저 찾아와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도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왔다고 하셨습니다. 비록 죄인이라도 죄 가운에서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고 죄인들이 악한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여 죽음을 면하게 되기를 바라고 기다립니다.(겔 18:28) 겔 18:31-32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3.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죄인들이 회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길을 만들기 위해 아버지의 뜻에 따라 희생양이 되어 십자가에서 대신 죽었습니다.(빌 2:8)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자 가운에서 다시 살려 내셨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어 구원의 주님이 되게 했습니다.(빌 2:9)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 흠 없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비록 완전하지 않은 존재로 죄가 가득한 세상에서 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세상이 알리고 어둠을 비추는 빛으로(빌 2:15)살아야 하는 빛의 자녀입니다.

4. 회개는 죄를 자각하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맘만 먹으면 회개할 수 있다고 죄를 쉽게 생각하거나 회심할 때에 한번 회개한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죄를 짓지 않을 만큼 의롭다고 스스로 자만하면 죄를 지적하는 말씀과 양심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성령의 감동도 깨닫지 못합니다. 회개할 수 있는 것도 은혜입니다. 죄를 자각하고 멀리하는 의지적인 돌봄이 필요합니다. 목욕하여 깨끗해진 사람도 손과 발을 날마다 씻는 것처럼 구원받은 우리들이지만 날마다 연약함을 고백하여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죄는 울타리를 넘어간 것이고 과녁을 벗어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기대와 계획에서 벗어난 것이 죄입니다. 회개에 둔감해지는 것은 죄에 대한 감각이 둔해진 결과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약해진 이유이며 하나님과 상관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5. 시 51편에서 다윗은 죄를 애통해 하고 철저하게 회개했습니다. 다윗의 소행이 하나님 보기에 악했기에(삼하 11:27)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보내 다윗의 죄를 깨닫게 했습니다. 나단 선지자는 한 가난한 사람이 키우는 양 새끼를 탐낸 부자가 자기 손님 접대를 위해 그 양을 빼앗아 요리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다윗은 화를 내며 그를 벌하겠다고 합니다. 나단 선지자는 그런 악을 행한 사람이 바로 다윗이라고 죄를 지적합니다. 밧세바를 범하고 죄를 감추려고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전장에 내보내 죽게 한 죄를 들추어냅니다. 다윗은 선지자의 지적에 자기 죄를 수긍하고 회개합니다. 그는 침상을 적시며 눈이 짓무를 만큼 슬퍼하며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거두지 말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성령이 떠나면 곧 죽음이라는 것을 아는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불린 것은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회개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6.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을 깨끗하게 하고 설교하는 예수님께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누구의 권위로 일하는지를 물었습니다. 세례요한의 설교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고 믿지 않았던 그들에게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맏아들은 대답하고도 실천하지 않았고 둘째 아들은 거절했지만 곧 잘못을 뉘우치고 실천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중하게 여기면서도 정작 자기들은 따르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올무와 거치는 것(롬 11:9)이 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무시하던 세리와 창녀들은 회개하고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었습니다.(마 21:31-32) 또 하나의 비유를 말씀합니다. 포도원 주인이 세를 받으러 종들을 보냈더니 악한 농부들이 종을 때리고 다른 종은 죽이고 또 다른 종은 돌로 쳤고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냈더니 죽였습니다. 그렇다면 주인은 악한 농부들을 벌하고 포도원을 빼앗아 다른 농부에게 경작을 맡길 것이 분명합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 나라를 거절하니 빼앗아 다른 민족에게 주실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7. 누구나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회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회개 없이는 구원도 없고 은혜를 받을 수도 없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도 예수님도 사역을 시작하면서 회개를 설교한 것입니다. 회개 없는 신앙고백은 가짜입니다. 예수께서 오신 목적과 십자가에서 죽으신 목적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에 대하여 알거나 그의 사상에 동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하여 사죄의 은총을 받는 것이고 그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눅 15장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는 목자,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여인, 집나간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는 아버지를 통하여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뻐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기뻐합니다. 지금도 교회를 통하여 세상을 회복시키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는 멀리 떠난 죄인이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소원을 마음에 품고 삽니다.

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8-9)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대하7:14) 어려운 시절을 보내며 우리 자신을 다시 점검하고 회개하여 더욱 새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돌이키고 돌이키라. 왜 죽고자 하느냐?’는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어둠과 같은 세상에 빛을 비추고 생명을 알게 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길입니다. 이것을 위해 힘을 다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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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20일 복음의 가치를 바로 알자 (마 20:1-16)

1. 한 부자 청년이 어떤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게 되는지를 예수님께 질문하자 예수님은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 사람은 자기는 평소에 계명을 잘 지켰는데 더 무엇이 필요한지를 되묻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하시자 그는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그 부자 청년은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계명을 다 지킬 만큼 열심도 있었고 영생에 관심도 있었지만 자기 소유를 팔아 이웃을 섬기는 일을 결단하지 못했습니다. 이 부자 청년이 근심하며 돌아 간 후에 예수님은 부자가 하나님 나라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처럼 어렵다고 하십니다. 사람의 행위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고 설명해 주십니다.

2. 하나님 나라는 자기의 것을 버림으로 얻는 신비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를 따르는 일이 절대 필요합니다. 나와 세상은 간 곳이 없고 구속한 주님만 바라보는 것이 우리의 신앙 여정입니다. 베드로는 자기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기에 어떤 영적인 보상이 있는지를 묻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과 함께 영광스런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될 것과 영생을 약속해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생명을 살리는 예수님의 사역에 제자들이 함께 하게 됨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기쁨이 있는 것이지만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되었던 자가 먼저 되는 사람이 많다고 경고하십니다. 그래서 자기 욕심보다 주님의 뜻을 우선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3. 본문은 아침 일찍 사람을 찾아 나서는 포도원 주인을 소개합니다. 1절을 보면 천국은 마치 일군을 찾아 나간 주인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 주인은 일거리를 찾는 배고픈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기 위하여 포도원을 경영하는 분입니다. ‘아무도 우리를 품꾼으로 써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라고 대답하는 소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7절)고 일거리를 제공합니다. 그러면서도 일군들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아침 일찍 와서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이나 오후 늦게 와서 잠깐 일을 한 사람에게 약속한 대로 하루치의 임금을 지급했습니다. 일보다 그들에게 일자리를 주어 생계를 이어가게 하는 것이 주인의 목적이었습니다.

4. 이 이야기는 죄인을 사랑하여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줍니다. 죄로 망하게 된 죄인들을 찾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를 베풀어 천국 백성이 되게 하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믿고 영생을 얻도록 뜻을 정하고 불러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줍니다. 사람들은 자기 계산과 여러 이유 때문에 사람을 선택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의 보혈로 덮어 거룩하고 흠이 없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선택하십니다. 엡 1:4-5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합니다.

5. 그러나 주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일군들에게는 오해와 불평이 많았습니다. 특별히 아침 일찍부터 하루 종일 수고한 사람은 불만이 많았습니다. 오후 늦게 와서 잠깐 일한 사람과 같은 임금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자기들의 수고한 대가를 정당하게 계산해 주지 않았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와 약속한 금액을 주었는데 무엇이 불만이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주시는 공평한 은혜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고도 그것의 가치를 모르면 불평하게 됩니다. 롬 3:22-24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6.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바로 이해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베드로도 먼저 부름을 받고 헌신하여 예수님을 따랐으니 큰 보상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요한의 어머니도 아들에게 좋은 자리를 맡겨주시기를 청탁했습니다. 이런 생각들은 늦게 와서 조금 일한 사람에게 같은 대우를 한 것을 부당하다고 여긴 것과 다르지 않은 생각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먼저 선택 받았다는 우월감이 있었고 율법을 목숨처럼 중히 여겼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고 결국 버림받았습니다. 집나간 아들의 비유에서 큰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도 특권을 누리지 못했고 다시 돌아온 동생을 환영하지도 못했습니다. 동생을 정죄하는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백성이 회개하고 용서받는 기쁜 일을 보고서도 함께 기뻐하지 못했고 오히려 불평했습니다. 니느웨는 당연히 멸망 받아야 한다는 자기생각 때문에 생명을 귀하게 여겨 살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 모든 경우는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지 못하는 것처럼 스스로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7. 은혜의 원리를 알아야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고 세상적인 기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누구라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도록 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누구에게나 공평하기 때문입니다. 늦은 시간에 포도원에 들어와 일한 사람도 일찍부터 일한 사람과 동일한 임금을 받았습니다. 주인은 나중에 온 사람을 배려하여 먼저 임금을 계산해 주었습니다. 독생자를 희생시켜가며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열정이나 업적을 보고 주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원하는 대로 베푸는 은혜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더 높아지고 더 좋은 평가를 위해서 경쟁하는 세상방법이 아니라 은혜로 사는 것을 연습해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에 감복하여 겸손히 주를 섬기며 형제를 존중하고 화목을 이루는 것이 필요합니다. 서로 비교하고 싸우면 마귀가 틈타고 하나님 나라의 평강이 희석됩니다. 은사는 주신 분의 의도에 맞게 사용해야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봉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먼저 되고도 나중 되는 일을 피할 수 있습니다.

8. 교회는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이고 용서받은 죄인들의 모임이며 주님이 친히 주인으로 계시는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생명을 얻고 그것을 알게 하는 일에 부름 받았으니 모든 일을 주님께 하듯 하고 겸손히 서로를 섬겨는 화목을 믿음의 열매로 주님께 드려야겠습니다. 지미 카터가 선거 유세에 바쁜 중에도 자기 교회에 빠지지 않았고 맡은 주일학교 교사의 직분에 충실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루는 자기를 찾아온 많은 기자들에게 고마움을 표하면서 그들도 자기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맡은 직분에 충성하기를 부탁했다고 합니다. 작은 일이라도 주님이 원하는 방법을 따르는 것이 복음의 가치를 바로 아는 사람의 모습이고 은혜 안에 사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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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13일 넓은 마음으로 서로 품어라 (마 18:21-35, 롬 14:1-12)

1. 예년 같으면 전교인수련회를 하며 서로 얼굴을 맞대고 생각을 나누며 교제하는 시간을 가질 때인데 올해는 얼굴을 볼 수 없는 제한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평소보도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관계도 약해지는 경우가 있기에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는 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 오늘은 넓은 마음으로 서로 품자는 말씀을 생각합니다. 힘든 일이기는 하지만 용서를 실천할 때 막힌 관계도 열리고 새롭게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죄를 멸하고 하나님과 죄인을 화목하게 한 것처럼 성도는 화목을 실천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사람들과 더불어 화평과 거룩함을 이루지 못하면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한다고 했으니 우리의 믿음의 정도는 화목으로 평가받는 것입니다.

2. 베드로는 형제의 잘못을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지를 물으며 아주 너그럽게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당시의 율법학자들은 누군가를 세 번 용서하면 충분히 너그러운 사람이라고 가르쳤으니 베드로는 아주 크게 생각하고 질문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곱 번 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하며 일만 달란트의 큰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의 이야기를 해주십니다. 갚을 것도 없고 갚을 능력도 없던 그는 주인 앞에 엎드려 절하며 어떻게든 갚을 것이니 참아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그를 불쌍히 여겨 놓아주고 빚을 다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돌아가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 작은 빚을 진 사람에게 빚을 갚도록 독촉하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소식을 들은 주인이 그 악한 종을 다시 불러 큰 빚을 탕감 받고도 작은 빚진 자에게 은혜를 베풀지 못함을 꾸짖고 다시 빚을 갚게 하고 옥졸들에게 넘겼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사하지 아니하면 하늘 아버지도 그리 하신다고 했습니다.(마 18:35)

3. 이 말씀은 몇 번을 용서해야 하는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처음 교회는 믿음 때문에 불의한 핍박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용서를 배우고 실천했습니다. 생색내는 정도의 용서가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용서를 실천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했습니다. 스데반은 순교를 당하면서도 자기를 죽이는 자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행 7:60).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도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처럼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달라고 기도하게 했습니다.(마 6:12) 예수님이 말씀하신 일흔 번씩 일곱 번은 제한 없는 용서를 말하는 것입니다. 상대의 잘못을 계산하지 말고 은혜로 덮을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더 넓은 마음으로 서로 품고 용서하기를 연습해야 하겠습니다.

4. 바울은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를 먹는 문제로 교회 안의 갈등을 다루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롬 14:6-10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5. 대부분의 갈등은 의롭지 못해서가 아니라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기대가 충족되지 않을 때 비난하고 정죄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고 더구나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기억한다면 서로 용서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롬 14: 4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상대가 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불편한 생각이 들지만 거기서 멈추어야 합니다. 그것을 잘못이라고 입을 벌려 말해버리면 자기 기준으로 상대를 평가하는 일이 되기에 그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상대를 정죄하는 것은 주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정죄와 비판보다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성숙한 자세입니다.

6. 자기 욕심이 우선되면 하나님의 일을 망치기 쉽습니다. 행 5장에 아니니아와 삽비라는 자기 재산을 팔아 헌금하는 선한 일을 하다가 성령을 속인 죄로 죽었습니다. 자기 것을 가지고 자기 계획대로 사용하는 것이 무슨 잘못일까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성령의 생각을 따르지 않고 자기 욕심을 따라 일부를 숨겨두었던 것이 원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행하는 봉사는 자기 기분이나 욕심보다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방법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목적을 가지고 자랑하고 인정받으려고 하는 교만한 마음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만 영광을 받게 하고 또 생명을 살리는 평안의 복음을 전하고 나누는 개인과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7. 아버지 사랑을 독차지 하는 요셉이 미워서 팔아버렸던 형들은 극심한 가뭄을 피하여 양식을 구하려고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총리가 된 요셉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요셉 앞에서 보복 당할 것을 두려워했지만 요셉은 형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창 50:19-21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기라도 하겠습니까?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니 형님들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형님들을 모시고, 형님들의 자식들을 돌보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하심을 인정하는 요셉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길을 인도하셨고 많은 사람을 살리게 하셨다는 것을 알기에 형들을 용서하고 넓은 마음으로 품었습니다. 이것이 은혜를 경험한 사람의 마땅한 태도입니다.

8. 상대를 품고 용서하면서 우리가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고 성숙해집니다. 교회도 이해와 용납의 과정을 통하여 서로 배우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갈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주님께서 죄에서 자유를 주신 것은 나의 의로움으로 상대를 평가하고 정죄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연약함 속에서 자신을 보고 더 넓은 마음으로 서로 품고 용납하는 생활을 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상대의 유익을 위해서 나의 권리를 제한 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배우고 훈련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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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6일 겸손한 사람이 되라 (겔 33:1-11, 마 18:1-14)

1. 예수님이 죽음과 부활을 여러 번 말씀하며 십자가를 준비하는 때에 제자들은 천국에서 누가 큰가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세 제자를 특별히 가까이 두고 사역하는 것을 시기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을 하고 칭찬을 들은 일이 있었고(마 16:16), 변화 산에 함께 올라가 영광스런 모습을 경험한 것도 세 제자들이었고(마 17:1) 물고기 입에서 돈을 건져 성전 세를 내는 일에도 베드로가 관여했습니다.(마 17:24-27) 왕의 아들은 세를 내지 않아도 되지만 다른 사람이 실족하지 않도록 세를 낸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주님 나라가 곧 이루어질 것을 확신했고 그때 권좌를 얻게 될 것을 자연스럽게 기대했습니다. 막 10장에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주님 나라에서 자기 아들들을 좌우에 앉혀달라고 청탁하는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2. 일류 대학과 높은 연봉으로 성공의 서열이 정해지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더 빨리 더 높게 더 많이 갖기를 원합니다. 신앙생활도 그것의 영향을 받아서 성공과 출세를 기도하게 됩니다. 직분을 계급으로 생각하고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어야 성공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봉사를 하면서도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기 원하고 잘한다는 평가와 칭찬을 듣기 원합니다. 주목받는 화려한 일에 관심이 갑니다. 인정받고 높아지고 싶은 마음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이런 마음을 잘못이라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때로는 이런 것들이 동기부여가 되어 열심을 내게 하는 촉매가 되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그것이 서로 비교하거나 공동체의 화목을 깨는 자기 욕심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평가보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라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 앞에 어린아이 하나를 세우고는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라고 하십니다.(마 18:3-4) 누구든지 크고자 하면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면 종이 되라고 하십니다.(마 20:26-27) 자리다툼하는 제자들에게 겸손을 배우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을 바라보고 겸손해야 합니다.(벧전 5:5-6) 겸손은 상대를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데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어 종이 되었고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죽기까지 복종했습니다. 그리고도 무익한 종이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눅 17:10)는 겸손한 자세를 보였습니다.

4. 겸손한 사람은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는 것처럼 자신을 낮출 줄 압니다. 신앙의 성숙은 성품에서 나타나고 성품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드러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자기에 대하여는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생활을 날마다 연습해야 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의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5. 예수님은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주님께 행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작은 자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실족하게 하는 것은 앞에 장애물을 놓는다는 것입니다.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가지를 부러뜨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 장애물 때문에 어린아이나 믿음이 약한 사람이나 사회의 약자들은 쉽게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가르치려 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지도자나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아직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배려하고 기다려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 용납하고 배려하기를 힘써야 하고 자기 잘못을 깨달을 때는 겸손히 수용해야 합니다. 무엇을 얼마나 성취하고 성공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보다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일하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6. 예수님은 손과 발이 범죄 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고 눈이 범죄 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는 과격한 말씀을 합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는 말씀입니다. 온전한 몸으로 지옥에 가는 것보다 장애의 몸으로 천국에 가는 것이 귀하다는 것입니다. 멋있는 사역의 열매를 위해서 상대를 몰아세우고 힘들게 하기보다는 조금 덜하지만 화목한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웁니다. 마태 18장은 계속하여 죄 지은 형제를 지혜로롭게 절차를 따라 권고하여 회개하게 하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탕감 받은 자는 자기에게 빚진 사람을 마땅히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고 경고합니다. 우리들이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할 이유입니다.

7.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을 위하여 일꾼들을 불러 세우고 구원과 심판의 소식을 죄인들에게 알리게 합니다. 일꾼들이 바로 일하지 않아서 죄인들이 심판의 소식을 듣지 못하고 죽으면 그의 피 값을 부름 받은 일꾼에게서 찾겠다고 말씀하십니다.(겔 33:7-9) 그러니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아래에서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 생각과 뜻과 계획을 그 앞에 내려놓고 하나님의 구원을 알리는 바른생활을 해야 합니다. 겸손한 사람이 되어 복음이 자연스레 흘러가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8. 한 아이가 엄마의 손을 잡고 시장에 갑니다. 잘 익은 앵두가게 앞에서 발이 멎었습니다. 주인아저씨는 아이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원하는 만큼 집어도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이는 머뭇거리고 기다립니다. 결국 주인아저씨가 한 주먹 가득 집어주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엄마가 왜 머뭇거렸는지를 묻습니다. 아이가 대답합니다. ‘그 아저씨의 손이 더 크잖아요.’ 겸손은 이런 것입니다. 내가 먼저 움직이지 않고 하나님의 크고 강한 손을 바라보고 그가 우리를 알아보고 은혜주시기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시 131:1-3 “주님, 이제 내가 교만한 마음을 버렸습니다. 오만한 길에서 돌아섰습니다. 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 나서지 않으며 분에 넘치는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젖 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듯이 내 영혼도 젖 뗀 아이와 같습니다.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히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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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30일 내가 지는 십자가 (마 16:21-28)

1. 베드로는 주님이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을 한 결과 주님께 칭찬을 들었고 주님은 그 신앙고백 위에 음부의 권세가 흔들 수 없는 교회를 직접 세운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로부터 고난을 당하고 죽게 될 것과 삼일 만에 부활하게 된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주님이 세우는 교회와 십자가의 죽음이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이룰 것이고 그 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것입니다. 성령을 보내시고 교회를 세워 그 일의 증인이 되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 고난을 말씀하시자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극구 만류했습니다. 고난의 필요와 이유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2. 베드로는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는 거침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나라.’는 호된 꾸중을 하여 사탄의 꼬임에 속은 베드로를 정신 차리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못하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할 때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로 떡을 만들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유혹했고 또 자기에게 절하면 세상 모든 영광을 주겠다고 마귀는 시험했지만 예수님은 말씀으로 물리쳤습니다. 세상의 권력을 얻고 출세하고 명성을 얻는 일이 나쁜 일이 아니지만 예수님은 이것을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류한 것은 예수님을 시험하는 사람의 일이 되었고 주께서 고난을 통하여 구원의 일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 되었습니다. 사단은 그럴듯한 열심을 앞세워 자기 욕심을 따르게 하고 화목을 깨뜨립니다.

3. 베드로의 열심과 충성은 보통 정치인들이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주께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게 될 때를 기다렸다가 그 나라의 공신으로 일하고 싶은 정치 야망이 있었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요?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구분하기가 그렇게 어렵습니다. 눈에 보이는 부와 명예와 성공과 번영을 꿈꾸는 사람들은 고난을 통한 하나님 나라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씀도 쉽지 않습니다. 마 16:24-25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4.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인 천국은 성육신과 십자가 대속의 죽음와 부활, 그리고 성령의 강림으로 드러났습니다. 성령께서 구원받은 사람들을 불러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 나라의 증인이 되게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경험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초기 교회의 성도들은 천국 백성으로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추구하는 가치와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고난을 견디고 인내했고 순교를 각오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날마다 모여 교제하고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했습니다. 서로의 필요를 따라 소유물을 나눴고 서로 사랑했습니다. 그들의 생활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고 그 결과 구원받는 사람의 수가 날마다 더했습니다. 성령의 다스림 가운데서 살았으며 그들에게 맡겨진 증인으로의 역할을 성실하게 감당했습니다.

5. 예수님은 믿는 자들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할 것을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을 구속을 위한 희생 제물로 내놓는 것이었습니다. 그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고 하나님의 구원의 일이 진행되었습니다. 부자가 되고 출세하는 것을 원하거나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을까를 신앙생활의 목적으로 삼으면 이런 말씀 앞에서는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을 위한 골고다의 십자가는 주님이 이미 졌습니다. 이제 우리가 져야하는 십자가는 구원의 감격을 나누는 십자가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용서하며 화목을 이루고 구원을 확증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십자가입니다. 믿음을 선택하기 위하여 어려움을 인내하는 십자가입니다. 세상 가치를 버리고 하나님나라의 원칙을 선택하기 위한 진통의 십자가입니다.

6.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로 자신을 가득 채울 때에 가능합니다. 욕심과 자아는 십자가에 못 박고 주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을 더 깊이 알고 구원의 감격을 누리기 위한 영적 싸움을 날마다 계속할 때에 가능합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지는 십자가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는 것입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자녀를 훈계하는 아버지처럼, 금과 은을 단련하는 세공사처럼, 좋은 열매를 위해 가지를 치는 농부처럼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사용하여 우리를 더 온전하고 성숙하게 단련하십니다.

7. 머리로 이해되는 이 일이 실천하기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앞서 가신 주님을 바라봅니다. 히 12:2-3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자기에 대한 죄인들의 이러한 반항을 참아내신 분을 생각하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은 낙심하여 지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 길을 함께 걸어가라고 교회 공동체를 주셨습니다. 함께 손잡고 의지하며 주님을 따라가는 건강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초청하실 때에 주님이 주는 멍에는 가볍고 그 짐은 가볍다고 말씀했습니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일, 곧 교회의 화목을 이룰 때에 짐이 가벼워집니다.

8.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님께 순종하며 함께 갑시다. 우리가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을 인정하고 의지하십시오. 우리의 연약함을 아는 성령께서는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를 의지하고 순종하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합니다.(롬 8:28) 주께서 영광중에 재림하실 때에 그 영광을 함께 누릴 것을 기대하며 인내로 믿음의 길을 잘 걸어갑시다.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이 믿음의 길을 말입니다. 골 3: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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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23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3-20, 롬 12:1-2)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3–20, 롬 12:1-2) 8/23/20

1. 가이사랴 빌립보는 헤롯의 아들 빌립이 로마 황제를 기리기 위해서 황제 가이사의 이름에 자신의 이름인 빌립을 붙여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이름 지은 곳입니다. 거기는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신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장소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섬겨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를 물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은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나 정의를 외친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바알 선지자를 물리쳤던 능력의 종 엘리야나 민족을 위해 눈물로 일했던 예레미야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

2.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믿음의 색깔도 달라집니다. 위대한 선생님으로 이해하면 그의 가르침을 잘 따르려고 할 것이고 민족해방과 사회정의를 외치는 혁명가로 이해하면 정치혁명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며 어떤 의미를 갖는 분입니까? 베드로는 이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이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구약에서는 제사장과 왕과 예언자를 세울 때에 기름을 부어 권위를 주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것은 예수님이 구원을 위해서 기름부음을 받은 분이며 제사장과 왕과 예언자의 역할을 하게 될 메시아라는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3. 신앙고백은 책을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통해 듣고 배우지만 결국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여 계시해 주는 것을 경험하고 믿게 됩니다. 베드로도 하늘 아버지께서 알게 해주신 것입니다.(마 16:17) 하나님은 이렇게 자신을 알려 주십니다. 예수께서 세례 받을 때에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친히 음성으로 들려주셨고 성령을 보내 가시적으로 알게 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 하실 때는 외면하셨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내 하나님 우편에 앉혔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는 성령을 보내 교회를 세우고 믿는 자들을 사용하여 복음이 전해지게 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일하심 가운데서 부름 받은 우리들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주이며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이 고백위에 세워진 주님의 몸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고 분명하게 하나님을 세상에 보여주고 알게 하는 곳입니다.

4.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면 그가 누구든 구원하고 의롭게 하고 거룩한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합니다. 음부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고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묶고 푸는 권세까지 주십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8-19) 바른 신앙은 자신을 위해서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를 주인으로 인정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5.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의 경험을 듣고 믿음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전하는 자 없이 들을 수 없으며 듣지 않고 믿을 수 없기에 복음 전하는 자의 발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입니다.(롬 10:15) 그런데 이 과정에는 갈등과 포기도 있고 하나님을 의심하는 과정을 겪으면서 믿음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부름에는 후회도 없고 실수도 없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태초부터 우리의 구원을 계획하셨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 구원을 보증해 주시고 믿음으로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이런 섭리와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믿음을 갖게 된 것 같지만 돌아보면 누군가의 수고와 성령의 조명해주시는 은혜가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시며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또 누군가에게 그 기쁨의 소식을 나누려고 하는 것입니다

6.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우리들은 존재의 이유를 하나님께 둡니다. 구원받은 우리의 몸이 하나님이 받을만한 거룩한 산 제물이 되기를 바라며 삽니다.(롬 12:1-2) 주일에만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날마다의 일상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되도록 살아갑니다. 일터와 가정에서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주님처럼 생각하고 결정하기를 힘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으려고 노력합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선한 열매를 맺으려고 자신을 통제하고 자신에 대하여 죽는 연습을 날마다 합니다. 이 영적인 예배는 죄와 탐욕과 허영으로 가득한 세상의 가치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에서 가능합니다.(롬 12:3) 아버지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을 내어준 주님의 겸손을 본받을 때에 자아와 욕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7.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계명으로 주셨습니다. 바울은 믿음의 열매로 나타나야 할 일들을 롬 12장 전체에서 열거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분수를 지키고 서로 섬김(3, 6)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함(9) 형제사랑, 우애, 존경(10) 부지런히 주를 섬김(11) 소망 중에 즐거워함, 환난을 참고 기도함(12) 성도의 쓸 것을 공급하고 대접함(13) 박해하는 자들을 오히려 축복함(14)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우는 공감(15) 스스로 지혜 있는 척 하지 않음(16)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을 도모함(17)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함(18) 원수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김(20, 21)을 말했습니다. 실천하기에 쉽지 않은 부분들이 있지만 이것을 실천하는 일이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인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일만큼 성품훈련도 함께 해야 합니다. 서로 존중하고 돕고 사랑하며 화목을 유지하는 일도 그만큼 중요합니다.

8. 제사에는 대신 죽어 피 흘리는 희생제물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희생양이 되어 우리의 죄가 깨끗하게 되었다면 이제는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서 희생제물이 되어야 할 차례입니다. 더 많은 은혜와 복을 구하기보다는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희생과 헌신을 통하여 이웃을 유익하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예배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빌리 그래함 사모님의 묘비에는 “End of construction-Thank you for your patience.”(공사 끝-기다리고 참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적혀 있다지요. 우리는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계속 다듬어지고 정비되어야 할 성화의 과정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생활이 신앙고백과 함께 하나님께 드려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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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16일 힘써 기도할 일 (사 56:6-8, 마 15:21-28)

1. 어린 시절 어머니 따라서 기도원에 갔다가 말씀을 잘 들을 수 있는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자리싸움하는 권사님들을 보고 실망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믿음이 좋고 열심히 기도하던 그분들인데 남을 배려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어떻게 적용했을까를 여러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느 교회는 교회활동을 하다가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때가 있었는데 이것이 전도의 길을 막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고백과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인정받는데 사람들에게는 칭찬을 듣지 못한다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2. 기도는 주님과의 교제이며 영적인 호흡이라고 배웠습니다. 대개의 경우 문제해결을 위해서 기도를 시작하지만 주님과의 교제가 깊어지면 주님 나라와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하여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하다보면 주님의 마음을 더 깊이 알게 되고 주님을 닮아가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딤전 4:7)고 권면했고 베드로도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벧후 1:4)을 말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습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기 위한 훈련을 계속하여 그것이 생활에서 묻어날 정도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 없이 내뱉은 한마디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어렵게 할 때가 있습니다. 깊이 생각하지 못한 우리의 신앙열심이 하나님께 무례를 범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3. 모세는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렸지만 한번도 하나님을 쉽게 대하지 않았고 항상 두려움으로 섬겼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믿음의 선배들은 감격하고 기뻐하기보다 하나님의 권위 앞에서 자기의 죄를 자각하고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성도는 자신을 무익한 자로 여기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됩니다. 기도의 모습에서도 하나님을 대하는 자세가 나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서로 다른 기도를 말하는 누가복음의 말씀을 보면 바리새인은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서서 손을 들고 사뭇 거룩한 목소리로 자기의 공로나 의를 자랑하며 기도했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성전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멀리 서서 자기 가슴을 치며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했습니다.(눅 19:9-14) 내가 원하는 것은 이것이라고 기도하며 요구를 관철시키기 보다는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묻고 자비와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조종하거나 무례하게 요구하는 것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4. 이렇게 보면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했던 겟세마네에서의 예수님의 기도가 좋은 예가 됩니다.(눅 22:42)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 아버지를 존중했고 아들로서의 신분을 지켰습니다.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나라와 뜻이 먼저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기도를 가르쳤고 또한 십자가를 지기 위한 기도에서도 그렇게 행동했습니다. 자기 욕심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잘못된 기도이며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약 4:2) 바른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한복음 15장 7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라는 말씀처럼 주님 안에 있어야만 주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고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5. 마태복음에 나오는 가나안 여인은 귀신들려 고생하는 자기 딸을 고쳐주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얼마나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소리쳐 기도했으면 제자들도 그녀를 돌려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주님은 자녀의 떡을 개에게 주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유대인을 위한 은혜를 이방여인에게 나눠줄 수 없다는 말로 들립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점검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여인은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그런 은혜라도 주십시오.‘ 주님은 드디어 여인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그녀의 강청 때문이 아니라 믿음의 고백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녀의 믿음을 크게 칭찬 하고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6. 믿음은 주께서 대속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주님이 주인 됨을 고백하는 것 뿐 아니라 고백대로 주님의 뜻에 맞게 행동하여 열매를 맺는 것까지를 포함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교회 활동에 머물지 않고 주님 안에 머물며 주님을 배워서 인격과 성품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신앙생활이 재미있고 다른 사람에게 전도할 문도 열리게 됩니다. 만일 기도 따로 생활 따로 살면 본인도 힘들고 그를 바라보는 다른 사람도 시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믿든 자에게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씨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자신에 대하여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했습니다. 인격과 성품의 변화가 우선 되어야 사역도 가능해 집니다.

7.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습니다.(롬 11:29)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방인이 구원받는 것을 보고 믿지 않던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설명합니다. 율법과 상관없던 이방인이 구원을 받는 것이나 율법을 귀하게 여기고 지키던 유대인이 구원을 받는 일 모두가 율법의 의나 행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선물입니다. 구원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입니다.(롬 11:32)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을 갖고 있었지만 정작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고 그 앞에서 방종했습니다. 하나님은 비록 이방인라도 하나님이 원하는 공의와 선을 행하며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차별하지 않고 그의 성산으로 인도하고 성전에서 기뻐하게 했습니다.(사 56:6-7)

8. 차별 없이 구원하는 하나님의 넓은 마음을 품는데서 우리의 성숙과 변화가 가능해집니다. 우리의 구원도 하나님의 일방적인 계획가운데 이루어진 것이니 교만하거나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존중하기를 더 연습해야 하겠습니다. 주님 오실 날이 가까운 때에 우리의 열심과 기도가 방향 없는 것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함께 연습하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지만 믿음으로 인내하라고 말하는 야고보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라고 격려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주께 내려놓고 기도함으로 더 성숙한 성품의 소유자가 되고 그런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행복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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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9일 두려워 말라 (욥 38:4-18, 마 14:22-33)

1. 욥기 38장 이후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를 욥과의 대화를 통하여 알려줍니다. 하나님이 땅에 기초를 놓을 때 욥은 어디 있었는지, 바다가 터져 나올 때에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인지를 묻습니다. 바다의 샘에 들어가 보았는지, 물 밑으로 걸어 다녀 보았는지, 땅의 너비를 측량할 수 있는지 아는 것을 말해보라고 욥에게 다그칩니다. 눈 곳간에 들어가 보았는지, 우박 창고를 본 일이 있는지 질문하며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열거합니다.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통하여 사람의 제한된 지식과 경험을 깨닫게 하여 하나님의 주권 앞에 무릎을 꿇게 합니다. 사실 욥은 고난을 겪으며 하나님이 실수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은 못하실 일이 없고 못 이루실 것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고 자기가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하나님에 대하여 말했노라고 회개하기에 이릅니다.(욥 42:2)

2. 하나님은 생명을 만든 분이고 그것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진 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물이 생겨났고 그의 손으로 세상을 다스립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은 사람의 생각을 뛰어 넘고 하나님의 미련함이 사람의 지혜보다 높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을 열어 보여주는 범위 내에서만 하나님을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것마저도 다 수용할 수 없는 제한된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함께 살면서 하나님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며 하나님을 경험하고 배웠지만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도 성령께서는 우리를 격려하여 믿음으로 살도록 도와줍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는 것이 큰 은혜입니다.

3. 마태 14장에는 풍랑을 만나 어려움을 겪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밤새 풍랑과 싸우다가 포기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 물 위를 걸어오는 예수님을 만났지만 유령으로 알고 패닉상태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은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제자들을 위로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난 시간은 새벽 3-6시경입니다. 자기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어 포기할 그때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제한된 우리들이 초월자이신 주님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의 형편을 아뢰고 기도하면 주님은 그의 손을 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마 14:27,31) 그래서 바울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롬 10:13)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4.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소개할 때마다 ”나는 나다. I am that I am“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는 나다. 에고 에이미.“라는 헬라말도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 우리들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계시해줍니다. 하나님은 선택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하려고 찾아온 주님을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을 가까이 모시면 문제를 만나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같은 기사를 다루는 막 6장을 보면 무리와 작별하신 예수님은 따로 기도하러 산으로 갔다가 거기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고는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을 찾아갔습니다.(막 6:48)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입니다.
5.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자 즉각 반응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능히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이시면 나더러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해 주십시오.’ 가정문 형태의 이 표현은 정말 주님인가를 의심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주님이라는 것을 강하게 확신하고 주님께 몸을 맡긴 반어법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청을 들어주셨고 베드로는 재빨리 물위로 뛰어내려 주님이 주시는 초월적인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계산에 맞지 않는 모험을 감행하여 물 위를 걸었습니다. 풍랑이라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더 큰 풍랑이 있는 바다로 뛰어내렸습니다. 무모해 보이는 일 같지만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한 믿음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믿음은 입으로 시인하는 것만이 아니라 예수님이 계시는 곳으로 발을 내딛는 것입니다. 안전한 곳에서 이론으로 공부하고 토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발을 내딛고 그에게 몸을 던지는 것입니다. 힘과 도움이 되는 예수님이 거기 계시기 때문입니다.

6. 우리가 겪는 문제들은 대부분 인생이라는 배 안에서 만나는 풍랑들입니다. 가정을 꾸려가기 위한 경제적인 문제나 건강문제나 내일에 대한 준비나 자녀 양육에 대한 염려들입니다. 그런데 대개는 흔들리는 배 안에서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를 고민합니다. 문제가 가득한 배에서 벗어나 더 심한 풍랑이 있는 바닷물에 발을 내딛는 것은 상상도 못합니다. 그래서 배를 가볍게 해 보려고 물건을 버리기도 하고 과거 경험에서 어떻게 했었는지를 생각하며 온갖 지혜를 동원합니다. 주변에 누가 이런 문제를 해결해 본 경험이 있는지 찾습니다. 그러나 문제의 해답은 주님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약한 체질을 이미 아는 분입니다. 또한 그분은 몸소 시험과 고난을 당해보았기에 시험 받는 사람들을 능히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히 2:18) 그러니 어떤 어려움을 만나든지 주님께 소리쳐 도움을 구하고 그의 품에 뛰어 안기십시오.

7. 베드로는 물위를 걷는 신비를 체험했지만 바람을 보고 두려워하다가 다시 물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은 물에 빠져가는 베드로를 즉시 잡아 구원해 주시고 왜 의심했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적은 자라고 하신 것은 주변 환경을 보지 말고 예수님만 바라볼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비로운 기적을 경험하는 것보다 주님과 함께 있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한 두 번의 은혜 체험으로 만족하지 말고 내가 주님 안에 살며 주님이 내 안에 거하는 연합이 유지되도록 자신을 관리해야 합니다.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예수님이 제자들이 있는 배에 오르자 비로소 바람이 그쳤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다시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누구인지도 깨달았습니다.

8. 오병이어를 경험한 제자들은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떡을 먹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풍랑과 싸우며 자기들의 무력함을 깨달았고 물위를 걷고 바람을 잔잔하게 하시는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주님 나라의 권좌를 나누어 갖으려는 세속적인 출세욕에서 벗어나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주님을 뒤따르고 섬겨야 할 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도 여전히 문제를 만납니다. 그러나 주님은 문제를 해결하고 평안을 주십니다. 그 문제는 오히려 주님을 더 깊이 경험하고 배우는 은혜의 시간이 됩니다. 어려운 때에 더욱 주님을 가까이 하며 그 안에서 평안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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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2일 영적 만족을 누리는 길 (사 55:1-7, 마 13:24-30)

1. 오늘은 다섯 달 만에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내 구원 받게 하고 성령의 도움으로 믿음을 견지할 수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전염병의 위협이 있는 때에도 주님과의 관계를 더 돈독하게 하려는 여러분이 참 자랑스럽습니다. 우리에게 거룩해지려는 열망도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지만 우리에게는 경건의 능력이 없다는 것을 발견할 때는 마음이 약해지고 하나님의 마음을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어느 분이 선과 악을 하나님이 창조한 것인지, 그렇다면 이유가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악이 존재하지 않으면 예수님이 죽지 않아도 되고 신앙생활도 힘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지요. 우선 예수 믿고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면 하나님의 뜻이 구원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권면했습니다.

2. 불순종으로 망하게 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회개를 촉구하며 구원으로 초청합니다. 적국의 포로가 되어 육체와 영혼이 힘든 상태이지만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고 회복시켜 열방이 하나님을 알게 하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때에 찾고 가까이 계실 때에 부르고 하나님께 돌아와 귀를 기울여 듣고 다시 살게 되는 은혜를 받으라고 합니다. 이 초청은 이스라엘 뿐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자기 욕심대로 사는 악한 길에서 돌아서고 거룩하지 못한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서야 합니다. 그러면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고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사 55:8-9)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은 내 생각과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만족을 누리는 길입니다.

3.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눈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지지만 열매를 맺게 하고 농부에게 산물을 내주는 것처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도 사라지지 않고 구원의 뜻을 반드시 이루어 냅니다.(사 55:10-11) 성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러 구원하기로 계획하셨고, 말씀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 가운데 육체로 오시어 십자가에서 대신 죽음으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귀와 마음을 열어 말씀을 깨닫고 믿게 하고 구원을 보증해 주십니다. 돌과 같이 단단한 우리의 마음을 옥토로 만들어 주님께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 열매를 맺게 합니다.(마 13:23) 또한 믿는 자에게 양자의 영을 주어 하나님을 아빠로 부를 수 있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상속자로 살게 합니다.(롬 8:14-15) 예수 믿고 누리는 복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구원의 감격을 누리는 엄청난 것입니다.

