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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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9/18

바른 선택과 결단 (수 24:14-16)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12지파에게 땅을 분배했고 각 지파는 최선을 다해 그 지역을 싸워 취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약속한 땅이지만 전쟁을 취루고 차지해야 했습니다. 오늘은 여호수아가 죽기 전에 장로들과 족장들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불러서 마지막 유언을 하는 내용입니다.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너 광야를 지나고 가나안에 정착하기까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하나씩 열거하며 우상숭배에서 벗어나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진실하고 성실하게 섬기십시오. 여러분은 조상들이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섬기던 신들을 버리고 오직 여호와만 섬겨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여호와를 섬기고 싶지 않으면, 여러분의 조상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섬기던 신이든 현재 여러분이 사는 땅의 아모리 사람이 섬기던 신이든 여러분이 섬길 신을 오늘 택하십시오. 나와 내 가족은 여호와를 섬기겠습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우리 조상들을 구출해 내시고 우리가 보는 가운데서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며 우리가 광야를 지나 여러 나라를 거쳐 오는 동안 우리를 지키시고 모든 대적의 손에서 우리를 보호하신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십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이 땅에 살던 아모리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이방 민족들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겠습니다. 그분이야말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은 여호와를 섬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분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다른 신을 용납하지 않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여러분의 반역 행위와 죄를 결코 용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을 섬기면 지금까지 오랫동안 여러분을 보살펴 주신 분이라고 해도 태도를 바꾸어 여러분을 쳐서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꼭 섬기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이 일에 대한 증인은 바로 여러분 자신들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가 증인입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우상을 모조리 부숴 버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여러분의 충성을 다짐하십시오.’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그분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겠습니다.’

여호수아는 그 날 세겜에서 백성들과 이런 계약을 맺고 지켜야 할 법과 규정을 그들에게 일러 주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약속을 더 분명하게 하려고 돌비를 세웠습니다.
=’보십시오! 이 돌은 우리의 증인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이 돌이 다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면 이 돌이 여러분에게 증거가 될 것입니다.’

세겜은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와서 이 땅을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처음 단을 쌓았던 곳입니다(창 12:5-7). 또 야곱이 외삼촌 집에서 돌아와 이곳에 땅을 사서 장막을 치고 하나님께 단을 쌓은 곳입니다(창 33:18-20). 그리고 세겜은 요셉의 뼈가 묻힌 땅이기도 합니다(창 48:21-22). 이런 역사적 의미기 있는 세겜에서 하나님 앞에 예배했던 선조들의 마음을 확인하면서 자기들도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언약을 새롭게 한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참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결단한 그들이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 우리가 살피고 싶은 부분입니다. 16년간의 정복전쟁을 치루고 정착한 가나안에서의 생활은 어느새 우상숭배로 얼룩졌고 이방사람들이 섬기던 신과 애굽에서 섬기던 옛 신을 다시 섬기고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환경의 지배를 받았고 하나님을 버릴 수도 없고 우상을 섬기지 않을 수도 없는 어정쩡한 상태였습니다. 이것은 그 이후의 사사시대뿐 아니라 왕국시대에도 계속되었고 하나님의 채찍을 피하지 못하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시정조치를 받으면 회개했다가도 또 다시 반복하여 나타났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러 번 다시 다짐하고 물으며 하나님께만 마음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한 이유가 여기 있었습니다. 후대에 엘리야도 바알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거리던 이스라엘에게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좇으라고 결단을 촉구하던 것을 보면 인간의 연약함이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엡 5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이었으나, 지금은 주님 안에서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사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와 진실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살피십시오. 지혜롭지 못한 사람처럼 살지 말고, 지혜로운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세월을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으십시오.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방탕이 따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여러분의 가슴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하십시오.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예수님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하시며 생명의 떡이신 자신을 먹는 일과 그 안에서 영생을 누리는 일을 설명했지만 사람들은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것 때문에 많은 사람이 예수님 곁을 떠나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였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고 묻는 질문에 베드로는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라고 바른 대답을 했습니다.