4. 예수님은 가라지 비유로 천국을 설명했습니다. 천국은 좋은 씨를 자기 밭에 뿌린 사람과 같은데 밤중에 원수가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는 것입니다. 종들이 뽑아내기를 청하지만 주인은 곡식까지 다칠 것을 우려하여 추수 때까지 기다리게 합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인자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씨는 천국의 아들들 곧 성도를 말합니다. 자기 밭은 주님이 다스리는 세상입니다. 주님의 목적은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을 추수하여 천국 곡간에 들이고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원수 마귀는 가라지로 비유된 악한 사람을 뿌려 의인이 악인과 함께 살도록 혼돈을 만들지만 주님께서는 알곡을 보호하려고 추수 때까지 기다립니다.(마 13:30) 주님께서 재림하여 심판할 때에 알곡은 천국창고에 넣고 불법을 행하는 가라지는 타는 불에 던져버릴 것입니다. 성도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같이 빛나지만 가라지는 타는 풀무 불에서 울며 이를 갈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이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은 원수 마귀에게 속한 것입니다.

5. 이 비유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이고 주님이 친히 머리가 되는 거룩한 교회이지만 지상에 있는 교회와 성도는 이런 불완전한 가운데 있다는 것을 배웁니다. 가라지와 함께 살며 치열한 영적 전투를 벌여야 하는 신앙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원하는 선은 행하지 못하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한다고 고민하던 바울의 문제와 갈등이 계속 존재합니다.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기 원하지만 우리 습관과 욕심은 여전히 옛 것을 좋아합니다. 말씀으로 도전받으면 거룩하게 살고 싶은데 일상으로 돌아가면 살던 방식대로 삽니다. 어느 틈에 옛날의 그 자리에 다시 돌아가 있는 자신을 보고 낙심합니다. 때로는 사람 때문에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다양한 사람들끼리 만나다 보니 오해도 생깁니다. 원수 마귀는 그것을 틈타 서로 미워하고 나뉘게 합니다. 그러다보면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믿음의 근간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이런 불완전함을 이해하는 것이 성장을 위한 디딤돌입니다.

6. 주님에게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고 진액을 공급받아 거룩한 열매를 맺으려는 결단이 그래서 필요합니다. 날마다 성령의 인도를 받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가라지와 쉽게 섞여버려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혼돈과 갈등이 존재하지만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교회는 여전히 회개와 용서의 복음을 믿고 가르치고 전해야 합니다. 아직 기회가 있을 때에 불신자들이 회개하고 돌이키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행위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엡 2:8) 그러나 말씀에 순종하며 영적으로 성장하려는 싸움은 여전히 우리의 몫입니다. 롬 6:11-13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하나님보다 자기 욕심을 따르는 것이 죄고 죄와 구별되어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 의로운 것입니다. 여기에 영적인 성장과 만족이 있습니다.

7. 예수님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고픈 오천 명을 먹였습니다.(마 14:18-19) 음식을 들어 축사하고 제자들에게 떼어 주어 무리를 먹게 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를 불러 쉼을 얻게 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합니다. 목마른 자 돈 없는 자도 배불리 먹고 마시게 합니다. 영과 육의 좋은 것을 먹고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게 합니다.(사 55:20) 열두 광주리나 남았듯이 풍족하게 베풀어줍니다.(마 14:20) 요 6:35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먼저 교회인 우리들에게 주셨고 이제는 또 다른 사람을 살리고 먹이게 합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한 몸, 한 식구, 한 공동체가 된 우리가 이제는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일하며 배고픈 사람들을 먹여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일하는 것이 영적인 만족을 확인하고 누리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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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26일 믿음의 성장 (마 8:5-10, 골 2:6-7)

1. 지난 주간에 이 지역에서 목회하던 젊은 목사님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목회 소명을 받아 평생 좁은 길을 걸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한 승리자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역의 목회자들 중에 여러 번 어려움을 겪고도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는 분들이 참 대단해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 평가하지만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사명을 따라 좁은 길을 걷는 그것이 믿음이란 것을 다시 생각 했습니다.

2. 마 8장에 한 백부장이 자신의 하인이 중풍 병으로 고생하는데 치료해 달라고 예수님께 찾아온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집에 가서 고쳐주겠고 하는데 백부장은 극구 사양하며 말씀으로만 명령해도 나을 것이니 그리해달라고 청합니다. 명령에 살고 죽는 군인이기에 권세를 가진 예수님의 한 마디 명령이면 자기 하인이 능히 치료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귀하게 여겼고 이스라엘 중에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칭찬했습니다. 영어는 such great faith (위대한 믿음, 좋은 믿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그의 말씀을 절대 수용하고 따르는 그의 믿음을 칭찬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단과 싸우고 믿음을 지켜낸 라오디게아 교인들을 칭찬하며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고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2:6-7)고 지속적인 믿음의 성장과 승리를 부탁했습니다.

3.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으로 산 선배들에 대해서 자상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린 아벨, 평생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명령에 순종하여 오랜 기간 방주를 준비한 노아, 약속받은 본향을 바라보며 말씀에 순종한 아브라함, 자녀들을 약속에 근거한 믿음으로 키워낸 이삭과 야곱, 약속의 땅을 기대하고 거기 묻히기를 바랐던 요셉, 왕궁의 편안함보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거하기를 선택한 모세, 믿음으로 정탐꾼을 영접했다가 구원을 받은 기생 라합, 당대에는 약속을 이루지 못했지만 끝까지 믿음으로 살았던 무명의 성도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형편이 어떠했든지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나그네의 삶을 끝까지 완주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것들로 예비해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4. 믿음은 바라는 것을 앞당겨 보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잡히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다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니 그렇게 될 것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 약속에 대한 전적인 신뢰이며 확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이며 세상을 다스리는 주관자임을 믿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의 전 생애를 맡기고 의지하는 것도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나가는 자는 그가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히 11:6) 아브라함이 미지의 세계로 떠난 것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며 죽은 자도 다시 살릴 수 있는 하나님을 믿었기에 아들까지 바칠 수 있었습니다. 가나안을 정탐한 후 적군과 비교할 때 자신을 메뚜기 같다고 두려워한 정탐꾼들과는 달리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을 보였습니다.

5. 믿음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할 때 성장합니다. 처음에는 현실문제의 필요 때문에 주님을 찾지만 주님을 만나고 나면 영생의 비밀을 알게 되고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도 받습니다.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것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험하는 기쁨을 누립니다. 롬 10:9은 예수를 주님으로 시인하고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것을 믿고 구원을 얻게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의 결단으로 구원을 받지만 그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는 지속적인 임재의 경험 곧 성령의 충만함이 필요합니다. 아벨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날마다 하나님 안에 있었기에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노아가 수십 년 동안 방주를 만들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지속적인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불 속에서 부르는 하나님을 만난 모세이지만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대화하며 하나님의 일을 했습니다. 지속적인 믿음을 위해서 날마다 은혜 안에 머물며 성장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6.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했습니다.(눅 22:42)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 십자가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문제를 회피하지 않았고 자기감정과 욕심을 넘어섰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예수님은 때마다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했고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를 헤아리며 아버지와 교제하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 요 5:30에서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자신을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순종을 우리의 본으로 삼고 따라야 하겠습니다. 길을 비춰주는 빛이 되는 말씀을 가까이 두고 읽고 묵상하고 실천하고 또 영으로 기도하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말씀이 다 이해되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을 유지해야 하나님께 시선을 두는 담대함이 생겨납니다. 이런 믿음이어야 예수를 따르고 닮아가는 순례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습니다.

7. 하박국은 비록 나라는 망하게 된 절망적인 상태이비만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합 2:4)고 역설적으로 고백했습니다.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릴 만큼 무서운 환란에 처해서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도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밭에 먹을 것이 없고 우리에 양도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는 상태이지만 그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겠다고 의지적으로 결심했습니다.(합 3:16-18) 하나님만이 유일한 힘과 소망이 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절대 능력이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그가 함께 하는 것을 믿고 발을 내딛는 것입니다. 한 두 번의 결단이나 체험으로 완성되지 않기에 날마다 은혜 안에 머물러 있기를 힘써야 합니다. 지식적이거나 습관적인 믿음에서 벗어나 성장해야 합니다. 주님을 더 깊이 알기 위한 거룩한 열정을 품으십시오.

8. 전도자 무디의 간증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믿음을 달라고 기도한 시간만 합쳐도 몇 달은 족히 될 것입니다. 믿음이 번개 불과 같이 어느 날 나를 확 달아오르게 할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수없이 기도해도 믿음이 오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로마서 10장을 읽다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라는 구절을 보았습니다. 즉시 성경을 끌어안고 믿음을 구했습니다. 그리고는 성경을 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믿음이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믿음을 달라고 기도했다면 지금 가지고 있는 자신의 믿음을 먼저 실행에 옮겨야만 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께 향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 행동에 옮겼습니다. 이 믿음의 결단과 실천 때문에 불가마 속에서도 사자굴 속에서도 보호를 받았고 더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믿음의 경주도 이렇게 승리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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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19일 믿음으로 사는 것 (마 17:14-20)

1. 어느 분이 제게 기도부탁을 해왔습니다. 자신도 제대로 된 믿음생활을 하기 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생각이 고맙고 자랑스러워 기쁨으로 함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교회출석은 하는데 믿음으로 사는 법이 무엇이고 주님을 신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터득하는 데는 시간이 더 필요한 듯합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믿고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날마다 믿음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믿음과 생활이 따로 갈 수 있습니다. 오늘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2.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오자 한 아버지가 자기 아들이 간질에 걸려 고생하는데 고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지만 고치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며 언제까지 참아야 하는지 꾸중하고는 귀신을 꾸짖어 내쫓고 아이를 고쳐주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은 왜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는지를 조용히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오래 지내며 사역훈련도 받았고 귀신을 쫓는 권세를 받아 현장실습도 했었는데 이번에는 고칠 수 없었으니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믿음이 작은 까닭이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아주 작은 겨자씨 한 알만큼의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을 명하여 저기로 옮길 수 있다(20절)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겨자씨만한 믿음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3. 겨자씨는 씨앗 중에 작은 것에 속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심겨지면 속히 자라서 새들이 깃들 만큼(마 13:32)자랍니다. 미약해 보이는 것이지만 새들에게 충분한 그늘이 되고 생명력을 전수하는 자기 역할을 합니다. 겨자씨를 믿음의 양이나 크기로 이해하면 더 큰 믿음을 가져야 하겠다는 거룩한 부담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절대 능력 앞에 우리의 믿음은 미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씨 안에 있는 생명력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능력이 점점 성숙해져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영적인 성숙을 꿈꿀 수 있습니다. 생명은 반드시 성장하고 성숙해집니다. 씨가 성장하기 위해서 양분을 머금은 땅과 적당한 햇빛과 비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믿음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며 그것을 자라게 하고 열매 맺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스스로 하나님을 알거나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4. 제자들이 귀신을 내쫓지 못한 것은 믿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믿음을 바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치료하는 권능을 받았습니다.(마 10:1) 그러니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하면 되었는데 제자들은 주변을 의식하고 자기능력으로 해보려다가 실패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불신앙을 믿음이 없다고 평가했습니다. 귀신도 이미 그것을 알고 제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이에게서 나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자기 스스로 열심을 내거나 노력해서 어느 경지에 오르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생각과 경험으로 판단하는 것도 아닙니다. 종이 주인의 이름으로 주인을 대신해서 심부름하는 것과 같이 믿음으로 사는 것은 오직 예수님께만 마음을 두고 그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지식적으로 알거나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인정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그 지식과 결단이 우리의 생활을 이끌고 가도록 발을 내딛어야 합니다.

5. 믿음은 관계입니다. 주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우리의 모든 형편에서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모든 삶의 형편에서 주님과 생각을 나누고 대화하며 결재를 받는 관계입니다. 평안할 때는 믿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고난을 당하거나 실패할 때에 무너지는 경우를 봅니다. 자기 필요가 충족되면 감사하는데 기도가 원하는 대로 응답되지 않으면 실망하기도 합니다. 믿음은 어떤 상황에서라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를 두려움으로 섬기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믿음만 자랑할 것이 아니라 오늘 주님과 바른 관계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변화산에서 모세, 엘리야와 함께 앞으로 닥칠 십자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고난을 준비했는데 제자들은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계신 것을 보고 주님 나라의 권좌를 꿈꾸었습니다. 예수님은 산 아래로 내려가서 구원의 일을 계속하려는데 제자들은 산 위의 황홀감에 더 머물기 원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십계명을 받는 동안 산 아래서는 하나님을 보여 달라며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거기 절하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믿음은 주님과 한 방향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6. 예수님은 환자를 치유할 때마다 그의 믿음을 점검했습니다. 정말 낳고자 하는 지를 물었고 또 주님께서 능히 낫게 하실 분이라는 것을 믿는지 물었습니다. 병 낫기 원하는 소원도 있어야 하고 주님을 바로 믿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마가복음의 기록을 보면 환자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나와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좀 도와달라고 말하다가 예수님께 꾸중을 듣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힘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기의 믿음 없음을 용서해달라고 말하고 “내가 믿습니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막 9:24)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말 못하고 못 듣게 하는 귀신에게 명령하여 아이에게서 나오게 하고 다시는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7. 같은 일을 설명하는 마가복음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라고 말합니다. 기도는 나의 소원을 아뢰는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 없이 영적성장을 꿈꾸거나 변화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몸에 벨만큼 연습하지 않고는 믿음으로 사는 것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약 2:26) 아는 것을 적용하고 실천하여 열매를 맺고 영적 성장을 이루어야 믿음으로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고 기도는 말씀에 순종할 힘을 얻게 합니다.

8. 여러분이 누군가를 사랑하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관계를 진전시켰는지를 돌아보십시오. 주님을 그렇게 인격적으로 대하면 됩니다. 범사에 주님의 생각을 묻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자세이며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길입니다. 이렇게 살면 주님의 손길을 받아 더 성장하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런 관계가 열리면 산과 같은 장애물을 옮기는 문제는 주님께서 하십니다. 갈 2:20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것이 되도록 그리스도로 사는 믿음의 사람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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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12일 역할을 다하는 교회 (대하 7:11-22) 창립36주년기념주일

1. 보스톤중앙교회를 36년간 사용하여 영광을 받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동안 교회를 지키며 수고한 여러 성도들에게 주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성결교회는 1907년에 일본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지도자들이 전도활동을 시작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장로교나 감리교보다는 20여년 늦게 시작되었지만 북치고 노방전도하며 뜨겁게 기도하던 열정이 있는 교회입니다. 현재 한국에 3000여 교회가 있고 미주에 200개의 교회가 있고 보스톤에도 6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을 강조하는 건전한 교회에 소속되어 있음을 감사하고 행복한 교회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솔로몬의 성전봉헌 이야기를 살펴보며 교회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2.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의 소원을 이어받아 성전을 건축하여 봉헌하며 성전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조목조목 기도했습니다. ‘이웃에게 죄를 지은 사람이 제단 앞에서 맹세하면 공의로 판단해 주십시오. 죄를 지어 적국에게 패했을 때에 회개하고 기도하면 집으로 돌아오게 해주십시오. 죄 때문에 하늘이 닫히고 가뭄이 생길 때에 회개하고 기도하면 선한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기근과 전염병이 생기거나 메뚜기와 황충이 농사를 망치거나 적들이 쳐들어오거나 재앙이나 질병이 생길 때 회개하고 성전을 향하여 손을 펴고 기도하면 사유하시고 행위대로 심판해 주십시오. 이방인이라도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들어주셔서 만민이 하나님을 알게 해주십시오. 전쟁에 임하면서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들어주시고 돌보아주십시오. 포로 되었을 때라도 성전 있는 쪽을 향하여 기도하면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기도를 보면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는지가 나타납니다. 자기 백성을 형통하게 간섭하실 뿐 아니라 이방인의 기도도 들어주시는 하나님께 드린 기도입니다.

3. 솔모몬의 구체적인 기도가 끝나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번제물과 제물들을 사르고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드리는 예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제사장이 성전에 들어가지 못할 만큼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했고 백성들은 돌바닥에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로 임하신 것은 죄와 우상숭배를 미워하고 질투하여 태워버리는 분임을 알려준 것입니다. 어둠을 밝혀 주는 불처럼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고 인도하시겠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나타나심 앞에서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갖는 두려움이 죄를 고백하게 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향하여 드리는 회개의 기도를 듣고 죄를 용서해 주고 그 땅을 회복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4.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이 있고 하나님의 마음과 귀와 눈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죄와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회개하고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죄를 용서하고 그 땅을 고쳐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대하 7:14-16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이제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이는 내가 이미 이 성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을 여기에 영원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 성전은 건물로서의 아름다움보다 거기에서 만나는 하나님 때문에 가치가 있습니다. 거기서 예배하고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고 구원의 소식을 전하고 주의 사랑으로 봉사하고 교제합니다.
5.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말씀에 순종하면 다윗에게 약속한 왕권이 계속 유지되겠지만 율례와 명령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면 그들의 뿌리를 뽑아버리고 성전까지도 내버려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 거리가 되게 하겠다고 경고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는 동안에만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성전은 건물에 불과합니다. 오늘 교회의 건물이나 프로그램도 성도들이 말씀에 순종할 때에만 교회로서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바로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의 원하는 뜻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고 순종할 수도 없습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구원받았음을 감사하며 우리들끼리만 행복에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악한 세상이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지 않도록 빛과 소금으로 살며 구원의 길을 제시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해야 할 일입니다.

6. 노아의 홍수는 전도를 받고도 믿지 않았던 노아시대의 무지한 사람들의 죄 때문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사람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의롭게 살아야 할 사람들이 죄인의 무리에 가담하여 노아의 가족 이외에는 깨어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는 진노를 막아설 수 있는 열 명의 의인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롯의 가족이 그나마 아브라함 때문에 구원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교회는 각자의 구원은 물론이고 소돔과 같은 세상에 내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막아설 의인 열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겔 22:30은 죄와 우상숭배로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된 이스라엘에게 에스겔을 통하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라도 이 땅을 지키려고 성벽을 쌓고, 무너진 성벽의 틈에 서서, 내가 이 땅을 멸망시키지 못하게 막는 사람이 있는가 찾아보았으나, 나는 찾지 못하였다.” 교회는 의인을 찾는 하나님의 탄식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기도하고 안내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7. 이 어려운 때에 우리는 혼탁한 세상에서 구별되지 못했음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자신만을 위한 신앙생활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소원을 품은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깊이 알려는 열정으로 가득해져서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이 새롭게 되어야 하겠습니다. 중세교회는 흑사병이 번질 때에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했고 누구의 죄인지를 따지다가 혐오와 저주가 난무하게 했습니다. 자기만을 위하여 살면 이기적인 신앙생활에 머물 수 있습니다. 사회와는 동떨어진 게토화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더 나가면 인종차별이나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사용하여 선을 이루는 분이며 죄인도 회개하면 새롭게 만드는 분입니다. 그러니 어려울 때일수록 하나님과의 교제를 더 긴밀하게 하고 주변을 돌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8. 교회 안에서 다음세대를 믿음으로 양육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구역에서 협력하는 선교를 통하여 영혼을 사랑하는 법을 더 배우기 원합니다. 지역의 연합행사에 협력하고 신학생들을 후원하여 다음 세대의 사역을 준비하는 일도 해야 합니다. 사실 생명을 위협하는 전염병이나 전쟁과 테러의 위험은 늘 주변에 있었습니다. 전염병을 무서워하여 지나가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이런 때에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고 오히려 주변사람들과 소망을 나눠야 하겠습니다.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호흡하는 동안에 자기 역할을 바로 감당하는 것은 각자의 믿음의 결단에 달렸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교회를 사용하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예수 생명의 소망을 나누는 그 책임을 힘껏 감당해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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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5일 참 평안과 쉼을 얻는 길 (마 11:25-30)

1. 엊그제 서머빌에서는 세 명 이상의 파트너를 배우자로 인정하는 조례를 통과시켰습니다. 의료보험 혜택을 주기 위해서라는데 동성결혼도 모자라 가족개념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습니다. 개인이나 국가를 막론하고 자기 유익을 먼저 챙기는 시대에 우리가 삽니다. 일본이 자기들 유익을 위해 한국을 견제했는데 오히려 악재가 되었다는 뉴스를 듣습니다. 미국과 중국도 자기 유익을 위해서 힘겨루기를 계속하는 것을 봅니다. 이런 경쟁시대에 살다보니 휴가나 쉼을 갖는 것을 사치스럽게 여기며 일에 중독되어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전염병 때문에 여유 시간이 많아지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언가를 하고 있지 않으면 뒤처지는 것 같아 불안하기까지 합니다.

2. 전염병 때문에 억지로라도 쉬다보니 자연도 회복되고 매연이 사라졌다는 말을 듣습니다. 쉼과 안식은 하나님이 제정한 질서입니다. 하나님이 엿새 동안 창조사역을 하고 마지막 날에는 쉬셨습니다. 그러니 피조물은 창조주의 질서를 따라 안식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고 마땅한 일입니다. 쉼은 낭비가 아니라 더 효과적인 일을 위한 준비입니다. 그래서 경쟁과 분주함에서 벗어나 자기를 돌아보며 쉼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더구나 생명의 주인이며 우리를 먹이고 입히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야말로 쉼 중의 쉼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입니다. 돈과 일하는 것이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지 않도록 하는 제동장치입니다. 7년마다의 안식년에는 땅도 쉬고 종들에게 자유를 주고 빚도 탕감해 주게 했습니다. 쉼을 통하여 새로운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3. 예수님은 25절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일을 찬양했습니다. 천지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이 아닌 어린 아이들에게 구원의 비밀을 계시해 주셨음을 감사했습니다.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여겨 복음을 거부하는 교만한 자들보다는 어린아이처럼 솔직하고 순박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고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려주었습니다. 이들은 바울이 말한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벧전 2:2) 사람이며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는 계시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인 성령께서 도와주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할 수도 없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감추어진 비밀 같은 일을 우리에게 알게 하셨고 믿음을 갖고 살게 했으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고 감사합니다.

4. 예수님은 진정한 쉼을 주려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세상살이에 피곤한 사람은 물론이고 영적으로 무뎌지고 죄의 짐을 진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피상적인 신앙생활을 할 때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하나님을 경험할수록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우리의 진면목을 보고 탄식하게 됩니다. 시편 38:4처럼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바울도 롬 7:24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탄식했습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만 육신으로는 아직도 죄 가운데 있는 자신을 보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선은 행하지 못하고 원하지 않는 죄를 짓는 자신을 한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불러 자유와 평화와 안식을 주십니다.
5.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을 감사했습니다. 순전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을 알려주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된 것을 감사했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겸비하게 낮춰 아버지의 뜻에 순종했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구원받을 자들을 자신에게 주셨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자기에게 나오는 모든 자들에게 참 쉼을 주십니다. 구원은 금식하고 고행하고 선행을 하고 공을 쌓아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 놓은 길을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날마다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일상의 모든 일들도 주께서 운영하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갈 2:20의 고백이 우리의 것이 되기 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6. 그러므로 진정한 쉼은 예수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것은 모든 죄의 짐으로부터 자유하게 하는 진정한 쉼입니다. 롬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 해방이 우리를 주님 안에 계속 머물게 합니다. 구원은 예수 믿고 죽어 천국에 가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일상에서 누리는 것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힘과 능력이라는 것을 경험하며 살게 됩니다.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 새롭게 되었다는 확신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신감을 일상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는 성령께서 이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 안에서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쉼을 위해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순전한 믿음으로 성령께 순종하고 따라야 합니다.

7. 29절에서 더 구체적인 소망을 찾습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이 주시는 멍에를 메고 따르고 배우라고 합니다. 한 번의 결단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그 안에 머물고 배우고 따라가는 과정을 말합니다. 그런데도 피곤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이 주는 멍에는 쉽고 가볍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메고 따라가면 마음의 쉼을 얻습니다. 멍에는 조금 무겁고 불편한 것이지만 그것이 있어야 통제도 가능하고 똑바로 밭을 갈 수 있습니다. 대개 멍에는 두 마리 소에게 함께 씌웁니다. 때로는 젖먹이 송아지가 어미 소와 함께 쓰기도 합니다. 경험 없는 소를 경험이 많은 소와 함께 멍에를 지게 하여 배우게 합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이 함께 멍에를 져준다고 하면 이것은 송아지가 어미 소를 따라가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 멍에가 쉽고 가볍다고 하신 것은 무거운 짐을 예수님께서 대신 감당해 주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죄에서의 해방과 구원의 감격은 물론이고 일상의 일들도 해결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8.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가 보내신 성령의 통제가운데 있으면 아무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낼 수 없습니다. 환란을 만나도 피할 길을 주십니다. 혹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도 결국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믿는 믿음을 주십니다. 전염병의 두려움, 건강, 가족구원, 결혼, 자녀들의 진로, 신분문제, 경제적 필요, 노후생활과 죽음에 대한 문제 그 어떤 형편에 있든지 주님과 함께 멍에를 지고 주님께 맡겨 드리십시오. 그리고 그를 뒤 따라 배우며 그 안에서 참 평안과 쉼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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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28일 선으로 악을 이겨라(롬 12:14-21)

1. 마스크를 끼지 않았다고 논쟁하다가 총을 쏘기도 하고 동양인들을 바이러스의 원흉으로 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 배려하지 않고 사재기하는 사람이나 전염병이 돌자마자 총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런 사회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 그대로 돌려주고 싶은 것이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자비로움같이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직접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고 합니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사랑을 베풀어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그 행위가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쌓는 것이 되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길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2. 이런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깊이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아니고는 누구를 용서하거나 품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경험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그 사랑과 자비를 다시 비춰 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도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누구를 대접할 때에도 돌려받을 것을 계산하지 말고 다시 돌려줄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의 눈을 의식하거나 인정받고 격려 받기를 기대하면 실망할 수밖에 없기에 하늘 아버지께서 공평하고 공정하게 판단하실 것을 믿고 맡겨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선행과 봉사는 철저히 주님 앞에서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3. 교회는 힘 있고 내세울 것이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친목 단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용서를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결코 의를 행할 수 없는 타락한 본성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이런 모난 돌 같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 대속의 은혜로 구원하시고 불러내 공동체를 이루어 서로의 부족을 채워주며 그 사랑을 연습하게 하셨습니다. 이미 구원받았지만 아직도 모난 부분이 많기에 성령의 도움을 구하며 말씀을 따라 사는 훈련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아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우리의 공동 목표입니다. 뿐만 아니라 더불어 사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앞선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품고 기다리는 생활 훈련도 계속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자비와 겸손과 순종을 실천하고 연습하고 그리스도의 온전함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4. 로마교회는 믿음과 은사가 있었지만 유대인 성도와 이방인 성도들 사이의 분쟁이 있었습니다. 영적 우월감을 자랑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밖에서는 로마의 박해가 심했습니다. 50년경에 일어난 폭동의 주범으로 유대인들을 지목하고 로마에서 유대인을 추방했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고민하고 있을 때 고린도로부터 바울의 편지가 전해집니다. 하나님의 의와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구원받은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을 때에만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그가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해방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해야 할 성도들이 서로 다투고 미워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화목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영적 예배가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5.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을 오히려 축복하라는 말씀을 어떻게 적용하겠습니까? 이 미움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영적인 생활을 지속하기가 힘듭니다. 이것은 주님에게 눈을 고정하고 거기에 마음을 둔 성령의 사람만이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법으로는 불가능한 가르침입니다. 성령에게 속한 사람은 육에 속한 일들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을 기도하며 말씀 앞에 자신을 내놓고 복종하고 하나님의 다스림 가운데 거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롬 8:5-9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

6.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고 집요하게 따라다니던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손대지 않고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주권을 인정하고 그가 판단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복음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으면서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주님께서 거기 계신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무지한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순종이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이루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자기를 팔아 종이 되게 했던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살아 온 요셉은 그가 겪은 고난을 하나님께서 주신 훈련과정으로 이해하고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창 50:19-21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7. 이것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문제는 맡겨 드리고 우리는 서로 화목하게 사랑하는 것 말입니다. 병든 사회에 교회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이런 사랑과 자비를 나타내 회복과 구원을 제시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 수 있습니다.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비천한 사람들과도 사귈 수 있습니다.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기 기준으로 상대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한 마음 한 뜻되어 하나님이 영광을 받게 합니다. 교회는 세상 사람들이 사는 대로 따라갈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간 길, 자신을 내주어 모두를 살게 한 순종의 길을 따라야 합니다. 자신을 겸비하게 낮춰 각양의 다른 사람들과 화목을 이루십시오. 자기와 생각이 다르고 반대하는 사람들까지 품으십시오. 교회에서의 예배를 시작하는 일에도 서로의 다른 생각이 한 마음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자세이며 이것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길입니다.

8. 롬 12:1-2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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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21일 두려워하지 말라. (신 7:17-26)

1. 신명기는 출애굽 2세대들에게 가나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할 것을 다시 설교하는 내용입니다. 모세는 가나안이 눈앞에 보이는 곳에서 마지막 설교를 하며 38년 전 가나안을 정탐한 이후에 맛보았던 좌절과 실패를 언급합니다. 그 때 정탐나간 사람들은 크고 장대한 아낙 자손들을 보고 무서워했으며 자기들을 메뚜기처럼 하찮은 존재로 여겼습니다. 이런 부정적인 보고는 모든 백성들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고 두려움에 쌓인 백성들은 가나안 정복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이 믿음 없는 행동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이 말한 대로 광야에서 죽게 했습니다.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현실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했지만 하나님은 신실하게 이스라엘을 돌보셨고 대적하는 세력들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2. 믿음으로 행하지 못하는 것은 현실문제에서 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그 문제보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으면 담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도 사랑을 베풀어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고 먹을 것을 풍성하게 주시며 질병에서 보호해 주신다고 말합니다. 신 7:12-15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를 번성하게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네 토지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하게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하게 하시리니 네가 복을 받음이 만민보다 훨씬 더하여 너희 중의 남녀와 너희의 짐승의 암수에 생육하지 못함이 없을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 하사 너희가 아는 애굽의 악질에 걸리지 않게 하시고 너를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 걸리게 하실 것이라.”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을 취하는 데는 여전히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신 7:17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이 민족들이 나보다 많으니 내가 어찌 그를 쫓아낼 수 있으리요 하리라마는”이라고 두려움의 문제를 지적합니다. 이 문제는 광야생활 처음이나 지금 광야생활이 끝나가는 때나 변하지 않은 현실문제입니다. 광야에서 유랑하던 사람들이 정착 문화를 이루고 잘 훈련된 가나안을 상대로 싸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승산이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절대 능력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과거를 회상시킵니다. 신 7:18-19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로와 온 애굽에 행하신 것을 잘 기억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내실 때에 네가 본 큰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강한 손과 편 팔을 기억하라.” 수많은 어려움을 하나님의 도움으로 극복한 경험이 있는 백성들이기에 과거의 일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다시 새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큰 은혜요 복입니다.

4.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면서 이미 그 땅을 약속하셨고 이제 때가되어 모세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그 일을 실행합니다. 싸움은 하나님이 하실 것이니 가나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열방을 위한 제사장 나라가 되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죄와 우상숭배가 가득한 가나안 민족에 대해서는 긍휼을 베풀지 말고 진멸하라고 하십니다.(16절) 그냥 두었다가는 올무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게 행한 것처럼 가나안과도 직접 개입하여 싸울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왕벌을 보내 남은 자들을 좇아내겠다고 합니다.(20절) 그리고 이스라엘의 전투 능력을 고려해서 천천히 쫓아내겠다고 합니다(22절). 순간에 적들을 물리치면 좋을 텐데 그리하면 공백이 생겨 또 다른 들짐승과 같은 세력들이 차지할 수 있기 때문에 점진적으로 쫓아내겠다고 합니다. 인간은 내일의 일도 모르고 더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역량을 아시기에 감당할 만큼의 시험을 주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서두르지 말고 조금 천천히 가더라도 온전한 훈련과정을 견디는 것이 필요합니다.

5.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싸우면 승리합니다. 가나안 땅은 그들이 새롭게 거처할 곳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앞서 그들을 징벌하신 것이고 이스라엘은 도구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도와주셨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기시고 그들을 크게 혼란하게 하여 마침내 진멸하시고 그들의 왕들을 네 손에 넘기시리니 너는 그들의 이름을 천하에서 제하여 버리라. 너를 당할 자가 없이 네가 마침내 그들을 진멸하리라.”(24절) 이 싸움의 목적은 거처를 얻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열방에게 알리는 제사장적 책임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우상숭배와 세속적인 풍요가 아무리 좋아보여도 그것을 탐내지 말아야 했습니다. 조각한 신상들은 불살라버리고 신상에 입힌 은이나 금도 탐내지 말고 그것을 취하거나 집에 들이지도 말아야 했습니다. 그런 가증한 우상들은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이기에 적극적으로 진멸해야 했습니다.

6. 그러나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을 다 진멸하지 못하고 남겨 두었다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처럼 우상을 숭배하게 되었고 그 결과 결국 망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나 실수가 없음을 믿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연약하여 그 부름을 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살던 사람도 믿음을 등지기도 하고 촛대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자신을 쳐서 주 앞에 복종시키고 성령께 민감하고자 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우리가 본성적으로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겸손히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백성들과 함께 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도와주십니다. 어떤 형편에서도 겁내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 안에 거하십시오.

사 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시 16:8-9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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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14일 하나님을 아는 믿음(창 15:1-21)

1. 우리는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종종 만납니다. 과거 6 25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고 가족이 헤어져 아직도 생사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전염병으로 발이 묶여 불편한 중에 있습니다. 조금 나아지는가했더니 한쪽에서 다시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아브람에게도 어려운 문제가 생겼습니다. 가나안으로 이주해 와서 헤브론에 살고 있을 때에 그 지역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근동지역을 제패한 엘람 왕이 세 나라와 연합하여 사해 연안의 다섯 나라를 공격해 왔습니다. 대부분의 전쟁이 그러하듯 강대국 엘람이 조공을 내지 않고 반역을 시도하는 속국들을 길들이기 위해서 무력으로 쳐들어왔습니다. 가나안 북쪽에서 시작하여 거의 모든 지역을 제압한 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조카 롯이 살던 소돔 땅도 침공을 당하고 롯도 잡혀 갔습니다.

2. 소식을 들은 아브람은 개인 군인들 318명을 데리고 롯을 구하러 갔습니다. 전쟁에 익숙한 강대국의 군사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소수의 전력이지만 약 190km를 쫓아가 야간습격을 하여 크게 이기고 롯과 재산을 찾아왔습니다.(창 14:14-15). 하나님의 도움으로 싸움에서는 이겼지만 그 감격은 오래가지 않았고 적들이 다시 침공해 올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있는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나타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해 주십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아브람을 선택한 하나님이 그를 보호하고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창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3. 그런데도 아브람은 위로 받기보다는 자기의 근본 문제인 후사를 거론합니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창 15:2) 상급도 좋지만 빨리 자식을 주시어 대를 잇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답답한 마음에 집에서 자라난 몸종인 엘리에셀을 후사로 삼겠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서 나름대로 결정하지만 하나님의 계획과 차이가 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깊이 알지 못하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우선하여 따르기도 어렵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우선하면 우리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약속도 알지만 내 것을 내려놓기 어렵습니다. 죄 용서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 항상 죄책감에 사로잡혀 살고 구원의 확신도 없습니다. 확실한 기도의 응답을 경험해 보지 않았으니 절박하게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자기 욕심도 이루어보려고 합니다.

4. 하나님은 선택한 백성들을 그냥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도록 훈련하십니다.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서게 해서라도 자신의 무능을 깨닫고 눈과 마음을 하나님께 두게 합니다. 환란가운데 처하면 왜 나에게 이런 아픔을 주느냐고 질문도 하고 낙심도 하지만 결국 택한 백성들은 성령의 도움가운데 다시 일어서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결코 후회가 없습니다.(롬 11:29) 하나님은 아브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뭇별을 보여주며 그의 후손이 그렇게 무성하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 종이 아니라 그의 몸에서 나오는 아들이 후사가 될 것도, 그리고 후손들이 400년간 종살이 하게 될 것도 미리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믿음으로 응답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십니다.
5. 하나님의 시청각 교육을 통하여 아브람은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말씀에 근거한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창 15:6-7) 이전에도 알던 하나님이지만 지금 믿는 것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상황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하나님을 믿고 보니 약속의 말씀이 더 분명해졌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땅을 주시려고 아버지 집에서 불러낸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니 그를 더욱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보고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아브람은 이 믿음 때문에 나중에 이삭을 바치는 일도 결단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죽은 자도 살릴 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면 믿음으로 응답하게 됩니다. 구원도 문제 해결도 하나님을 깊이 알고 경험하는 이 믿음으로 받습니다.

6. 하나님은 믿음을 고백하는 아브람에게 약속의 증표로 쪼갠 제물 사이를 불로 지나갔습니다. 이 계약은 횃불언약이라고 하는데 하나님 혼자서 맺은 일방적이며 은혜로 맺은 계약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람과 맺은 이 약속 때문에 그들의 후손들을 지켜 주셨고 그들이 타락하여 벌을 받을 때에도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것도, 애굽 군대를 수장시킨 것도, 광야에서 40년을 먹고 지낸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골리앗을 이긴 다윗에게는 칼과 창이 아니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과 물맷돌이 있었습니다. 기드온의 승리는 군사의 수에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사용될 믿음을 가진 300명의 군사였습니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것은 전쟁물자가 아닌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순종이었습니다. 그 동일한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믿음을 다시 점검하고 하나님을 우선하는 믿음으로 살아야겠습니다.

7. 신 20:1 “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우려 할 때에 말과 병거와 백성이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이스라엘이 전쟁에 임할 때에 제사장은 먼저 이 전쟁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전쟁임을 선포하고 공동체가 온전히 하나님만을 신뢰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방해하는 요인들을 제거했습니다. 집을 짓고 준공하지 못한 사람, 포도원을 만들고 열매를 맛보지 못한 사람, 약혼하고 결혼하지 못한 사람, 전쟁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군인의 숫자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며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8. 코로나 바이러스를 이기는 길은 정부 보조금이 아니라 우리의 힘과 능력이 되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인종차별이나 인권문제도 서로를 존중하고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는 것이 해결책입니다. 개인과 가정과 일터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살고 죽는 일조차도 하나님께 권한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니 호흡하는 날 동안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흐트러짐 없는 믿음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라는 말씀을 붙들고 믿음의 길을 함께 달려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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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7일 찬송 받으실 하나님 (엡 1:1-14)

1. 구약의 처음 아버지들의 예배는 극히 개인적이었습니다. 특별한 의미를 갖는 장소에서 제단을 쌓거나 짐승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성막이 건축되고 제사에 관한 구체적인 지침을 받은 이후에서야 체계적인 성막제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분열되자 예배 장소도 예루살렘으로만 고집할 수 없어서 북쪽 사마리아 사람들은 벧엘에 따로 성전을 모방한 예배 처소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포로생활을 하면서는 성전예배가 어려워지자 회당에서 말씀을 배우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절하며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다렸습니다. 회당예배는 예수님 당시에도 계속되었고 성령강림이후에 교회가 생기면서 오늘과 같은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영적인 예배가 생겨났습니다. 물론 정치적인 이유로 교회가 카톨릭과 정교회로 나누어지고 나중에 종교개혁을 통하여 개신교가 분리되었지만 이 모든 역사를 통치하는 주인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2. 우리의 신앙고백은 성경 말씀에 근거해야 합니다. 성경은 약 1500여년의 역사를 40여명의 저자들이 성령의 감동을 따라 하나님이 하신 일을 각기 기록한 책입니다. 그것도 원본은 전해지지 않고 사본으로 발견되어 나중 사람들이 말씀을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많은 글들 중에 하나님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하는 것들과 교회 신앙전통에 어긋나지 않는 글들을 선택하여 신앙의 기준인 정경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성령의 계시와 조명해 주시는 은혜를 전제로 했습니다. 인쇄술이 발달한지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그 이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죽이나 나무껍질에 손으로 적어 간직했습니다. 그것을 옮겨 적거나 취급하는 사람도 따로 있었고 일반 성도들은 예배 중에 듣기만 할 수 있었습니다. 요시아 왕이 성전을 수리하다가 창고에서 율법 책을 발견하고 그 글을 읽고 회개하고 종교개혁을 단행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니 한동안은 율법을 듣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자기 생각대로 섬겼고 그러다보니 우상 숭배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기준이 되는 말씀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3. 구약성경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에스라에 의해 BC 440년경에 24권으로 모아졌습니다. BC 300년경에는 나라를 잃고 헬라지역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을 위해서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했는데 이것을 70인 역 성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성경에는 신구약 중간기 약 400년 동안에 쓰여 진 외경들이 포함되었습니다. 어떤 외경을 포함하느냐에 따라 카톨릭은 46권, 정교회는 49권의 구약 성경을 갖고 있으며 교리적인 차이들도 외경의 내용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은 바울이 주후 50년경에 쓴 고린도전서가 가장 먼저 기록되었고 복음서 중에서는 마가복음이 AD 65~70년경에 처음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처음부터 목격하고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들은 사람들이 전해준 말을 기록한 사람들이 많습니다.(눅 1:2) 이런 여러 책 중에서 AD 397년 카르타고 회의에서 27권을 정경으로 채택했습니다.

4. 초기 교회는 AD 313년이 되어서야 로마의 인정을 받고 자유를 얻었고 AD 325년에 되어서야 니케야 회의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정리했습니다. 교회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가르침들 때문에 혼란스러웠고 이단 논쟁도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우리 손에 들려지기까지는 이런 아픔과 인내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오늘은 교회달력에 의하면 삼위일체 주일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삼위일체를 양태론적으로 설명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액체상태의 물이 기체인 수증기와 고체인 얼음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혹은 한 남자가 아버지와 남편과 사장님으로 일하는 것처럼 한 하나님께서 때마다 다른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고 설명합니다. 그럴듯한데 이것은 세 분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미 초대교회 때에 이단으로 판정된 사상인데 지금도 이단들이 즐겨 사용하고 있습니다.

5. 성부, 성자, 성령님은 본질적으로 동일하시지만 각기 고유하게 존재하고 구별된 일을 하십니다. 완전히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세 분 하나님이지만 또 완전히 상호 의존하여 본질적으로는 하나인 분입니다. 분명히 세 분인데 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셔야 하는 일이고 이해하기 보다는 믿음으로 고백해야 하는 신비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성부는 구원할 사람을 미리 정하고 선택하고 불러주시고 성자께서는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 구원을 이루시고 성령께서는 그 구원을 확증해 주신다고 했습니다.(엡 1:1-14) 우리 모두는 성부 하나님의 구원 경륜에 따라 창세전에 선택받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을 받아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믿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하나님의 비밀스런 구원의 일을 밝히 드러내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대신 죽고 부활하고 승천하는 일련의 순종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만 세상에 드러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 구원의 일이 우리에게 적용되도록 도장을 찍어 보증해 주십니다.(엡 1:13-14) 그 인치심이 있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6.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며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때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임하여 그 위에 머물렀 습니다.(요 1:32) 하늘에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는 성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공생애의 시작은 이렇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협력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요한은 요한일서 4장에서 하나님을 사랑으로 설명했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사랑(요일 4:8)이신지라 죄인을 구원하려고 독생자까지 내주셨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성부의 사랑을 보여 주려고(요일 4:9) 십자가에서 죄인들을 위하여 대신 죽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그런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도록 도와주십니다.(요일 4:13). 이렇게 각기 일하는 세 분의 하나님은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한 분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우리들이기에 하나님을 찬송하고 영광을 돌립니다.

7. 성경 여러 곳에서 삼위 하나님의 협력을 찾을 수 있지만 삼위일체라는 단어도 없고 또 제한된 인간의 지각으로 다 이해할 수 없다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를 감동하고 조명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롬 8:9) 성령의 인치심의 은혜를 더 깊이 경험하며 하늘의 신령한 복을 주신 하나님을 마음껏 기뻐하고 찬송하기 바랍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여호와를 알되 힘써 알자고 했습니다. 새벽빛같이 일정하게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은 제사보다 사랑을 원하시는 분이니 하나님을 아는 일에 힘쓰자(호 6:3,6)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 변화, 죄 용서 받은 일, 영원히 누릴 영광스런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생각하며 옥중에서 소리쳐 찬송했던 바울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려운 때를 살고 있지만 하늘의 신령한 복을 주신 하나님을 크게 찬송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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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31일 하나님의 구원 계획(행 2:1-4, 36-41) 성령강림절

1.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주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백성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서운하게 했습니다. 선지자들은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주고 백성들로 회개하고 돌이키게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백성들이지만 하나님을 최우선에 두지 않았고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겨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따랐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공의는 행하지 않고 착취와 미움과 싸움을 반복했습니다. 정치 지도자도 부패하고 영적 지도자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모두들 자기 배를 채우기에 급급했습니다. 백성들은 불합리한 사회구조 속에서 고생해야 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2.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여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촉구했습니다. 요엘 선지자도 크고 두려운 여호와의 날에 대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이 지금이라도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회개한다면 여호와의 심판의 날이 변하여 구원의 날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주변 강대국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의 날이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요엘은 결국 메시아가 오시어 구원하실 것을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요엘 2:21-23)하라고 말하며 여호와가 행하는 큰일 곧 구원의 일을 설명했습니다.

3. 욜 2:27-32 “그런즉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4. 성령의 오심은 함께 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는 하나님은 더 이상 이스라엘이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구원하십니다. 말세에 남녀노소의 구분하지 않고 만민에게 성령을 부어 주어 꿈꾸고 예언하며 하나님의 능력가운데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극심한 심판 중에서도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게 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멸망에 이르지 않고 영생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요 3:16) 하나님의 관심은 결국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품에 거하는 것입니다. 승천하기 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신 것도 성령님이 오셔서 예수님이 하던 일을 계속할 것이고 제자들에게 위임한 모든 사람을 제자 삼는 일도 가능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과 함께 하는 것이 어떤 일을 하고 결과를 내는 것보다 우선되는 중요한 일입니다.

5.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함께 모여 기도하다가 성령님을 충만하게 경험했습니다. 누가는 성령강림의 모습을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2절) ‘불과 같이 갈라지는 혀(3절)로 묘사했습니다. 제자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로’(행 2:4) 말했고 각 지방에서 온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내용을 자기 말로 들었습니다. 바대, 메디아, 엘람, 메소포타미아, 유대,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 이집트, 리비아, 로마, 크레테, 아라비아에서 온 사람들이 자기 말로 설교를 들었습니다. 이들은 포로기 이후에 다른 나라에 정착한 유대인들인데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하나님의 행하신 기이한 일을 보았습니다. 누가는 이 일을 성령께서 주도하셨다고 말합니다. 제자들이 방언을 말하게 된 것도 그렇고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한 빌립도 전도행위도 ‘성령이 빌립에게 말씀했다’(행 8:29)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은 성령의 주도적인 일하심에 순종한 결과물입니다. 성령님은 제자들과만 함께 한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예수를 주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지금도 말씀을 믿고 사모하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충만하게 임하십니다.

6. 제자들은 성령께서 주시는 권능으로 일했습니다. 더 이상 겁쟁이처럼 숨어 지내던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압제자들 앞에서도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담대하게 말하게 되었습니다. 성도들도 삶의 우선순위와 가치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날마다 모여 기도하며 말씀을 듣고 서로 사랑하며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변화는 주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고 스스로 찾아와 예수를 믿는 사람이 하루에도 수천이나 되었습니다. 성령께 순종한 결과였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일을 자기가 경험한 이야기로 쉽게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셔서 그리스도와 주가 되게 하셨다고, 예수 이외의 다른 이름을 통하여 구원받을 수 있는 이름이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성령께서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찔림을 주셨고 어찌해야 할지를 묻는 회개가 일어났습니다.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행 2:38)고 가르쳤습니다. 성령께서 지금도 교회를 통하여, 구원받은 우리들을 통하여 구원의 일을 계속합니다.

7. 이렇게 보면 교회는 구원에 대한 경험담을 나누고 실천하는 곳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간증을 사용하여 구원받을 사람들을 살려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선전하고 찬양하며 예배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배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깊은 기도생활로 성령 안에 거하는 즐거움을 누리기 원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만을 제일로 삼고 범사에 그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가장 큰 사랑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전하여 영생을 얻게 하는 일입니다. 맥추절은 구약의 선배들이 봄철 첫 열매로 하나님께 감사하던 절기입니다. 맥추절이 오순절이고 이날에 성령께서 강림했습니다. 맥추감사주일이라고 이름 하여 드리는 오늘의 예배가 만민을 구원하시려고 성령을 부어주신 하나님께 깊이 감사하고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널리 알리는 기회가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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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24일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 (눅 24:49-53, 행 1:1-11)

1.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신자들이 점점 세상을 떠나게 되자 교회는 예수님에 관한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겨야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바울과 함께 사역했던 누가도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적어 데오빌로에게 보냈습니다. 눅 1:1-4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그런데 예수님의 승천에 관해서 기록하면서 누가복음에서는 승천장소를 베다니로 기록했고 사도행전에는 감람산으로 적고 있습니다. 이런 차이 때문에 성경을 불신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저자가 무엇을 강조하는가에 따른 사소한 차이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고 낙심했던 마음에 기쁨과 소망으로 가득해졌습니다. 부활하여 40일을 함께 하던 예수님이 승천했지만 그 일도 부활의 연속으로 이해되었을 것입니다. 부활의 감격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열흘 동안이나 함께 모여 기도하게 만든 힘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헤어진 슬픔보다는 약속에 대한 기대가 더 컸습니다.

2. 예수님의 승천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는 구원사역의 한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였습니다. 성자 예수님이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은 일은 죄를 철저하게 벌해야하는 하나님의 공의 때문입니다.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승천은 예수님이 지상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성육신 이전의 본래의 자리인 하나님 옆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곳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광의 자리입니다. 그가 승천함으로 성령께서 그 일을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요 16:7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 7:39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3. 예수님은 제자들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서 승천했습니다. 요 14:1-3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고 너희에게 말했겠느냐?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내가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에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 그러니 처소가 준비되면 주님께서 우리를 데리러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름을 타고 영광중에 재림하실 것이고 성도들과 함께 영원히 거하실 것입니다. 계 1:7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살전 4:16-17“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4.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권세와 능력의 자리에 앉아서 교회와 그의 왕국을 다스리고 통치합니다. 막 16: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벧전 3:22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골 3:1“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행 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베드로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오른손으로 높여 하늘과 땅의 모든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진 왕이 되게 했다고 설명했고 바울도 예수님께서 승천함으로 그리스도와 주가 되어 만물을 다스린다고 말했습니다. 엡 1:20-22 “하나님께서는 이 능력을 그리스도 안에 발휘하셔서,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쪽에 앉히셔서 모든 정권과 권세와 능력과 주권 위에, 그리고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 일컬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굴복시키시고, 그분을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5. 예수님은 그곳에서 성도를 위하여 중보하십니다.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십니다. 히 4:15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그분은 자기의 영이며 진리의 영인 성령을 보내어 우리로 진리 가운데 거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성령의 은사를 주어 성도들이 여러 가지 봉사의 일을 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게 합니다. 그리고 최후 심판대에서도 우리를 변호해 주실 것입니다. 엡 2:14,16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우리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일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계속 도와주십니다.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6. 예수님의 승천으로 그가 지상에서 하던 복음 선포의 일이 제자들에게 위임되었습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성령께서 제자들을 능력 있게 세워주셨고 복음을 전하게 했다는 것을 기록했습니다. 지난 2천년의 신약교회의 역사는 성령의 주도적인 사역에 순종한 성도들의 역사입니다. 시대마다 이 부름에 응답한 성도들을 통하여 당대의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오실 때까지 성령께서 주도하는 복음전파의 일은 우리를 통하여 지속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며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고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우리들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결하게 살며 주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겠습니다. 요일 3: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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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17일 고난 중에 드리는 기도 (시 77:1-15; 요 16:24-33)

1. 지난 주간에 목사님들끼리 회의를 하며 우리 시대의 변화에 어떻게 대처할까를 생각했
습니다. 적당한 때에 다시 모임을 시작할 수 있겠거니 하고 기다렸는데 예배실을 소독하
는 일이나 어린이들의 모임 등을 생각해보면 간단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내일이면 일부
사업장은 문을 열겠지만 교회는 언제 다시 모이게 될지 좀 더 지켜봐야 하겠습니다. 교회
가 마음 놓고 예배할 수 없는 이런 상황에서 스스로 주님과 교제하고 주님의 평강을 누리
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은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인내력을 충분히 발휘하
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십시오.”(약 1:2-4) “여러분 가운데
고난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약 5:13)

2. 고난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인 경우가 있습니다. 또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나누는
아픔일 때도 있습니다. 가슴 깊이 회개할 때 생기는 고난도 있고 더 큰 악을 막기 위한
경고로 주시는 아픔도 있습니다. 더나가서는 그리스도를 닮도록 연단하기 위해서 주시는
고난도 있습니다. 시 77편의 저자는 고난을 당하여 밤새도록 두 손을 들고 하나님께 부르
짖어 기도하다가 말할 힘이 없어질 만큼 지쳤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영원히 버린 것일
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않는 것일까? 하나님의 노여움이 커서 긍휼을 거두어들이신 것
일까?’ 하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주님
께서 하신 일들을 하나하나 다시 회상하고 깊이 되새겼습니다. 이런 의지적인 믿음의 행
위를 통하여 해답을 찾았습니다. 불안과 근심은 사라졌고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을 감사하
고 노래했습니다.

3. 예수님은 지상 사역을 마치고 하늘 아버지께로 올라가면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응답을
약속했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
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
하리라.”(요 16:23-24)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제자들
이 상심하고 흩어질 것을 아셨고 세상의 미움을 받을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수
있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성도는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에 관한 모
든 것을 가르쳐 주고 믿음으로 살게 합니다. 우리의 약함을 아는 성령께서는 어려움을 인
내하도록 힘을 주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도와주십니다.

4.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듣고 배웠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요
16:30)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보라 너
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요 16:31-32) 믿음이 약한
제자들을 위해 장차 일어날 일을 미리 알려 주셨습니다. 33절에서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
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라고 말씀했습니다. 다 흩어져버릴 연약한 제자들이
지만 예수님 안에서 이길 수 있다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5. 기도는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의 뜻을 배우는 일입니다. 바른 기도는
바른 관계에서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 나라와 뜻이 우리를
통하여 나타나기를 바라는 성숙한 성도가 바른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
로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과 우리가 서로 바른 관계에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숙
한 성도는 자신의 필요보다 하나님의 영광에 더 마음을 둡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를 때에
만 믿음으로 반응하고 일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영혼을 새롭게 하고 구원하시는
성령님을 배우고 경험하는 훈련장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대로 활동하지 못하고 답답한 시
간을 보내는 때에 성령 충만을 위해서 집중하여 기도하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6.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결코 실수가 없습니다. 신앙선배들은 문제를 만날 때마다 하
나님을 피난처로 삼았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자신을 점검하고 돌
아보았기에 고난이 오히려 하나님을 경험하는 복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
고 애굽에 팔려 옥살이를 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통하여 훈련했고 애굽의 총리가 되게
했습니다. 모세는 젊은 혈기로 동족을 살해하고 광야로 도망쳐 인생을 허비한 것처럼 살
았지만 하나님은 그를 불러내서 자기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으로 동족을 구하게 했습니
다. 다윗은 정치 망명을 다니던 광야훈련학교에서 하나님만이 유일한 피난처라는 것을 배
웠고 주옥같은 시편을 기록하여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옥중서신을 기록했고 사도 요한도 밧모 섬에 갇혀서 요한 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우리도
격리되어 지내는 이 기간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7. 이번 주간 선지서를 읽다가 삼일 밤낮을 물고기 뱃속에서 철저하게 회개하면서 드린
요나의 기도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의 기도는 다급해서 살려달라는 문제 해결을 위한
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응답을 미리 확신하고 노래한 기도였습니다. 욘 2:2,6 “”내가 고
통스러울 때 주님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님께서 내게 응답하셨습니다. 내가 스올 한가운
데서 살려 달라고 외쳤더니, 주님께서 나의 호소를 들어주셨습니다. 나는 땅 속 멧부리까
지 내려갔습니다. 땅이 빗장을 질러 나를 영영 가두어 놓으려 했습니다만, 주 나의 하나
님, 주님께서 그 구덩이 속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미리 노
래할 수 있었던 믿음의 사람, 회개한 요나를 하나님께서는 다시 사용하여 니느웨 사람들
을 구원했습니다.

8. 우리도 이런 믿음의 기도를 드릴 만큼 성숙해져서 하나님께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하
나님이 사용하는 도구이며,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요, 하나님 나라를 이어갈 상속자이
니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도록 우리와 후손들을 건강하고 형통하게 해달라고 기
도합시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일하는 성령께 순종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어가고 대물림
해주는 교회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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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10일 크신 하나님의 사랑(요일 3:1-10) 어버이주일

1. 염낭거미 암컷은 풀잎을 둘둘 말아 천적이 접근하지 못하게 공간을 만들고 알을 낳습니다. 그리고 새끼가 부화하면 자신의 몸을 새끼들을 위한 먹이로 내줍니다. 또한 가시고기의 수컷도 암컷이 알을 낳으면 먹지도 않고 알을 지킵니다. 둥지 앞에서 열심히 부채질을 하여 산소를 공급해주고 적들이 가까이 오면 등에 가시를 세워 겁을 주고 쫓아냅니다. 새끼들이 먹이활동을 시작하면 앙상해진 자신의 몸을 새끼들의 먹이로 내줍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에 부모의 희생과 사랑을 기억하며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생각합니다. 모든 부모는 자녀들이 건강하게 성장하여 가정을 이루고 자기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자녀를 위한 부모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며 일방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2.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대해 말합니다. 빛이신 하나님이 죄와 어둠에 처한 인간과 사귐을 갖기 위해서 육체를 입고 세상에 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자유하게 하려고 유월절 희생 짐승처럼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어 십자가를 지고 대신 죽었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생명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성령 안에서 살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립니다. 우리가 아직 죄 가운데서 하나님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집나간 자식을 기다리던 아버지가 다시 돌아온 아들로 기뻐하고 잔치를 베푼 것처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우리들을 용납하고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 사랑을 받은 우리들이기에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3. 부모의 생각을 알아야 효도할 수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아야 제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도 죄를 멀리하고 거룩해야 합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죄는 마귀에게 속한 것입니다. 과녁을 빗나간 화살처럼 하나님의 계획과 기대에서 벗어나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일 3:4에서 죄를 불법이라고 했고 8절에서는 죄를 짓는 사람을 마귀에게 속한 자라고 말했습니다. 아담이 불순종의 죄를 지은 후에 수치심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피했습니다. 바른 관계에 있을 때는 모르던 것인데 단절이 생기자 어둠에 빠졌습니다. 죄의 결과로 하와는 해산의 수고를 해야 했고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냈습니다. 아담은 힘들게 노동해야만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흙으로 다시 돌아가는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4. 불순종은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사 1:2-3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라고 하나님을 떠난 타락한 이스라엘을 꾸짖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켰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입니다. 9절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 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라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구원을 보증해 주고 믿음으로 살게 도와주시기에 성도는 지속적이고 고의적인 죄를 짓지 못하는 것입니다. 혹시 죄를 짓더라도 깨닫고 회개하고 그리스도로 옷을 입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하는 표시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계속 죄 가운데 머문다면 그는 하나님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5. 영적승리의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죄는 마귀에게 속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귀의 일을 멸하려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은 마귀와 죄에서 자유롭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는 바로 성도들을 위한 것입니다. 바울이 롬 8:1-2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고 선언한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성령 안에서 죄 사함의 기쁨을 누리며 삽니다. 주께서 세상에 다시 오실 때에 우리도 그와 같이 영광스럽게 변화될 것을 믿습니다. 그날에 우리가 주님을 얼굴과 얼굴로 대면하여 볼 것입니다. 이 소망 때문에 거룩함을 연습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6. 부모를 사랑하는 자녀는 부모의 성품을 닮아갑니다. 거룩함에 대한 열망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니 그의 자녀들도 거룩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하나님과 재물을, 하나님과 마귀를 함께 섬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을 높이고 순종하며 닮아가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롬 8:5-8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어느 편에 설 것이며 얼마만큼 주님을 사랑하고 따를 것인지는 각자가 결정해야 할 일입니다.

7.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식은 형제끼리 화목합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형제의 필요를 구체적으로 채워주는 행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라고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진리가운데 있으며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길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자녀답게 아버지의 뜻을 바로 이해하고 서로 사랑하기를 연습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주의 말씀으로 훈계하고 믿음의 본을 보이십시오. 자녀들은 부모를 하나님의 대리자로 여기고 순종하고 공경하십시오. 부부는 서로를 자기 몸처럼 귀하게 여기고 서로의 본분을 다하십시오. 이런 형제 사랑이 가정을 통하여 교회로 세상으로 흘러가게 하십시오.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나누는 복된 가정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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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3일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 10:1–18)

1. 얼마 전 구역모임에서 엡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라는 말씀의 뜻을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으로 충만해진다는 것은 주님을 깊이 알고 그 신앙고백이 생활에서 묻어나 또 다른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사람뿐 아니라 자연 만물까지 창조 때의 모습으로 완전하게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신앙생활이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더 크게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전에는 자신의 야심을 채우려고 했다면 성령 충만을 경험한 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그의 부활을 담대하게 전하여 듣는 자들이 구원에 이르게 했습니다. 교회는 날마다 모여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며 서로 사랑했습니다. 이들의 변화된 생활은 더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갖게 했고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2. 변화는 주님과의 만남에서 이루어집니다. 요한복음 4장에 예수님을 만나고 삶이 바뀐 사마리아 여인이 나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되는 범상하지 않은 생활을 하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완전히 다른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죄도 깨닫고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기쁨과 감격을 혼자 간직하지 않았고 보물을 발견한 사람처럼 동네로 뛰어 들어가 자기를 변화시킨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더 이상 숨어 지내지 않았고 메시아를 만난 소식을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는 날 때부터 소경되었던 자가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고 예수님을 선지자로 믿게 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범한 예수님을 죄인으로 단정했고 그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는 눈뜬 사람을 출교해버렸습니다. 소경이 보게 된 기쁨은 그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고 단지 기득권에 도전하고 불편하게 하는 예수님을 처단할 궁리를 했습니다.

3. 오늘 교회 안과 밖에는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들이 참 많습니다. 진리에 대한 열정도 있고 자기 신념에 투철한 모습도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거짓과 참을 구분하고 삯군 목자와 참 목자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 24:23-24) 하나님은 제사장과 율법 교사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맡겼지만 제대로 돌보지 않고 자기 욕심을 채웠기에 그들을 삯군 목자라고 불렀습니다. 품삯을 위해서 일하는 일군은 자기 유익을 위해서 일하다가 위험이 닥치면 도망쳐 버립니다. 책임도 없고 소명의식도 없고 자기에게 돌아올 이익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자기 소원성취를 위해 열심을 내다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낙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른 믿음은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여 말씀에 순종하고 그를 기쁘게 하기 위한 것에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4. 선한 목자는 자기 양을 충성스럽게 돌봅니다. 흩어진 양들을 모아 집으로 데려와 좋은 꼴로 먹이고 돌봅니다. 상처를 싸매주고 다친 곳을 치료하여 줍니다.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요 10:11-12)라고 했습니다. 선한 목자는 맹수의 공격으로부터 자기 양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목숨을 내놓기도 합니다. 빈들에서 밤을 지새울 때는 임시 울타리를 만들고 그 문에 앉아 양을 지킵니다. 이 문을 통하지 않고는 출입을 하지 못하게 지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한 것은 그가 양 무리를 지키는 목자이고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5. 참 목자는 양의 소리만 듣고도 문제가 무엇인지 압니다. 그런 자상한 목자의 돌봄을 받는 양은 주인의 목소리를 알고 따릅니다. 14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고 했습니다. 여기 ‘안다’라는 말은 상대를 지식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속적이고 친밀한 관계 안에서 경험을 통하여 서로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결혼관계를 통하여 부부가 서로를 경험적으로 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여 우리를 살렸습니다. 죄의 굴레를 벗겨 주시고 상처를 치료해 주시고 의의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경험적이고 인격적인 교제를 더해가도록 지혜와 계시의 영인 성령을 통하여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해주십니다.

6.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우리들의 모든 필요를 압니다. 자신의 목숨까지 내주신 참 목자이신 주님은 우리를 인도하여 푸른 초장과 잔잔한 시내에서 먹고 쉬게 합니다.(시 23) 예수님은 이런 회복과 평안을 주기 위해서 십자가 고난의 길을 스스로 선택했습니다. 요 10: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아버지의 뜻에 마지못해 따른 것이거나 실패한 결과로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양들을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내놓은 적극적인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몸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양으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선택이었습니다.

7. 그러므로 그 사랑을 입은 우리들도 주님을 기쁘게 하려고 힘쓰는 것입니다. 요 10: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주님께서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관심이 있었고 심지어는 이방인들까지도 구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0-21)라고 기도했습니다. 제자들을 통하여 앞으로 믿게 될 사람들까지 염두에 두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니 은혜를 입은 우리들이 주님의 소원을 품고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8. 어린이주일입니다. 잠 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라고 했습니다. 범사에 주를 인정하고 말씀대로 살아 참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호와 인도를 받기를 축복합니다. 그 사랑에 감사하여 교회 안과 밖의 영혼을 섬겨 목자이신 주님을 기쁘게 하는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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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26일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눅 24:30-35, 요 11:25-27)

1. 오늘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제목으로 부활과 영생에 관해 생각해 봅니다. 부활에 관한 소식을 들고도 믿지 못하고 고향 엠마오로 돌아가던 두 제자를 예수님이 만나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얼마나 상심이 컸던지 눈이 가려져서 길에서 만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십자가 죽음과 부활소문을 설명했지만 정작 그들의 마음은 텅 비어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씀을 풀어주시며 메시아가 고난을 받지만 다시 부활한다는 약속의 말씀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날이 저물자 마을에 들어가 함께 음식을 먹으며 떡을 떼어 축사하시고 그들에게 나눠 주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의 눈이 밝아져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이상 그곳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기들을 만나주셨다는 것을 알게 된 제자들은 길에서 말씀을 들를 때에 마음이 뜨거워졌던 것을 기억해냈습니다. 그들은 즉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다른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2. 부활신앙은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증언을 통하여 2천년 교회 역사를 흘러 왔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을 믿게 된 것도 우리에게 그 소식을 알게 한 누군가의 증언과 우리의 눈을 열어 믿게 한 성령의 도우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죄인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고 영생을 얻도록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요 6:35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 11:25-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라고 말씀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을 얻습니다. 구원은 지금이나 장차 죽은 후에도 영원하신 주님 안에서 영원히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3. 요 11장에는 나사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는 기쁜 소식을 말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더나가서 생명의 주관자이신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그 이후의 부활을 미리 말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기절했다가 살아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알도록 나흘이나 지나 살아날 소망이 끊어진 때에 창조주의 능력으로 명령하여 그를 살려냈습니다. 생명을 주관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사용하여 사렙다 과부의 아들을 살렸고 엘리사를 통하여 수넴 여인의 아들을 다시 살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뿐 아니라 나인 성 과부의 아들도 살려냈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는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 죽은 자들이 많이 살아났습니다.(마 27:52-53) 성령으로 충만한 베드로를 사용하여 도르가를 살렸고 바울을 사용하여 창에서 졸다가 떨어져 죽은 유두고를 다시 살게 했습니다. 이 일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해야 하는 아픔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입니다.

4. 죽음은 지금까지의 경험과 만남이 중단되고 사라지는 아픔입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의 죽음은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요 5:24에서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응답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은 나중에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영원히 함께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믿을 때에 이미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나중에 죽어도 주 안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원받은 성도는 사나 죽으나 영원하신 주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마지막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시작이며 그 후에 받을 상급을 소망하고 예수님을 대면하여 볼 것을 기대합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요 5:28-29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살전 4:16-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5. 그러니 어떤 경우에도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썩지 않는 영원한 유업을 약속받은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이유는 세상을 이긴 예수님 안에 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유혹이나 시험이나 환란이나 심지어는 죽음조차도 성도를 묶어둘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향하여 일어나라고 말씀하자 모든 묶은 것들이 풀어지고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죽음도 더 이상 그를 가두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다 포기하고 낙심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던 제자들의 발걸음을 돌이켜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했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들의 문제와 아픔도 다루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가 무엇이든지 못할 일이 없으신 그분께 맡기십시오. 그리고 어떤 형편에서든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시다.(고전 15:57)

6. 어떤 사람이 요한 웨슬리에게 오늘 죽는 것이 확실하다면 하루 동안 무엇을 하겠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웨슬리는 다른 날과 다름없이 설교준비하고 심방하겠다고 대답했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람의 대답입니다. 오늘 우리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길에 들어서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예수 안에서 영원히 죽지 않다는 부활신앙으로 담대하게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7. 롬 8:33-39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감히 고발하겠습니까?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누가 우리를 죄인으로 단정하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항상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니다. 그런데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는단 말입니까? 고난입니까? 의로움입니까? 핍박입니까? 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거뜬히 이깁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지옥의 권세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은 것이나 깊은 것이나 그 밖에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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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19일 온전한 믿음 (수 14:6~15)

1. 신앙생활은 지식적인 깨달음만이 아니라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말씀을 믿고 따르며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고 다만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들에 관심을 두고 성공과 형통을 위해 기득권 세력과 결탁하여 인본적인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군중들이나 심지어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하나님 나라를 배우고 기적을 경험했지만 하나님의 구원계획이었던 십자가 죽음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기들의 기대와 소망이 물거품처럼 사라지자 믿음조차 흔들렸습니다.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변함없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2. 부활 이전의 제자들은 주님 나라가 이루어질 때에 누가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겠는가 하는 세속적인 관심이 컸습니다.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아들들이 왼쪽 오른쪽에 앉기를 청탁을 할 때 모두 화를 낸 것을 보면 분명합니다. 그 꿈이 사라지자 낙심하고 다 흩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는 그들의 믿음에 흔들림이 없었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그의 부활을 담대하게 증거 했습니다. 핍박과 고난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죽는다 해도 다시 부활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예배 때마다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고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사는 일이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부활한 것도 사실이 아닐 것입니다. 그가 부활하여 죽은 자의 첫 열매가 되었다면 우리도 분명 다시 살게 될 것입니다. 부활신앙은 신앙생활의 근간이 되고 온전한 믿음을 갖게 합니다.

3. 갈렙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따른 사람입니다. 수 14:14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 민 14:24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민 32:11-12 “애굽에서 나온 자들이 이십 세 이상으로는 한 사람도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을 결코 보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를 온전히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러나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여호와를 온전히 따랐느니라.”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다고 했는데 온전하다는 말은 하나님이 만족할 만한 자세로 하나님의 뜻에 충성스럽게 순종했다는 말입니다.

4.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열 명의 부정적인 보고는 사람들을 낙심시켰습니다. 사람들은 밤새 통곡했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다른 리더를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민수기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은 일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일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출애굽 일 세대들이 죽기까지 광야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곳이니 믿음으로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확신했습니다.(민 14:7-9). 갈렙은 백성들의 믿음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자기 옷을 찢었고 하나님께서 그 땅을 주실 것이니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고 그 땅의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백성들을 격려했습니다. 주위 환경에 동조하지 않고 하나님만 신뢰하고 그의 뜻을 따른 것이 온전한 믿음입니다.
5. 믿음으로 산다고 늘 형통한 것만은 아닙니다. 백성들은 갈렙이 하는 말을 듣기 싫어했고 돌을 들어 치려고 했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만 보고 자기 경험으로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현실을 바라봅니다. 비록 어려운 일을 만나도 그것에 굴복하지 않고 그것보다 더 크신 하나님께 마음을 둡니다. 갈렙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충성스럽게 믿음을 지켰습니다. 가나안에 들어와 5년이 되어 땅을 분배할 때에 갈렙은 거인들이 사는 정복하기 어려운 헤브론 산지를 자기 기업으로 달라고 여호수아에게 요청했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한 그 땅을 이제 취하려는 것입니다. 수 14:12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그의 믿음은 45년의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움직이고 있었고 온전한 믿음으로 순종하게 했습니다.

6. 온전한 믿음은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과 목숨을 건 영적대결을 해야 했습니다.(왕상 18:19) 하나님이 미워하는 우상숭배가 창궐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진 백성들은 무엇이 진리인지 구별하지 못하고 세상의 흐름대로 살았습니다. 엘리야의 승리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한 백성들은 그제야 하나님을 두려워했으며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믿음은 환경과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며 진리 편에 서는 것입니다. 그것이 온전한 믿음이며 충성스런 자세입니다. 다윗은 자기를 대적하는 세력 앞에서도 하나님만을 절대 신뢰했습니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시 3:5-6)라고 믿음으로 선포했습니다. 대적들을 피해 다니느라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하나님께만 마음을 두었습니다. 자기 문제 해결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일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조건을 떠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온전한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묵상하며 삶에 적용하는데서 생깁니다.

7. 누구나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납니다. 건강문제나 재정문제, 자녀들과 내일에 대한 염려 등을 만날 때에 하나님께 향한 온전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전염병으로 고생하는 이 시대의 아픔을 함께 겪고 있습니다. 이때에 우리는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가서 문제가 어떻게 진행되고 우리가 환란을 당한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처음과 나중이 동일한 충성스런 믿음이 주권자에 대한 신뢰이며 바르고 온전한 믿음입니다.

요 16:32-33 “보아라,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제각기 자기 집으로 흩어져 갈 때가 올 것이다. 그 때가 벌써 왔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사 26:3-4 “여호와는 자기를 의지하고 마음이 한결같은 자에게 완전한 평안을 주신다. 너희는 여호와를 항상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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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12일 평강을 주시는 예수님. (요 20:19-23) 부활주일

1. 요한은 예수님 부활의 증거로 막달라 마리아와 베드로와 요한이 빈 무덤을 확인했던 일과 시신을 쌌던 세마포와 머리 수건이 거기 놓여 있었던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천사가 나타나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님의 부활을 말한 것을 들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러 제자들에게 직접 나타나셨음을 증거로 들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기절했다가 살아난 것이라거나 혹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 다른 곳에 두고 부활했다고 꾸몄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설득력이 없습니다. 제자들은 하나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다가 순교했고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을 전하는 바울 사도가 되었습니다. 2천년 기독교 역사는 예수께서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믿고 가르쳤으며 교회는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고 고백해왔습니다.

2. 부활을 믿는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의에 대하여 산 사람입니다. 롬 6:4-5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의 죽으심과 연합함으로써 그와 함께 묻혔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을 죽어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우리는 부활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부활신앙은 믿는 자에게 구원의 확신을 갖고 부활정신으로 살며 죽은 후에라도 주님의 날에 부활하게 된다는 소망을 갖게 합니다. 고전 15:20-22,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3. 부활을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사실 제자들도 부활을 믿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될 때 제자들은 위험을 피하여 흩어졌습니다. 언제 잡힐지 모르는 두려움 때문에 은밀한 곳에 숨어서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외부와 단절된 채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굳게 닫힌 문을 열지도 않고 들어와 제자들에게 평강을 물으셨습니다. 누가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유령으로 생각하고 놀라고 무서워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못 박혔던 손과 창에 찔렸던 옆구리를 보여주며 믿게 했고 제자들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쉬며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생선을 함께 잡수시며 제자들을 안심시켰습니다. 주님이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부활의 소망을 갖게 되는 것이 은혜입니다.

4. 예수님은 제자들이 구원 사역을 계속하도록 격려했습니다. 목자 잃은 양과 같이 패닉상태에 빠졌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니 세상을 다시 얻은 것과 같은 위로와 기쁨이 생겼습니다. 두려움도 사라지고 문제가 다 해결되었습니다. 이제는 어떤 고난이 찾아와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의심 많던 도마는 자기가 직접 보고 만져보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다고 했는데 예수님은 그에게도 나타나 그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고 믿도록 했습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도마에게 예수님은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고 그들에게 숨을 불어 성령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성령과 함께 자신이 하던 사역을 계속하도록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숨을 내쉬어 성령을 받게 하신 일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들고 자신의 숨을 불어 넣어 생령이 되게 한 것과 같습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에게도 여호와의 생기, 곧 성령이 들어가니 움직이는 군대가 되었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리스도를 증거 하여 믿게 합니다. 성도들이 말씀대로 믿고 구원의 일을 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5.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 용서를 받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영적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누구의 죄를 사하면 사해지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믿으면 구원을 받지만 거부하면 심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니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묶거나 푸는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책임은 사도들만이 아니라 예수 믿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사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주신 권한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영혼 구원이듯이 교회의 사명도 영혼 구원의 일이어야 합니다. 신자는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과 함께 다른 사람의 영혼을 살려내야 합니다.

6. 그렇지만 영혼을 구원하는 사역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과 권위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하여 구원을 이루셨고 성령을 통하여 지금도 그 일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교회는 이 영적사역을 위임받아 일하는 대행기관이며 성도는 이 일을 위해 부름 받은 일군입니다. 무덤을 찾은 여자들은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눅24:6)라는 말씀을 듣자마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했고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낙심한 제자들에게 달려가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기쁨의 소식을 알리고 나누는 것이 성도의 할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변화된 기쁨과 감격으로 증인 역할을 하면 성령께서 주도적으로 일을 하십니다. 그러니 수동적인 신앙생활이 아닌 성령과 함께하는 적극적인 제자의 생활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누군가를 주님께 안내할 수 있게 됩니다. 그 대상이 여러분의 가족일수도 있고 전도 잔치에 초대할 친구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7.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마음대로 활동할 수 없는 부자유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문 닫고 숨어 있던 제자들이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게 되었던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오늘 성령으로 우리에게 찾아와 평강을 주시고 위로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 평강 때문에 우리들의 문제가 해결되고 두려움이 사라지고 주 안에서 마음껏 기뻐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부활신앙은 우리 인생의 가치와 방향이 성령 안에 머물게 합니다. 여러분의 존재 자체가 누군가에게 샬롬, 곧 주님의 평안이 되게 하십시오. 여러분 모두에게 주의 보호와 평강이 함께 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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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5일 친구이신 예수님(요 15:12-17) 종려주일

1. 필리핀에서 막내가 3살쯤 되었을 때에 주로 길거리나 허접한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하루는 길가다가 어떤 어른하고 친하게 인사하는 것을 모고 누구냐고 물었더니 ‘Kaibigan ko siya, 내 친구야’ 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문화로는 꼬마가 어른하고 친구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지만 생각해보니 마음이 통하고 대화상대가 되면 친구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종일 동네 골목에서 놀며 사람들을 만나다보니 이웃이 다 친구가 되었고 덕분에 우리는 전도의 문을 쉽게 열었습니다. 친구는 필요에 따라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면서 자연스레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시간을 함께 보내며 생각을 나누고 경험을 나누며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친구는 서로 닮아가는 것이고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2. 믿음의 선배들은 하나님과 생각을 함께 나누고 그 뜻을 위해 살다가 하나님의 친구로 불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약 2: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겼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고 늦게 얻은 아들까지 제물로 바칠 만큼 신뢰관계가 쌓였으며 그 순종 때문에 하나님의 벗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려는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미리 알려 줄만큼 친밀했습니다. 모세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출 33:11,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대면했고 그 영광을 보았고 시내산 정상에서 40일 주야를 두 번이나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백성들에게 전하여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게 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생각하고 대화하고 함께 일한 하나님의 친구였습니다. 노아나 에녹은 물론 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서 하나님의 생각을 품고 일했습니다.

3. 예수님도 제자들을 친구라고 불렀습니다. 요 15:14-15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알려주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각자의 길을 가던 제자들을 불러 같은 생각 같은 목적을 품게 했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목적을 갖게 된 제자들을 친구라 불렀습니다. 요 15:9-10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서로 사랑하는 계명을 지키면 예수님의 친구가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이 제일 큰 사랑이라고 가르친 대로 몸소 실천했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내주어 죄인들을 살게 했습니다.

4. 예수님은 사회 약자인 죄인과 세리와 창녀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시간을 보냈고 그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했습니다. 마치 의사가 병든 사람을 가까이 하는 것처럼 거룩하신 주님은 죄인들을 가까이 했고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사회지도층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했지만 예수님은 죄인들과 소통하며 하나님 나라를 알려주었습니다. 빌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신 것은 우리를 친구 삼아 예수님과 같은 목적을 갖고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던 때에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한다는 표시입니다.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고 예수님의 친구가 되었음을 감사합니다.