믿음은 선택이고 결단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그를 최고의 가치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주님을 비교하다가 더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만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선택을 지키기 위해 두 마음을 갖게 하는 세상과 싸우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물고기가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날마다 그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으면 그것이 우리 몸과 하나가 되어 힘이 되는 것처럼 예수님과 영으로 한 몸이 되어 그의 생각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주님이 기뻐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때마다 분별하고 결단하고 순종합니다. 선과 의와 진실을 행하게 하는 성령께 순종합니다. 우리의 나약함을 도와주시는 성령님을 앞세우고 따라갑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을 사용하여 우리 시대에 또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감사함으로 받읍시다. 세상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때마다 점검하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고 결단합시다. 일상의 생활로 드리는 예배로 그것을 살아냅시다. 주께서 우리를 마음껏 사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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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2/18
신실하신 하나님 (왕상 19:9-19)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의 영적 대결에서 승리한 엘리야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우상숭배의 선봉이던 왕비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장담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이세벨을 피하여 도망치다가 한 나무 아래에서 하나님께 하소연했습니다. 이만하면 되었으니 차라리 목숨을 거두어 주시라고 한탄하며 깊은 원망을 쏟아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살았는데 도망자의 신세가 되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에게도 보통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약한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신실하신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고 엘리야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구운 떡과 물을 먹게 하고 그를 어루만져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호렙 산으로 인도하여 그를 만나주시고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상에게 절하지 않은 칠천의 믿음의 동지들을 붙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사엘을 아람 왕으로, 예후를 이스라엘 왕으로, 엘리사를 새로운 선지자로 세우게 했습니다. 역사를 운영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선생님을 잃어버리고는 낙심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흩어져 버렸습니다. 주님 없는 그곳에는 더 이상 소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물고기나 잡으러 가야겠다고 자리를 뜨자 몇몇 제자들이 따라갔습니다. 상한 마음으로 그물을 던졌지만 소득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낙심한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평강을 묻습니다.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라 하여 많은 고기를 잡게 합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바로 알아차렸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준비한 음식을 먹이며 영과 육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시고 모든 족속으로 제자 삼으라는 사명을 새롭게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새롭게 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대나 생각보다 훨씬 크신 하나님입니다. 유리가 기대하는 방법보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스스로 일하십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일의 성과나 열매보다 하나님 안에서의 삶을 더 요구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신실하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롬 11: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우리의 모습이 어떠하든 용납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만들어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입니다.

엘리야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특별한 열심이 있었지만 인간의 연약함도 있었습니다. 우상 숭배하는 이스라엘을 보고 거룩한 분노가 일어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와 싸워 이겼습니다. 불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며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그런데도 혼자 남았다는 생각 때문에 무서워했고 그 문제에 사로잡혀 역사를 진행하는 하나님의 손을 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혼자 다 할 수 있을 것처럼 일에 몰두하다가 탈진해버렸습니다. 문제에 사로잡히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기 어렵습니다. 하나님도 내 생각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기 쉽습니다. 굴에 숨어있는 엘리야를 만나는 하나님을 보십시오.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고 지진이 일어났지만 하나님께서는 거기 계시지 않았습니다. 지진 후에 불이 있었지만 불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했습니다. 엘리야가 사역하던 방법인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의 방법이 아니라 기대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방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방법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엡 4장에서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옛 사람은 자기 생각을 우선하지만 새 사람은 성령을 우선합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않으려고 자기를 포기하고 내려놓습니다. 신령한 음식과 음료인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그 안에서 힘을 얻습니다. 이런 사람은 요 6:35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의와 거룩함을 형제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일상의 삶에서 살아냅니다.

하나님은 때로 엘리야의 경험과 같은 영적승리를 맛보게 합니다. 말씀이 믿어지고 기도가 응답되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기쁨을 알게 합니다. 그런가하면 때로는 깊은 절망감을 맛보게도 합니다. 잘되던 일이 막히고 철저하게 깨지는 경험을 하게 합니다. 자신의 무능과 한계를 인정하게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산다는 것을 배우게 합니다. 어느 경우에도 하나님은 신실하게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니 문제에서 눈을 돌려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의 일하심을 기대하십시오. 거친 바람에서도 더 높이 날아오를 수 있고 폭풍 속에서도 오히려 잠잠하게 주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까? 엘리야처럼 우선 마음껏 먹고 자고 쉬며 주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십시오. 그리고 힘을 차려 그에게 귀 기울여보십시오. 모든 일이 잘 풀리고 평안하십니까? 그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겸손하게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계획을 물어 보십시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인지를 말입니다. 영이 잘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러면 범사가 형통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필요를 덤으로 채워주십니다. 이것이 우리를 사랑하는 신실한 하나님이 일하는 방법입니다.