5. 친구는 자주 만나고 대화를 많이 해야 정이 듭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주님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관계가 깊어지고 서먹해지지 않습니다. 주님께 향한 관심과 마음이 흐려지게 하는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사 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라고 했습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멀어지게 하고 적당히 거리를 두고 따르게 합니다. 선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거나 기도하지 못하는 연약함의 죄를 그래서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성장하기를 노력해야 합니다. 렘 29:13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라고 했습니다. 약 4: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세상 끝까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신 예수님은 지금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분을 더 가까이 하며 지냅시다.

6.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을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날에 사람들이 종려가지를 들고 환영했던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에 대한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메시아로 환영하며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예수님의 생각과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자기 욕심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을 환영했던 군중들은 그 기대가 무너지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신앙은 나의 소원성취를 위해서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의 소원을 이루어가며 사는 것입니다. 기적을 경험하고 떡을 얻어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친구가 지켜야 할 의리입니다.

7.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때에 죽음에 대한 생각이 깊어집니다. 한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지만 그 후에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남은 인생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고 다시 다짐합니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했으니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한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시다. 주님의 보호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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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29일 예배에 승리합시다. (레 9:22-10:7)

1. 오늘 읽은 말씀은 성막을 세운 이후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세워 첫 제사를 드린 내용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백성들을 회막문 앞에 모이게 하고 정한 절차에 따라 제사장 위임식을 성대하게 거행했습니다. 제사장은 구별된 삶을 살며 질서를 따라 예배해야 했습니다. 정해준 제사의 종류대로 질서를 따라 섬겨야했습니다. 제사장의 봉사로 모든 백성들이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서 나와 백성들을 축복하자 하나님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임했고 지성소에서 불이 나와 제단의 제물을 살랐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표시였습니다. 모든 백성들은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2. 그런데 곧 이어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죽는 일이 생깁니다. 제사장이 매일 아침저녁으로 성소 안에 불을 밝히고 향을 피울 때에 번제단의 불을 사용해야 했습니다.(레 16:12)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지성소 안에서 여호와의 불이 나와서 그들을 죽였습니다. 그들은 아무 불로든 섬기는 일을 하면 되겠거니 생각했을 것입니다. 일의 결과만 생각한다면 다른 불로 분향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그러나 레 10:3에서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라고 하신 것을 보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못했습니다. 또 제사장이 회막에서 봉사할 때는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한 것을 보면 그들이 술을 마시고 봉사했다고 짐작할 수도 있습니다. 분명 예배행위이고 영적사역인데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봉사를 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질서를 무시했고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은 말씀에 순종하는 겸손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나답과 아비후에게는 하나님의 명령을 가볍게 여길 만큼 제사장이 된 것을 자만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질서를 어겼고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기지 못했습니다. 원칙을 따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것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마음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있습니다.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만하여 직접 제사를 드리다가 왕이 된지 이 년 만에 하나님께 버림받습니다.(삼상 13:8-15) 웃시야 왕이 교만하여 제사장을 무시하고 직접 분향하다가 문둥병에 걸려 죽습니다.(대하 26:16-19). 다윗이 언약궤를 찾아올 때에 정해준대로 어깨로 메지 않고 수레에 싣고 오다가 흔들리는 언약궤를 붙잡은 웃사가 죽습니다.(삼하 6:7)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성령을 속이고 교회 앞에 거짓말하다 죽습니다.(행 5:9) 말씀대로 따르지 않고 질서를 무시한 교만과 거짓의 예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약해진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을 이렇게 다루어 교회의 거룩함을 유지시켰습니다. 겸손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를 높이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4. 요즘 교회에 모이지 못하고 식구들과 함께 영상으로 예배하는데 여러분의 예배생활은 어떻습니까? 몇 번이나 더 이렇게 예배해야 할지 모르지만 어디서 어떤 스타일의 예배를 드리건 예배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전심으로 드리는 예배여야 합니다. 의무를 행한다는 마음보다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가 되게 해야 합니다.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의 은혜를 힘입어 거룩하게 된 성도들이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얻은 속죄의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을 높여 찬양하는 것입니다. 더 나가서 제사장적 삶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정성을 드려 예배합니다. 모든 형편에서 하나님을 자랑하고 드높이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온전한 예배이며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영적예배입니다.

5. 예수님은 율법의 근본정신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을 범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교만한 율법학자에게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곧 살인한 것이라고 근본적인 법정신을 말씀했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치료했다고 비난하는 바리새인에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우선순위를 말씀했습니다. 법조항을 따지기보다 법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만 위안을 삼지 말고 예배의 목적과 정신을 바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예배를 통하여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린다는 것은(롬 12:1)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삶의 이유와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에 두고 살아야 어긋나지 않습니다.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살고 죽는 일이 쉽게 갈리는 요즘 내 욕심과 소원을 이루기 위한 예배보다는 하나님의 기대를 이루어드리는 예배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우선하면 우리의 필요는 하나님께서 덤으로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마 6:33)

6. 요즘 바이러스 때문에 바깥 활동을 못하다 보니 생각할 시간이 참 많아졌습니다. 마침 어느 친구의 글이 공감되어 소개합니다. “기름 값은 떨어지고 덕분에 매연도 사라졌다. 모처럼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일에 매달리거나 여행이나 사회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갑자기 생소하면서도 소중한 그 무엇이 불쑥 찾아 왔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고 함께 하며 서로를 신뢰하는 것이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 모두가 한 배를 탄 존재이다. 좋은 차든 낡은 차든 모두 멈춰 있다. 거리는 텅 비었고 땅 조차 휴식을 하는 것 같다. 돈, 스포츠, 명예, 정치를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살았는데 코로나 바이러스가 나를 깨쳐준다. 나의 보호자는 하나님이시고, 나의 안식처는 가정이며 오늘만이 나의 시간이라고 말이다. 이제 잠깐 쉬어 가련다. 그리고 서로를 귀하게 여겨야겠다. 우리는 절대자도 아니고 왕도 아니고 모든 것을 다스릴 힘도 없다. 다만 깨어지기 쉬운 연약한 존재이며 극히 작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아주 기본적이고 그러면서도 가장 중요한 것, 우리 영혼의 쉼터인 창조주를 기억해야겠다.“

7. 우리 주변에 다른 불이 참 많습니다. 이단과 잘못된 가르침들, 세상과 섞여 거룩성을 상실한 교회, 자기중심적 신앙생활이 난무하는 때입니다. 그래서 더욱 창조주를 기억하고 말씀대로 살며 하나님이 기뻐하는 예배를 드리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이렇게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 121:1-8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이 말씀이 우리 모두의 기도와 신앙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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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22일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출 40:34~38)

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듣고 애굽의 종살이에서 그들을 건져내어 약속한 가나안으로 인도했습니다. 출애굽기는 1-19장까지는 홍해와 광야를 지나 시내산에 도착한 3개월 동안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과 은혜로 살아온 것을 말합니다. 그 이후는 시내산에서 9개월을 살며 십계명과 성막건축에 관한 명령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 제사장 나라로 살아갈 생활원칙을 배우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예배하도록 성막을 세울 준비를 했습니다. 마지막 40장에서는 출애굽한지 둘째 해 일월 일일에 성막을 세워 봉헌하자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임했습니다.

2. 성막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지어졌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대로 되니라.”라는 말이 반복하여 나옵니다(출 40:19, 21, 23, 25, 27, 29, 32). 모세는 말씀을 따라 지성소를 먼저 세우고 거기에 증거궤를 안치하고 휘장으로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했습니다. 성소에는 떡상과 등대와 향단을 두었습니다. 바깥뜰에는 번제단과 물두멍을 놓고 물두멍에 물을 채웠습니다. 성막의 모든 기구에 기름을 발라 거룩하게 성별했습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물로 씻기고 제사장의 옷을 입혀 일하게 했습니다. 성막 세우는 일을 다 마치자 하나님께서 그곳에 임하셨고 구름이 그곳을 덮었습니다. 이 구름은 수증기가 모여 이루어진 일반적인 구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상징하는 구름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막을 기뻐 받으신다는 증거이고 거기 거하신다는 표시였습니다.

3. 성막은 하나님이 거하는 곳입니다. 그들이 머물 때든 이동할 때든 성막을 그들의 중앙에 두어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신다는 것을 인식하게 했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계시는 집이고 구름은 그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과 임재의 표시였기에 이스라엘은 그 구름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구름이 떠오르면 모두 짐을 싸서 길을 떠났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으면 떠오르는 날까지 기다렸습니다.(출 40:36 -37, 민 9:15~23). 그들이 머물러 있는 동안에 낮에는 구름이 성막위에 있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가운데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았습니다.

4. 성막은 교회의 모형입니다. 성막에서 희생 제사를 드려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성막에서는 지성소 안의 언약궤와 그 뚜껑의 속죄소에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번 피를 뿌려 죄 용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대제사장이 되어 그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열방을 위한 제사장으로 삼으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도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며 세상에게 하나님을 자랑하기를 원하십니다.

5.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두려움과 기쁨이 있었고 모든 백성들이 그들의 눈으로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보았듯이 우리도 예배 때마다 성령의 임재를 경험해야 합니다. 죄의 용서를 받고 두렵고 떨림으로 예배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해 주십니다. 교회는 이 감격을 세상에게 알게 해야 합니다. 제한된 인간이고 용서받은 죄인들이기에 완전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교회는 여전히 머리되신 주님을 중심으로 그의 몸을 세워가는 유기체입니다.

6.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합니다. 교회에 모이지 못하는 불편함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정지되어 버리고 내일에 대한 기대를 할 수 없는 불안한 시간을 살아가지만 그러기에 더욱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은혜의 방편입니다. 가정에서 드리는 예배에서도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마치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막에 임한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을 본 것처럼 말입니다.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라고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우리들도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이런 기쁨의 예배를 드리기 바랍니다.

7. 이때에 우리의 신앙고백이 더 깊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일상의 일들이 제한되고 주춤하는 때에 말씀묵상과 기도에 힘을 쏟으십시오. 지금은 위기의 순간이고 불안한 때이지만 그러기에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고 우리를 선택하여 자녀삼아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사 26:3-4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라고 구원의 은혜를 노래했던 유다 백성처럼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을 새번역으로 읽어봅니다. “주님, 주님께 의지하는 사람들은 늘 한결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니 그들에게 평화에 평화를 더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영원토록 주님을 의지하여라. 주 하나님만이 너희를 보호하는 영원한 반석이시다.”

8.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는 백성들과 항상 함께 하십니다. 여호수아를 새로운 지도자로 세우며 모세에게 함께 한 것처럼 여호수아에게도 함께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수 1:9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또 우상 숭배로 벌 받고 나라를 잃게 된 백성들에게도 이사야를 통하여 위로하고 함께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사 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하나님과 함께 하면 환경에 굴하지 않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공포와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병에 걸리더라도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이며 능력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 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9. 그러니 이제 눈을 떠 주변을 돌아보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과 나라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대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하셨으니 우리가 먼저 회개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기도합시다. 이 고통의 시간이 우리를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배려였다고 고백하는 날이 속히 오기를 바랍니다. 이 일이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눈으로 확인하는 과정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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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15일 위기를 극복하는 힘(출 33:1-14)


1. 지난 한 주간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처하는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습니다.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학교들이 문을 닫고 거리도 한산해 졌습니다. 아직 마트에는 식자재를 사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이지만 언제 멈출지 모를 일입니다. 지역교회 목사님들도 함께 기도하며 어떻게 이 상황에 대처할까를 고민했습니다. 우리교회도 가정에서 예배하고 소그룹 모임을 중단했습니다. 물론 한시적인 것이고 전염병의 전파를 막기 위한 것입니다. 지혜롭게 대처하고 기도하며 믿음을 점검하는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2. 원하지 않는 일을 만날 때에 어떤 사람은 패닉상태에 들어가기도 하지만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더 침착하고 담대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상황까지도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분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환경이 변하고 어려움이 닥쳐도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에 서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신뢰를 받던 의인이었지만 고난을 피해 갈 수 없었습니다. 가진 것을 다 잃고 힘든 과정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견뎠습니다. 그가 다시 회복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절대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환란은 인내를 배우게 합니다. 그 아픔을 통해서 정금같이 순도 높은 믿음을 갖게 됩니다. 평안할 때 시도할 수 없었는 전폭적인 신뢰를 배울 수 있습니다.

3. 모세와 이스라엘 공동체에게도 위기가 닥쳤습니다. 하나님께서 노하시고 그들의 여정에 더 이상 함께 하지 않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산 위에서 하나님과 대면하고 율법을 받는 시간에 산 아래서는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보이지 않자 백성들은 불안했고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아론에게 부탁합니다. 아론은 백성들의 패물을 모아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이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이라고 하고 거기에 절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영적한계였고 애굽에서 배운 신앙생활의 전부였습니다. 이 일로 하나님의 노를 샀습니다. 하나님을 바로알지 못한 영적무지가 빚은 결과입니다. 그래서 신앙훈련이 필요하고 믿음의 성장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섬기며 위기의 순간에 바로 서기 위함입니다.

4. 모세는 레위인들에게 칼을 주어 형제를 치게 했습니다. 그날에 3,000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받은 돌 판까지 내던지며 백성들에게 진노했고 금송아지 우상을 불에 태워 가루로 만들어 물에 타 백성들로 마시게 했습니다. 죄에 대한 책임을 느끼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죄 용서를 위한 기도를 했습니다. 만일 용서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책에서 자기 이름을 지워달라고 말하며 간곡하게 기도했습니다. 모세에게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성도의 최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기 때문입니다.

5.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을 데리고 가나안으로 올라가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냅니다. 그들에게 약속한 가나안은 허락하겠지만 대신 하나님께서 백성들과 함께 가지는 않겠다는 것입니다. 목이 곧은 죄인들과 함께 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죽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승리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백성들로 회개하게 합니다. 백성들은 이 말을 듣고 슬퍼했으며 그들의 몸에서 모든 장신구를 벗었습니다. 장신구들은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것들이고 그것은 애굽의 불신앙의 생활을 상징하는 것들입니다. 그런 장식품을 모아서 금송아지 우상을 빚은 것입니다. 몸에서 장신구를 벗었다는 것은 철저하게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새 믿음을 각오한 것입니다.

6. 모세는 장막을 거둬 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다시 치고 그것을 회막이라 불렀습니다.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서 준비한 만남의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던 성막은 회중의 중심에 있었지만 회막은 진 밖에 있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목이 곧은 백성과 함께 할 수 없기에 진 밖에 둔 것입니다. 회막에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구름기둥이 내렸고 거기서 모세는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그것을 본 백성들은 자기 텐트 앞에서 그곳을 응시하며 예배했습니다. 진정한 회개와 예배의 모습을 봅니다. 예배는 회개하여 깨끗해진 사람이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뵈옵고 절하는 것이며 생각을 함께 나누고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나 가정에서의 모든 예배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어려운 때에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공간을 따로 구분하고 시간을 정하여 기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7. 모세는 더 나가서 주의 길을 보여주고 은총을 입혀주고 백성들을 주의 백성으로 여겨달라고 간청합니다. 하나님은 결정을 번복하시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가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모세의 짐을 가볍게 해주셨고 마음을 편하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친구에게 대하듯 말씀하셨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비록 약속 받은 가나안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기쁨을 누렸고 하나님의 뒷모습을 보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8. 모세가 차라리 광야에서 죽는 것이 낫겠다며 간곡하게 기도한 것은 자기의 이름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욕하게 될 것을 걱정하며 백성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힘과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적당한 기도가 아니라 간청하는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바이러스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시고 하나님을 자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을 연습하고 확증하십시오.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은 하나님에게로부터 옵니다.

9. 시 91:1-6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
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이런 믿음으로 기도하여 위기를 극복하고 더 큰 믿음을 얻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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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8일 시내산에서의 복 (출 19:1-25)

출 24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에 순종하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모세는 시내산 아래에 단을 준비하고 희생짐승의 피를 받아 반을 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낭독합니다. 백성들은 말씀대로 준행하겠다고 약속합니다. 모세는 남은 피를 백성들에게 뿌리면서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라고 피로 언약을 맺습니다.(출 24:7-8). 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서로 목숨을 걸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님과 죄인을 화목하게 하는 언약의 피 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것이고 죄 값을 대신 지불해 주기 위해 흘린 사랑의 표시입니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이 큰 복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길을 얻었으니 말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뵙기 위해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지시사항을 성실하게 전하는 모세는 복을 나누는 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복하여 경고하며 살 길을 제시해 주신 것도 큰 은혜요 복입니다. 출 19장의 일을 함께 살펴봅니다. 3절, 하나님은 모세를 산으로 불러 계획을 말씀합니다. “너는 이같이 야곱의 집에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7절, 모세가 내려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니 백성들은 그대로 지키겠다고 합니다. 8절, 모세가 산에 올라 백성들의 뜻을 하나님께 전합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모세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을 수 있도록 자신을 보여주기로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백성들은 옷을 빨고 성결하게 준비하고 셋 째 날을 기다리게 합니다. 여호와께서 강림하는 때에 산에 오르거나 세워 놓은 경계를 넘지 못하게 하고 산에 오르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경고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에게 경솔하게 접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4절, 모세는 산에서 내려와 그대로 백성들에게 주지시킵니다.

20절, 셋 째 날에 시내산에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났습니다. 천둥과 번개가 일고 빽빽한 구름이 덮이고 나팔 소리가 크게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불 가운데 시내산 꼭대기에 강림했고 백성들은 그 위엄과 영광을 보고 두려워 떨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다시 불러 백성들이 산에 오르지 못하게 재차 말씀합니다. 산에 오르는 자는 죽게 될 것이니 하나님의 거룩함에 도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모세와 아론만 올라오고 제사장과 백성들은 아래에 머물게 합니다. 25절, 모세는 다시 내려와 백성에게 모든 것을 알립니다. 하나님의 인내와 모세의 수고는 백성들을 배려하는 하나님의 은혜였고 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뵙는 경험은 큰 복입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은 두려워 엎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야도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몇 차례나 산을 오르내리며 백성들을 준비시켰습니다. 백성들이 경솔하게 산에 오르다가는 죽음을 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고 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이 예배하는 일이 그래서 조심스럽습니다. 교회생활을 하다가 실망하고 시험에 빠지는 일이 그래서 생깁니다. 거룩한 하나님을 뵙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허물과 죄가 가려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던 백성들과는 달리 우리에게는 기록된 말씀을 주셨습니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옛날 사람들의 문화와 언어를 해석해야 하는 어려움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록된 말씀이 우리 귀에 들려지도록 성령의 도움을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와 성령의 계시해 주시는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그 말씀을 바로 이해할 때에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바로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거는 기대는 분명했습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소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 세상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백성들의 죄를 들고 하나님께 나가 사죄의 은총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 중간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마치 부지런히 산을 오르내리며 하나님의 뜻을 백성에게 알려주던 모세의 역할과 같습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을 보여주기 위해서 힘없고 무능한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거룩하게 사용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결코 자기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세상에 알려야만 했습니다. 이 사명을 위해서 율법과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이 시대의 교회들도 이 일을 위해 존재합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 생활 지침서입니다. 열 가지를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레위기에서 말한 모든 율법을 축소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고 했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핵심입니다. 그렇다고 복을 받기 위해서만 말씀을 지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에 그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을 자랑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킬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약속을 맺습니다. 아담에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금했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아담에게 여자의 후손이 사단의 후손의 머리를 부숴버릴 구원을 약속합니다. 노아 홍수 이후에도 무지개 약속을 주셨고 아브라함에게 자손과 땅을 약속했습니다. 야곱에게 아브라함의 약속을 다시 확인시켰고 모세를 통하여 그 약속을 더 구체화시켰습니다. 이런 약속들은 하나님이 일방적이고 은혜로 주신 약속들이고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불순종하여 벌을 받고 포로 되었을 때도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고 미워하지도 않고 아주 멸망시키지 않고 그들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신 신실하신 하나님입니다.(레 26:44) 그 하나님이 창 20:6에서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수천 대 자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고 약속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 은혜를 주시고 여기까지 오게 하셨습니다.

벧전 2:9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7월 전도행사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을 자랑하는 일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를 거룩한 백성으로 불러주시고 복을 주셨으니 그 하나님을 자랑하고 은혜와 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대상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통하여 세상에게 알려지는 복된 일이 되도록 함께 기도하고 함께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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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1일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자(출 12:1-14)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풀려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바로는 여러 번의 재앙을 겪으면서도 마음을 강퍅하게 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재앙의 강도를 점점 높여갔고 바로는 장자가 죽는 마지막 재앙에서 완전히 패하여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바로의 패배는 바로와 그의 백성들이 섬기던 신들의 패배였습니다.

유월절 저녁은 바로와 그의 백성들에게는 죽음의 날이었지만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생명을 얻은 날입니다. 그래서 유월절이 있는 달을 새해의 첫 달로 지켰습니다. 구원이라는 말은 어떤 상황에 묶여있던 사람이 회복되어 다시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구원은 죄에 묶여서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와 복을 누리지 못하던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려주심으로 다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을 말합니다.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신 은혜요 선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거룩함과 평화와 기쁨을 나누고 실천하는 곳입니다.

이스라엘은 은혜로 얻은 생명을 감사하기 위해 유월절을 대대로 지킵니다. 유월절 짐승은 흠 없는 일 년 된 수양이나 염소를 그달 십일에 골라서 4일간 간수하였다가 유월절 당일 해질 때에 잡습니다. 그 피를 우슬초에 찍어 문 인방과 설주에 발라 표를 하여 죽음의 사자를 건너뛰게 했고 집 안의 사람들은 보호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말한 것처럼 흠이 없고 순결하고 죄가 없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린 피를 믿는 자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음식을 먹는 식탁에서 떡을 떼어주며 그것이 제자들을 위하여 주는 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잔을 돌리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피 곧 언약의 피(마 26:28)라고 말씀했습니다. 유월절 짐승의 희생과 피로 생명을 얻은 것처럼 예수 십자가의 보혈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얻고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유월절 음식은 식구들이 함께 먹는 공동체 식사였습니다. 식구수가 적어서 한 마리를 다 먹을 수 없으면 이웃과 함께 짐승을 잡았습니다. 그 고기는 다음 날까지 남겨두지 못했고 그 밤에 다 먹어야 했습니다. 보통 고기와는 달리 구별된 거룩한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공동체가 같은 믿음을 고백하고 한 식탁에서 먹는 일은 중요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함께 먹고 고백하며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가치를 증거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혼자 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한 주님을 섬기고 한 믿음을 고백하는 공동체입니다. 고전 10:16-17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교회는 성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에 속하여 활동하지 않고 혼자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구원을 완전하게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 연합하고 각자의 은사를 활용하여 몸을 세우고 서로 격려하며 그리스도를 배우고 성장해 가기 때문입니다.

유월절 고기는 누룩이 없는 빵과 쓴 나물과 함께 먹었습니다. 허리띠를 매고 신을 신고 지팡이를 잡고 일어서서 급히 먹었습니다. 이것은 종살이하던 당시의 고통을 기억하는 음식입니다. 밀가루 반죽을 부풀릴 사이도 없이 급하게 애굽을 벗어나야 했던 때를 기억하는 식사입니다. 그 음식 자체가 하나님에게 속한 백성이라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말해줍니다. 교회는 죄와 죽음에서 벗어난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다시는 옛 생활을 그리워하거나 뒤돌아보지 않고 죄와 싸워 이겨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거룩하게 살며 그의 영광을 위해 언제든지 뛰어나갈 수 있는 역동적인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유월절은 출애굽의 역사를 기억하고 유지하고 가르치도록 하나님께서 공동체에게 제정해 주신 것입니다. “너는 그날에 네 아들에게 뵈어 이르기를 이 예식은 내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일을 인함이라.”(출13:8)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원해 주신 것을 잊지 않고 대물림하게 한 것입니다. 교회는 후손에게 물려줄 신앙고백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와 대속의 죽음을 기념하고 대물림하기 위해서 교회는 세례와 성찬을 행합니다. 롬 6장을 보면 바울은 세례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는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세례는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의에 대하여 다시 사는 것을 의미입니다. 예수 안에서 변화된 증거가 분명한 세례 받은 사람에게 성찬을 베풉니다. 주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구원의 감격을 누리고 전하게 하려는 교회 공동체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러분, 그 귀하고 중한 유월절을 출애굽 후 두 번째 해에 시내 광야에서 지키고는 요단강을 건넌 후 길갈에 도착해서야 지킬 수 있었습니다. 불신앙 때문에 벌을 받아 광야에서 38년을 방황할 때는 할례를 행하거나 절기를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출애굽의 기적과 은혜를 경험했지만 정탐이후에 믿음 없는 말로 하나님께 대항했던 부모세대들은 가나안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과 다음 세대가 그 땅을 밟았습니다. 귀한 은혜체험도 간수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령 안에서 믿음으로 응답하며 구원의 감격을 생활에 적용하며 사는 것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공포에 떨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서부에서는 이미 사망자가 나왔고 보스톤에서도 한인회가 삼일절 행사를 취소했고 한국학교에서도 수업을 취소했습니다. 이런 때에 다시 깊이 생각해 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가 강한 전파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믿고 두려워하는 것만큼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생명을 주관하시는 절대 능력의 하나님을 확실하게 믿고 있는가 말입니다. 열 번 째 재앙에서 목숨을 건진 유월절의 저녁의 감격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감격이 오늘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지 말입니다.

시편 116:12-14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이 시편기자의 고백이 우리들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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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2월 23일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출 6:1-9)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과 신실하게 관계를 유지하는 분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대로 이스라엘이 민족을 형성할 만큼 수가 늘자 위협을 느낀 바로는 그들을 학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들어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은 그 소리를 듣고 구원하기로 작정하고 모세를 부릅니다. 위대한 역사에 쓰임 받은 모세이지만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과정을 보면 그가 우리와 다르지 않은 보통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할 수 없다는 모세에게 여러 차례 확신을 주고 함께 할 것을 약속해 주십니다.

그리고 여호와라는 자신의 이름을 모세에게 알려줍니다. 여호와는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며 전능하신 분입니다. 누구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 처음부터 영원까지 존재하고 절대적이며 필연적인 존재입니다. 모든 피조물의 원천이 되는 창조주입니다. 출 3:14-15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서 손에 있는 지팡이가 뱀이 되게 하고 손에 문둥병이 피는 경험도 시킵니다. 나일 강의 물을 피로 물들게 하는 능력도 주시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 능력을 행할 지팡이를 손에 들려 보냅니다. 드디어 모세는 바로에게 가서 하나님께 예배하려고 하니 백성들을 풀어달라고 용기를 내어 말합니다. 그러나 어느 사람이 노예를 조건 없이 내보내겠습니까? 돌아온 것은 이전보다 더 무거운 노동이었습니다. 감독관들은 재료도 주지 않고 같은 양의 벽돌을 만들라고 압박했습니다. 이 일로 백성들은 더 고생해야 했고 마음에는 불평이 가득했으며 그 원인을 제공한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모세는 무모하게 문제를 키웠다고 하나님께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분명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바로에게서 백성들을 구해 내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한 땅을 차지하게 되고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모두에게 알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여전히 불평합니다. 출 6:12 “모세가 여호와 앞에 고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자손도 나를 듣지 아니하였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 모세는 극구 사양합니다. 마치 믿음 없는 우리들의 모습과 그래도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는 하나님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 대화의 중간에 모세와 아론의 족보가 등장합니다.(14~27) 하나님은 그가 어떠한 계보에 속한 사람인지,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족보를 통하여 깨닫게 하십니다. 아론의 가보를 말하며 레위와 제사장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모세 가문도 언급하며 백성을 인도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며 모세와 아론은 선택받은 종이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출 6:26-27 “이스라엘 자손을 그 군대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라 하신 여호와의 명을 받은 자는 이 아론과 모세요, 애굽왕 바로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내어 보내라 말한 자도 이 모세와 아론이었더라.”

하나님은 모세를 다시 바로에게 보냅니다. 출 6:29 “나는 여호와라. 내가 네게 이르는 바를 너는 애굽 왕 바로에게 다 말하라.” 그런데도 모세는 여전히 변명합니다. 출 6:30 “나는 입이 둔한 자이오니. 바로가 어찌 나의 말을 들으리이까?” 하나님은 대안을 제시합니다. 출 7:1-2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너는 네 형 아론에게 말하고 그는 바로에게 말하여 그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보내게 할찌니라.”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말씀합니다. 출 7:3-5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고 나의 표징과 나의 이적을 애굽 땅에 많이 행하리라마는 바로가 너희를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더하여 여러 큰 재앙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찌라. 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모세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이적을 행하여 바로를 무너뜨리고 사람들 모두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알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심부름꾼에 불과했습니다. 심부름하는 사람은 일의 결과를 걱정할 것이 아니라 메시지만 잘 전하면 됩니다. 완전하지도 못하고 연약한 우리들을 복음 전하는 사람으로 하나님 나라의 후사로 불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선물로 받은 구원을 주변사람들에게 알리라고 우리를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전도의 열매나 일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성실하게 전하면 됩니다.

자신의 무력함에 실망하고 위축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이해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구원받게 하여 하나님 나라의 후사로 불러주신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내가 너를 기억한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와 함께 하겠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 너는 내 것이다. 내가 다 이루겠다.’고 말씀하시는 주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모세를 격려하여 사용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와도 함께 하십니다. 연약한 우리를 불러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의 은혜를 자랑하고 선전하게 하십니다. 바로와 같이 힘 있고 두려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분명하게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고전 1:27-29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낮아지고 포기되는 때가 주님이 드러나는 때입니다. 우리가 연약한 그때가 바로 전능하신 주님을 경험하는 때이며 주님의 힘과 능력이 나타나는 때입니다. 신실하며 전능하신 하나님 안에서 담대할 수 있고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맡은 사명에 충성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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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2월 16일 믿음의 대물림(창 35:9-15), 남선교회 헌신예배

대물림이란 표현은 무언가 남겨줄 것이 있을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모든 부모들은 자녀를 보면서 그 속에 자신의 디엔에이가 대물림 된 것을 봅니다. 좋은 것도 있고 닮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은 것도 있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했고 부름에 응답하여 믿음으로 살았고 또 그 믿음을 자식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시대가 바뀌고 사람은 바뀌지만 하나님은 이런 믿음의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있도록 반복 교육을 해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은 자도 살리며 없는 것도 있게 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고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신실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자기나 아내의 몸이 이미 늙어 생산 능력이 사라진 때에도 하나님이 주신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는 꿈을 결코 놓지 않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믿음은 점점 단단해졌습니다. 아브라함의 예배 생활을 옆에서 보고 자란 이삭은 그 아버지의 믿음을 자연스레 물려받았습니다. 이삭은 자기를 제물로 드리려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을 텐데도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아버지가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는지 옆에서 보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동일한 약속을 아들에게도 반복해 주셨습니다. 창 26:3-4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의 공유이며 신앙의 대물림입니다. 이것이 식구들이 한 집에서 살며 서로의 삶을 공유하는 유익입니다.

이삭은 늦게 쌍둥이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의 믿음의 역사는 큰 아들 에서보다는 야곱을 통하여 대물림되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이라고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그는 형을 피하여 도망하다가 벧엘에서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겠다.”(창 28:13)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고향으로 무사히 돌아오게 하시면 그곳 벧엘로 다시 와서 제단을 쌓고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서원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세겜에 거주하다가 딸 디나가 세겜 추장의 아들에게 겁탈을 당합니다. 이일로 오빠들은 세겜의 남자들을 할례 받게 하고 움직이지 못하는 틈을 노려 집단 살해합니다.

디나의 어려움을 겪으며 깊이 회개한 야곱은 식구들이 가지고 있는 우상을 다 제거하고 벧엘로 올라가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시고 “너는 생육하고 번성할 것이다. 한 민족과 많은 갈래의 민족이 너에게서 나오고, 너의 자손에게서 왕들이 나올 것이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너에게 주고, 그 땅을 내가 너의 자손에게도 주겠다.”라고 아브라함의 약속을 더 구체적으로 약속해 주셨습니다. 야곱은 창 48:15에서 아들 요셉을 축복하면서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다.”라며 부모에게 물려받은 약속과 믿음을 자식에게 대물림해줍니다.

이 약속은 요셉을 통하여 구체화됩니다. 형들의 미움을 받아 팔려가 종살이하며 모함을 받고 옥에 갇히면서도 하나님께 신실했던 요셉은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어 나라를 살려냅니다. 70명의 식구들을 고센 땅에 정착하여 살게 했는데 이들은 그곳에서 대를 이어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고 민족을 형성할 만큼 수가 늘어납니다. 시간이 지나 요셉을 알지 못하는 바로가 그들을 학대하게 되고 그들은 고역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세워 애굽의 종살이에서 그들을 해방시켜 약속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자신을 설명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믿음을 계승하는 사람들을 사용했습니다. 믿음의 대물림은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게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약속이 이삭, 야곱, 요셉에게 대물림되었고 때가 되니 민족을 형성하게 하여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하여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자손과 그들이 거할 땅을 주신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제사장 나라가 되어 모든 민족이 복을 받도록 살아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믿음을 대물림하는 사람들을 사용하여 약속을 이루고 구원의 역사를 진행해 가십니다.

믿음의 부모를 둔 자식은 복 받은 자식들입니다. 자녀들에게 신앙의 모범을 보이고 대물림하는 부모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식구들이 한 마음, 한 뜻, 한 믿음, 한 사명을 갖고 함께 믿음을 공유하는 것이 그래서 의미 있는 일입니다. 가정이나 교회가 한 마음으로 같은 비전을 갖고 함께 신앙생활 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복을 함께 공유하고 그것을 자식에게 대물림하고 또 후배들에게 물려주는 것은 우리가 남겨줄 수 있는 가장 큰 유산일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한 예가 있습니다. 삿 2:11-14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께 범죄하고 바알 신들을 섬기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인도해 내신 그들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를 저버리고 그 주변에 있는 이방 민족들의 신들을 섬겼다. 이와 같이 그들은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겨 여호와를 노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분노하셔서 그들을 약탈자들의 손에 넘기고 또 그 주변 원수들의 지배를 받게 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다시는 원수들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사사시대의 사람들은 부모세대의 믿음을 전수받지 못했고 주변의 불신자들과 섞여버렸고 자기들 생각에 좋은 대로 살다가 하나님께 벌을 받았습니다.

잠 22:6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남선교회 회원들이 스스로의 믿음을 굳게 세우고 다음세대에게 전해주어 그들도 대를 이어 복을 누리게 하는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를 위하여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음으로 사는 법을 적극적으로 훈련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영적인 성장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영적 권위를 가지고 가정을 세우고 또 교회 안의 후배들에게 믿음을 대물림하는 좋은 선배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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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2월 9일 은혜로 맺은 약속(창 15:1-7)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모든 족속을 복 받게 하는 자로 세움 받았고 그는 말씀에 순종하여 발을 내딛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보통 사람이었고 실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맺은 약속을 신실하게 지켰고 구원의 역사를 지속해 가셨습니다. 오늘은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1. 믿음과 현실 사이의 갈등
하나님은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고 그의 이름을 창대케 하고 복의 근원으로 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13장에서도 땅의 티끌처럼 많은 자손을 주겠다고 약속을 반복했습니다. 그런데 15장에서는 민족은커녕 아들 하나도 없다는 현실 문제로 고민하는 아브라함을 봅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자기 종을 양자로 삼으려는 합리적인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거절하고 그에게서 나오는 아들이 후사가 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사실 늦게 얻은 아들 이삭을 통하여 그의 가문이 이어지지만 더 나가면 그의 후손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갈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도 현실문제에 부딪칩니다. 믿음으로 최선을 다했지만 감당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나기도 하고 건강을 잃기도 하고 자녀들이 잘못 되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의 고민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도 아닙니다. 현실 문제 속에서 어떻게 그 약속을 우선하며 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갈등은 아마도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고 때로는 다 이해되지 않아도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다행인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약함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를 때에는 ‘네게 보여줄 땅’(창 12:1)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나중에는 ‘눈을 들어 바라보라. 네가 보는 땅’ ‘이집트 강에서부터 큰 강 유프라테스까지’ ‘가나안의 모든 땅’을 준다고 구체적으로 말씀하며 믿음을 갖게 했습니다. 나중에는 아브라함도 아들까지 바칠 수 있는 믿음으로 자랐습니다. 믿음은 한번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순종을 통하여 점차 자라가는 과정입니다.

2.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안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창 15장은 두려움과 염려로 마음이 무거운 아브라함을 위로하는 하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1절) 하나님이 아브람의 방패가 되고 상급이 되겠다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가 작정한 뜻을 이루려고 아브라함을 도와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택한 이스라엘이 죄를 지을 때도 내치지 않았고 그들이 용기를 내서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기다리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사 41:8-10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하나님은 걱정하는 아브라함을 데리고 나가 밤하늘의 뭇별을 세어보게 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그렇게 많아질 것을 믿게 했습니다, 6절을 보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었습니다. 이 믿음 때문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땅을 약속하자 어떻게 그것을 믿을 수 있겠느냐고 확인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연약함입니다. 한 번 은혜를 경험했다고 다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는 솔직해야 하고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해야 하고 또 인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준비시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둘로 쪼개 마주 놓게 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쪼개 놓은 희생제물 사이를 함께 지나가며 약속을 맺었습니다. 어느 한 쪽이 약속을 파기하면 죽게 된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준비를 마친 아브람은 깊이 잠들었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의 후손들이 이방에서 사백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게 되겠지만 그 기간이 지나면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징계하여 아브람의 자손들을 해방시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마치고는 연기 나는 화로와 타는 횃불로 자신을 계시했습니다.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17절) 하나님께서 희생제물 사이로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쌍방이 맺어야 하는 약속인데 하나님 혼자 제물사이로 지나갔으니 이 언약은 일방적으로 맺어진 언약입니다. 이것은 약속에 대하여 하나님 혼자서 다 책임을 지겠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아브라함에게는 약속을 지킬만한 힘이 없었으니 하나님께서 스스로 약속을 이루겠다고 보증한 것입니다.

은혜로 맺은 이 언약은 아브라함과 후손들에게 신실하게 적용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은 그 약속을 기억했습니다. 출 2:24-25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이 약속은 우상을 숭배하다가 벌 받을 때도 회개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인류의 죄를 위해 피 흘린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도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지킨 결과입니다.

3. 나의 선택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우리들도 그 약속의 보장 안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우리가 천국을 누립니다. 잠시 거쳐 가는 이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고 아픔도 겪지만 장차 주어질 영광스런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인내합니다. 걱정이 앞서면 하나님 나라가 보이지 않습니다. 염려에 마음을 뺏기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빛나고 높은 보좌에 계신 주님께 우리의 눈을 의지적으로 고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는 보혜사 성령님을 의지하고 세상 끝 까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한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날마다 주를 닮아가는 믿음의 진보가 이루지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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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2월 2일 바벨탑인가 제단인가? (창 11:1~9, 12:1-9)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될 때에도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짓밟아 버릴 것을 말씀해 주셨고 짐승을 희생하여 얻은 가죽옷을 입혀주셨습니다.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도 그를 죽이려는 자들로부터 보호해 주셨고 역시 가죽옷을 입혀주셨습니다. 홍수심판 때에도 노아의 식구들을 살려주시고 구원의 역사를 이어가게 했고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무지개 약속을 주셨습니다. 바벨탑을 쌓고 하나님께 대항하던 자들을 흩으면서도 아브라함을 불러 새 역사를 이어가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없이 살던 가인의 후손들은 벽돌과 역청을 개발하여 집을 지었습니다. 무거운 돌로 집을 짓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새 세상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성과 대를 쌓아서 하늘꼭대기까지 올라가 자기들의 이름을 들어내고 서로 흩어지지 말고 함께 살기를 원했습니다.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바벨탑을 쌓고 하나님과 힘겨루기를 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무너뜨리고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사람들을 흩어버렸습니다. 하나님 없는 사람들이 자기를 보호하려고 노력하는 일들은 늘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죄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인간은 결국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파멸에 이르는 길을 선택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힘만으로도 살 수 있다는 교만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판단과 경험으로 사는 것이 불순종이고 죄입니다. 로마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썩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을 썩어버릴 금수와 버러지의 형상으로 바꾸어 버렸다고 말합니다. 오늘 최첨단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컴퓨터와 개인전화기의 발전을 보면서 빠른 변화를 느낍니다. 의학이 발달하여 생명체를 복제할 단계에 이르렀고 지구를 벗어나 다른 행성까지 방문할 꿈을 꾸는 때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배불리 먹을 수 있고 평화롭게 사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이런 편리함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는 것이 된다면 그것이 우리들의 바벨탑이 될 것입니다.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을 흩어 버린 후에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을 보십시오. 지극히 보통 사람인 아브라함을 불러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갈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아브라함은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불편함을 겪으며 자신의 것을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배웁니다. 우상을 만들어 팔던 아버지에게서 떠나 새로운 환경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집중합니다. 장래에 보여줄 미지의 땅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하나님만 바라보는 믿음으로 삽니다. 철저한 자기 부정과 포기를 통하여 하나님만이 그의 힘과 능력이 됨을 배웁니다. 드디어 아들까지도 제물로 드릴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순종과 믿음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땅을 약속 받았지만 62년이 지나도록 죽은 아내 사라를 매장할 땅조차 갖지 못하고 유목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그의 중심에 있었고 하나님께 받은 약속을 포기하지 않고 믿었습니다. 그의 믿음으로 인내할 수 있는 힘은 하나님께 제단을 쌓는데서 공급되었습니다.

창 12:6-8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창 13:15-18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예배는 형편이 좋아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의지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소원성취나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 정성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주권을 수용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는 일들이 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발을 내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에라도 우리는 가던 길을 계속 가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의지하고 맡겨드리는 행위입니다. 히 6:15은 아브라함이 오래 참았기 때문에 약속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언급된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에서 잠깐 누리는 영화보다 영원한 본향을 더 생각한 사람들입니다. 그 믿음이 인내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우리들도 하나님의 약속을 인내로 붙들어야 합니다. 약 1:6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그 어떤 상황에서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르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는 예배생활을 통하여 하님만이 나의 주인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기를 버렸다고 의심할 만큼 철저하게 망해버린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사 49:14-17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네 자녀들은 빨리 걸으며 너를 헐며 너를 황폐하게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가리라.“

하나님은 지금도 택한 백성인 우리들을 그렇게 사랑하고 돌보십니다. 하나님이 하는 일이 다 이해되지 않을 때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예배할 것입니다. 예배 생활의 승리를 통하여 하나님 안에서의 감사와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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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26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노아 (창 6:1-8)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숨을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했습니다. 인간이 비록 흙으로 만들어진 제한된 존재이지만 영원한 하나님과 함께 생각을 나누고 함께 일하는 특별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으로 죄가 들어오고 그 영향력이 후손들에게까지 대물림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원래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했고 때마다 은혜를 입은 사람을 선택하여 구원의 일을 진행하셨습니다. 창세기 전반부는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 사람들을 대조하여 설명하며 그 은혜를 입은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동생을 죽이고 하나님께 쫓겨난 가인은 에덴 동편 놋 땅에 정착했습니다. 가인과 그의 후손들은 자기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서 성을 높이 쌓고 살았습니다. 가축을 기르고 악기도 만들고 문화적인 발전도 이루고 제법 산업사회 형태의 국가를 형성했습니다. 하나님이 없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는 힘을 키웠습니다. 가인, 에녹,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 유발과 두발가인에 이르는 가인 계열은 하나님 없이 죄의 지배아래 사는 세상을 대표합니다. 나중에 바벨탑을 쌓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으로 연결됩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창 5장은 여자의 후손을 따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이루기 위한 계보입니다. 아담으로 시작하여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에 이릅니다. 물론 동명이인이 있어서 헛갈리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죽은 아벨대신 셋을 주셨고 그의 후손을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어가게 했습니다. 노아의 아버지 라멕은 아들이 태어나자 ‘안식’, ‘위로’라는 뜻을 가진 노아라고 이름 했습니다. 창 5:28-29 “라멕은 182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에덴에서 쫓겨나 먹고 살기위해 수고하는 존재로 전략해버린 인간에게 노아가 위로와 쉼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기대한 것입니다.

노아는 아담 이후 천 년이 지난 뒤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때에 사람들의 죄악이 관영하여 하늘까지 사무쳤습니다.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며 죄를 짓는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을 거두어 가셨고 그래서 그들은 육신이 되었습니다. 5절을 보면 그들의 생각은 항상 악했습니다. 지속적으로 죄를 짓고 죄 가운데 머물러 있었습니다. 사고의 틀 자체가 악했고 그 악한 생각이 체질화 되었습니다. 오죽하면 하나님이 사람 만드신 것을 마음 아파하시고 근심하다가 결국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다 쓸어버리고 새 판을 짜려고 계획합니다. 종교개혁가 칼빈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에 대해서 말할 때 ‘타락한 인간은 근본적으로 그 본성이 부패하고 오염되었으므로 스스로는 아무런 영적 선도 행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노아의 때는 선을 행할 힘을 상실한 절망의 때였습니다.

이런 때에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었고 당대에 완전한 자였으며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죄로 오염된 세상에서 자신을 거룩하게 지켜나가는 노아를 하나님이 기뻐하셨고 그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의 가족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세상을 심판하는 중에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을 노아에게 알려주시고 방주를 짓게 합니다. 어떻게 무엇으로 얼마나 크게 지어야 할지를 말씀하시고 나중에는 배에 들어갈 생물들을 하나씩 노아에게 데려다 주기까지 했습니다. 14절에 보면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방주는 노아 자신과 가족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노아는 그 경고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고 두려움으로 받들어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120년 동안 성실하게 그리고 묵묵하게 인내하며 방주를 준비했습니다. 비난도 있었겠지만 끝까지 견디며 일을 마쳤습니다. 노아의 순종은 믿음의 선택이며 결단입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홍수 사건을 청사진 보듯이 보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언제일지도 모르고 아직 체험해 보지 못한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였고 자기 의지로 믿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히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이것이 믿음의 신비입니다.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과 은혜가 여기 묻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택한 백성을 구원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구원의 일을 함께 감당하게 하십니다. 소돔이 망할 때 롯을 구원하셨고 바로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했으며 대적들의 손에서 다윗을 구원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를 구원하여 방주 같은 교회 안에 머물게 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로 선택하시고 성자 예수님은 몸으로 오시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우리를 속량하시고 성령께서는 그 구원을 보증하고 인 쳐주셨다고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우리들이 이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주의 오심을 준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세상은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깨달음도 없습니다. 영적인 일에 무관심합니다. 자신의 생존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마치 노아 시대의 사람들과 같습니다. 영적으로는 이미 죽었고 육체로만 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눅 17: 26-30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그러나 우리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중요한 것으로 믿고 그것을 위해서 삽니다. 예수 믿어 구원을 받고 보니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골 3:2-4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주께서 다시 오실 때에 우리가 믿는 생명의 가치가 세상 앞에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잘했다고 칭찬해 주시는 주님을 얼굴로 뵈올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영적전투에서 승리하고 또 다른 사람을 살려내는 시대적 사명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구원 받은 우리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의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는 이 교회는 이 시대의 사람들을 살리기 위한 구원 방주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인내하며 말씀위에 든든하게 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먼저 믿고 경험하고 함께 나누는 신앙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엡 4:13 “교회의 머리인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르라.” 고 했는데 이런 은혜를 함게 누리는 교회생활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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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19일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창 4:1-7)

창세기의 가인과 아벨의 제사이야기에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어떤 예배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가인이 드린 곡물제사는 하나님이 받지 않았고 아벨이 드린 피의 제사는 받았으니 피가 있는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이나 동생을 죽인 가인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신 것은 짐승의 희생을 통한 구원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예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힘입어 성령의 도움으로 하나님께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을 이렇게만 이해한다면 하나님은 농사하는 사람들이 드리는 곡물제사는 싫어하는가 하는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주신 제사법에 보면 분명 곡물로 드리는 소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제물인가보다 누가 제사를 드렸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아벨과 그가 드리는 제물은 받았고 가인과 그가 드리는 제물은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배드리는 사람이 평소에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떻게 사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아벨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기에 하나님이 그의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아벨은 자기가 돌보던 짐승의 첫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첫 것을 드린다는 것은 모든 것을 드린다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께 그의 모든 소유를 드리는 믿음으로 첫 것을 구분하여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기쁘게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구분하여 드리고 시간을 구분하여 주일에 예배하는 것도 첫 것을 구분하여 드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인정하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아벨과는 반대로 가인은 제사의 형식만 따랐을 뿐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리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가인은 땅에서 거둔 곡식의 일부를 가져다가 제사했습니다. 이 일부에 전체를 담을 만한 정성이 깃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제물을 받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제물이 열납 되지 못하자 자신을 점검하기보다는 도리어 안색이 변하여 하나님께 화를 냈습니다. 더나가서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동생을 죽이고 맙니다. 그가 평소에 하나님 중심의 생활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일 3: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가인의 생활은 악했고 아벨의 생활은 의로웠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장자인 가인이 아벨보다 더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릴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이름을 보아도 가인은 ‘여호와로 인하여 득남했다.’는 뜻을 가졌고 약속을 이을 후계자로 대접받으며 살아왔습니다. 아벨은 ‘바람, 헛됨, 아무 것도 아님.’이라는 뜻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이름과는 다르게 살았습니다.

나중에 모세를 통하여 제사법을 주신 것을 보면 “가축 중의 처음 난 것은 여호와께 드릴 첫 것이라.”(레 27:26) “네 토지에서 처음 거둔 열매의 가장 좋은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출 23:19상)라고 했습니다. 가축이든 농산물이든 첫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대표성을 갖는 첫 것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믿음이 있는가가 예배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요즈음 예배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공연처럼 변하고 있습니다. 처음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나 불신자를 배려하려는 선한 의도에서 시작한 열린 예배가 사람위주의 예배로 흘러가게 하는 위험이 있습니다. 화려한 무대조명과 프로그램, 잘 갖추어진 음악, 짜임새 있는 예배를 통하여 신자들의 호응을 얻으려 합니다. 감정적인 터치가 있어야 은혜 받았다고 하고 그것을 성령 충만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상당히 조심스런 부분입니다. 예배는 철저히 하나님께 드려지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예배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그를 경배하는 믿음의 행위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예배를 통하여 기도응답이나 문제해결도 주시지만 그것이 목적이 되면 사람 중심의 예배로 흐르기 쉽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고 그를 찬양하고 드높이는 것입니다. 우리를 불러 구원하셨음을 감사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 부름에 합당한 생활을 다짐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때마다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다짐하던 언약갱신 같은 것입니다. 거기에는 지정의가 다 동원되는 감격과 희열이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철저한 회개와 자기 돌아봄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 없이 하나님께 나가는 일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을 뵈올 준비가 되지 않은 채로 예배에 나가는 것은 하나님을 역겹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예배 첫 순서에 침묵기도를 넣은 이유도 한 주간의 생활을 돌아보며 회개하고 죄의 용서를 확신하고 예배하자는 취지입니다. 허물과 죄가 있는 상태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 1:13-15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이사야 때의 사람들은 희생제물을 드리고 안식일과 월삭과 대회로 모이는 종교 활동에는 열심이었지만 하나님이 원하는 생활을 하지 못했습니다. 손에 피가 묻은 채로 형식적인 종교 활동을 하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화를 내셨고 그들을 향하여 눈을 감아버리고 그들의 기도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사 1:16-17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는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일상에서 선을 행하고 정의를 행하며 서로 존중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종교 활동을 하는 잘못을 반복하지 않아야 합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한다면 형식과 전통보다 믿음으로 드리는 영적인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 보혈을 통하여 죄가 사해지고 의롭게 된 확신으로 하나님께 엎드려 절하고 경배하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일상이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는 생활예배가 될 때에 주일에 드리는 공동체의 공적인 예배를 기뻐 받으실 것입니다. 그런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성품을 배우고 그와 함께 일하며 그를 기쁘게 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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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12일 하나님의 대리인(창 1:26-28)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고 그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육체를 입고 제한된 시간을 사는 존재이지만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구원이고 영생입니다.

창조이야기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성경을 보는 안목이 달라집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의 내용이 중복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것을 비판하며 저자가 다른 기록물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많은 이단들은 여기서 다른 주장을 펼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1장에서 개략적으로 설명한 것을 2장에서 상세하게 보충하고 있다고 보면 자연스럽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려줍니다.

창 1:26-28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2:20-23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따라 아담을 지으시고 자신이 손수 만든 것들을 그에게 맡겨 다스리게 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것을 다스리고 경영하는 하나님의 대리자요 동역자의 복을 받았습니다. 아담에게 복을 주시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과 바다와 공중의 모든 것들을 관리하고 다스리게 했습니다. 아담은 짐승들의 이름을 지어주었고 자신의 갈빗대에서 나온 여자를 보고 자신의 일부, 곧 ‘너는 나다.’라고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아담의 정체성을 통하여 우리를 부르신 목적을 배운다면 아담의 타락 또한 우리의 한계와 약함을 알게 합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창조주와 피조물인 인간의 본분을 알게 하는 상징물이었습니다.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것과 하나님 안에서만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그것을 먹으면 죽음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쌍방 간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먹으면 하나님과 동등하게 될 수 있다는 사단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스스로 선택하여 그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사용해야 하는 의존적이고 상대적인 것이라는 것을 무시한 것입니다. 그 타락의 결과는 하나님과의 단절, 계약의 파기, 곧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단절을 가져왔습니다. 에덴동산을 거니는 하나님을 더 이상 뵐 수 없어서 피하고 숨었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던 하와에게 책임을 돌렸습니다. 만물도 타락한 인간 때문에 탄식하고 고통가운데 있으며 회복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롬 8:20) 각종 나무 열매를 먹고 살던 아담은 타락 후에는 땀 흘려 노동해야 했고 하와는 해산의 수고를 해야 했습니다. 땅은 척박해지고 엉겅퀴를 내었습니다.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자연을 관리하던 인간은 생존을 위한 정복자가 되어 자연을 해치고 파괴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에덴에서 내치면서도 구원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멸하게 됨을 말했습니다. 이것을 원 복음이라고 하는데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게 될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창 3:15“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바울은 롬 5:18-19에서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라고 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죽음에 이르게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죄에서 자유하게 되고 에덴의 복이 회복되었습니다. 구속(redemption), 화해(reconciliation), 새롭게 됨(renewal), 거듭남(rebirth), 중생(regeneration)으로 표현되는 단어들은 모두 ‘다시’를 말하는 ‘re-’ 접두사를 사용하여 타락 이전의 창조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엡 4:24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들은 하나님과 함께 생각을 나누고 협력해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새사람 곧 구원받은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을 성실하게 걸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바로 살아 구원의 복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출애굽하여 시내산에 도착한 이스라엘은 율법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다는 언약을 맺었습니다. 모세는 가나안이 눈에 보이는 모압 평지에서 광야에서 출생한 젊은이들에게 신명기 설교를 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다는 약속을 하게 합니다. 여호수아도 요단강을 건너 길갈에 도착해서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의 일을 기억하고 기념비를 세우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다는 언약을 갱신했습니다. 세겜에서 다시 헌신을 다짐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새해를 맞아 직원들이 헌신예배를 다짐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빛과 소금의 생활을 다짐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적으로는 말씀으로 다시 새롭게 되기를 위해서 성경을 통독하고 묵상하며 깊이 기도하는 영적활동이 불붙기를 기대합니다. 사명에 충성하는 하나님의 대리인들이 되려는 노력이 새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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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5일 말씀으로 다시 새롭게 (딤후3:15-17)

교회 부흥을 일으킨 전도자 디엘 무디는 믿음이 하늘로서 번개 치듯 뚝 떨어질 것으로 생각하다가 어느 날 롬 10:17 말씀을 읽다가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는 말씀에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성경보다 기도에만 집중하던 생활을 바꿔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니 믿음이 자라기 시작했다고 그의 경험을 얘기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게 합니다.

오늘 말씀은 성경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영적인 지혜를 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은 구원의 진리를 가르쳐주고 우리의 잘못을 책망하여 회개하게 하여 의로운 생활을 하게 합니다. 벧후 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것은 사람의 생각이 우선 된 것이 아니라 그 목적과 시작과 과정이 하나님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알려 주려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을 기록한 사람은 주님께 범죄 하지 않으려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했다고 고백합니다. 말씀이 자기 삶의 지침이 된다는 것을 알고 말씀을 사모했습니다. 마치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갈급해 하는 것처럼 입을 벌리고 헐떡인다고 표현했습니다. 요 10:10에서 예수님은 양으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오셨다고 말했습니다. 그 생명을 누리고 풍성한 삶을 누리기 위하여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자신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온갖 역사를 이야기하는 성경 속에서 우리를 사랑하고 구원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역사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닫힌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침묵했다기보다는 사람들의 마음이 둔하여 하나님께 관심을 두지 못한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영적인 분별력이 사라져 아들을 잘못 가르쳤고 결국 가문이 망했습니다. 역대하 33을 보면 므낫세 왕 55년의 통치 기간은 어느 때보다 우상숭배가 만연했고 하나님을 떠난 때입니다. 그러나 요시야 때는 성전을 수리하다가 발견한 말씀을 다시 읽고 회개했습니다. 우상숭배를 금했고 이방 산당들을 헐어 버렸고 큰 영적갱신을 일으켰습니다. 영적 부흥이 있던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고 그 앞에서 철저하게 회개할 때였습니다.

아모스 8: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고 했습니다. 영적인 기갈이 있을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생활에 영향을 주지 못할 때입니다. 선지자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도 무시했고 듣기 좋은 말만 들으려 했고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고 선택했습니다. 우상에게 이미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부르지만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사는 결과는 파멸이었습니다. 나라를 잃고 종살이 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종살이를 마치고 느헤미야의 인도로 귀향하여 성전과 성벽을 다시 보수할 때에 남다른 감회가 있었습니다. 바벨론에서 살면서 성전예배가 얼마나 큰 복인지를 몸으로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회당을 만들고 말씀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여 성전을 보수하게 되니 그들이 느끼는 감격은 그야말로 감개무량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공사를 마치고는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그 말씀을 들어도 싫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들으니 잘못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상 숭배를 멀리했고 이방사람들을 멀리했습니다. 자신과 선조들의 죄까지 철저하게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모든 시대의 영적 부흥은 말씀을 읽고 듣고 실천하는 일에서 왔습니다. 딤후 3:17은 성경을 주신 목적을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라고 말합니다. 성도를 온전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영적인 삶을 살게 하여 또 다른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올해 교회의 표어를 ‘말씀으로 다시 새롭게’라고 정했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영적 부흥을 맛보고 주님과 함께 기쁨을 새롭게 맛보기 위해서 입니다. 올해 신구약 성경 전체를 한번 통독하는 계획도 세우고 깊이 묵상하고 실천해 보기를 권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려고 그 계획을 알려주는 사랑의 편지입니다. 그것을 읽고 묵상할 때에 마음이 뜨거워지고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열심이 생겨날 것입니다.

요 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 곧 그의 일이며 그의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태도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아름다운 것을 보아도, 유명한 곳을 방문해도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설교 시작에 무디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무디의 성경 여백에는 알파벳 T와 P가 잔뜩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무슨 뜻이냐고 물자 T는 tried(시도), P는 proved(증명)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성경에도 자신의 주석으로 성경이 지저분해 지기 바랍니다.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두고 읽고 실천하여 그 사랑이 더욱 뜨겁게 유지되기를 바랍니다. 새해에 말씀을 더 가까이 하여 영적 기쁨이 새롭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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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29일 주님의 평강을 누리십시오. (시 122, 빌 4:4-7) 12/29/19 중앙

시 122편은 순례자들이 성전에 올라가며 부르던 노래입니다. 1절에서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기뻤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그곳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기대와 감격이 크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창조주이며 모든 권한을 가진 주권자로 고백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소유이며 그가 기르는 양이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집인 성전에 올라가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마치 우리가 교회를 사모하고 예배하는 일을 기쁨으로 여기는 것처럼 말입니다.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할 때에는 성전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되자 곳곳에 회당을 만들고 모여서 말씀을 배우고 신앙을 계승했습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무너진 성전을 재건할 때에 그래서 남다른 감격이 있었습니다.

시 122:2-5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거기에 심판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의 집의 보좌로다.” 라고 말하며 자유롭게 예배할 수 있는 예루살렘을 칭찬하며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전을 생각하며 기쁨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아름다운 것은 거기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평화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가 형통할 것이라는 고백도 예루살렘 자체가 아름답거나 어떤 힘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며 힘을 얻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주시는 샬롬의 평화를 맛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예루살렘을 축복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교회를 통하여 주시는 영적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 감격과 평화를 지속할 수 있는 길을 생각해 보려합니다.

1. 영적인 감격과 평강을 누리기 위해서는 주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참 평강을 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항상 주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바울이 옥중에 있으면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비결도 주님을 인정하고 주님과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형편이 좋아져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을 의지적으로 선택하고 기쁨의 근원이신 주님을 붙잡고 찬양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옥문도 여리고 간수도 복음을 듣게 되고 자신도 자유를 얻었습니다. 옥에 갇힌 것이 복음을 위해서는 오히려 잘된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빌 4:1 ‘주안에 서라’, 4:2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빌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빌 4: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한다.’ 라고 말하며 주 안에서의 삶을 말했습니다.

주 안에 있다는 것은 주님과 친밀한 영적 교제를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영인 성령님을 인격적으로 환영하고 생각을 나누고 대화하는 관계에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지식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사랑하고 뒤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주안에 있다는 증거는 주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주님은 서로 사랑하는 것을 가장 크고 새로운 계명으로 말씀했습니다. 요 15:12 “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하는 이것이니라.” 요 13:34, 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서로 사랑하는 것이 계명을 지키는 일이고 주님 안에 거하는 일이며 제자의 신분에 맞는 생활입니다. 서로 용납하고 사랑해야 평강과 기쁨을 유지하고 영적 생활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한계를 느끼기에 성령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 4:5에서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라고 관용을 요구했습니다. 관용이란 말은 손해를 끼친 상대에 대한 나쁜 생각을 누르고 너그럽게 받아주고 친절을 베푸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일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 없이는 우리의 사랑은 말에 그치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말씀대로 산다고 할 수 없으며 주안에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영적 감동을 유지하고 주님 주시는 평화를 누리려면 자존심과 고집을 포기하고 서로 사랑하고 포용하고 용납하는 순종을 실천해야 합니다. 상처를 앉고 사는 우리들이 실천하기에 상당히 부담스런 계명임에 분명합니다. 미워하지 않고 부딪히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예의를 지키는 선까지는 해보겠는데 적극적으로 사랑하고 관용을 베푸는 일은 주님이 힘을 주셔야 가능한 부분입니다.

2. 기도하는 일입니다. 빌 4:6-7에서 바울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했습니다. 벧전 5:7-8에서 베드로도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 하심이니라. 깨어라 근신하라 너희 대적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했습니다. 염려와 근심을 하지 않을 수 없지만 마귀가 그것을 사용하여 우리를 믿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는 것을 알기에 예수 안에 거하는 의지적인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마다 주님을 선택하고 따르기로 작정하는 일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런데 기도가 응답되기 위해서는 서로 사랑하고 관용을 베푸는 주님 안에 거하는 순종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 관용을 베풀지 못하면서 자신을 합리화하고 방어하려 한다면 인격이신 성령께서도 우리가 온전히 순종할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러니 나도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마음을 넓혀 서로 용납하고 존중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 막힘이 없어야 하나님과의 관계도 열립니다. 이것이 영적 생활의 바른 원리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기도와 말씀을 통하여 자기 욕심을 죽이고 예수 안에서 사는 연습을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일은 한 번의 노력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떤 공적을 쌓거나 내공을 기르는 수련활동이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과 함께 하며 주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으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예배의 감격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지체들을 서로 사랑하고 관용하며 주님의 성품을 배워가는 훈련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주의 은혜로 한해를 살았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주장하시는 주님을 의지적으로 선택하여 기쁨과 평강을 누리는 승리가 계속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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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22일 성탄절의 도전, The Christmas challenge. (마 1:18-21)

마 1:18-21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Matt 1:18-21 “This is how the birth of Jesus Christ came about: His mother Mary was pledged to be married to Joseph, but before they came together, she was found to be with child through the Holy Spirit.
Because Joseph her husband was a righteous man and did not want to expose her to public disgrace, he had in mind to divorce her quietly.
But after he had considered this, an angel of the Lord appeared to him in a dream and said, “Joseph son of David, do not be afraid to take Mary home as your wife, because what is conceived in her is from the Holy Spirit.
She will give birth to a son, and you are to give him the name Jesus, because he will save his people from their sins.”

예수님은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해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 우리를 위한 속죄의 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기에 죄인을 구원하는 속죄제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때에 하나님과 한 가족이 되고,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조금 후에 천국에서 우리는 그 주님을 얼굴로 뵐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크리스마스는 그 구주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고 우리를 구원하신 은혜를 감사하는 날입니다.
Jesus was born for paying penalty for our sins. God sent his only son Jesus, to be the atonement for our sins. By believing in Jesus as our Savior, we can become united with God again as family, and we all become children of God, and someday later we will meet him in person in Heaven. Christmas is the day of celebration of the Savior’s birth. We are thankful to Jesus Christ, saving us from the death.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아들의 명분을 주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고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유업을 이어갈 후사가 되었습니다.
Paul teaches us that God sent Jesus Christ in His time, to make us children of God, so that we may call God as Abba Father, and to be heirs.

갈 4:4-7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Gal 4:4-7 “But when the time had fully come, God sent his Son, born of a woman, born under law, to redeem those under law, that we might receive the full rights of sons. Because you are sons, God sent the Spirit of his Son into our hearts, the Spirit who calls out, “Abba, Father.” So you are no longer a slave, but a son; and since you are a son, God has made you also an heir.”

눅 2:10-11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Luke 2:10-11 “But the angel said to them, “Do not be afraid. I bring you good news of great joy that will be for all the people. Today in the town of David a Savior has been born to you; he is Christ the Lord.”

천사가 전해준 예수 탄생의 소식은 온 세상이 구원을 얻게 된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 기쁜 소식은 이제 우리 손에 들려있습니다. 여러분의 친구도 예수님을 만나서 새롭게 되는 은혜를 경험하게 해야겠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물려받을 후사가 되었으니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경영하는 하나님의 동역자로 살아가십시오. 주변사람들에게 주님을 만나는 복을 나누어주십시오. 이것이 성탄절을 의미 있게 보내는 길이며 우리에게 주시는 성탄절의 도전입니다.

While we celebrate and worship Him today, let the spirit of God be with us and challenge us to be mighty helpers of the Lord. The good news about the birth of Christ is on our hand, and it must be shared with friends. As his heirs, let us practice and enjoy our rights, the partnership with the Lord, so that our friends might believe in Jesus Christ as their savior too. Jesus Christ is still saving your friends through your participation. This is the Christmas challenge. May God bless you 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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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15일 참 평안과 위로이신 예수그리스도 (사 9:1-7, 눅 2:8-14, 빌 4:6-7)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게 터무니없는 방위비를 요구하며 평화는 값비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정당한 값을 지불하고 군사적 보호를 받으라고 압박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장하는 평화는 이렇게 강자의 힘에 의해서 유지됩니다. 때로는 강압을 하고 때로는 빼앗기도 하며 가진 것 없는 약한 나라는 쥐 죽은 듯이 지내라고 합니다. 이런 평화는 위장된 평화입니다. 이런 불합리한 일들은 나라와 나라 사이만이 아니라 가정과 개인에게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대개의 경우 겉으로 들어나지 않게 감추고 적당히 거리를 두거나 말을 섞지 않는 방법을 택하지만 참 평안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참 평안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참 평화, 샬롬의 평화를 주십니다. 죄로부터의 자유이며 하나님과의 화해입니다. 자신을 내어주어 우리를 살게 한 사랑의 결과물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임마누엘의 복입니다. 풍랑을 잔잔하게 하신 주님을 경험한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하는 한 다시는 풍랑을 겁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는 그날을 살게 하는 일용할 양식입니다. 내일을 염려하여 많이 거두면 썩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 전에는 이틀 분량을 거두어도 썩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사는 법,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법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의 도움으로 사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면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의 기대대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마음과 생각을 다스려 주십니다. 이런 순종이 평안을 누리는 길입니다.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그가 주시는 평안을 날마다 누려야 하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어야 합니다.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 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골 1:21-22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엡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 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고후 5: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어둠 속에 사는 백성들에게 큰 빛이 비쳤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빛이 비쳤다고 이사야는 절망 가운데 있던 사람들에게 소망과 평안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사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메시야의 탄생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시는 메시아는 그 이름대로 다스리는 권세가 있고 능력을 행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는 놀라운 조언가여서 무슨 일이든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십니다. 그의 왕권은 점점 더 커지고 그가 주시는 평화도 끝없이 이어질 것이고 다윗의 보좌와 왕국 위에 앉아서 공평과 정의로 나라를 굳게 세울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그의 왕국이 곧 예루살렘에 건설될 것을 꿈꾸었지만 주님은 그의 나라를 사람들의 마음에 심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고통 받던 백성에게 빛과 소망을 주셨습니다. 이방 땅과 접해있던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은 늘 소외된 지역이었습니다. 갈릴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는가라고 무시당하던 그 곳의 사람들과 함께 살며 일했습니다. 그 지역을 영화롭게 했고 더 이상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마 4:13-14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예수께서 사 9장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가버나움에서 사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삶의 질이 달라지고 천국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 복음을 믿는 사람의 변화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늘 영광을 버리고 세상에 오시어 가난하고 무시당하던 사람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셨습니다. 히브리서는 그가 몸소 고난을 당했기에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능히 도울 수 있는 중보자며 대 제사장이 되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었습니다. 모든 묶인 것을 자유하게 하고 죽음의 권세도 깨뜨렸습니다. 그가 영으로 우리와 함께 하며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십니다. 바울은 빌 4장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합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신다고 가르쳐 줍니다. 자신은 옥에 갇혀 있으면서 교회에게는 오히려 기뻐하라고 말했습니다.

고후 1: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가 옥중에서 주님의 위로를 경험했기에 이제는 염려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성도가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은 문제가 작아서가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위로가 크기 때문입니다. 환경이 좋아서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만을 위하지 않고 또 다른 고난 받는 자들을 위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에서 자유함을 누리고 기뻐하며 다른 사람에게 평안과 위로를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구주께서 탄생하신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이란 말은 하나님이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만들고 만족해하며 기뻐하신 것처럼 구주 탄생이 하나님께 영광과 기쁨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십자가 고난과 부활이 구원을 이루는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고 그래서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땅에서는 그 은혜를 힘입게 될 사람들, 곧 하나님이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 은총을 받은 사람들, 구원받기로 작정된 사람들에게 복이 되고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천년 전에 육체로 오셨던 주님은 오늘 영으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가 참 평안과 위로를 주십니다. 눈물짓는 자들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어둠에 있는 자들에게 빛이 되어 주십니다. 죄에 갇힌 자들을 풀어 자유하게 하십니다. 마음의 병을 치료하고 낮은 자존감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직장도, 가정의 문제에도 관여하십니다. 자녀교육의 짐도 대신 져주십니다. 죽음과 그 너머의 시간도 보장해 주십니다. 그러니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고 참 평안을 누리십시오. 주님의 평안과 위로를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 안에서 마음껏 누리고 나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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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8일 목적이 있는 기다림 (롬 13:11-14)

대림절은 성탄절이 되기 전 4주간을 예수님의 사역과 삶을 생각하며 주님과 만남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 정한 기간입니다. 강림, 대강, 대림이라고 불리는 Advent 라는 단어는 로마제국의 황제가 즉위한 후에 여러 도시들을 방문할 때 그가 오셨다 혹은 방문했다라고 말하던 His Advent 것에서 나온 것입니다. 교회가 이 단어를 사용하면서 진정한 왕이며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The coming of our Savior 라는 의미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대림절은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오신 ‘구세주의 오심‘을 기다리고 환영하는 절기입니다.

대림절기에 많이 생각나는 인물이 있다면 시므온과 안나 일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기다린 사람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기사와 함게 소개되기 때문입니다. 시므온은 자기 생전에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이라는 성령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기다렸습니다. 안나 선지자도 일찍 과부가 되었지만 메시야를 기다리는 소망으로 기도하며 성전에서 지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주님을 뵈올 날을 기다렸습니다. 오랜 시간을 인내하며 기다리던 이들은 결례의식을 위해 성전에 들어오는 아기 예수를 보자 금방 알아차리고 크게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 붙잡혀가 고생을 하며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성전예배가 불가능했기에 회당을 짓고 말씀을 배웠습니다. 회당에 모여 회개하며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간구했고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날을 기다렸습니다. 선지자를 통해 들려주셨던 회복시켜 주신다는 말씀을 기억하고 구원주로 오시는 메시아를 갈망했습니다. 렘 33:14-16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대하여 이른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 그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얻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거할 것이며 그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

그들이 붙잡은 한 의로운 가지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때가 되자 메시야를 보냈습니다. 마 1:21~23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다윗 왕의 후손 가난한 요셉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십자가 고난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도 겸손하게 나귀를 타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를 수용하셨습니다. 낙심한 사람들에게 부활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부활은 죽음 너머의 시간도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모두가 죽지만 다시 산다는 것을 알려주시고 그 후에 있을 심판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의 재림으로 시작되는 세상의 종말은 또 다른 시작입니다. 주께서 모든 것을 완전하게 회복시키고 새로운 질서와 세상을 열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림절은 주님을 경험하는 절기입니다. 지식으로 알던 믿음에서 한걸음 나가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적당한 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열매를 점검하고 다시 오시는 주님을 준비하는 기회입니다. 현실과 믿음사이의 괴리를 보며 더 깊은 기도를 하게 됩니다. 우리 스스로에게는 의롭게 되거나 고백한대로 살 수 있는 힘이 없다는 사실로 인해 가슴아파하며 철저한 자기 부정과 절망감 속에서 주님의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구약성도들이 메시아를 기다린 것이나 우리가 재림하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살며 목적 있는 기다림을 가진 사람만이 주님을 우선하며 마음을 거기에 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약 5:7~8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오늘 말씀을 새 번역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롬 13:11-14 “ 여러분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압니다.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더 가까워졌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낮에 행동하듯이, 단정하게 행합시다. 호사한 연회와 술 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에 빠지지 맙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립니다. 그가 이루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기대합니다. 말라기는 여호와의 구원의 날을 크고 비밀스러운 날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날은 교만하고 죄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는 크고 두려운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들에게는 큰 기쁨의 날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고 고대하던 주님을 얼굴로 뵙는 날이고 구원이 완성되는 기쁨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우리를 착하고 충성스런 종이라고 칭찬하시고 상급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눈물을 씻어주시고 주님의 영광가운데 거하게 하고 영원한 시간을 주님과 함께 보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 꿈으로 삽니다. 그날에 대한 기다림은 막연하지 않습니다. 지나간 버스를 기다리듯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 소풍날을 밤잠 설치며 기다리던 그 설렘으로 그날을 기다립니다.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환영하고 사랑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조심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임할 때에 피하지 못하게 됩니다. 깨어있어야 회개도 하고 주인의 뜻을 분별하고 충성할 수 있습니다. 깨어있어야 구원의 주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기대와 소망으로, 그러면서도 내 욕심과 무거운 짐은 내려놓고 주의 오심을 적극적으로 기다리는 목적이 분명한 대림의 기간을 보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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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1일 돋보여 주는 삶 (마 5:14-16)김동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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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24일 하나님을 기억하라(신 8:1-6, 골 1:18-23)

광야생활을 거의 마치고 가나안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모세는 광야에서 태어난 신세대들에게 지난 역사를 회고하며 율법을 다시 설교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으며 고생한 것은 백성들을 겸손하게 낮추어 하나님만 신뢰하도록 훈련하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2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16절) 광야는 복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배려였습니다.

만나는 광야에서의 일용할 양식이었습니다. 그날 분량만 거두어야 했고 욕심을 부려 많이 거두면 썩어버렸습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을 배우게 한 것입니다. 4절을 보면 그들이 광야에서 지내는 40년 동안 의복이 헤어지지 않고 발이 부르트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인도하심 가운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데 마음을 두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먹고 마시는 문제 때문에 불평했습니다. 그래서 1절에서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라고 다시 말하며 말씀에 대한 순종을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장차 가나안에 들어가 풍요로운 생활을 하게 될 때에 교만하거나 은혜를 잊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12-14절“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17-18절”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하나님을 항상 기억하라는 것입니다.그것을 위해서 안식일과 안식년 제도를 주어 하나님이 먹이고 입힌다는 경제 질서를 따르게 했습니다. 때마다 절기를 지키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잊지 않게 했습니다.

은혜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면 망한다고 경고했습니다. 자기 힘으로 이루어 낸 것조차 하나님의 은혜로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재물을 얻었다면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며, 건강하다면 그것도 하나님이 돌보신 은혜입니다.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생각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 경험을 공유하고 그 현장으로 들어가 거기서 배운 것을 지금 나의 삶에 적용하는 것까지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광야 백성중의 하나가 되어 만나를 먹으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배워 우리의 생활에 적용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만찬 테이블에 함께 앉아 그 떡과 잔을 받아먹고 지금도 영으로 함께 하시는 그 주님을 날마다 누려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억하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그의 편지 여러 군데에서 감사를 가르쳤습니다. 그는 옥에 갇혀서도 감사했고 그것이 복음을 위해 도움이 된다며 기뻐했습니다. 자신을 염려하는 성도들을 오히려 격려하며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감사는 형편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신이 새롭게 된 사실 때문에 드리는 감사였습니다.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할 만큼 형편없던 자신을 새로운 존재로 만들어 주신 주님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고 나서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만을 위하여 헌신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교회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며 감사했습니다. 로마교회의 믿음 때문에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감사했고, 고린도교회의 풍성한 은사와 재림에 대한 믿음을 감사했습니다. 에베소와 골로새 교인들의 믿음과 사랑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감사했습니다. 사역의 필요를 함께 나눴던 빌립보교회에게 감사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본을 보이는 믿음을 칭찬하고 감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하나님의 통치 안에 거하며 영적 풍성함을 누리기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범사에 주님을 기쁘게 하고 선한 열매를 맺기를 기대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모든 어려움을 참아내며 믿음을 지키기를 부탁했습니다.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창조하고 통일시켰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그를 다시 살려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창세전부터 우리를 선택하고 예정하고 불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의롭게 했고 책망 받을 것이 없는 거룩한 존재요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불러 주셨습니다. 오늘도 믿음으로 살도록 교회의 일원으로 불러주셨고 때마다 다시 일어서도록 격려하고 힘을 주셨습니다.

광야 백성들이 만나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면 우리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죽음에서 부활시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하려고 오신 구원주입니다. 요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약속했습니다. 성찬의 떡을 먹고 잔을 마실 때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기억하고 구원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배부르고 목마르지 않는 풍성한 생활의 비밀을 그 안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자답게 성령 안에서 살며 하나님의 뜻인 영혼구원을 위해서 때를 얻는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제 구원받은 우리들은 떡만으로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힘과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의 일을 기억하고 감사하고 드러내는 것입니다. 지나온 날들에 대한 감사와 함께 앞으로의 삶을 주님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풍성함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는 물론이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형편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감사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천국에서의 예배를 지금 여기서 드리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작은 몸동작과 말 한마디가 부모를 기쁘게 하듯 감사함으로 드리는 우리의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종의 치유를 위해서 예수님을 찾았던 백부장은 주께서 자기 집에 오는 것을 감당할 수 없으니 말씀으로 명령해주시기를 청했습니다. 귀신들린 딸을 가진 가나안 여인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며 은혜를 사모했습니다. 주님은 이런 겸손한 자들을 칭찬했습니다. 뱃세다 들녘에서 자기 도시락을 아낌없이 내어드린 어린아이의 헌신이 주님의 손에 들려 많은 사람을 먹게 하는 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함으로 드리는 우리의 예배와 헌신도 주님 손에 들려져 그렇게 사용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주께 돌아오도록 사용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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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17일 너희도 서로 받으라. Accept one another 롬 15:1-7 이규원 전도사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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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10일 복된 제자의 헌신 (마 5:1–12, 계 7:9–17)

이스라엘을 선택한 하나님은 그들이 제사장 나라가 되어 구원의 메시지를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주기를 원했습니다. 시내산에서 주신 말씀을 따라 살고 성막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훈련받아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의 일을 함께 감당하기를 기대했습니다.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제자의 길을 가르쳐 주시며 제자들이 예수님을 닮아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을 받으며 자신과 공동체의 삶을 맛깔나게 하는 존재가 되어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함께 하기를 원했습니다. 신앙생활은 우리가 복 받기 위한 것도 있지만 더 나가서는 열방에게 구원의 복을 나눠주며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가르침대로 실천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아니 세상적인 가치를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성령님을 절대 의지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항상 은혜를 구하는 겸손한 자세로 삽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마음이 가난하고 온유하며 날마다 천국을 소망합니다. 타락하고 망가진 세상을 보며 욕하고 비판하기 보다는 하나님과 함께 마음 아파하며 대신 회개합니다. 그에게는 예루살렘을 보며 울었던 예수님의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 영혼의 구원에 대한 애착을 갖습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하여 우리를 살려주신 주님을 따라 다른 사람의 유익과 구원을 위해 자신을 드립니다. 제자는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길 줄 압니다. 상대의 입장을 공감하고 함께 아파합니다. 이웃과 함께 울고 함께 웃습니다. 항상 마음을 깨끗하게 관리합니다. 두 마음을 품지 않습니다. 일편단심으로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살기에 하나님을 보고 느낄 줄 압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들과도 화평을 이룹니다. 막힘없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리스도의 향기를 자연스레 발산하며 생명을 얻게 합니다. 문제를 만나더라도 장차 누릴 천국의 소망을 바라며 인내할 줄 압니다.