전교인수련회를 준비합니다. 일상의 분주함을 떠나 말씀묵상과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를 통하여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며 마땅히 있어야 할 그곳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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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18
더 가치 있는 생활 (요 6:22-40)

저는 자라면서 돈을 버는 일이나 성공보다는 인격수양이나 선한 일이 더 중요하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우리 막내는 초등학교 때부터 빈 콜라 캔을 모으고 만화 캐릭터를 그려서 친구들에게 파는 경제관념이 있어서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또 커서는 부모의 권유로 주식에 투자하여 고등학교 졸업 전에 큰돈을 모았다는 유대인 친구 이야기도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경제관을 심어주는 유대인들이 우리와는 많이 다르다는 것도 아들을 통하여 배웠습니다. 돈이 참 중요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어디에 사용하는가는 더 중요한 일입니다. 돈의 사용처를 보면 어디에 가치를 두고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에서 메추라기 고기와 만나를 먹고 살았습니다. 그들을 제사장 나라로 세워서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을 알리려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고 먹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름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어린아이의 도시락 하나로 장정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병 고침이나 배고픔을 해결하는 현실적인 문제해결에 만족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에도 열심히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했습니다. 그런 능력자가 왕이 되면 먹고 사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달랐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질책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적을 베풀었는데 사람들은 당장 먹고 사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나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에 대한 소식을 들은 사마리아 여인이 그런 물을 자기에게도 주어 물 길러 오는 수고를 덜게 해달라고 했던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하늘로부터 온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샘물이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알아보지 못했고 자기 문제에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자기 급한 문제를 해결만을 기대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더 근본적인 하나님 나라의 회복에 있었습니다. 죄로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려는 관심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으면 현실문제의 해결뿐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까지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죽었습니다. 죄를 벌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요 6장에서 여러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인 예수님을 먹으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고 하셨습니다. 51절에서도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말씀하며 대속의 죽음을 언급했습니다. 새번역에서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빵을 먹는 것은 우리의 전 존재를 통하여 예수님을 주인으로 믿고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함께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께 새롭게 접붙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며 주님과 하나 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성취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하늘로부터 내려온 빵입니다.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빛입니다.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입니다. 자신의 몸을 내주어 우리로 살게 하신 주님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며 길과 진리입니다. 우리로 선한 열매를 맺게 하는 포도나무 원줄기입니다.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뜻은 그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이고 하나도 빠짐없이 마지막 날에 다시 살게 하는 것입니다.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우리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지금까지 달려왔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예수 생명의 씨가 있는 지를 다시 점검하고 싶습니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우선하여 살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소망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 정체성이 분명한지 또 부름에 합당한 삶을 바로 살고 있는지 말입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은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려고 여기저기를 찾다가 배타고 건너편까지 찾아가는 열심있던 사람들을 생각해 봅니다. 그들에게서 우리의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부름도 받았고 은혜도 맛보았고 열심도 있었지만 진정한 생명의 가치를 누리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더 가치 있는 것을 놓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의 목적보다는 자기 문제 해결을 위해 열심을 냈기 때문입니다. 신앙고백도 하고 열심도 있었는데 하나님과 함께 하는 능력을 삶에서 누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참 가치를 우선해야 하는 중요성을 깨우쳐주는 예입니다.

처음 교회의 사도들과 신자들의 변화를 보십시오. 성령 충만 이후에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 앞에서 두려워하던 약한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더 이상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살지 않고 예수의 증인으로 살았습니다. 생전에 가르쳐 주신 말씀을 기억하고 지켰습니다. 모일 때마다 떡과 잔을 나눠 먹으며 주님의 죽음의 의미와 부활의 가치를 되새겼습니다. 예수님이 남겨두신 복음 전하는 일을 자기들의 일로 알고 순종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처럼 생각하고 그리스도처럼 행동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일을 내 일로 알고 순종합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그리스도를 만나도록 향기를 발하는 사람들입니다.