사도 요한은 수많은 사람들이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와 흰 옷을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서 예배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보좌에 계신 하나님과 어린 양이 우리를 구원했다고 찬양했습니다.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영원히 하나님께 있습니다 아멘! 하고 경배했습니다. 요한이 본 흰 옷 입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내고 구원받은 성도들입니다. 어린 양의 피에 자기 옷을 빨아 거룩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밤낮으로 그분만을 섬깁니다. 거기는 다시는 배고픔이나 목마름이 없습니다. 어린 양이 목자가 되어 그들을 생명 샘물로 인도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모두 씻어 줍니다. 참 기쁨과 행복이 거기 있습니다.

십자가 고난을 앞에 둔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기쁨을 준다. 이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 세상이 빼앗아갈 수도 없는 기쁨이다. 나는 십자가에서 죽고 너희를 떠나지만 너희 속에는 그 기쁨이 있을 것이다. 너희를 돕는 또 다른 보혜사가 와서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 그들이 흔들리지 않고 제자의 길을 가기를 바랐습니다. 부활 후에도 40일간 세상에 계시며 그들을 격려했습니다. 승천하신 후에 약속한대로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따르고 그 예수님을 증거 하게 하고 생명의 기쁨을 날마다 누리며 했으며 환란가운데서도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그 은혜를 주십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의 통치를 사모하게 합니다. 불의를 보고는 마음 아파하는 제자가 되게 합니다. 영적 배고픔을 주시어 말씀을 묵상하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게 합니다. 때로는 환란을 만나지만 믿음으로 견디며 천국을 소망하게 합니다. 비록 오늘은 제한 된 육체 가운데 있지만 그날에 그리스도와 같이 영광스럽게 변화될 것을 바라게 합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본 그 흰 옷 입은 무리는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마 26장에 한 여자가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식사중인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제자들은 값비싼 향유를 무례하게 사용하는 것을 핀잔하고 팔아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의미가 있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장례를 준비한 것이라고 그 여인을 칭찬했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행한 거룩한 낭비를 값진 헌신으로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청산하는 마음으로 자기 소유 전부를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삶의 이유를 다시 찾았기에 자기 인생 전체를 아낌없이 드린 것입니다. 죄 용서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알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구원의 감격이야말로 모든 헌신과 섬김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지난 두 주간 말씀 공부하는 교우들을 섬기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확신하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하루 세 시간, 두 주간의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고 말씀에 집중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아이가 병원에 있는데도 배움의 자리로 달려오는 어머니의 열정을 보았습니다. 자기 자식이 아픈 것처럼 마음을 묶어 함께 기도하고 병상을 지키는 성도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하루 두 번 여섯 시간의 강의도 힘든 일인데 또 한 사람을 위해 쉬지 않고 보충강의를 하는 강사의 헌신과 사랑을 보았습니다. 찾아와 격려하고 음식을 제공해 주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기에 가능한 일들이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라는 찬송을 쓴 존 뉴턴은 믿음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목사가 되기를 원하던 어머니가 그의 나이 여섯 살에 죽고 아버지가 재혼하자 힘든 세월을 보냅니다. 믿음에서 떠나 살다가 나중에는 아프리카에서 잡아 온 노예를 파는 노예상이 됩니다. 어느 날 큰 폭풍을 만나 배가 파선할만한 급한 상황에서 기도를 했는데 폭풍이 가라앉는 기도의 응답을 경험하고는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어떤 죄도 용서해주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그는 설교자가 됩니다. 노년에 그의 건강을 염려하는 사람들이 대중설교를 그만하도록 권유했지만 ‘옛날 아프리카에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던 죄인이 아직 입술을 움직일 수 있는데 어떻게 그분의 은혜를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시 116:12-14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음 주일은 추수감사주일로 지킵니다. 주께서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를 세어보고 감사하는 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복된 제자들이 주님께 드리는 최고의 헌신의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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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3일 삭개오처럼 (눅 19:1-10, 사 1:10-18)

구원은 죄인에게 은혜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행위나 노력이 아니라 값없이 일방적으로 주시는 은혜입니다. 예수님 만나기를 사모하던 키 작은 삭개오가 나무에 올라갔다가 뜻밖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삭개오를 알아보고 말을 건넸고 그의 집에 들어가 구원을 선포해 주셨습니다. 누가는 예수님과 삭개오의 대화를 다 말하지 않습니다. 5절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9절,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라는 사이에 8절에서 삭개오의 변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변화가 한 두 마디의 대화로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사람들은 죄인과 세리를 가까이 하며 음식을 먹는 예수님에게 화를 내고 욕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을 사회 규범을 깨는 도전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라고 말씀했습니다. 사회 통념이나 율법에 근거한 전통보다 버림받은 약자들을 섬기고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 편에서 더 중요했습니다. 눅 15장에서 이미 잃어버렸다가 찾은 한 마리의 양, 한 드라크마, 한 아들에 대하여 말씀하시며 그 한 영혼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잔치를 베푸는 하나님의 마음을 말씀했습니다. 전도나 영혼 구원하는 일은 합리적으로 이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누구를 사랑하면 주변의 상황에 휘둘리거나 투자가치를 계산하지 않고 온 정성을 쏟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우리를 사랑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했습니다.

삭개오에게는 내적 갈등이 있었습니다. 돈과 명예를 위해 양심도 팔고 동족으로부터 욕도 들었으니 어찌 마음이 편했겠습니까? 살기 워한 자구책이었지만 갈증이 심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기의 문제를 해결해 줄 분으로 여겨졌고 꼭 한번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흥분하여 길로 나갔지만 작은 키의 삭개오는 군중 속에 파묻혀 버립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빠르게 돌감람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체면과 지위보다 주님을 보고 싶은 마음이 우선한 결과였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선재적 은총이라고 말합니다.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먼저 주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 밭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런 삭개오에게 자신의 집에 머물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어떻게 들렸을까요?

어두움은 빛 앞에서 소리 없이 사라집니다. 삭개오는 지금 군중 속의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선 죄인으로 예수님 앞에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맘몬 우상을 섬기며 갈등하는 자리에 계속 머물 수 있겠습니까? 봄철 따스한 볕에 눈 녹듯 삭개오는 예수님의 사랑에 녹아 내렸습니다. ‘내 소유의 절반을 떼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습니다.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로 갚겠습니다.’ 라고 회개합니다. 더 이상 돈을 우선하지 않겠다는 결단입니다. 가난한 이웃도 돌보고 열린 관계로 살겠다는 변화입니다. 폭리를 취하지 않고 죄의 자리에 머물지 않겠다는 자기포기입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기에 이루어진 회복이고 변화입니다.

이것은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입술이 부정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고 두려워한 것과 같습니다. 이 거룩한 만남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할 때에 진정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구원의 감격과 변화를 경험했기에 여기 예배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 이후에도 지속적인 성품의 변화와 인격의 성숙을 노력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은혜로 단번에 받지만 성숙이나 성화는 꾸준한 과정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심을 버리고 예수님을 우선하는 지속적인 훈련을 통하여 배워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고 예배 훈련을 하는 것도 그것을 위한 것입니다. 삭개오가 약속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자신과 싸웠을 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아마 직업을 바꾸지 않았을까요? 쉽지 않은 싸움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약속을 지키고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 위해서는 자신을 인정해 주고 구원을 선언하신 예수님을 때마다 생각하고 자기를 포기하는 반복적인 신앙고백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지속적인 변화를 요구하십니다. 이사야 1장은 소돔의 관원들과 고모라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새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러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나의 뜰만 밟을 뿐이다! 다시는 헛된 제물을 가져 오지 말아라. 다 쓸모없는 것들이다. 분향하는 것도 나에게는 역겹고, 초하루와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참을 수 없으며, 거룩한 집회를 열어 놓고 못된 짓도 함께 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사 1:11-13)

자신을 위하여 율법이 정한 것은 열심히 드렸지만 사회 정의는 실천하지 않던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고 스스로 깨끗하게 하라고 요구하십니다. 구원받은 것은 감사하지만 환경에 묶여 적당히 타협하고 사는 신자들이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그래서 구원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때마다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성령과 함께 자기를 점검하고 죄를 미워하며 하나님과 사람에 인정받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삭개오가 결단하고 방향을 바꾼 생활의 변화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갈 2:20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롬 12:1-2,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성도는 세상을 위한 빛과 소금입니다. 한없는 주의 사랑에 날마다 감사하며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거룩한 생활의 열매로 하나님을 자랑하며 세상이 하나님을 알게 해야 합니다. 때로 실패하고 넘어질 때도 있지만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포기할 수 없습니다. 시 121편은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라고 노래하며 그 하나님이 환난을 면하게 하며 영원까지 지켜주실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자신의 백성들을 신실하게 돌보시는 분입니다. 그를 소망하고 바라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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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27일 의지적인 신앙 고백 (시 34:1-10,삼상 21:10-15)

시 34편은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척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입니다. 삼상 21장을 보면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하자 급히 피하여 적진 블레셋 진영으로 숨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적군의 신하들이 다윗이 숨어 들어온 것을 왕에게 알리고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이라고 칭찬했던 세간의 소문을 아기스 왕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아기스는 이름이고 아비멜렉은 왕을 부르는 호칭입입니다. 애굽 왕들을 바로라고 부른 것과 같습니다. 어떻든 사울을 피해 적진으로 숨어 들어온 다윗의 정체가 폭로되면 죽을 것이 뻔했습니다. 다윗은 순간의 기지를 발휘하여 침을 흘리고 대문을 긁고 미친 사람 흉내를 내며 그곳을 빠져 나와 아둘람 굴로 도망했습니다. 그런 일을 겪은 후에 그 어려움 속에서 구해주신 하나님을 찬송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문제를 겪으며 삽니다. 때로는 자기 뜻을 이루어보려는 지나친 열심 때문에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기도 하고, 정 반대로 오해를 받아 미움을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때로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져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이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보려고 하지만 한계가 있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전능하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1-3절에서 다윗은 그 하나님을 인정하고 찬양하는 의지적인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언제 어떤 상황에서라도 항상 지속적으로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 경배하고 그 이름을 높이며 자랑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주의 도움이 아니고서는 삶의 소망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는 항상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며 하나님이 주는 평안을 귀하게 여깁니다. 다윗은 문제에 짓눌리지 않고 믿음으로 평강을 누리는 비결을 터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를 경외하는 자와 그에게 피하고 찾는 자에게 응답해 주시는 분임을 믿었기에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주변 사람들을 초청합니다. 우리가 모여 예배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이유도 그 하나님이 선한 분이고 우리를 끝까지 사랑해 주시는 분임을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그 복의 자리에 함께 하기를 초청하는 것입니다.

4절-7절에서 기도에 신실하게 응답해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자랑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다윗은 참 많은 문제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문제를 만날 때마다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했으며 하나님은 신실하게 그의 기도에 응답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기도를 결코 외면하지 않습니다. 신약에서는 옥에 갇힌 전도자들을 풀어주기도 했고 옥에 갇히는 일이 오히려 복음의 진보가 되게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우상숭배로 심판을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위로를 주셨습니다. 사 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다윗은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건져주고 부족함을 채워주신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보호해 주셨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도의 응답이 항상 내가 원하는 방법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우리 욕심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기도의 응답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우리는 형통을 기대하지만 때로는 어려움에 머무는 것이 하나님의 도움의 길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의지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로움을 노래했습니다. 빵 한 조각 물 한 병이 없는 도망자의 형편에서 또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평안을 누렸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해결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을 바라보고 그를 신뢰하며 감사했습니다. 이것이 은혜이고 복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위로와 평강이며 슬픔을 기쁨으로 채워주시는 복입니다. 이것은 물질의 많고 적음보다 더 원천적인 기쁨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이 천국을 소유하는 복을 받는다고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평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평강의 기쁨 때문에 문제가 더 이상 문제로 보이지 않고 해결의 실마리도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의 응답이 우리에게서도 속히 일어나기 바랍니다.

8절-10절은 결론과 같습니다. 그런 신실하고 좋은 하나님을 함께 경험하고 즐거워하자는 권면입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고 합니다. 음식을 혀로 맛보고 눈으로 확인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알자는 것입니다. 어떤 형편에서라도 만족을 주시는 하나님을 노래하자는 것입니다. 비록 젊은 사자라도 먹이를 잃고 굶주릴 때가 있지만 주님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들도 지금까지 승리한 것처럼 어떤 형편에서든지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자족함과 평강을 누리십시오. 시 23편에서 말한 쉴만한 물가와 푸른 초장의 복은 눈앞에 펼쳐진 풍성한 먹을 것만이 아닙니다. 양들을 지키고 돌보는 목자가 곁에 있다는 것이 복입니다. 목자가 거기 있기에 만족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인생의 어려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있기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복을 유지하는 비결은 영적 생활의 지속적인 승리입니다. 시 34:15,18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하나님의 눈은 항상 의인에게 있고 마음이 상한 자, 회개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십니다. 그러니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의지적인 신앙고백으로 살면서 우리를 형통하게 하며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껏 누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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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20일 가치 있는 헌신(엡 3:16-21) 직원헌신예배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십자가를 안다고 하면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구원의 감격을 맛보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 대하여 알려면 그가 어떤 성품의 소유자인지를 보면 됩니다. 성품은 인격이며 주로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살펴보면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가진 분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깊어지고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살게 됩니다. 환경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와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다니엘이 사자굴과 타는 불속에서도 하나님의 보호를 믿었고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도 찬양할 수 있었던 힘은 하나님을 아는데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누구의 제한도 받지 않는 창조주입니다. 모든 것을 아는 분이며 능력에 제한이 없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한도 받지 않고 없는 곳이 없는 무소 부재하신 분입니다. 육체를 가진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그러나 초월적인 그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한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를 만들어 주셨기에 지정의 인격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교감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영입니다. 그래서 영적 감각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습니다. 제한된 육체로 하나님을 알려고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하나님이라고 섬기던 잘못을 범하기 쉽습니다. 그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셨고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을 통하여 그분을 알고 믿게 합니다. 하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을 만나주십니다. 그래서 기록된 계시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며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거룩은 불의와 부정에서 분리된 상태를 말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은 죄와는 상관이 없는 분입니다. 완전하고 흠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고 심판해야 하는 공의로운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게 된 인간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대신 죽음으로 그 죄의 값을 치뤘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그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요일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십자가는 우리를 용서하고 자녀 삼아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끝이 없고 우리만을 사랑하는 독점적인 사랑입니다. 도중에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고 자기 몸을 내주기까지 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신 7: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신실하신 하나님이 긍휼과 자비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교제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며 사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어 그 하나님을 예배하려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그 안에서 성장해 가는 유기체입니다. 바울은 한 나무가 성장하는 것처럼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깊게 넓게 뻗어나가기를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창세전부터 우리를 구원하기로 작정한 하나님의 계획과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 구원의 길을 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성령의 보증하시는 은혜 때문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성장도 은혜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충만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성도들을 충만하게 해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을 기도한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뜨거운 감정이나 체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에 성령 충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을 말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지배당하여 나는 죽고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령 충만은 말씀대로 살며 자신에 대하여는 죽고 예수에 대하여 사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합니다. 부름과 사명도 알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헌신하고 그를 닮아가도록 힘을 주십니다. 성령의 인도에 순종하는 것이 곧 성령 충만이고 가치 있는 헌신입니다.

엡 4장 13절에서도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부족한 것을 채워주시는 것도 감사한데 그것보다 훨씬 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계획을 아시기에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 가십니다. 또 장차 우리를 그리스도와 동일한 모습에 이르기까지 충만하게 하실 것을 약속해 주셨으니 참 감사합니다. 그러니 날마다 성령을 환영하고 내 생활의 주도권과 속마음을 내드려야 합니다.

요일 3:1-2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푸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의 자녀라 일컬어 주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와 같이 될 것임을 압니다. 그 때에 우리가 그를 참모습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21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 안에서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무궁하기를 기도했습니다. 우리 교회도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고 세상에게 알게 하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하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교회가 되기를 꿈꿉니다. 오늘 직원들이 헌신을 다짐하는 예배를 드립니다. 사역을 어떻게 하고 얼마나 열심히 할 것인지 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적으로 알아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숙을 꿈꾸는 것이 더 가치 있는 헌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운데 능력으로 들어오시어 그분의 계획을 이루어 가도록 자신을 내드리는 날마다의 헌신이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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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13일 하나님의 섭리 (롬 8:28-39)

하나님의 일하심을 설명할 때에 우리는 섭리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섭리라는 말은 자연계를 지배하고 있는 원리와 법칙, 혹은 세상과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뜻을 일컫는 말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는 그가 만든 모든 것들을 방치하지 않고 어떤 질서와 원칙에 따라 돌아가게 합니다. 우리가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계획과 뜻을 이루기 위해서 만물을 보존하고 통치하는데 그것을 섭리라고 부릅니다.

섭리를 믿는다고 운명론자들처럼 모든 것을 체념하고 하나님께만 책임을 돌리는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음부에 내리기도 하시며 올리기도 하시는 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며,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며 높이기도 하시는 도다.”(삼상 2:6-7). 이 말씀을 믿으니 나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가롯 유다를 십자가 구원사역을 가능하게 한 공로자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죄를 짓는 방향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거나 죽음으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또 섭리를 믿는다고 인간의 책임을 배제하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이 로마로 압송당할 때 광풍을 만나 죽을 처지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들의 생명을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때 바울이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선원들을 위로했고 파선된 배의 널빤지를 잡고 헤엄쳐 살게 했습니다. 또 솔로몬같이 칭찬 듣던 사람도 타락했으니 우리가 노력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가 노년에 전도서 마지막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라고 후회 섞인 충고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섭리를 믿는 믿음의 사람은 더욱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수고해야 합니다.

섭리는 은혜로 주신 약속들을 이루어가는 통로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구원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작동됩니다. 하나님께서 때로 우리 상황에 꼭 맞는 말씀이 생각나게 하여 영적인 승리를 맛보게 합니다. 그런데 어떨 때는 우리가 잘못을 범하고 넘어져도 조용하실 때가 있습니다. 죄를 짓고 가슴 아파하며 자신의 무능함을 철저히 회개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비록 죄를 지었지만 그만큼 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또다시 죄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참아주는 것이지 죄를 짓도록 격려하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합리적인 판단보다는 말씀을 믿고 그 믿음으로 볼 때만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은 일이 잘 될 때나 반대로 어려움에 처할 때에도 붙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상황도 하나님께서 때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롬 8:35-36의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는 경우‘들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도 닥치는 일입니다. 문제를 만나지만 하나님께서 힘을 주시고 도와주시기에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낼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내가 원하는 대로, 혹은 나 중심으로 해석할 것이 아닙니다. 원하지 않는 일도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힘과 능력이 됩니다.

엡 1:4-5 “하나님은 세상 창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예정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모태에서부터 따로 세우고 불러 예수 그리스도를 이방 사람들에게 전하게 했다고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를 말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이유를 분명하게 이해했습니다. 그가 교회를 핍박하고 있을 그때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에게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행 26:14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왜 나를 핍박하지? 가시 돋친 채찍을 발길로 차면 너만 아플 것인데‘라는 주의 음성을 듣고 핍박하던 사울이 바울사도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 섭리의 결과입니다.

요셉의 인생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섭리를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려 고생과 옥살이의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섭리가운데 그를 리더로 키웠습니다. 보디발의 가정 경제를 돌보며 나라 살림을 준비하게 했고 감옥에서 고위 정치가들을 만나 나라 정치를 배우게 했습니다. 예언하고 해몽하는 지혜를 주어 왕의 눈에 들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요셉이 총리가 되었기에 식구들을 굶어죽지 않고 애굽에 정착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애굽으로 이민을 갔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을 이루려고 그들을 그곳으로 옮겨 살게 했고 거기서 큰 민족을 형성하게 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고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창 39:9). 자기를 애굽으로 보낸 것도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창 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하나님께서 가족의 생명을 구원하려고 형들을 사용하여 자기를 애굽으로 보냈다고 이해했습니다.(창 45:5,7) 그는 죽으면서도 하나님께서 가족과 후손들을 약속하신 땅에 이르게 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창 50:24). 요셉이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자비는 하늘보다 더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구름보다 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모든 피조물에게 자비를 베풀며 아무리 작고 하찮은 피조물이라도 배제하지 않고 사랑과 자비로 돌보아 주십니다. 심지어는 우리의 머리털까지 셀만큼 자상함으로 돌보아 주십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 하나님(잠 16:9)입니다. 예수님도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알 수 없다”(요 15:5)고 말했습니다.

일이 잘 될 때 감사하고 마음대로 풀리지 않을 때도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인내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하시고 섭리의 손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창조주 하나님 안에 거하십시오. 그가 우리의 모든 상황을 사용하여 우리를 더 온전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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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6일 예배의 회복 (대하 34:1-7, 요 4:20-24)

북 왕조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망한 이후에 남 유다도 바벨론의 침공을 받고 있을 때에 젊은 왕 요시야는 나라의 위기를 믿음으로 극복했습니다. 요시야는 아버지 아몬 왕이 2년 만에 살해당하여 8살의 나이에 왕이 되어 31년을 통치했습니다(BC 640-609). 그는 16살이 되자 하나님을 찾았고 20살부터 6년 동안 우상을 제거하고 신앙을 개혁했습니다. 50년 전 여로보암 2세가 세운 산당과 방치되었던 우상들을 제거했습니다. 26살이 되는 해에는 성전을 수리하고 유월절을 회복하여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게 했습니다. 성전을 보수하다가 성전 창고에서 모세가 전해준 율법 책을 발견했습니다. 왕은 옷을 찢고 하나님의 말씀을 잊고 지낸 것을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 훌다에게 하나님의 의중을 묻습니다. 선지자는 우상숭배로 인해 재앙이 내릴 것을 말합니다.

왕은 선지자의 말을 듣고 유다와 예루살렘의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과 고위관료와 백성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려주고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그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겠다는 약속을 맺게 합니다. 대하 34:33 “이와 같이 요시야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모든 땅에서 가증한 것들을 다 제거하여 버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으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였으므로 요시야가 사는 날에 백성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복종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그들의 회개는 예배의 회복 곧 유월절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왕은 어린양과 어린 염소 3만 마리와 수소 3천 마리를 내주어 유월절을 지키게 했습니다. 유월절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기억하고 후손들에게 신앙을 대물림하게 하는 절기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게 하는 하나님과의 약속이었습니다. 출애굽 이후 가나안에 도착하여 길갈에서 유월절을 지킨 이후 지키지 못하다가 히스기야와 요시야 때에 지켰습니다. 이것을 행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새롭게 했고 믿음을 회복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믿음에서 떠나고 우상을 숭배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처럼 중요한 유월절은 왜 계속 지키지 못한 것일까요? 오늘 신앙을 갖고 사는 우리들의 생활을 돌아보면 그 이유가 보일 것입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이나 오늘 우리들의 마음 밭이나 생활방식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얻고 구원을 주신 분이 하나님 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사시대의 특징처럼 자기들 보기에 좋은 대로 생각대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활에 바쁘고 믿음 없는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의 예배가 중요합니다. 유월절 희생양의 피로 구원받았음을 감사하고 후대에게 가르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고 증거하는 예배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흔들리면 타락하고 범죄하기 쉽습니다. 나의 일과 세상 재미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됩니다. 그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그래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영과 진리로 예배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예배는 구원을 행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와 영적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위해서 내가 한 일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와 주인 되심을 깨닫고 믿기로 결정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자면 그것조차도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섭리하신 결과물입니다. 예수님도 ‘내게 주신 자’ ‘내양’이라고 표현하여 하나님의 선택을 말했습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라는 말씀을 보면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입니다. 바울도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여 주셨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니 구원에 관한 한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를 선택하어 구원해주심을 감사할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엎드리고 예를 갖추어 절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인들은 이방인들과 피가 섞인 일로 유대인들의 비난을 받고 예루살렘 성전예배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자 그리심 산에 자기들의 예배처소를 따로 만들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에게 어디서 예배해야 하는지 장소와 방법을 물을 때에 예수님은 하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는다고 예배자의 자격과 태도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롭게 거듭난 사람이 성령의 도움가운데 영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사슴이 물을 갈급해 하듯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갈급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관심과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를 높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간절히 찾는 자를 만나주십니다. 상한 마음과 회개하는 마음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은혜받기 위해서 예배에 참석하는 분이 있는데 조심스런 일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지 우리가 무엇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하나님을 바로 예배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이지 그것이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교인이 예배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다른 일에 마음을 뺏기거나 혹은 더 나은 예배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예배를 평가하며 참관하고 있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또 예배를 프로그램으로 이해하고 관람하는 자세로 참석하는 교인도 있습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것과 예배를 드리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찬양이 나의 고백이 되고 대표기도가 나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간증과 나의 정성을 직접 드리고 말씀을 통하여 들려지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배가운데 임하는 하나님을 먼저 만나야 영적인 회복이 일어나고 문제도 해결 받고 영적 싸움을 위한 힘과 위로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마음을 더 깊이 이해해야 바른 섬김과 봉사도 가능해집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을 예배가운데서 만나지 못했다면 예배의 관람자로 참석한 것이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12장에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 영적 예배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의 전부를 하나님의 것이라고 인정하고 소유권을 양도해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예배는 우리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마치 내가 각을 뜬 제물이 되어 태워 드려지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마음과 정성을 드리며 영으로 예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준비된 몸과 마음으로 예배에 임해야 합니다. 몸과 마음이 피곤하지 않도록 준비하십시오. 정한 시간 전에 미리 와서 한 주간을 차분히 돌아보고 기도로 준비하십시오. 무엇보다 하나님을 만날 기대를 갖고 오십시오. 구원을 확신하는 믿음으로 성령의 도움을 받아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가십시오. 예배의 승리가 구원받은 자의 열매이고 영적 승리의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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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29일 문제의 해답 (창 12:1-20 요 21:1-14)

우리는 살아가면서 때로 뜻하지 않은 일들을 경험합니다.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서 내린 결정이 엉뚱한 결과를 가져올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를 만든 분이며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아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불립니다. 그가 하나님께 부름 받아서 모든 민족을 복 받게 하는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평생 형통하고 복되게 살았어야 하는데 그에게도 어두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지만 이미 그곳에 자리 잡고 사는 토착민들과 어울려 살기에 쉽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기근이 심해져서 먹을 것이 부족했습니다. 결국 새로운 땅 애굽으로 다시 이사를 결심합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내가 너무 예뻐서 애굽인들이 자기를 죽이고 아내를 빼앗아 갈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결국 묘안을 낸 것이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기대한 것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왕이 자기 아내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느끼는 절망감과 무너지는 마음을 우리는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인생의 문제들은 이렇게 찾아옵니다. 우리가 준비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 문제를 당하면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자괴감과 상실감이 큽니다. 누구에게 쉽게 말할 수도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자존감은 깨지고 의욕도 사라집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 같고 가족조차도 멀리 있는 사람들처럼 여겨집니다. 슬며시 찾아오는 우울증과 싸워야 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배반했던 베드로의 심정이 그랬습니다. 누구보다 책임감이 강했고 최측근에서 예수님을 모시며 제자들을 지휘했던 그가 작은 계집종의 말 한마디에 무너졌습니다. 붙잡혀 심문당하는 선생님을 모른다고 시침 떼었습니다. 아니 그를 저주하며 자신과는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자기 살 길을 찾았습니다. 그때 닭이 울었고 그러고 보니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 송구한 마음도 크지만 자신에게 대한 신뢰가 무너져버렸습니다. 밖에 나가 한참이나 통곡을 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울며 회개했다면 다시 예수님께 찾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평소 그의 성정으로 봐서는 고난을 함께 당하겠다고 나서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약함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은 디베랴 호숫가에서의 대화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3년 전에 예수님 만나서 인생의 소망을 찾고 예수의 제자로 살겠다고 다짐했던 바로 그 갈릴리 호숫가입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의 손에는 버리고 갔던 그 그물이 다시 들려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힘없이 죽어버린 선생님에 대한 원망과 꿈꾸던 일들이 물거품이 된 허탈함이 그를 옛 생활의 터전으로 몰아냈습니다. ‘나는 고기나 잡으러 가야겠다.’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운 것처럼 그가 그런 모습으로 원래의 자기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 이것이 나의 모습이지.‘ 원래 자신은 이런 형편없는 존재라고 자학하며 그물을 던지고 있습니다. 밤새 수고했으나 빈손인 그들에게 오른편에 그물을 내리라고 주님께서 찾아와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상심이 얼마나 컸던지 3년을 동거 동락한 선생님을 몰라봤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일하십니다. 때로는 일이 풀리지 않는데서 주님을 다시 만나는 은혜를 주십니다. 그날 고기가 많이 잡혔다면 다시는 예수께로 돌아갈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빈손으로 돌아온 것이 은혜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자 수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들은 주님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베드로는 겉옷을 챙겨 들고 바다로 뛰어 내렸습니다. 다시 기회를 주시는 주님께로 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도 지켜주셨습니다. 바로의 집에 재앙을 내려 사라를 취한 일이 잘못된 것임을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하여 할 일이 있었고 그와 맺은 약속이 있기 때문에 그를 구출하여 주신 것입니다. 바로에게 창피를 당하고 애굽에서 추방당했지만 아브라함은 벧엘에 도착하여 다시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실패한 인생을 회복시켜 주시는 은혜입니다.

사실 베드로에게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마음을 열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연민과 상실감 때문에 쉽게 주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머뭇거렸습니다. 그러는 동안 점점 주님과의 관계는 멀어졌습니다. 드디어 고기나 잡으러 가야겠다고 말을 내뱉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주님께서 먼저 찾아오셨고 조반까지 준비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은 베드로가 어떻게 회개했는지에 대해 말이 없지만 배 밖으로 급하게 뛰어내린 베드로의 행동으로 보아서 둘은 이미 화해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이 통한 둘의 대화에는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이 내 마음 이미 아시잖아요.’ ‘그러면 다시 힘을 내서 내 양을 먹여야지.’ 베드로가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사도행전이 상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 71편에 보면 인생의 문제가 얼마나 힘들던지 밤잠을 설치고 말할 힘조차 없이 탈진해버린 시인의 모습이 나옵니다. 주님께 버림받은 존재라는 생각이 가득했고 더 이상 은혜도 사랑도 느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끝나버린 것인가 의심할 만큼 힘든 영적 암흑기에 처했습니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소리 높여 부르짖고 밤새 손을 들고 솔직한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의 일들을 하나씩 회상하며 그 신실하신 주님을 의지적으로 붙잡습니다.

문제의 해결은 주님에게 있습니다. 시 103편이 말하는 것처럼 주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사랑이 그지없습니다. 두고두고 꾸짖지 않으시며, 노를 끝없이 품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를 그대로 갚지 않고 우리 잘못을 저지른 그대로 갚지 않으십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우리의 반역을 우리에게서 멀리 치우십니다. 부모가 자식을 가엾게 여기듯 주님께서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가엾게 여겨 주십니다. 그래서 찬양할 수밖에 없도록 우리를 인도해 가십니다.

하나님은 바벨론 포로 중에 있는 자들에게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라고 해방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있으면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단 말입니까?(롬 8:31) 그 어떤 사람도 그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낼 수 없습니다. 항상 우리 옆에 계시며 쉼과 평안을 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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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22일 구원의 감격을 누려라 (갈 3:10-14)

한때 구원의 감격이 왕성하다가도 시들해지기도 하고 갈라디아 교회처럼 복음의 핵심에서 벗어나 그 시대에 유행하는 잘못된 가르침을 따르기도 하는 것이 우리들의 약함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점검해 보려고 합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이며 죄를 심판하는 공의로운 재판장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믿음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면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살 수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신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도록 만드셨다고 설명했습니다.

인류의 대표자인 아담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불순종하여 그의 후손들 모두가 죄의 영향아래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과 분리되었고 그 단절은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죄를 벌하시는 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에 처해져 지옥으로 추방당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엡 2:3 “우리도 모두 전에는 그들 가운데에서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했으며 나머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날 때부터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 지은 인간을 회복시킬 방법을 만드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육체로 보내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죽게 했습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 그를 벌하고 그 대속의 피로 믿는 자들의 죄를 씻고 속량하여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 행위를 의지하려고 하자 율법은 단지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하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구원을 힘입게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갈 4:4-6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여기 속량이라는 단어는 값을 지불하고 샀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값으로 지불하고 죄인들을 샀다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저주에서 건져내 다시 살게 했기에 율법의 굴레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자녀가 된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심판입니다. 롬 3:23~26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못 미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는 선고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속죄 제물로 내주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피를 믿을 때에 유효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지은 죄를 너그럽게 보아주심으로써 자기의 의를 나타내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십자가는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하게 보여준 것입니다. 롬 5:8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다시 살려내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했습니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묶인 자에게 자유를 주고, 죽은 자에게는 다시 사는 기쁨을 주는 복음 곧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됩니다. 사울이 자신이 핍박하던 예수가 메시아이며 왕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가 중요하게 여기던 모든 것들이 더 이상 가치 있는 것이 되지 못했습니다. 예수만이 가치 있는 것이 되었고 복음을 전하면서 고난을 당하고 죽음에 처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고후 4:8-9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삶의 이유와 목적이 되었습니다.

복음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세상의 출세나 돈 때문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만왕의 왕이며 만주의 주이신 그분을 주인으로 모셨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바뀌었고 통치권자가 바뀐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으로 함께 하시는 주님이 우리를 다스립니다. 이 믿음이 있기에 과거의 실패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그가 영광가운데 다시 오는 날에 우리도 그와 함께 왕 노릇 할 것도 믿습니다. 더 이상 세상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제한된 우리의 힘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갑니다.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예수 생명을 누리며 삽니다. 내가 스스로 노력해서 선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이 영이 우리 안에 계시며 나를 사용합니다. 다만 내가 하는 일은 왕 이신 그 주님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구원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합니다. 성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로 계획하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구원을 이루셨고 성령께서는 복음을 믿고 구원의 은혜를 누리도록 보증해 주십니다. 이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갈 3:1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입니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복이 되게 하고 땅의 모든 족속이 그를 통하여 복을 받게 하셨습니다.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우리들을 자녀로 삼아주시고 아브라함의 복이 또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게 사용하십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복을 받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구원의 감격과 복을 누려야 합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말씀에 근거하여 믿고 누려야 합니다. 구원의 감격을 누리지 못하면 결코 나눌 수 없습니다.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구원의 감격을 먼저 누리십시오. 예수 생명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능력이 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리는데 우리를 필요로 하신다는 감격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게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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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15일 예수 안에 거하십시오. (요 15:1-17)

예수님은 자신을 참 포도나무라고 설명하고 제자들을 열매 맺는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그 포도원을 경작하는 농부로 설명했습니다. 가지가 나무로부터 양분을 먹고 좋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농부이신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말했습니다. 농부는 말라버려 더 이상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잘라내고 열매 맺을만한 가능성이 있는 가지는 보호해 주고 깨끗하게 관리합니다. 3절에서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라고 말씀했는데 이것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십자가 대속의 죽음으로 거룩하게 하시고 예수 안에 거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에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성령 강림 이후에 담대하게 복음을 전한 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예수님에게 붙어 있어야 합니다. 2절 “내게 붙어 있어”, 4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붙어 있지 아니하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5절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6절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9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내 안에 거하라’(Remain in me)라는 것은 거기 꼭 붙어있어 항상 머물러 있으라는 것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잠시 잠깐만 떨어져도 죽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순간이라도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말라버린 가지처럼 밖에 버려집니다. 예수님 안에 항상 거하는 일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입니다. 살고 죽는 문제와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8절에서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열매가 있어야만 제자이고 그 열매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예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힘으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것도 많이 맺어야 합니다. 16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를 먼저 선택하여 구원하여 주신 이유가 열매를 많이 맺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노력해서 맺는 것이 아니라 원 줄기에 붙어서 양분을 공급받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우리의 공급자요 영적 양분을 공급해 주시는 예수님 안에 거할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는 상호 교통이 필수조건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기도응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7절에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라고 약속했습니다. 예수 안에 거하며 말씀을 지켜 행하는 사람의 기도에 응답하겠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기도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동역자로 사용하십니다.

겔 36:37은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황폐해진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고 무너진 성벽을 다시 세우고 주민들이 살게 하겠다는 약속을 주시면서 그래도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하는 사역이 됩니다. 기도의 응답을 맛보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마 6: 31-33에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바로 이해하는 사람의 바른 기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항상 붙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마음에 품고 묵상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를 이끌어 가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욕심대로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의 지배를 받는 사람의 기도는 모두 응답됩니다. 내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여 일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떤 열매를 기대하신 것일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을 종으로 여기지 않고 친구라고 불러주시고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주는 십자가 사랑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십자가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 것처럼 그 순종을 배워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요 13:35에서도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라고 말했고 사도 요한도 요일 4:20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은 계명이고 명령입니다. 십자가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열매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어려운 사랑의 열매를 요구하는 이유가 10-12절에 나옵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예수 믿는 개인이나 교회가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사랑할 만한 사람,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함께 하기에 부담스러운 사람이나 공동체를 흔드는 사람, 더구나 예수를 반대하는 세상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순종과 그 사랑이 필요합니다.

교회가 말씀 안에 거하기를 힘쓰고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은 예수 안에 거하기를 훈련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기 위한 노력입니다. 커뮤니티를 섬기고 나그네와 이웃을 돌아보는 일들은 생색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내가 손해보고 죽어 다른 사람이 복음을 통하여 살게 된다면 그것은 명령을 따르는 순종의 수단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항상 붙어 있어 사랑의 열매를 맺으십시오. 날마다 말씀을 따라 살고 하나님의 계획을 묻고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의 수고가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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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8일 다시 말씀으로(롬 10:13-17)

신앙생활 하는 우리들은 믿음조차도 하나님이 주셔야 한다는 것에 동의할 것입니다. 스스로 믿음을 갖고 싶어도 마음대로 믿어지지 않을 때가 있는가하면 말씀을 묵상하다가 뜻밖의 사실도 성령의 감동으로 믿어지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노력만으로 믿음에 이르지 못하고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또 성령의 감동이 있어도 무시해버리면 그 은혜를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의 우선적인 은혜와 우리의 믿음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성도가 제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장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말씀을 공부하고 순종의 삶을 훈련하는 것은 영적인 성장을 위한 것입니다. 주님을 더 깊이 알고 그 안에서 기뻐하며 주님을 닮아가기 위한 노력입니다. 바울이 빌 3:12-14에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라고 말했습니다.

지난 수련회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시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몸으로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다시 공부했습니다. 예수께서 나의 왕이며 주님이심을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인데도 그 말씀을 다시 들을 때에 우리 마음에 새로운 감동이 있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 마음에 성령께서 깨닫고 결단하도록 감동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나에게 말씀하시는 살아있는 말씀으로 들을 때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번 수련회에서 학생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했다는 것이 감사한 일입니다. 함께 기도하다가 뜻밖의 은혜를 경험한 분도 있습니다. 이런 경험들은 믿음의 성장을 위해서 값진 것들입니다. 주님께 관심과 마음을 묶어두게 하는 은혜의 수단이며 통로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실 때에도 표적을 보여 주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난치 병자를 고쳐주고 묶인 자들을 자유하게 했습니다.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5천명을 먹이기도 했고 심지어는 죽은 나사로를 살려냈습니다. 무엇보다 몸소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것을 믿게 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은혜의 수단들입니다. 요 20: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영적인 경험은 우리에게 큰 격려가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일 수 있습니다. 그 경험 위에 말씀을 배워 그 말씀이 우리를 운행하도록 할 때 주님 안에 거하며 지속적인 성장을 할 수 있습니다. 요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고 말씀했습니다. 지금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주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말씀을 읽고 배우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책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도록 안내합니다. 이제 다시 말씀을 손에 듭시다. 시 119: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라는 고백처럼 주의 음성을 듣는 일이 우리의 기쁨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 묵상과 읽기를 계속하십시오. 성경을 읽고 공부하며 주의 음성을 듣는 기쁨을 맛보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부름 받은 우리들이 그 부름에 합당하게 살기 위해서 입니다.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말씀처럼 선전군의 책임을 잘 하기 위해서입니다.