요일 5:12-13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엡 4:21-24 “여러분이 예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 관해서 듣고, 또 그분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면,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그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보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하시고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고 했습니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하면 우리의 필요는 하나님께서 보장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영생이 우리 안에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니 예수 생명의 씨 때문에 예수 열매를 맺는 것은 당연합니다. 더 가치 있는 그것, 생명의 빵을 날마다 먹기를 노력합시다. 새사람이 된 기쁨을 누리며 삽시다. 성령으로 임재하고 일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매 순간을 승리의 노래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지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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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9/18
날마다 주시는 새 은혜 (창 9:8-17, 막 6:45-56)

하나님께서 홍수 심판 이후에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무지개로 약속해 주셨습니다. 무지개 약속은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베풀어주신 은혜입니다. 창 9:9-10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보통 약속은 쌍방 간의 합의로 진행되는 것인데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약속을 맺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여러 번 ‘내가’ 라고 말하며 하나님은 자신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무지개를 볼 때마다 인간의 죄에 대한 심판과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을 생각해야 합니다.

홍수 심판은 죄를 미워하는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기 위한 단호한 조치였습니다. 그러기에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무지개 약속이 죄를 무조건 용서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의 죄를 불로 심판했고 말세에도 불로 심판하겠다고 말씀했습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심판을 믿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심판도 믿지 않고 하나님도 거부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심판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이런 심판 아래에 있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 죄의 값을 지불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구원이며 일방적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복음서는 한밤중에 풍랑을 만나 고생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본 제자들은 그를 유령으로 생각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이 배에 오르자 바람도 그치고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제자들은 풍랑보다 예수님의 신적 능력 때문에 더 많이 놀랐습니다. 그들은 이미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을 경험했음에도 그들의 마음이 둔해져서 분별력이 없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창조주이심을 다시 경험하고는 그 신적 권능 앞에서 두려워 떨었습니다.

한 번의 신앙고백으로 완전해 지지 않습니다. 한 번의 각오와 헌신으로 신앙인격이 바뀌지 않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주시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하나님이 먼저 주시는 은혜도 필요하지만 은혜를 경험한 자가 자신의 마음이 둔해지지 않도록 관리해야 하는 책임도 있습니다. 롬 4:18에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른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은 몇 번의 각오로 되지 않습니다. 말씀묵상과 기도생활과 모이기를 힘쓰는 훈련이 그래서 필요합니다. 자기에 대하여는 십자가 안에서 죽은 자로 여기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아있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우리들이기에 쉽게 믿음이 식고 마음이 둔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은혜가운데 살기를 노력해야만 합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 받는 특별한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종이 되었던 우리들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희생시켜 그 피로 죄에서 해방 되게 했습니다. 더 이상 책망 받을 것이 없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했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들을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다듬고 빚어서 하나님을 닮아가도록 훈련하십니다. 죄 용서뿐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거하고 함께 일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바울은 성령께서 교우들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해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교인들의 마음속에 항상 머물러 계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일하심에 자신을 내놓고 순종할 때에 가능한 은혜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약함을 아시고 도와주십니다. 이천년 전의 십자가 사건을 오늘 나에게 적용시켜 구원의 감격을 맛보게 합니다. 우리 속사람을 강하게 하여 믿음으로 살게 합니다. 영적 해방과 평강을 누리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합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감히 담대하게 나가서 그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하게 합니다. 영적인 승리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도록 형통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을 자랑할 수 있도록 우리 안에서 일하십니다.

이런 사람은 삶의 목적이 분명해집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을 오히려 기뻐합니다.
롬 6:13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겨서 불의의 연장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답게 여러분을 하나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연장으로 하나님께 바치십시오.”

이런 사람은 문제를 만날 때마다 주님께 나가 오히려 찬양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시 28:7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벧전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독수리는 자기 날개 짓으로 날려고 하지 않고 기류에 올라타기 위해 날개를 폅니다. 그리고 바람에 몸을 내맡겨 높이 올라갑니다. 은혜 안에 거하는 사람은 자신의 의로운 행위나 남다른 희생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성령님과 함께 살며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이 나의 힘과 방패가 된다고 찬양하고 기뻐하며 자랑합니다. 이런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날마다 새롭게 주어지기를 바랍니다.


MOVE TO TOP7/22/18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3-11) 동아시아 이선생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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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5/18
하나님의 일 (엡 1:3-6) 단기선교 파송예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생명을 얻은 구원의 기쁨을 누리며 삽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들기 이전부터 우리를 자녀 삼기로 작정하고 선택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의 짐을 지고 대신 죽어 주심으로 믿는 자마다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했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린 그의 피가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책망 받을 것이 없는 사람이 되게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이유는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그에게 예를 갖추어 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사람들을 불러 함께 일하십니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불러 복을 주시고 땅의 모든 민족들이 그를 통하여 복을 받게 했습니다. 뽕 나무 기르던 보통 사람 아모스를 불러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심판의 계획을 말하게 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미움을 받고 협박을 받았지만 아모스는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했습니다. 요나는 불순종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결국은 순종하게 하여 니느웨 백성들을 구원해 냈습니다.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백성들에게 알게 하기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그 부름에 순종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세례요한도 불편한 광야에서 지내며 회개를 외쳤습니다. 그리고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소개했습니다. 헤롯의 죄를 지적한 일로 옥살이하다가 죽었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늘 영광을 버리고 세상에 와서 천국복음을 전했으며 자신의 몸을 희생 제물로 내주어 죄인들을 살려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성령의 지시에 순종하여 최고 지도자인 바나바와 사울을 이방지역 선교를 위해서 내주었습니다. 금식하며 기도하다가 성령의 지시를 들었고 교회는 그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 부름에 순종하여 단기선교 팀을 낯선 지역에 파송합니다.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자기의 편안함과 권리를 포기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고생을 선택하는 것이며 손해 보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이루어지고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일을 경험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극적인 경험할 함께 하게 됩니다. 우리의 기도가 눈앞에서 응답되는 감격도 맛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비밀스런 것을 맛본 구원받은 사람은 그 즐거움을 혼자만 간직할 수 없습니다. 함께 나누어지는 생활간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또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십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어찌 그 이름을 먼저 부를 수 있겠습니까? 또 들어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는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보냄을 받지 않았는데 어떻게 가서 전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우리교회가 단기선교 팀을 볼티모어에 보내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누군가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 우리들의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우리의 힘과 자원이 충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연약하고 준비도 미진하지만 하나님이 원하는 일이니 우리가 그 부름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존 파이퍼 목사는 “선교는 예배가 없는 곳에 예배가 있게 하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선교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앙인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예배의 감격과 기쁨을 소개하는 것이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교는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신 이유가 될 것입니다.

오늘 파송예배를 드리며 팀원들과 교회에게 몇 가지의 기도제목을 드립니다.

1. 지금도 쉬지 않고 구원의 일을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먼저 불러 복을 주신 이유는 그가 준비되었거나 위대해서가 아니라 땅의 모든 민족이 그를 통하여 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 불러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여 여기까지 오게 하신 하나님이 이제 또 누군가를 구원하려고 우리를 보내십니다. 그러니 사역을 위한 프로그램보다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는지를 기다리고 기대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깨어서 순간순간 기도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십시오. 기도하다가 생각나는 감동이 있으면 따지고 계산하지 말고 순종하십시오. 선교기간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시간입니다. 누구를 섬기라고 나를 보냈는지를 묻고 찾아보십시오. 우리들의 좁은 생각과 다른 사람에 대한 무관심에서 벗어나서 여러분을 통하여 복을 받게 될 그 한 사람을 찾아보십시오. 하나님의 손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를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2. 모든 일에 감사하고 찬양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 모든 형편에 감사하십시오. 집을 떠나는 순간부터 불편하고 짜증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해보지 않은 일과 책임이 버거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믿고 감사하십시오. 불평과 싸움은 교회를 나누어지게 하고 힘이 빠지게 하는 마귀의 작전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서로 비난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감사하십시오. 리더에게 순종하며 팀원끼리 서로 섬기고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볼티모어의 형제들을 대하십시오. 우리가 잘 배우고 많이 가졌기 때문에 돕고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조금 일찍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서로를 수용하고 인정하고 존중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일하십니다.

3. 교회는 비상을 걸고 기도합시다.
선교 팀은 소풍가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대표하여 영적 사역을 하러 갑니다. 그곳은 마귀가 전쟁준비를 하고 기다리는 곳입니다. 마귀는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잃지 않으려고 우리를 방해할 것이고 우리를 실망하게 하려고 어려움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손이 함께 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팀원들은 볼티모어에서 몸으로 일하고 교회는 여기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기도로 함께 사역하는 것입니다. 살아있고 생명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구원받는 사람들이 생기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순종하면 주님이 구원할 자를 살리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는 일입니다.

사 41: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의 하나님이니, 떨지 말아라. 내가 너를 강하게 하겠다. 내가 너를 도와주고, 내 승리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주겠다.”