어제 문화학교 개강예배를 드리며 문화학교의 사명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문화명령과 선교명령이란 말을 비교하여 설명했습니다. 창 1장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만든 인간에게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대신 다스리게 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복을 주셨습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리라는 명령을 주셨는데 이것을 문화명령이라고 말했습니다. 문화는 우리 삶을 위한 모든 수단들인데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 28:18-20에서 모든 족속을 제자 삼으라는 선교명령과 통하는 것입니다. 선교는 복음을 전하여 죄인이 의인되게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이 나의 문화의 틀과 색깔을 가지고 복음을 살아내고 전합니다. 수고와 희생이 있어야 나눔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복음 전하는 자의 발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문화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세상문화를 거부하고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생각을 달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그들을 품으면 분명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문화학교는 본질에서 벗어난 세상 문화를 복음으로 새롭게 하는 방법입니다. 지식과 재주를 가르치는 일뿐만 아니라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는 통로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문화학교를 우리 교회에게 주신 문화적 선교적 명령으로 받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의 열매가 문화학교를 통하여 세상으로 연결되기를 바랍니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갑시다. 하나님의 동역자요 대리 통치자로 바로 살기 위해서 입니다. 개인의 구원을 이루기 위한 수고와 함께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이 운영되도록 기도하고 더 나가서 문화를 새롭게 변화시키는 일에 함께 합시다. 하나님이 모든 면에서 우리를 다스리는 왕이 되신다는 것을 실천에 옮겨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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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삼하 6:1-15) 전교인수련회 이종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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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25일 지혜로운 선택 (잠 7:1-5, 24-27)

동료 목사님이 페북에 소개한 글을 보니 브로니 웨어 (Bronnie Ware)라는 호주 간호사가 임종을 앞둔 환자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뽑아서 ‘죽기 전에 하는 후회 5가지’(The top five REGRETS of the dying)라는 책을 냈다고 합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다른 사람이 기대하는 삶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좀 더 솔직한 삶을 사는 용기가 필요했다(I wish I’d had the courage to live a life true to myself, not the life others expected of me). 2. 그렇게 너무 열심히 살 필요는 없었다(I wish I didn’t work so hard). 3.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용기가 필요했다(I wish I’d had the courage to express my feelings). 4. 친구들과 좀 더 자주 만났어야 했다(I wish I had stayed in touch with my friends). 5. 내 자신이 좀 더 행복해지려고 노력했어야 했다(I wish that I had let myself be happier)

어제 필리핀 선교를 시작할 때에 처음 교회를 함께 개척했던 단테 목사님이 지난 해 말에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늦게야 알게 되었습니다. 20대 후반의 전도사와 30대 초의 선교사가 의기투합하여 첫 열심을 불태웠는데 나보다 먼저 갔다니 그 어떤 소식보다 마음이 허전했습니다. 그리고 보니 주변에 여러 친구들이 세상을 달리한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러다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 어떻게 인생을 마무리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그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새삼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만이 인생의 가치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여러 왕들에 대하여 평가하고 기록할 때 그가 열조를 따라 죽었다고 짧게 기록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히스기야 왕에 대하여는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왕하 18:5-6)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을 따라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우상을 부수고 산당을 없애고 성전 중심의 예배를 부활시켰습니다. 국가적인 어려움에 처할 때 하나님만 의지하여 전쟁에서 승리했고 자신이 죽을병에 걸렸을 때도 하나님께 기도하여 15년을 연장 받았습니다.

요시야 왕은 성전을 수리하다가 찾은 모세의 율법을 기록한 책을 백성들에게 읽어주고 말씀에 명한대로 유월절을 지켰으며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학사 에스라가 모든 백성 앞에서 율법이 적혀 있는 책을 펼쳐들자 백성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경외심을 보였습니다. 말씀을 읽고 여호와를 송축하자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했습니다. 말씀이 하나님을 인정하게 했고 마땅한 예를 갖추어 그 앞에 엎드려 예배하게 했습니다. 말씀이 영적 부흥과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훈련장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우리들의 정체성을 배우고 사명을 알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았고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는 제사장으로 부름 받았지만 그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실패는 우리에게 주는 경고입니다. 우리들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한 족속으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 받았음을 믿습니다. 죄 용서와 구원의 은혜를 받은 우리들은 부활의 증인이 되어 생명의 복음을 전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말씀대로 순종할 수 있는 힘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기에 성경을 더 깊이 읽고 배우고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성령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교회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그가 원하는 바를 알지 못한다면 어찌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면 내 생각대로 판단하고 방향을 잃기 쉽습니다. 우리의 욕심을 앞세우고 세상 경영원리를 따르기 쉽습니다. 수많은 정보와 소식을 들으며 사는 우리들이 진리를 분별하며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더 가까이 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딤후 3:15-17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한 몸이며 하나의 건물입니다. 한 지체가 병들면 모두가 아픔을 나눕니다. 그래서 한 사람도 낙오하지 않고 영적인 생활에 승리를 맛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앞서 간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가르쳐 준 예수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을 믿고 따릅니다. 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같은 성경을 배우고 가르칩니다. 말씀이 우리를 거룩하고 순결하게 하며 영생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엡 2:20-22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며, 그리스도 예수가 그 모퉁잇돌이 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서, 주님 안에서 자라서 성전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도 함께 세워져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실 처소가 됩니다.”

잠 7:1-5 “아이들아, 내 말을 지키고, 내 명령을 너의 마음 속 깊이 간직하여라. 내 명령을 지켜서 잘 살고 내 교훈을 너의 눈동자를 보호하듯 지켜라. 그것을 너의 손가락에 매고, 네 마음 속 깊이 새겨 두어라. 지혜에게는 “너는 내 누이”라고 말하고, 명철에게는 “너는 내 친구”라고 불러라. 그러면 그것이 너를 음행하는 여자로부터 지켜 주고, 달콤한 말로 호리는 외간 여자로부터 지켜 줄 것이다.” 잠언 기자는 달콤한 말과 몸놀림으로 젊은이를 유혹하여 지옥으로 가게 하는 창녀의 역할을 상세하게 묘사했습니다. 여행 중인 남편이 있는 여자가 젊은이를 유혹하여 결국 사망의 길로 내려가게 하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성적인 타락 뿐 아니라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유혹거리들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먹이를 찾는 배고픈 사자처럼 믿음의 사람들을 유혹하여 세상 재미에 푹 빠지게 하고 믿음을 등지고 지옥으로 떨어지게 합니다. 신앙으로 승리하기를 원한다면 지혜의 말씀을 다시 손에 잡아야 합니다. 마음 판에 새겨 지워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관심을 빼앗아가는 일들을 조정해야 합니다.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꼼꼼하게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 생활로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는 지혜로운 선택이 필요합니다. 이것만이 우리를 믿음으로 살게 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합니다.

이번 수련회는 우리의 마음을 다잡게 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말씀을 다시 가까이 하여 읽고 배우는 기회로 삼읍시다. 구원의 감격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을 나누는 개인과 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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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18일 가치 있는 결단 (전 11:9-12:2) 청장년선교회 헌신예배

우리교회는 남선교회 여선교회 청장년 선교회가 조직되어 서로 격려하며 영적인 성장을 도모하고 대 내외 선교사역을 효과적으로 감당하고 있습니다. 오늘 40세 이하의 젊은 남녀로 구성된 청장년선교회가 헌신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청장년들은 철부지 청년의 때를 지나 어른이 되어 인생을 건축해 가는 활발한 때입니다.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양육하는 바쁜 때입니다. 20대의 꿈 많던 시절이 지나고 인생이 그렇게 멋있는 꽃길만이 아니라는 것을 배우는 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생에 대하여 조금은 두려움도 있고 시행착오를 겪어가는 때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신앙생활을 하기 힘든 시기라서 말씀을 따르려는 각오와 순종이 더 필요한 때입니다.

지혜자는 이 젊음의 시간을 책임 있게 즐기라고 합니다.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때이지만 하나님의 심판의 눈을 의식하며 조심하라고 합니다. 본문을 새 번역으로 다시 봅니다. “젊은이여, 젊을 때에, 젊은 날을 즐겨라. 네 마음과 눈이 원하는 길을 따라라. 다만, 네가 하는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만은 알아라. 네 마음의 걱정과 육체의 고통을 없애라. 혈기왕성한 청춘은 덧없이 지나가기 때문이다. 젊을 때에 너는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고생스러운 날들이 오고, 사는 것이 즐겁지 않다고 할 나이가 되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기 전에, 먹구름이 곧 비를 몰고 오기 전에, 그렇게 하여라.”라고 합니다. 기회가 있는 젊음의 날을 믿음으로 지혜롭게 살라고 합니다. 인생의 겨울 같은 시기 곧 곤고한 날이 금방 오기 때문입니다.

3-5절을 보면 “그 때가 되면, 너를 보호하는 팔이 떨리고, 정정하던 두 다리가 약해지고, 이는 빠져서 씹지도 못하고, 눈은 침침해져서 보는 것마저 힘겹고, 귀는 먹어 바깥에서 나는 소리도 못 듣고, 맷돌질 소리도 희미해지고, 새들이 지저귀는 노랫소리도 하나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높은 곳에는 무서워서 올라가지도 못하고, 넘어질세라 걷는 것마저도 무서워질 것이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고, 원기가 떨어져서 보약을 먹어도 효력이 없을 것이다. 사람이 영원히 쉴 곳으로 가는 날, 길거리에는 조객들이 오간다.” 라고 말합니다.

젊음이 생각만큼 길지 못합니다. 그래서 시간을 아껴 내일을 준비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아쉬움과 후회가 남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는 때가 바로 변화할 수 있는 때입니다. 인생이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지만 다시 시작할 수 없는 때가 오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후회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은혜로 살았다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창조주를 기억하는 사람은 창조주의 섭리와 간섭을 인정합니다. 피조물로서의 자신의 한계를 고백하고 자비와 은혜를 구하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생각한다는 것은 잊었던 것을 기억해 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의지적으로 결단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의 창조주를 기억한다는 것은 범사에 그를 인정하고 그의 이름을 위해서 살며 하나님이 나를 만들고 운영한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의 계획을 따르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먹고 마실까를 염려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살라고 말했습니다. 먹고 마시는 일이 꼭 필요한 일이지만 거기에 마음을 뺏기지 않고 삶의 목적과 방향을 하나님께 맞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고 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 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잠 3:5-7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전 12:13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믿음생활에는 날마다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자기 계산이나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폭적으로 믿고 따랐습니다. 아버지가 살던 곳, 자기가 자라난 곳, 친척과 친구가 있는 편안한 곳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할 미래의 땅으로 발을 내딛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의 결단입니다. 어디까지 순종할 것인지, 얼마만큼의 관계를 유지할 것인지는 자기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있는데 환경이나 시간이 어렵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마음을 먹고 결정하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우선순위를 하나님 앞에서 정하고 그것을 실천하십시오.

사도 베드로도 성도들에게 이미 세상의 썩어질 것을 피하여 거룩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로 부름 받았으니 더 강한 믿음으로 자신을 가꾸어 가라고 권고합니다. 벧후 1:5-10“그러므로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여러분의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지식을 더하고, 지식에 절제를 더하고, 절제에 인내를 더하고, 인내에 경건을 더하고, 경건에 신도간의 우애를 더하고, 신도간의 우애에 사랑을 더하도록 하십시오. 이런 것들이 여러분에게 갖추어지고, 또 넉넉해지면,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게으르거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근시안이거나 앞을 못 보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옛 죄가 깨끗하여졌음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더욱 더 힘써서,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은 것과 택하심을 받은 것을 굳게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almost Christian)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거의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인데 진리를 알기도 하고 봉사도 하는데도 정작 십자가는 지지 않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온전한 그리스도인(altogether Christian)을 말했는데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며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젊은이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고 고백한대로 살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부름에 합당한 생활을 해나가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여러 결정들을 하나님의 뜻을 우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결정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가, 영적인 복을 누리는데 보탬이 되는가를 먼저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이번 수련회도 교회 공동체가 함께 한다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거기에 우선순위를 두고 함께 하려는 여러분의 결단이 다른 사람에게 큰 격려가 되고 힘을 얻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름과 선택을 굳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게 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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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11일 믿음의 경주(히 12:1-2)

히브리서는 믿음으로 승리한 선배들에 대하여 일일이 언급하며 구름같이 둘러싼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으니 그들처럼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완수하라고 말합니다.

1. 믿음의 경주를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1절에서 “그러므로 이렇게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 라고 합니다.

무거운 짐이란 일상에서 겪는 생활을 위한 염려들입니다. 의식주, 경제생활, 가정을 세우고 자녀를 양육하는 일, 건강을 돌보고 더 안정적인 내일을 위해서 수고하는 일입니다.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들이지만 내가 주인 되어 그 일을 해결하려고 하면 한계를 느끼고 무거운 짐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그 일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을 믿고 맡기고 자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얽매는 죄는 우리들이 쉽게 생각하지만 걸려 넘어지는 것들입니다. 오해, 갈등, 미움, 시기, 질투, 거짓말, 자기 욕심, 습관적인 죄 등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뿐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포함합니다. 히 12장에서 화목과 거룩함을 방해하는 것, 쓴 뿌리가 퍼져 공동체를 해롭게 하는 것, 은혜 생활을 방해하는 것, 음행, 장자권을 팔아먹은 에서처럼 가치 있는 것을 지키지 못하는 것, 구원의 약속을 저버리고 거룩하지 못하게 살았던 이스라엘의 죄 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며 다른 사람 살리는 제사장 역할을 감당하게 했습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것처럼 살지 말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방인들과 어울려 우상을 섬겼고 자기들이 좋은 대로 판단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사람은 더 이상 내가 주인 되어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삽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결단을 날마다 해야 합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마지막 칭찬과 상 주심을 바라보며 끝까지 인내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믿음의 경주를 위해서 나른한 손과 힘 빠진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똑바로 걸어야 합니다. 절름거리다가 다시 다치는 일이 없도록 믿음생활을 돌보아야 합니다. 심지어는 오락과 여가선용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게 해야 합니다. 예배에 지장이 될 정도로 운동을 심하게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는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2.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2절에서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우리의 경주가 그리 간단하지 않기에 좋은 본보기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창시자이고 완성시키시는 분입니다.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빌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바울은 믿음도 구원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우리 스스로에게는 의로운 것이 하나도 없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더욱 예수님을 목표로 삼고 배우고 닮아가는 믿음의 경주를 계속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장차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될 것을 바라보며 십자가의 아픔과 부끄러움을 참았습니다. 비난과 희롱을 견디며 매 맞고 벌거벗김도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죽기까지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구원하여 의롭게 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믿음의 주님이며 우리를 온전하게 하는 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 예수 그리스도를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했습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했습니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보좌 우편에 앉혔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시선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정하고 인내하며 달려갑시다.

바울은 자기의 믿음의 싸움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빌 3:10-14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번 수련회는 믿음의 경주를 위하여 예수님을 깊이 배우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이 일에 우선순위를 둘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린아이를 염려하는 부모도 있고 꼭 처리해야 할 바쁜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몸이 불편하신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선순위를 정하지 않으면 항상 더 바쁘고 중요한 일이 생겨 은혜 받는 일을 방해합니다. 젖먹이 때는 아이가 어려서 정신이 없고, 학교가면 또 다른 일이 생기고, 유스가 되면 활동하는데 따라 다니기 바쁘고, 대학가면 학자금 때문에 바쁘고, 빚 갚느라 바쁘고, 노후준비하기 바쁘고, 은퇴하면 건강이 문제가 됩니다. 지금 이 형편에서 우선순위를 정해야 가능합니다.

이번 주부터 매주 금요일에 수련회를 위한 준비 기도회를 세 번 모입니다. 각 선교회가 한번 씩 주관하여 사회도 보고 특송도 해주시기 바랍니다. 전교인이 준비 기도를 하며 새로운 은혜를 경험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믿음의 경주를 완주할 수 있는 힘을 공급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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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4일 성찬의 유익 (눅 22:14-23)

에베소서는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자상하게 설명해 줍니다. 성부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로 예정하고 계획을 세우셨고 성자 예수님은 몸으로 죄 값을 치루고 구원의 일을 이루셨고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구원을 확신하도록 보증해 주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고 자녀 삼아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합니다.

예배의 여러 요소들 중에 특별히 설교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해석하고 적용하기 위하여 말씀을 듣는 시간입니다. 배운 말씀대로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듣는 설교가 오늘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설교자의 지식적인 강의나 종교적인 훈화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움직여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행하는 성찬식은 음식을 먹는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주님과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설교에서 배운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말씀이 성찬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경험되고 확신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모든 일에 성령의 은혜가 절대 필요합니다.

음식은 누구랑 먹는지가 중요합니다. 잔치를 준비한 사람이 동네 깡패라면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즐길 수 없을 것입니다. 성찬은 주님과 함께 하는 식탁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에는 먹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죄인들과 먹고 교제하신 것 때문에 먹기를 탐한다는 비난도 받았습니다. 벳새다 광야에서는 오천 명을 먹였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나눠 먹게 했습니다. 또 부활하신 후에 고기를 잡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오는 제자들에게 아침을 준비하여 함께 먹기도 했습니다. 낙심하여 엠마오로 돌아가던 두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 말씀을 풀어 주실 때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함께 떡을 떼어 나누어 먹을 때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함께 먹는 것은 배고픔을 해결하는 일뿐 아니라 교제와 사귐을 갖는 의미가 있습니다. 성찬은 예수님과 함께 가까이 앉아서 먹는 일입니다. 멀리 군중 속에서 주님을 보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특별한 교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먹게 될 완성된 구원의 잔치를 소망하셨기에 제자들과 함께 이 땅에서 먹는 마지막 유월절 음식 먹기를 그렇게 고대했습니다. 유월절에는 희생 짐승의 고기와 쓴 나물, 누룩 없는 빵을 먹습니다. 애굽을 나올 때에 급하게 들고 나온 밀가루 반죽은 누룩을 넣을 틈도 없었고 그때의 고통을 생각하며 쓴 나물과 함께 먹었습니다. 희생 짐승의 피로 구원받은 유월절의 의미를 잘 아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유월절의 의미를 설명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친히 하나님의 희생양이 되어 피 흘림으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빵을 들고 축사하시고 떼어 주시며 ‘받아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해 주는 나의 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식사 후에 잔을 들어 축사하시고 ’받아 마시라. 이것은 너희와 모든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대속의 피, 곧 새 언약의 피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먹는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계속 이것을 행하여 자신을 기억하라고 성만찬을 제정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새 언약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이 구원의 감격을 나누게 했습니다. 그 언약은 율법이 정한 희생 짐승의 피가 아닌 주님의 대속의 피로 구원을 얻게 하는 새 언약입니다. 렘 31:31-3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운 새 언약 때문에 우리도 예수를 믿고 구원을 은혜로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성찬식을 커뮤니온이라고 말하는데 교제와 참여의 의미를 말합니다. 주님과 교제하고 주님과 함께 먹고 주님과 하나가 됩니다. 주님의 몸을 이루는 교회 공동체도 서로 하나가 됩니다. 또 성찬을 유카리스트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감사를 말합니다. 주님이 나를 살리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죽은 주님이라는 고백하고 주신 은혜를 감사하며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례 받은 신자에게 한하여 성찬을 먹게 합니다. 어느 교회는 교회에 등록하고 정회원이 된 사람에게만 제한하여 성찬을 먹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분명한 신앙고백을 점검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을 행할 때마다 식탁에 함께 앉아 음식을 떼어 주시는 주님을 보십시오. 성찬위원을 본다거나 나누어주는 떡과 잔을 수동적으로 받아먹는 것이 아니라 그 식탁의 주인이신 주님을 만나려는 간절한 기도와 함께 죄 용서의 기쁨과 감사로 먹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십자가 대속의 죽음의 의미와 부활의 능력과 재림의 소망을 확인하고 전할 수 있습니다. 성찬식은 복음의 핵심을 먹고 마시는 행동으로 선포하는 전도입니다.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그가 오실 때까지 그가 행하시는 구원을 몸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세례가 주님 안에서 새롭게 된 생활의 시작이라면 성찬은 그 관계의 지속을 위한 것입니다. 주의 몸과 피를 먹는 것으로 주님과 하나가 되고 주 안에 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살피고 준비된 마음으로 성찬을 행하여 복을 누리십시오. 고전 11:29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올바른 자세로 먹는 성찬은 주님으로 인해 살게 하는 승리를 줍니다. 요 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 성찬의 신비를 통하여 주님과 하나가 되고 새 힘을 공급 받아 또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하는 승리가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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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28일 Why Mission? 왜 선교인가? (마 24:14) 단기선교보고 문인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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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21일 가치 있는 일(롬 10:9-15) 단기선교파송예배


하나님은 선교의 주체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스스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불러 땅의 모든 족속이 그로 인해 복을 받게 하겠다는 약속을 주셨고 그의 후손 이삭과 야곱의 삶을 사용하여 그 약속을 신실하게 진행하셨습니다. 요셉을 이집트로 파송하여 식구들을 이주하여 정착하게 했고 그곳에서 큰 민족을 형성하게 했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그들을 가나안으로 옮겨 살게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곳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다른 사람들을 구원받게 하는 제사장 나라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변나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동화되어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여러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듣지 않았고 죄 가운데서 살다가 결국 나라는 망하고 백성들은 다 흩어졌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서 대신 죽게 하고 그 피로 믿는 자들의 죄를 씻어 의롭게 하고 구원하셨습니다. 구원은 그러므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선교는 하나님의 구원소식을 널리 알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위해서 시대마다 사람을 부르고 훈련하고 파송했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 20:21)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을 전하는 것을 가치 있는 일이며 존재의 목적으로 삼습니다. 지난 몇 달 동안 단기 선교 팀원들이 기도하며 사역을 준비했습니다. 오늘 이들을 파송하며 팀원들과 교회에게 몇 가지 부탁을 드립니다.

1. Expect the great things from God. and do the great things for God.
하나님께서 위대한 일을 하실 것을 기대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위대한 일을 실천하십시오.

우선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구원하시고 그 기쁨을 알게 하신 것처럼 가서 섬길 대상 역시 하나님께서 사랑하고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들의 형편과 반응은 우리가 기대한 것과 다를 수 있지만 그들도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여 그리 살고하고 있으니 그들을 주의 사랑으로 품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땅의 모든 족속들이 복을 받을 것이니라.”라고 하신 약속을 이번 여름에 우리를 통하여 이루실 것입니다. 교회는 팀원들을 파송하고 그들은 가서 복음을 전하여 벌티모어와 워싱턴의 낯모르는 사람들이 구원의 복을 받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위대한 구원의 일을 기대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위대한 일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준비하고 큰 헌금으로 동참했어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flexibility 유연성이 중요합니다. 내 고집과 생각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그가 사역의 주인이고 우리는 조력자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면 서로 존중하고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습니다. 절대 비판하거나 화를 내지 마십시오. 사탄이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을 허용하지 마십시오. 사역자체보다 하나님 안에 머무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2. Introduce your Lord Jesus Christ.
당신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소개하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의 예배와 모든 활동은 주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팀원들은 가서 찬양하고 설교하고 그룹 활동을 하면서 결국은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보여줄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재미있는 게임도 하고 운동도 할 것입니다. 홈리스를 섬기고 사람들을 만나고 기도할 것입니다. 이 모든 활동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팀원들의 경비를 조달하고 기도하고 그들이 돌아와 승리의 보고를 할 때까지 함께 깨어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주님을 자랑하고 세상에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았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선행과 종교 활동을 하는 것이지 복음 전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십니까?

롬 10:13-15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라는 성경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도 않은 분을 어떻게 부르며 듣지도 못한 분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전하는 사람이 없이 어떻게 듣겠습니까? 또 보내심을 받지 않고 어떻게 전하겠습니까?.”

= 여러분은 사영리에 대해서 들어본 일이 있습니까?
= 이전 주간 여러분의 믿음을 확인하고 실천해 보십시오.
한 사람에게 예수님 소개하기. 시간 정하고 기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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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14일 넘치는 은혜 (시 116:12-14) 창립35주년기념예배 김석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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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7일 감사하는 자가 누리는 복(눅 17:11-19)

신 16:16-17 “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큰 모임을 갖고 하나님께 예배하고 제사했습니다. 봄철에는 1월 14일에 유월절을 지키며 애굽에서 나올 때의 구원 받았음을 감사했습니다. 여름에는 유월절 후 7주(50일)째가 되는 맥추절, 칠칠절, 오순절에 처음 익은 열매로 감사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가을에는 7월 15일에 가을 농사를 마치고 수장절, 초막절을 지키며 감사했습니다. 맥추감사는 부활절 후 50일이 되는 오순절에 지키던 것이지만 한국에서는 보리 추수를 마치고 7월 초에 지켜왔습니다. 날자보다 그 의미를 따른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7월 둘째주일이 창립기념주일이라 오순절인 성령강림절에 지키면 좋겠습니다.

감사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절기를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자녀들에게 그것을 전수하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살전 5:16-18 “항상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택한 자녀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감사하며 기쁨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기회 되는대로 은혜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일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알기에 그렇습니다. 눅 15장에 집나간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는 곧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하나님입니다. 아버지는 가진 것 다 잃고 망해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알아보고는 맨발로 뛰어가 끌어 앉고 입 맞추고 새 신발을 신기고 손에 금반지를 끼워 아들의 권위를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얻은 아들이라고 잔치를 열고 함께 즐거워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그렇게 받아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기 욕심대로 살던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유업을 물려받을 후사로 세워주셨습니다. 바울은 이 사랑을 깨닫고 난 이후에는 자기를 사랑하여 대신 죽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고후 5:21에서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구원하기로 예정한 사람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고 인정하시고 의롭다고 인정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롬 8:30) 그러니 그 은혜를 어찌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죄를 용서해주고 병도 고쳐주고 파멸에서 건져내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워주시고 좋은 것으로 만족케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경험하고는 시편 103편에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라.”고 노래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삶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믿음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런 감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물론 감사하는 본인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복을 지속적으로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청하며 치료받기를 원하던 열 명의 나병환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말씀하였고 그들은 이 말씀을 믿고 제사장에게 보이기 위해서 가다가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중의 한명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표시했습니다. 예수님은 나머지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아홉 명의 나병환자도 분명히 은혜로 치료를 받았지만 감사하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한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이 크신 선생님뿐 아니라 전능하신 주님이심을 알고 다시 돌아와 감사하며 예배했습니다. 그에게는 치료 받은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격리생활을 끝내는 일보다 예수님께 감사하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가족을 만나 기쁨을 나누는 것보다 예수님께 감사를 표시하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감사하고 예배하는 것이 그의 우선순위였습니다. 예수님은 “일어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고 새로운 복을 주셨습니다. 다른 아홉 명은 비록 병은 치료받고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이런 믿음의 관계에서 누리는 영적 즐거움은 맛보지 못했습니다.

감사는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합니다. 시편 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자기 행실을 바르게 하는 자에게 내가 구원의 길을 보이리라.” 감사를 통하여 구원받은 자의 특권을 누리며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롬 1:21에서는 감사하지 못하는 죄인들의 속성을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해드리거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해져서, 그들의 지각없는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범사에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죄 가운데 빠지기 십상이며 하나님을 원망하기 쉽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께 불평하며 감사하지 못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수많은 기적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 가운데 살았지만 모세와 하나님을 때마다 원망했습니다. 정상적인 판단을 하지 못했고 방향을 놓쳤습니다. 감사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가 하실 일을 기대하는 믿음의 행위이지 형편이 좋아서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원망은 불신앙이며 죄이고 그 결과는 파멸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께 찬송하고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감사를 들으시고 옥에서 풀어주셨습니다. 그들은 잠시 고난을 받았지만 오히려 그 일로 인해서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성도가 당하는 고난은 재앙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시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시고 자신을 드러내고 영광을 취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엊그제 엘에이 근방에 강진이 있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금요기도회를 인도하다가 건물이 흔들려서 급히 마당으로 나와 기도회를 계속했는데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기도할 수 있었다고 감사하는 글을 올렸습니다. 두려움이 있었지만 그래서 더 겸손히 엎드리게 되었다고 감사하는 글을 보았습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우리에게는 더 큰 감사할 일들을 가져다줍니다. 오늘의 맥추감사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경험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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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30일 복이 되십시오. (창 12:1-3)

지난 한 주간 선교 세미나에 참석하며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교회형편이 좀 더 좋아지고 믿음도 성장하여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때가 되면 선교하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하나님 생각과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은 능력의 유무가 아니라 순종하기로 작정하는 결단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브라함을 열방의 아버지로 삼고 복되게 하신 것은 그의 유능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통치자로 여기며 세상을 구원할 제사장 나라를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부름이었습니다. 바벨탑 사건이후에 홍수 심판을 당한 사람들 중에 노아의 가족만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면 그 이후에는 완전해야 했지만 다시 타락하였고 하나님은 이런 시대를 구원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그는 단지 부름에 순종하여 어디로 갈지를 모르면서도 고향을 떠났고 하나님은 그의 순종을 믿음의 행위로 인정하고 복을 주셨습니다. 순종은 힘들 때 처음부터 해야 의미가 있습니다. 순종하면 사명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교회의 역사를 다시 살펴보았습니다. 성령의 강림을 경험한 초대교회는 탄압가운데서도 예수 부활의 소식을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4세기 초가 되어 로마의 인정을 받고 드디어 자유를 얻지만 그 이후부터 신앙의 색깔도 변하고 세속화되어 힘을 잃어갑니다. 1517년 말씀으로 돌아가려는 종교개혁이 이루어지기까지의 교회 모습은 타락하여 복음의 능력을 잃은 모습입니다. 그러면 종교개혁 이후에는 부흥이 오래 지속되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루터가 죽은 이후의 독일 교회는 다시 사변적인 기독교로 바뀝니다. 30년 전쟁은 경제적 위기를 가져왔고 교회지도자들은 권력과 함께 타락했고 철학이 발달하여 지성을 강조하다보니 종교 정통주의에 빠져 형식에 치우쳤습니다. 학교는 문을 닫고 병자와 가난한 자는 거리에 방치되었습니다. 강탈과 파괴가 심했지만 부자들은 여전히 맥주 의자에 앉아 삶을 즐겼습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이런 암흑기를 보내며 일부 사람들에게서 시작된 경건한 신앙생활은 성령의 일하심과 함께 퍼져나갔습니다.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나고 목사관에서부터 학교가 다시 시작되고 빈민들을 위한 시설이 운영되기 시작합니다. 신앙의 부흥은 교육과 복지와 전반적인 사회개혁으로 번졌고 선교사 훈련기관도 생겨났습니다. 특히 모라비안은 형제단을 조직하여 경건한 생활과 함께 선교에 열심 했습니다. 감리교회 창시자 요한 웨슬레나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윌리암 캐리도 이 모라비안 신자들로부터 도전과 영향을 입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들이 19세기의 일이니 그리 오래되지 않은 최근의 일입니다.

모든 족속을 제자 삼으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은 사도들은 지중해 인근 밖에 모르던 보통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스페인을 땅 끝으로 이해할 만큼 좁은 세상을 가진 1세기의 옛날 사람들이니 모든 민족을 이해하는 폭이 좁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유대 민족에 국한되었던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해지고 로마를 통하여 유럽지역에 소개되고 영국과 미국에 의하여 모든 민족에게 확대되어 우리에게 까지 전해진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물론 세상 역사의 소용돌이와 제국의 침략 전쟁들이 있었지만 그 와중에서 하나님은 사명을 인식한 사람들을 사용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도 그동안 복음에 대한 빚을 갚는 마음으로 선교에 동참하여 세계 여러 곳에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올림픽을 유치할 만큼 국력이 신장되고 교회가 힘과 열정을 갖게 된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경제가 성장하는 것과 반비례하여 교회는 영적 힘을 잃었습니다. 1980대에부터 선교의 불이 붙어 선교사 파송율이 세계 2위까지 올라가더니 40년이 지난 지금은 6위로 다시 내려왔습니다. 사회를 변화시키고 영향을 주던 교회는 점점 힘을 잃고 있습니다. 교회 안의 어린이와 청년들이 줄어들고 선교사 후보생을 모집하는데도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인구감소의 탓이기도 하지만 젊은이들에게 교회는 더 이상 매력 있는 곳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들이 몸담고 있는 이지역의 교회는 어떤가요? 한동안 세계 선교를 주도하고 영적 영향력을 끼쳤던 이 지역의 교회들은 지금 세속화의 선봉에 서 있습니다. 그래도 소수 이민 교회들이 영적 맥락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지난 역사에서 더 이상 소망이 없다고 여길 만큼 타락한 때에도 깨어있는 소수의 사람들은 경건한 생활을 하고 기도하며 영적 불씨를 간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사람들을 사용하여 복음의 능력을 회복시켰고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시대의 흐름을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다시 말씀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이 말씀하시는 말씀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한인 이민교회도 이 지역의 영적 부흥을 위해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시대를 살리는 제사장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민생활에 지친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어야 합니다. 만일 지난 시대의 사람들처럼 자기만을 위하는 개인주의 신앙에 빠지거나 세속에 휩쓸러 타락의 역사를 반복한다면 다시 오는 주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시대의 흐름과 자기 사명을 아는 사람은 내일을 앞당겨 볼 줄 압니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하는 복이 됩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사용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계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구원하심이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이 말씀은 재림 이후에 천상에서 이루어지는 보좌 앞에서의 예배 모습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의 고백처럼 구원하시는 주권은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습니다. 그 구원은 모든 민족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언어와 민족들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위층에 사는 유학생도, 옆집의 인도사람도, 앞집의 중국 사람도 천국에서 함께 기뻐해야 할 우리의 형제들입니다. 그들이 이 잔치에 함께 하도록 복음을 전하는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의 복이 되라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복이 되어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이것이 우리 개인과 가정과 교회가 받아 누리는 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부름에 응답하여 일하는 성도들을 만난 것이 제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유트브에 신앙서적을 읽어주는 분, 선교지에 묻힐 꿈을 꾸는 분, 기도 방에서 얼굴 모르는 사람들을 품고 중보 하는 분, 교회의 일에 이름 없이 봉사하는 평신도들, 비행기 표를 사고 휴가를 내서 봉사하는 세미나 인도자들을 보았습니다. 복이 되라고 불러주신 그 부름을 듣고 주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하나님 나라의 이름 없는 보통사람들입니다. 이번 배움을 통해 얻은 결론은 이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타문화권 선교사로 부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아브라함의 언약으로 부름 받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또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하라고 우리를 복의 근원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받은 복을 나의 것으로만 간직하지 말고 흘려보내 또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해야 하겠습니다.

다음 주일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영과 육의 복을 세어보고 감사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할 이유가 더 많아지고 그 은혜를 나눌 사람들이 더 많아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열방을 복되게 하라고 복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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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23일 자녀의 특권을 누리십시오. (갈 4:1-7)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한 이유는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들이 유대주의자들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행 15:1-2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다.” 유대주의자들은 이방인 출신 교인들도 유대인의 율법을 지키고 할례도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문제는 초대교회를 어지럽게 했고 풀어야 할 큰 어려움이었습니다. 행 15장에 보면 이 문제로 교회는 진중하게 모임을 갖습니다. 베드로도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에 전도하다가 그곳에 성령이 동일하게 임했던 것을 설명했습니다. 결국 교회는 이방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고 중요한 결정을 합니다. 행 15:19-20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 것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이 전하는 복음은 예수의 복음과는 다른 복음이라고 말했습니다.(갈 1:6-9).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심하게 말했습니다.(갈 1:8) 은혜 위에 율법의 행위를 덧붙인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헛되게 하는 것이 고(갈 2:21)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갈 3:2-3). 갈 2:16에서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라고 말하여 유대주의자들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반박했습니다. 율법의 기능은 사람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이며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지만 거기까지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속량하여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속량이라는 단어는 ‘건져낸다’ ‘구해낸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출애굽 사건을 통하여 자기들의 신분이 바뀐 것을 잘 알기에 속량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잘 압니다. 이 단어는 자기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의 대가를 다 지불하고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건져냈습니다. 자유를 얻은 종이라고 해도 감사할 일인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양자로 받아 주시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게 하고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갈 4:4-7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롬 8:15-17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구원받은 신자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요 상속자입니다. 종은 주인의 눈치를 살피고 시키는 것만 하는 수동적인 자세를 갖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의 것을 마음껏 사용하며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아버지의 일을 합니다. 또 어린아이는 자기 요구를 들어달라고 보채기만 하지만 장성하면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며 효도할 수 있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유아기적 단계에서 벗어나 장성한 성인처럼 해야 합니다.

아빠는 어린 아기가 아빠를 신뢰하며 부르는 말입니다. 자기 아빠는 슈퍼맨보다 더 강한 대상이라는 믿음이 모든 아이에게 있습니다. 아빠는 개인적인 친밀함은 물론 절대 권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는 사람은 모든 염려와 살고 죽는 문제까지도 하나님께 맡기고 삽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까지 아버지에게 순종한 것을 보십시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라고 순종했습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고 말씀하고 운명했습니다. 그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냈습니다. 동일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들로 불러 상속자가 되게 했으니 그 앞에 담대하게 서십시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방문하는 사역지마다 마귀가 쫓겨나갔습니다. 마귀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미리 알았기에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더 이상 사람들을 괴롭히지 못하고 도망쳤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피로 우리 죄를 씻어 죄와 상관없는 하나님의 아들로 살게 합니다. 그 능력은 우리의 현실 문제까지도 새롭게 합니다. 더 이상 무덤 사이에 거하던 거라사 광인처럼 죄와 마귀의 손에 놀아나지 않게 합니다. 성도의 기쁨을 빼앗아가는 현실 문제도 능히 해결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어떤 문제가 있든지 아빠와 자녀 관계를 회복하십시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불러주시는 주의 손을 붙잡고 힘을 얻으십시오.

갈 4:6절에서는 ‘아들의 영’을 주셔서 그의 도움으로 아빠라고 부르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아들의 영은 성령을 말합니다.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생명의 상속자라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믿게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며 살게 합니다.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시며 필요한 은사를 주시어 능력 있는 믿음 생활을 하게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게 하시고 우리가 방향을 모르고 있을 그때에라도 안타까워하며 우리를 위해 중보해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움을 구하십시오. 성령과 함께 자녀의 특권을 마음껏 누리십시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기쁨을 맛보십시오. 주의 은혜가 여러분 가운데 항상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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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16일 야곱이 받은 은혜 (창 35:1-15)

오늘 아버지날에 야곱을 소개합니다. 야곱은 삶의 의욕과 열심이 있었고 목표의식도 분명했습니다. 자기 뜻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을 이루어 냈습니다. 어떻게 보면 경쟁에서 이기고 성공하려는 현대인과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야곱은 험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창 47:9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아마도 그의 외모에서 산전수전 겪은 모습이 있었던가 봅니다. 바로가 처음 본 야곱에게 나이를 물은 것을 보면 말입니다.