마 28: 18-20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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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18
공동체를 살리는 두 가지 영성 (고전 14:1-3) 교회창립기념주일 전석훈 목사

고전 14:1-3
1.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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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18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 (고전 1:1-9)

7월은 교회를 생각하는 달입니다. 맥추감사주일과 창립기념주일로 지키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단기선교 팀을 파송하여 사역하는 동안 온 교회가 함께 기도로 협력하게 될 것이고 넷째 주일에는 이영기 선교사님이 오셔서 선교지 소식도 들려주실 것입니다. 요즘은 교회들이 이전처럼 외형적인 부흥을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위축되거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가 얼마인지를 알고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면 주께서 칭찬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나 영적인 은사가 많았던 고린도 교회도 완벽하지 못했습니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로 나뉘어 교회의 정체성이 흐려지고 힘도 잃었습니다. 심지어 교회 밖에서 일어나는 음행을 암묵적으로 수용했습니다. 또 교회 문제를 교회 안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사회 법정으로 가져가기도 했습니다. 거기에 바울의 리더쉽을 인정하지 않고 이단의 잘못된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생겼습니다. 영적인 은사를 바로 사용하지 못하고 자랑하다가 서로를 다치게 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라고 불렸습니다. 교회의 머리와 주인은 주님이며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고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2-3절의 인사말을 주목해 봅시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라고 인사했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사람들이 운영하는 모임으로 보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도적인 개입과 일하심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입니다. 그렇다고 교회 구성원 모두가 도덕적으로 완전해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세상과 속된 것으로부터 따로 떼어 구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를 때에 하나님의 자녀로 구별된 것입니다. 죄와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분리된 하나님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교회를 말하는 에클레시아도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구성원된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자답게 하나님을 우선하여 사는 것입니다.

빌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였습니다. 구원의 효력이 날마다 지속되도록 관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변화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를 자기 인생의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성도들의 영적 진보를 생각해 보십시오. 삶의 방향과 목적이 달라졌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기에 교회를 예수님의 신부요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합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죄가 깨끗해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아직 완전하지 못하지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중에 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는 주님을 닮아가며 거룩을 삶을 살아내는 중에 있는 것입니다.

롬 8:8-9 “육신에 매인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여러분은 육신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습니다.”

고전 1:8-9 “그분은 재림하시는 날에 여러분이 흠 없는 자가 되도록 끝까지 지켜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을 불러 그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완전한 존재로 만들어져 갑니다. 성도의 거룩은 성령께서 먼저 은혜를 주심으로 가능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거주하며 재림하시는 날에 흠 없는 자가 되도록 끝까지 지켜 주실 것입니다. 죄에서 벗어난 신자는 자기 판단이 아닌 앞서 인도하시는 성령을 따라 절제하고 훈련하며 거룩을 배워갑니다. 때로는 징계를 받더라도 회개하면서 순종을 배웁니다.

예레미야 애가 3:19-23 “내가 당하는 쓰라린 고통과 역경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내가 이것을 생각하면 낙심도 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오히려 희망이 있다. 여호와의 크신 사랑 때문에 우리가 소멸되지 않았으니 그의 자비가 영원하구나.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는 정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지속적인 영적훈련과 성령님을 모시고 순종하는 관계 안에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고전 1:1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이라고 말하며 자신이 예수님의 사도로 부름 받았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비록 그에게 여러 가지 부족한 점들이 있었지만 사도로 부름 받은 정체성에는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주께서 먼저 우리를 선택하고 불러 구원해 주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엡 1:4-5 “하나님은 세상 창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예정하신 것입니다.” 이 계획에 따라 예수 믿고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이 은혜에 감사하며 새로운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맥추감사도 그런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 될 것입니다.

이런 신앙 여정에 동반자가 되어주신 여러분을 환영하고 격려합니다. 어려움이 있어도 상 주실 주님을 바라보고 끝까지 함께 갑시다. 우리교회 안에는 영적 성장과 성품훈련을 위해서 몸부림하는 연약한 식구들도 있습니다. 서로를 인정하고 손잡아 주며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어져가는 건강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로 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엡 2:20-22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집이며 그리스도 예수님은 친히 그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머릿돌이 되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 점점 거룩한 성전이 되어가고 여러분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계실 집이 되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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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4/18
믿음으로 사는 사람 (막 4:35-41)

지난주일 야외예배는 모든 성도들이 한자리에서 시간을 보내며 하나님이 만든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먹고 마음껏 대화하고 바람과 그늘을 즐겼습니다. 물놀이도하고 땀 흘리며 운동도 했습니다. 깊이 묵상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서로 다른 시간을 보냈지만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품에서 느끼는 자유와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저는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예배당 안에서나 밖에서 동일하게 느낄 수 있는 영적감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곳이든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영적 축복입니다.

어제 정치인 김종필 씨가 별세했습니다. 1926년생으로 92년을 살며 40년 넘는 시간을 정치에 몸담았던 사람입니다.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했고 5.16 군사 구테타 이후 중앙정보부장을 지냈습니다. 아홉 차례나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박정희 김대중 때는 국무총리로 일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정치인생을 돌아보며 정치는 헛된 일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권력의 핵심에 있었지만 정작 자신은 2인자의 자리를 지켜야 하는 아쉬움이 있었겠지요. 그러나 만일 자신이 최선을 다했고 자신의 역할을 했다는 보람을 느꼈다면 그렇게 평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실패한 사람이며 헛된 꿈을 좇은 사람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고난을 참아내며 의인으로 불리며 하나님께 인정받았던 욥이 또 한순간 고민하며 갈등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그의 주변에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믿음을 버리라고 말하는 믿음 없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욥기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고난의 이유에 대해서 시원한 대답을 주시기보다는 누가 세상을 만드셨으며 어떻게 운행하는지를 질문하며 답하게 하십니다. 욥 40:2 ”전능한 하나님과 다투는 욥아, 네가 나를 꾸짖을 셈이냐? 네가 나를 비난하니 어디 나에게 대답해 보아라.“ 욥기서의 마지막 부분까지도 하나님과 다투고 하나님을 꾸짖고 비난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의 고민이 상당히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일상을 살며 믿음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고 갈등하는 우리의 모습과도 비슷합니다. 욥이 ”저는 비천한 사람입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주님께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손으로 입을 막을 뿐입니다. 이미 말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더 할 말이 없습니다.“ 라고 그럴듯한 대답을 했지만 하나님의 질문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결국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앞에 겸손하게 엎디며 순응하기를 기대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1.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을 우선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대에 우리가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분이며 우리는 그의 소유임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믿음은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우리가 부름 받았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우선순위가 분명해야 믿음의 가치를 인정받습니다. 풍랑이 일고 배가 기우는 시간에 예수님은 배에서 주무셨고 제자들은 살려달라고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잠에서 깬 예수님은 바람을 명하여 잔잔하게 합니다. 그리고는 믿음이 없다고 제자들을 혼냅니다.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어려움 가운데서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도 분명 믿음의 행위인데 왜 믿음이 없다고 하신 것일까요? 예수님이 말씀하는 믿음은 도대체 어떤 믿음일까요?

팀 켈러 목사는 요나서와 비교하면서 이 부분을 설명했습니다. 복음서의 말씀이 요나서와 거의 동일한 단어와 문구를 사용하여 세상을 구원하는 예수님을 설명했다는 것입니다. 요나와 예수님이 모두 배 안에 있었습니다. 배에 함께 탄 사람들은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잠자는 선지자를 깨웠습니다. 폭풍이 잠잠해졌습니다. 배에 탄 사람들은 무사했습니다. 요나는 바다에 던져져 사람들을 살렸고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내줌으로 사람들을 살렸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문제가 해결되고 폭풍이 잠잠해 진후에 이전보다 더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폭풍까지라도 다스리는 전능하신 주님의 힘과 권능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경외감이고 이것이 믿음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요나보다 크신 분이며 폭풍보다 크신 분이고 세상을 구원하는 전능하신 주님이라는 것을 믿어야 했습니다. 크신 주님을 믿고 신뢰했다면 풍랑이나 죽음 앞에서 그리 요란을 떨지 않았을 것입니다.

욥기서의 마지막장인 42:1-6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된 욥은 비로소 바른 대답을 합니다.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주님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귀로만 듣고 알던 지식적인 믿음에서 눈이 열려 보고 경험적으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자기의 의를 주장할 수도 없었고 질문할 것도 없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피조물로서의 한계를 인정하고 창조주의 뜻을 최우선에 놓습니다. 그 앞에 언제나 겸손하게 엎드릴 줄 압니다.