야곱은 쌍둥이로 태어났지요. 형 에서가 외형적이며 사냥을 좋아하던 것과는 달리 야곱은 내성적이었습니다. 배고픈 형에게 팥죽을 주고 장자의 권한을 샀는가 하면 시력이 좋지 않은 아버지를 속여 형이 받을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이 일로 형 에서는 동생을 죽이려 했고 결국 야곱은 삼촌 집으로 피신합니다. 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을 열심히 일하며 재산을 모읍니다. 그러나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했고 삼촌에게 속는 신세가 됩니다. 삼촌의 둘째 딸 라헬을 사랑하여 7년을 일하고 결혼허락을 받지만 삼촌에게 속아 첫째인 레아와 첫날밤을 지냅니다. 삼촌에게 다시 항의하여 라헬도 아내로 얻습니다. 그 대가로 7년을 더 일합니다. 야곱의 재산이 늘자 삼촌과 식구들의 모함을 받고 결국 삼촌이 없는 틈을 타 도망치듯 피해 나옵니다. 그는 아내와 자식을 편애하는 단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 아내와 두 여종에게서 얻은 12자녀들이 서로 갈등했습니다. 오죽하면 형들이 요셉을 팔아버렸을까요? 딸 디나가 세겜에게 욕을 당하자 두 아들이 원수를 갚는다고 세겜 사람들을 몰살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얍복강 가에서 형이 400명을 거느리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두려움으로 대비책을 마련합니다. 형의 마음을 달래 줄 가축과 종들을 앞세우고 자신은 맨 뒤에서 사태를 주시합니다. 그의 이름 야곱의 의미는 ‘뒤꿈치를 잡은 자’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살았지만 자신도 속으며 실패자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삼촌 집으로 피신 가던 중에 광야에서 돌을 베게 삼고 잠을 잘 때에 한 꿈을 꿉니다. 하늘까지 닿은 사닥다리와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며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겠다. 그리고 너를 이 땅으로 다시 데리고 오겠다. 내가 네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룰 때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창 28:15)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습니다. 야곱은 그곳에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것과 고향으로 돌아오는 때에 십일조를 드리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이 만남과 약속 때문에 그는 평생을 하나님을 의지하며 삽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언약한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도망자 야곱을 만나주시고 그의 인생의 주인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창 28:1-2에서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고 오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네게 복을 주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도망치고 있는 야곱을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이루기 위한 여행자로 만들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어려움 중에서도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을 수 있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것은 정금같이 나오게 하려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씨름한 일도 위기를 극복하려는 자기욕심으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야곱은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형의 마음을 풀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약해지고 사랑이 식을 때마다 반복하여 은혜를 주시고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연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창 35: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라고 합니다. 돌베개를 베고 자며 하나님과 약속했던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 관계를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야곱은 세겜에서 정착하여 살려고 하던 때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딸 디나가 추장 세겜에게 욕을 당합니다. 레위와 시므온이 여동생의 복수를 합니다. 세겜의 남자들에게 할례를 받는 조건으로 동생의 결혼을 허락하겠다고 거짓으로 약속하고 할례 받고 거동이 불편하던 남자들을 죽였습니다. 야곱이 큰 위기를 만난 그때에 하나님은 벧엘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문제를 만날 때마다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그래서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고 첫사랑을 유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 소유가 풍부해지면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잊어버릴 것을 경계했습니다.(신 8:13-14) 그런데 창 35:2을 보면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라고 말한 것을 보면 세겜에 있을 때에 이미 우상을 함께 섬기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도 성결한 삶을 유지하는 일은 그냥 되지 않습니다. 시대의 영향을 피해갈 수도 없고 믿음 없는 사람들과 살다보면 그들과 비슷하게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적 싸움을 계속해야 합니다. 날마다 우리의 베델로 돌아가 하나님과 약속했던 그때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에 즉각 순종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창 35: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식구들과 함께 이방신들을 상수리나무 밑에 묻어버리는 결단을 실천했습니다.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고 방향을 바꾸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벧엘로 함께 올라가 제사를 드리고 믿음을 회복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하나님과 겨루어서 승리했다는 의미로 이스라엘이라고 바꿔주시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진행해 갔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왕들이 그의 가문에서 나오게 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야곱과 그의 후손에게도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가 평생 그를 뒤따랐습니다.

우리 아버지들에게 이런 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통하여 구원의 은혜를 이미 맛본 우리들이지만 날마다 함께 해주시는 성령의 동행의 은혜를 힘입어야 합니다. 아버지들이 영적리더가 되어 식구들의 영적인 필요를 공급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앞장서야 합니다. 비록 완벽하지 못하고 실수도 있겠지만 다시 믿음을 회복하고 그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신 6: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라.” 엡 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했습니다. 믿음의 가장 여호수아는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다.”라고 결단했습니다. 주의 위로와 격려가 아버지들에게 함께 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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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9일 성령의 도움을 구하라 (행 2:1-13)

구약에서 하나님의 신이 일하신 경우가 언급되지만 특별한 경우나 기름부음 받은 선지자나 지도자에게 제한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신약의 서두에도 요한의 사역이나 예수님의 세례 받을 때, 사가랴 등의 경우에 성령의 사역이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소개된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120명의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 강림은 모든 사람에게 임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것은 요엘 선지자가 예언했던 내용이 현실로 나타난 것입니다. 욜 2:27-29 “그런즉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성령의 강림은 제자들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나타난 현상으로 알았습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 같은 것이 집 안에 가득했고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의 머리 위에 임하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복음을 전했는데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 그 말을 이해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들을 이상하게 여겼고 대낮에 술에 취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베드로는 나타난 현상에 대하여 자상하게 설명하며 하나님이 행사신 구원의 일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회개했고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사도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기사와 이적을 행했습니다.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행 4:10-12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성령께서 사람들을 사용하여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에게,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해지게 했습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예수를 믿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구체적으로 성도 개인에게 적용되게 일하십니다. 옆에서 가르치는 선생님처럼 보혜사 성령님은 신자의 삶에 함께 하시며 모든 형편에서 능히 이기게 하십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에게 인도하여 믿도록 합니다.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게 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게 합니다. 그 믿음 안에 있도록 기도해 주십니다.

요 16:13-14절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롬 8:14-16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롬 8:26,27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이렇게 사람을 변화시키고 복음이 전해지게 하여 결국 교회를 세웁니다. 사도행전의 성령강림은 교회를 통하여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여 사용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성령의 충만한 사람들을 영적 제사장으로 세워 사용하십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담대하게 증언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에서도 보듯이 행 4:11-12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라고 외쳤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듣는 사람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고 죄를 회개하고 주께 돌아왔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하루에도 수천의 사람이 개종하고 주께 돌아오는 역사를 맛보았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모였고 하나님을 찬송했으며 기도하고 배우며 성령을 따라 순종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형제의 필요를 채웠고 모두에게 칭찬을 듣는 소문난 교회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찾아와 소문을 확인했고 주께서 날마다 믿는 사람의 수를 증가하게 했습니다.

보스톤중앙교회가 35주년을 맞습니다. 창립자들의 마음을 감동하여 교회를 시작하게 하신 분도 주님이고 지난 역사 속에 많은 과정마다 개입하여 승리하게 하신 분도 주님이십니다. 그들을 사용하고 움직이신 분이 교회의 머리이며 주인이신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내일도 희망적입니다. 부족함도 있고 제한된 것도 있지만 주님을 인정하고 순종한다면 그가 우리 앞서 일하시며 사용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기쁨을 맛보며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할 것입니다.

요 14:26-27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일대일, 제자훈련, 구역활성화, 선교적 책임을 감당한 교회가 되자고 제언하신 분들이 있습니다. 더 열심히 모여 기도하고 말씀을 배우고 전하는 교회가 되기를 꿈꾸는 자들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의 기쁨과 능력을 후배들에게 물려주는 영적인 책임을 다하는 교회가 되기를 함께 기도합시다. 생명을 구원하는 성령의 일에 적극적으로 함께 하는 교회로 발전해 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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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2일 마음을 지켜라 (잠 4:23, 행 2:43-47)

잠 25:28은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라고 합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는 성도들도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믿음 없는 말을 하게 됩니다. 성벽이 무너진 도시처럼 무방비 상태가 되어 넘어지기 쉽습니다. 지난 주간 말라기서를 묵상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는 말에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말 3:13-15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너희가 오만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서도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습니까?’ 하고 말한다. 너희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소용없는 일이며 그의 명령을 지키고 우리 죄를 슬퍼하며 탄식해 봐야 무슨 유익이 있는가? 우리가 보기에는 교만한 자가 복이 있고 악을 행하는 자가 잘되며 하나님을 시험해도 벌을 받지 않는다.’” 라고 말하는 것을 읽었습니다.

얼마나 믿음이 약해지고 시대가 타락했으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을까요? 지도자들은 공의를 행하지 않고 자기 배를 채우기 급급했고 제사장들마저 영적 사역에 관심을 두지 못했습니다. 백성들이 드린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분배하여 먹고 살게 해야 할 것인데 자신의 배를 채웠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했다고 말합니다. 덕분에 성전 곳간이 텅 비어버려서 레위인들도 먹고 살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러니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었겠습니까? 영적으로 무감각해진 사람들은 겁 없이 악한 말로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겨서 잘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만하고 악한 사람들이 잘되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사람들이 더 잘사는 것 같은데 하나님 정말 살아계시는 것입니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망하는 지름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까지 말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기 마음을 지켜 믿음으로 살지 못하고 세상과 자기 욕심을 하나님보다 우선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은 자기위주로 삽니다. 그런 환경에서는 신앙생활도 복 받고 잘살기 위한 자기 욕심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합니다. 이것은 샤머니즘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믿음은 어느 경우에서든 신실하신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게 합니다. 나에게 어떤 유익이 있겠는가를 저울질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악인들이 형통하고 성공한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초라하고 볼품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속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눈과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세상을 운영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를 지켜주십니다.(시 121:4)

마음은 어떤 것을 생각하고 의사를 결정하고 감정을 느끼는 일도 하지만 영적인 것을 알게 하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갈 4: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엡 3: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롬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라는 말씀을 보면 우리가 생각과 마음을 잘 관리해야 영적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을 지키고 믿음으로 사는 자들에게 주시는 상급이 있습니다. 말라기는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기고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하는 자들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기념책에 기록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계시록에서 말하는 생명책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 보물을 챙기는 날에 그들이 내 백성이 될 것이다. 아버지가 효성이 지극한 자기 아들을 아끼듯이 내가 그들을 아끼겠다. 그때 너희는 의로운 자와 악한 자의 차이와 나를 섬기는 자와 나를 섬기지 않는 자의 차이를 다시 한 번 보게 될 것이다.'(말 3:17-18)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사는 사람들을 보물과 같이 여기고 아끼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악인을 어떻게 심판하시고 의인에게 어떻게 보상하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승리한 자들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약 1:12), 영광의 면류관(벧전 5:4), 자랑의 면류관(살전 2:19), 의의 면류관(딤후 4:8) 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믿음 없는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에 처할 것입니다. 그러니 주변상황에 흔들리지 말고, 다른 사람 때문에 마음 다치지 말고, 주님을 푯대 삼고 달려가십시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것을 자랑으로 여기며 여러분의 마음을 믿음 위에 세우고 지키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알려주셨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제자들을 인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잡히던 날 밤에 제자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우리와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를 하나님과 예수님과 하나가 되도록 초청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도록 보혜사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오순절 날에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가 집안에 가득했고 불이 혀같이 갈라져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120명의 사람들에게 내렸습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임한 성령을 눈과 귀로 보고 듣고 느끼고 확인했습니다.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고 많은 사람이 주께 돌아왔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찬양했고 선한 행실로 사람들의 칭찬을 들었습니다. 같이 나누어 먹고 서로의 필요를 채우며 돌보았습니다. 날마다 모여 기도하고 말씀을 배우고 그것을 실천했습니다. 교회는 소문이 났고 구원받는 자들이 날마다 늘었습니다.

영적 생활의 재미는 이것입니다. 성령에게 사로잡혀 그가 인도하는 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면 우리의 한계를 넘어 성령의 능력가운데 일하게 됩니다. 불평할 틈이 없습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할 것도 없습니다.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사용해 주시는 하나님을 자랑하기에 바빠집니다. 하나님의 보물이 된 것으로 감사하고 인내할 수 있습니다.

딤후 4:7-8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시 119:11 “내가 주님께 범죄하지 않으려고, 주님의 말씀을 내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합니다.”

성령 충만을 사모하고 지속적으로 집중하여 기도하십시오. 생각과 마음에 역사하는 성령을 따라 순종하고 그를 주인으로 모시고 사십시오. 어떤 경우에도 믿음을 잃지 말고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을 굳게 지키십시오. 이런 의지적인 훈련을 통하여 우리 믿음도 성장하고 선한 열매도 맺어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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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26일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습 3:14-17)

남 유다의 요시야 왕은 우상을 타파하고 회개운동을 벌였지만 그가 죽자 나라는 다시 타락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흩어버리기로 작정하지만 70년이 지나면 남은 자들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스바냐는 하나님의 약속을 설교하며 현실은 탄식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지만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형벌을 제거하고 원수를 쫓아내며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이니 기뻐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날을 믿음으로 기대하는 백성들로 인해서 하나님도 잔치 날에 즐거워하듯 기뻐하십니다. 이런 기쁨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지난 주간에는 스가랴서를 묵상했습니다. 나라를 바벨론에 잃고 종살이 하다가 고향에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격과 희망에 부풀어 성전을 재건하려고 했지만 반대에 부딪혔고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급하여 중단할 수밖에 되었습니다. 스갸랴는 여호와의 구원의 날을 설명하며 성전재건을 독려했습니다. 그 날에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직접 싸워 적들을 물리치고 승리와 영광을 맛보게 하십니다. 은혜와 자비의 성령을 보내 슬픔과 죄를 다 씻어 줍니다. 하나님이 미워하는 우상과 거짓 예언자와 거짓 영을 몰아냅니다. 왕이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니 힘을 내서 성전을 건축하라고 권면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설명됩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마음에 있고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환경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도 근심과 슬픔을 피해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창 47:9에 보면 한 평생을 은혜로 산 야곱도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이다.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도 실패할 때가 있었고 사울의 칼을 피해 다녀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던 제자들도 십자가 고난에 대하여 듣고는 근심하고 걱정했습니다. 그 일이 현실이 되었을 때에는 크게 낙심하고 두려워서 도망치고 숨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약함과 어려움이 있다면 주께서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셨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약함을 알기에 미리 위로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잠깐 슬픔을 당하겠지만 결국 기쁨이 될 것이니 환란을 당하더라도 담대하라고 하십니다.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께서 승리하신 그 승리를 본받아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은 죄의 결과로 오는 죽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신 그 능력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믿음의 승리를 위해서 제자들에게 기도의 확신을 갖게 합니다. 요 16:2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무엇이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늘 아버지께서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욕심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뜻과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기도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를 했다면 받은 줄로 믿어야 합니다. 성도가 환란을 당하면서도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믿고 기뻐하는 것은 세상이 흉내 낼 수 없는 무기입니다. 문제에게 지지 말고 믿음으로 기쁨을 유지하십시오.
예수님은 부활 후 바로 승천하지 않고 40여일을 세상에 더 계시면서 제자들이 부활을 믿게 했습니다. 부활을 믿으면 죽음의 권세를 넘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신앙을 가지면 천국을 앞당겨 맛볼 수 있고 슬픔 가운데서 기쁨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에게는 상처 자국을 만져보게 하고 음식도 함께 먹으며 믿음을 갖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신 후에도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계시며 성도들이 부활 신앙의 기쁨으로 복음을 전하도록 중보하십니다. 그 일을 위해서 돕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요 16:7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했습니다. 보혜사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며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분입니다. 예수를 알게 하고 믿게 합니다. 오늘도 교회 안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한 식구 되어 기쁨을 나누게 합니다. 주께서 지상에서 하던 그 복음 전하는 일을 우리가 하도록 힘을 주십니다.

성도가 기쁨으로 사는 것은 믿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스바냐나 스가랴가 말한 여호와의 날은 구원의 날을 믿는 믿음입니다. 장차 주의 재림으로 완성될 그 날을 바라보며 오늘을 기쁨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궁극적인 목적도 바로 기쁨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한 사도들은 환란을 만나더라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기뻐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벧전 1:5-6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능력으로 여러분을 보호해 주시며, 마지막 때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는 구원을 얻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지금 잠시 동안 여러 가지 시련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슬픔을 당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기뻐하십시오.” 약 1:2-3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은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살전 5:16-18 “항상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마음을 주님께 두는 것이 우선입니다. 기뻐하겠다고 작정하고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잘 해결되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그 일을 이루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미리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믿었기에 환란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시 16:8-12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기쁨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지배하게 하십시오. 평강을 잃지 마십시오. 풀리지 않는 문제를 더 이상 붙들지 말고 주님께 맡기십시오. 미워하는 감정이 풀리지 않을 때에도 거기에 머물러 있지 말고 믿음으로 용서와 사랑을 선포하십시오.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사탄의 잔꾀를 따르지 않기로 결단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적하십시오.

시 37:3-6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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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19일 오늘의 기념비를 세우자 (수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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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12일 부모를 공경하십시오. (신 5:16 엡 6:1-4)

모든 부모는 자녀를 여기고 잘 되기를 기대합니다. 인생 선배들은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효도하라고 충고합니다. 자기 생활에 바빠 부모생각 못하다가 형편이 조금 나아져서 효도하려고 하니 부모님은 이미 세상에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은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녀들을 잘되게 하고 장수하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신 5:16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공경이란 말은 몸가짐을 조심스럽게 하여 받들어 모시는 것을 말합니다. 히브리어도 무겁게 여긴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의 respect, honor 역시 같은 의미입니다. 부모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길러주시도록 세워준 대행자로 인정하고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부모를 무시하거나 다른 사람과 비교하거나 그 앞에서 화를 내는 것은 하나님이 미워하는 큰 죄입니다. 부모의 능력을 따지지 말고 부모를 통하여 세상에 태어난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부모를 존중하십시오. 부모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일하는 사람이며 부모 공경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부모들은 자녀를 자기 욕심대로 키우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양육해야 합니다. 엡 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자녀를 화나게 하지 말고 우격다짐하지 말고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하나님이 주신 자기 만의 개성을 살리도록 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알게 하는 믿음의 길잡이 노릇을 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위한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 그래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십계명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출산하고 양육하는 일뿐 아니라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알려주어야 하는 책임도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부모들이 먼저 주님을 깊이 알고 영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영적 생활을 바로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이 많아 생산 능력이 멈춘 아브라함의 가정에 이삭을 주셨습니다. 그 가정을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고 제사장 나라로 삼아 땅의 모든 백성이 복을 얻게 하려는 계획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아브라함의 믿음을 갖고 자녀들을 양육한다면 우리 자녀들도 그들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양육할 것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을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닮아가도록 꾸준히 양육하고 가르치는 일에 수고했다는 것입니다. 해산의 수고를 하는 어머니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태어난 자식이 제대로 구실하도록 꾸준히 돌보고 가르칩니다. 여러분의 자녀나 혹은 교우들을 영적으로 돌보고 책임지는 부모가 되십시오. 그들이 장성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도록 돌보고 가르치십시오. 영적인 부모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많은 건강한 가정과 교회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십니다. 육신의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만큼 하늘 아버지의 마음도 헤아려 믿음으로 살면서 또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 바랍니다.

요 14:21“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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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5일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막 10:13-16)

예수님의 사역에 아이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바친 아이의 이야기를 잘 압니다. 예수님은 자기 도시락을 바친 아이의 헌신을 기뻐하셨고 그것으로 많은 사람들을 먹이셨습니다. 자기 도시락이 많은 사람을 먹인 것을 본 아이는 신바람이 났을 것이고 평생 예수님을 자랑했을 것입니다. 물론 더 많은 날 동안 예수님을 뒤따라 다녔겠지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에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를 외치며 찬송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다고 했다.”(마 21:16)라고 말씀하시며 아이들을 환영하고 칭찬했습니다. 예수님의 칭찬을 들은 아이들은 온 동네를 다니며 예수님을 더욱 자랑했을 것입니다. 야이로의 어린 딸이 죽었을 때에 예수님은 그 아이를 살려주었습니다.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라고 말씀하여 아이를 살렸습니다.(막 5:40-42). 다시 살아난 아이가 어찌 예수님 소문을 내지 않았겠습니까? 이렇게 주님을 경험한 사람들의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까를 생각해 보십시오. 신앙생활은 날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 주님을 경험하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뉴욕 현대 미술관에는 에밀 놀데가 그린 ‘어린이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이란 그림이 있습니다. 오른 쪽 밝은 색깔로 표현한 곳에는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이 예수님의 품안에서 마냥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반면 왼쪽 어두운 쪽에는 제자들의 걱정스런 얼굴이 그려져 있습니다. 제자들은 사역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아이들을 막았지만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이 예수님 주위에 오는 것을 막지 않았고 오히려 환영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에서 누가 큰지를 겨루던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하게 상대를 섬기는 자들의 것이라고 꾸중했습니다. 힘없는 어린아이들에게는 부모의 도움이 절대 필요한 것처럼 하나님을 사모하고 서로를 겸손함으로 섬길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어린아이들이 부모를 절대 신뢰하는 것처럼 주님을 따른다면 주께서 잔잔한 물가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어린이들과 같이 겸손하고 순수한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아이들을 품에 안고 손을 얹어 축복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을 숫자에도 넣지 않던 때였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결코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생 후 8일이 된 남자 아이에게 할례를 행했습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 언약의 표시였고 이것을 행하지 않으면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없었습니다. 창 17: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 하였음이니라.” 할례는 언약백성의 표시였고 또 동시에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는 표시이기도 했습니다. 생후 8일밖에 되지 않은 유아에게 할례를 행할 만큼 하나님을 알게 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었다면 예수님이 아이들을 환영하고 안수기도 해주시며 믿음을 갖게 한 것도 따라야 할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누리는 복 받는 길을 아이들에게도 열어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례가 죄에서 자유하게 되고 하나님의 약속가운데 들어가는 중요한 것이라면 어린이에게도 세례의 은총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고 약속을 이어가기 위해서 유아세례를 베풉니다. 사도들도 온 가족에게 세례를 베풀 때에 어린이를 배제하지 않았습니다. 웨슬리는 유아세례를 원죄를 씻는 표시이며,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인증이고, 중생의 표시이고, 하나님의 영생을 부여받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지난 부활절에 우리는 유아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또 유아세례를 받은 학생이 자기의 선택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입교식을 했습니다. 이것은 잠언서의 말씀대로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는 일입니다. 잠 22:4,6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예수님 주변에 있었던 순수한 아이들처럼 우리 교회 안에 있는 아이들과 후배들이 말씀을 잘 배우고 믿음으로 살며 예수님의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랍니다. 유아세례는 어린 아이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자라도록 가르치고 훈련하겠다는 부모와 교회의 약속을 근거로 하여 베풉니다. 그리고 유아세례 받은 자가 15세가 되어 스스로 결단할 나이가 되면 다시 신앙을 고백하고 입교식을 통하여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아이들을 사랑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기 원합니다. 교회 안의 아이들과 후배들을 내 자식처럼 귀하게 여겨 마음껏 격려하고 안수하고 축복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과 하나님 나라를 이어 갈 일꾼들이기 때문입니다. 히 11:20-21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인 이삭을, 이삭은 야곱을, 야곱은 열두 아들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복을 빌고 선배가 후배들을 위하여 복을 비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운영해 가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함당한 바른 가치관을 갖고 세상을 바꿔나가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하나님은 믿음으로 구하는 기도를 들으시고 대를 이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게 하실 것입니다. 자녀들과 후배들을 위하여 주의 이름으로 손을 얹고 기도하는 좋은 전통을 세워 가기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을 준수하는 생활을 가르치고 본을 보여서 그들이 배우고 따라오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손을 내밀어 인사하는 일, 사랑을 고백하는 일, 선한 일에 인색하지 않게 손을 펴는 일, 전도하는 일, 준비된 예배를 드리는 일, 정한 시간에 기도하는 일, 배운 말씀을 실천하는 일, 모든 일에서 주님을 인정하는 일, 다른 사람을 위해 시간과 재주와 돈을 사용하는 일에 본을 보여 주십시오. 그리고 어린아이들처럼 겸손히 자기를 낮추어 주님과 이웃을 섬기십시오.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4)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살면 하나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갈 뿐 아니라 천국에서 큰 자로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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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28일 부활 이후의 변화 (눅 24:13-53)

부활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하던 제자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두 제자가 예루살렘에서 11킬로 정도 떨어진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지만 한참을 대화하고도 예수님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지나친 슬픔 때문에 세상이 제대로 보이질 않았습니다.
‘너희가 길을 가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
‘당신은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최근에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르고 계십니까?’
‘무슨 일인데?’
‘나사렛 예수님에 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모든 백성들 앞에서 행동이나 말씀에 능력 있는 예언자였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우리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주어 사형 선고를 받게 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이스라엘을 구해 주실 분이라고 잔뜩 기대했었는데 말입니다.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이런 일이 일어난 지 사흘이나 되었는데 우리 가운데 어떤 여자들이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그들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예수님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돌아와서 천사가 그분이 살아나셨다고 말하더라는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있던 몇 사람도 무덤에 가 보고 여자들이 말한 것이 사실임을 확인했으나 예수님은 보지 못했습니다.’

히 11:1-3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선조들은 이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훌륭한 사람으로 증언되었습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나 있는 것에서 된 것이 아닙니다.”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은 아무리 복음을 설명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믿음을 갖는 일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관심과 마음을 하나님께 묶어두려는 의지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가 깊어집니다. 예수님은 예언자들의 말씀을 들어 그리스도께서 마땅히 고난을 겪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를 설명해주셨습니다. 설명한다는 말의 의미는 ‘텍스트를 향해 가까이 찌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말씀을 피상적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화살처럼 찌르고 부딪히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에도 지식전달로 듣지 말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쪼개고 회개시키는 살아있는 말씀이 되도록 듣고 집중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말씀을 더 듣기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떼어 나눠주셨습니다. 이 떡을 받을 때에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던 그 모습이 생각났고 그제야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사라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눈을 열어주시고는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제자들은 그제야 앞뒤를 분간합니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 말씀을 설명해 주실 때 우리 마음이 속에서 뜨겁지 않더냐?’ 말씀을 공부하고 듣다가 우리 마음에도 이런 뜨거움이 일어나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믿음은 이렇게 은혜의 과정을 경험하면서 성장합니다. 말씀을 배우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고 때마다 은혜를 경험하고 확인하는 과정들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배우고 알아가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그래서 필요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기에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우리들에게 능력을 주시고 선을 행하게 하고 하나님을 아는 믿음이 자라게 합니다. 말씀을 지식으로 접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하고 그 하나님을 만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사실 낙심한 제자들도 예수께서 나사렛 예수라는 사실을 이미 알았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속할 구원자라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부활의 소문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지식적인 믿음은 아무 능력이 되지 못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떡을 받아먹을 때에 그 만남을 통하여 눈이 밝아지고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오늘 여러 가정을 환영하고 한 식구 된 것을 기뻐합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들이 함께 만나 그 감격을 함께 나누니 참 행복합니다. 보스톤중앙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하며 지식으로 아는 주님을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깊이 만나고 경험하는 즐거움이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으로 더 충만하게 되어 우리에게 위임해주신 증인의 삶을 함께 살아갑시다. 잠깐 눈이 어두워지고 슬픔이 우리의 마음을 둔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서로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십시오. 우리를 위로하고 떡을 주시고 말씀을 풀어 주시는 주님을 만나는 거룩한 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제자들은 영적 눈이 열리고 나니 그냥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즉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거기는 동지들이 있고 교회 공동체가 있는 곳입니다. 열한 제자와 다른 사람들이 시몬 베드로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기쁨을 함께 나누고 있었습니다. 두 제자도 의기양양해서 길에서 있었던 일과 예수님이 빵을 떼어 주실 때 그분을 알아보게 되었던 일을 자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어주실 때 자기들 내면에서 일어난 뜨거운 성령의 감동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이것이 간증 나눔이고 감사 나눔이고 거룩한 예배입니다. 자기가 경험한 은혜를 나누면 듣는 사람들도 함께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그러나 자기만의 경험으로 감춰두면 그 감동은 점점 사그라집니다. 이런 은혜 나눔이 활발하게 나누어지는 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꿈꿉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고 나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바로의 손에서 벗어나 홍해바다를 건넌 이후에 이스라엘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찬송하리라. 그가 영광스럽게 승리하셨으니 말과 마병을 바다에 던졌다. 여호와는 나의 힘, 나의 노래, 나의 구원이 되셨네. 그가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양할 것이요, 그가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라. 여호와는 용사이시니 여호와가 그의 이름이시다.“(출 15:1-3) 제자들의 사기가 충천했습니다. 우리도 이런 영적 생명력이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사명을 새롭게 했습니다. 그들이 있어야 할 곳이 바닷가나 엠마오가 아니라 갈보리 언덕, 십자가가 있는 곳, 죽이려는 자들이 있는 곳,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는 곳, 희생과 위험과 죽음이 있는 바로 그곳이라는 것을 알게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다시 모였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째 되는 날에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실 것이며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라 하였다. 너희가 이 일의 증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기다려라.“ 부활신앙으로 무장된 제자들에게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라 하십니다. 자기들만의 힘으로가 아니라 능력을 주실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지금까지의 지상사역을 제자들에게 위임하고 승천하셨습니다. 우리시대의 교회들도 이 명령에 순종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길과 진리와 생명이심을 힘 있게 전하는 증인으로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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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21일 Stop doubting and believe. 부활을 믿는 사람 (요 20:26-29)

Today we are celebrating the miracle of Jesus Christ being raised from the death. He was dead on the cross for the sin of all sinners.
When the people put Jesus to death, they thought that he was dead and gone forever. But on the third day he came back to life.

It was a miracle. He rose from the dead.
And He became the Lord and savior of us.
He demonstrated that death is not final destination.
Each of us also will be risen again and live forever.

Thomas, one of disciples of Jesus, would not believe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until he meet Jesus personally. One day Jesus appeared to Thomas and said, “Put your finger here; see my hands. Reach out your hand and put it into my side. Stop doubting and believe.” Thomas confessed finally, “My Lord and my God!” Then Jesus said that blessed are those who believe without seeing with their eyes.

John 11:25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He who believes in me will live, even though he dies; and whoever lives and believes in me will never die.”
Rome 10:9 “That if you confess with your mouth, “Jesus is Lord,” and believe in your heart that God raised him from the dead, you will be saved.”
Rev. 3:20 “Here I am! I stand at the door and knock. If anyone hears my voice and opens the door, I will come in and eat with him, and he with me.”

Shall we prepare eternal place where we live with him ?
Do not doubt and believe him.
Jesus is the only Lord and savior for you.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감사하고 함께 기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삼일 후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 모든 죽은 사람들도 다시 살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다시 부활하여 영원한 시간을 살게 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 제자 중에 도마는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했지만 자기가 확인하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나타나 못 박힌 손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만져보게 했습니다. 도마는 그때야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들이 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의 첫 증인은 여자들이었습니다. 여자들을 수에도 넣지 않았던 시대에 여인들의 말을 증거로 기록하고 있는 것을 부활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이렇게 확실한 부활을 증거 하다가 모두 순교 당했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사울이 변하여 사울이 변화되어 부활을 전했습니다. 초기 교회는 많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부활을 전했습니다. 그런대도 반대자들은 예수의 시신을 찾아내거나 빈 무덤에 대하여 해답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같이 하나님과 상관없던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새 생명을 주셨다고 믿고 고백합니다. 그가 부활하였기에 우리도 부활하여 영원한 천국생활을 할 것을 믿습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 세계를 믿음으로 바라보고 오늘을 살아갑니다.

아직도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몇 시간 전에 스리랑카에서는 부활주일을 드리던 교회와 성당, 그리고 호텔 등에서 연쇄폭탄이 터져 200명이상 죽고 600여명이 다쳤다고 합니다. 미움과 살인과 전쟁과 테러가 성행하는 시대의 아픔이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히 9: 27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운명이지만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요 11:25-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아직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에 영원한 시간을 어디서 보내게 될 것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그와 함께 영원한 시간을 보내게 하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길을 내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초청합니다.

롬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주 예수님을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네 마음속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니.”

계 3:20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마음의 문을 열고 그를 초청하십시오.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하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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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14일 그리스도를 본받으라. (빌 2:1-11)

이번 주간은 예수님 공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의 행적과 그의 삶을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수난주간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그분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의 희생 때문에 모든 죄인들이 용서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죽은 그리스도를 다시 살려 모든 이름위에 뛰어나게 했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하나님으로의 권리를 포기하고 낮아져 인간이 되었기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육신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 사랑의 극치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그 결과 하나님과 단절되는 죽음을 맞게 되었지만 육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어 피 흘림으로 그 죄가 가려지고 용서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서 오셔서 인간의 한계와 아픔을 몸소 겪었습니다. 출생 때부터 낮은 곳 구유에서 출생하신 예수님은 헤롯의 칼날을 피하여 이집트로 피신해야 했고 다시 돌아와 갈릴리 시골 보통 사람들과 어울려 살았습니다. 보통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셨고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먼저 사랑하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을 만큼 겸손했으며 스스로 낮은 곳을 선택했습니다. 오죽하면 고향사람들은 그를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 여겨서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철저히 보통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이사야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하면서 고난 받는 종으로 묘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죄를 그에게 옮겨 놓고 그를 대신 벌하셨습니다. 이사야가 말한 것처럼 그의 외모는 풍채도 없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아 버림당했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가 그런 대우를 받고 매 맞은 것은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그가 찌림을 당한 것은 우리의 반역때문이고 그가 으스러뜨림을 당한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입니다. 그가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가 낫게 되었고 그가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가 고침 받았습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19“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십자가에서 이루신 화목의 은혜를 경험한 선배들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왜 고초 당했나.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주 보혈 흘렸네. 주 십자가 못 박힘은 속죄함 아닌가. 그 긍휼함과 큰 은혜 말할 수 없도다. 늘 울어도 그 큰 은혜 다 갚을 수 없네. 나 주님께 몸 바쳐서 주의 일 힘쓰리.’ 우리에게도 이런 가슴 벅찬 감사가 느껴지기를 바랍니다.

감옥에 있는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루디아 같은 신실한 동역자가 있어서 사역을 펼칠 수 있었고 더구나 옥에 갇혀있는 동안에도 한결같은 사랑을 전해준 교인들에게 감사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들입니다. 성령과 교제하며 자비로운 마음으로 서로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같은 마음을 품고 불평과 시비가 없이 하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행동하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가라고 부탁했습니다. 아마도 빌립보교회에도 사람들 사이에서 오는 갈등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디든 사람들이 모이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없거나 악해서가 아니라 서로의 생각과 삶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일하는 방식이 서로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그 다른 생각들을 조정하고 하나가 될 것인지가 참 중요합니다. 바울은 그 해결책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자기보다 남을 더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과 겸손함을 그리스도에게서 배우라고 합니다. 자기의 유익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한 그리스도의 순종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자기 유익보다 공동체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것, 자기 자랑을 그치고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지식을 얻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을 낮추고 비운 그 겸손의 삶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 되는 비결이며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는 길입니다.

세상은 높은 곳에 올라 큰 소리치고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을 출세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이루려고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더 희생하며 열심히 돈을 모읍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권리를 포기하고 스스로 인간이 되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었습니다. 선생이 되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며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위해 조금 희생하고 손해를 보았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조금 맛본 것입니다. 영적 생활에 승리했거나 누구에게 선을 베풀었다면 그것도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렇게 사셨고 우리에게 그 길을 걸으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기포기와 겸손한 섬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집니다. 그의 사랑이 나눠지고 구원의 능력이 흘러가게 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 쓰임 받았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 13:3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일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을 계명으로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사람 사랑으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고 조금 무례하게 보이는 사람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고 사랑하는 데서 우리의 신앙의 정도가 드러납니다. 그 사랑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의 제자라는 것이 증명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을 우리에게 주셨듯이 이제는 우리가 겸손한 자세로 교회 밖의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겨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과의 화목을 알게 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주변 사람들에게 생활로 보여주어야 하겠습니다. 이번 한 주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고 기도할 때에 우리의 사명이 더 새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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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7일 하나님의 은혜(사 43:1-3, 10-21)

이사야는 왕족출신의 예언자로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망하고 남족 유다만 남았을 때에 사역했으며 남쪽 유다와 바벨론 그리고 주면 국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이사야서의 전반부는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나라를 잃어버리고 바벨론의 포로가 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40-66장의 후반부에서는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소수의 남은 자들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될 것을 말했습니다. 구원과 용서와 회복을 예언했고 특히 구원주로 오시는 메시아에 대해 예언했습니다.

오늘 선택한 본문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회복시키고 새롭게 하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신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라고 강하게 말합니다. 그들이 처한 상황은 암담하고 정치적 형편은 풍전등화와 같은 때였습니다. 북쪽의 이스라엘을 먹어버린 앗수르, 그리고 그 앗수르를 무너뜨린 바벨론 앞에서 작은 땅덩어리 유다는 두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사야는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 능력을 힘입게 했습니다.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건너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보호받던 일을 다시 기억하게 했습니다. 그 하나님이 물 가운데서라도 불 가운데서라도 함께 하여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말하며 위로했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때마다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노래하며 자기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했습니다. 출애굽의 경험을 회상하며 애굽의 군대를 수장시키고 싸움에서 승리하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출 15:1-3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지켜주시고 이스라엘을 위해 직접 싸우는 전사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니 그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으면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이런 은혜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불러 복을 주시고 땅의 모든 민족이 그를 통하여 복을 얻게 될 것을 약속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삶을 통하여 민족을 형성하게 했고 모세와 여호수아를 사용하여 그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했습니다. 시내산에서 계명을 주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구별된 삶을 살게 했고 다른 민족에게 하나님을 소개하는 제사장 나라가 되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다는 약속이 있었습니다. 다윗에게도 대를 이어 왕권이 계속되게 하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런 약속들을 기억하며 그들은 때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기억했고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새롭게 했습니다.
시 46:1-3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하나님은 항상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거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아담을 만드시고 생각을 나누고 함께 일했습니다. 타락한 인류를 홍수로 심판하실 때에도 노아를 구별시켰습니다. 아브라함을 불러 새로운 제사장 나라를 세웠습니다. 우상숭배로 나라를 잃게 될 때에도 소수의 남은 자들을 통하여 일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다윗의 혈통을 통하여 메시아이신 에수 그리스도를 보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육체로 우리가운데 찾아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죄의 값을 지불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을 구원하여 함께 하기 위해서입니다. 임마누엘로 죄인들 가운데 오신 예수님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요 6:35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 8:12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 10:7-9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요 15:1-2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예수님을 주로 믿으면 누구든지 영과 육의 문제를 해결 받습니다. 어둠에서 벗어나 빛에 거하게 됩니다. 사망에서 옮겨 생명에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고 나면 그 은혜에 감사하여 새롭게 살게 됩니다. 바울의 변화를 보십시오. 빌 3장 “내게 유익하던 그 모든 것을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다 버렸습니다. 더구나 내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여기는 것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훨씬 더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내가 그 모든 것을 쓰레기처럼 여기는 것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과 완전히 하나가 되기 위한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며 그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분의 죽음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 나도 부활하는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그것을 이미 얻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일만은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나를 부르신 부름의 상을 얻으려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성숙한 사람들은 모두 이와 같은 생각으로 살아야합니다.”

우리도 세례와 성찬을 통하여 그 주님을 우선하여 살겠다는 새로운 고백을 했습니다. 십자가의 피로 죄 용서를 받았음을 고백합니다. 나의 옛 성품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새로운 존재로 태어났음을 고백합니다. 교회는 이 신앙고백을 확인하고 세례를 베풉니다. 세례 받고 등록한 신자를 교회의 식구로 환영하고 영혼 구원의 책임을 함께 나누어집니다. 교회 공동체의 한 식구 된 신자들이 성찬을 나누어 먹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 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가 지상에서 하신 생명 살리는 일을 교회를 통하여 계속 감당하겠다는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 주님을 재림 때까지 전하는 책임 있는 행위입니다.

은혜를 알면 사명이 새로워집니다. 사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나니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위해서 자원하여 열심을 내게 됩니다. 이 사순절기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세어보며 찬양합시다. 그리고 생명 살리는 주님의 일에 헌신을 다짐하는 기회로 삼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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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31일 화목을 위한 실천(고후 5:10-21)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화목의 직책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거짓교사들의 가르침에 현혹되기도 했고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의혹을 제시하고 무자격자라고 매도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을 향하여 바울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각자가 행 한대로 상과 벌을 받게 된다고 말하며 두려움으로 주님을 섬겨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 개인은 교회를 핍박하는 위치에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극적으로 만난 사람입니다. 변화의 증거가 분명한 만큼 그의 시간과 정열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데 사용했습니다. 16절에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한다.”라고 했는데 ‘육체대로 안다’는 것은 육신의 잣대로 보고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의 관점에서 완전히 벗어나 영적인 관점을 갖게 된 것을 말합니다. 그는 고후 5:17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선언하며 완전히 새롭게 된 존재의 변화를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알고 난 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모두를 위한 복음이라고 증거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 죄 가운데 있을 때에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마치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집을 떠나 탕진하고 실패하고 돌아온 자식을 맨발로 반기고 잔치를 베풀었던 탕자의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품어 주셨습니다. 죄인인 우리에게 자식의 권리를 회복시켜 주셨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가 가리어졌고 죄를 향한 하나님의 화도 풀리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홍 같이 붉은 우리의 죄를 눈같이 희게 했으며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옮겨버리고 다시는 기억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롬 5:10-11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사 12:1-2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구원받은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이요 힘이며 노래임을 고백합니다.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다시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롬 8:30-31 “하나님은 예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고 인정하시고 의롭다고 인정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라면 누가 감히 우리를 대항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확신에 찬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우선하며 하나님의 기쁨이 되려고 합니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후 5:15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자들이 이제부터는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있는 우리들이 다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고 나니 하나님과의 관계나 사람과의 관계에서 적극성을 띄게 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신을 사로잡고 휘어잡고 강권한다고 말했습니다. 마치 그리스도에게 미친 사람처럼 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