2.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며 인내합니다.
욥 30:20 “내가 주께 부르짖으나 주께서 대답하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다.” 이런 답답함 가운데 있던 그에게 드디어 하나님이 말씀했습니다. 욥 38:1 “그 때에 주님께서 욥에게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서 대답하셨다.” ‘그때’는 우리가 원하는 시간이 아니라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정한 시간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 46)라고 크게 부르짖는 고통의 순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듣고 있었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가 되니 하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워 살리셨고 만유의 주가 되게 했습니다. 약 5:7-8 “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하나님을 인정하는 절대 믿음을 가지면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의 이유를 묻지 않습니다. 고난 중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시 40:1-2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합 3:17-19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실패할 때나 성공할 때, 가난할 때나 부할 때에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절대 주권자로 인정합니다. 주께서 선하고 신실하게 일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항상 주님과 함께 하며 그 안에서 기뻐하고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며 인내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이렇게 노래할 수 있습니다. (찬송가 419장)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밤 깊고 비바람 불어쳐도
아버지께서 날 지켜 주시니 거기서 편안히 쉬리로다.
주 날개 밑 나의 피난처 되니 거기서 쉬기를 원하노라.
세상이 나를 위로치 못하나 거기서 평화를 누리리라.
주 날개 밑 참된 기쁨이 있네. 고달픈 세상 길 가는 동안
나 거기 숨어 돌보심을 받고 영원한 안식을 얻으리라.

주 날개 밑 평안하다 그 사랑 끊을 자 뉘뇨
주 날개 밑 내 쉬는 영혼 영원히 거기서 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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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7/18
믿음의 성장 (막 4:26-34)

농사에는 파종과 성장과 추수의 때가 있습니다. 겨울이 가고 날이 풀리자마자 밭을 갈고 때맞춰 모종을 심었습니다. 미리 모종을 준비해 주신 덕에 여러 가정에서 채소를 먹게 되었고 오늘 밥상에도 올라왔습니다. 알곡 식물도 씨가 움터서 줄기와 잎을 내고 시간이 지나 곡식이 열리면 때를 맞춰서 추수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신비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로 말씀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스스로 자라는 씨에 관하여 그리고 작은 겨자씨가 자라서 크게 역할 하는 비유를 들어 하나님 나라를 가르쳐주었습니다. 농사의 원리야 우리 모두가 아는 것이지만 영적 성장과 연관시켜 두어 가지만 생각해 봅시다.

1. 씨의 생명력입니다.

씨는 크기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씨가 살아있는지가 문제입니다. 생명이 씨에 있기 때문입니다. 농사 전문가는 씨만 보아도 무슨 씨이며 어떤 열매를 맺을 것인지를 구분해 냅니다. 고추씨는 고추나무가 되어 고추를 맺고 전나무 씨는 자라서 우람한 전나무를 만들어 냅니다. 씨 속에 감추어진 생명력 때문입니다. 아무리 작은 씨라도 살아있기만 하면 생명력을 발휘하여 자기 본래의 모습을 나타내고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씨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씨가 살아있는지가 중요한 것처럼 믿음이 얼마나 있는가보다 그 믿음이 말씀에 근거한 살아있는 씨인가 하는 것입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뿌리박고 있는가 말입니다. 예수님은 믿음 없이 행하는 자들에게 작은 겨자 씨 만큼의 믿음이라도 가지라고 책망하시며 비유로 말씀했습니다. 언제 신앙생활을 시작했는지 보다도 지금 그 믿음이 살아 있는 생명의 씨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두고 있는지를 때마다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가 행하는 믿음의 봉사와 수고가 주님께 향한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 생명을 가진 살아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대화가운데서 다시 확인하십시오.

2. 씨를 자라게 하는 것은 땅입니다.

농부가 열심히 물을 주고 풀도 뽑고 관리하지만 정작 씨가 언제 어떻게 자라는지는 잘 모릅니다. 씨앗을 움트게 하고 자라게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땅의 역할입니다. 농부가 잠을 자는 사이에도 땅은 씨앗을 자라게 합니다. 고전 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며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말씀의 씨가 사람의 마음에 심겨지면 하나님께서 자라게 합니다. 이 일에 성령께서 주도적으로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다 아시는 성령께서(고전 2:10) 죄로 어두워진 우리의 마음을 열어서 영적인 것에 대한 지식을 갖게 합니다. 성령께서 깨닫고 알게 해주셔야만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고전 2:14, 마 15:14, 행 9:8). 성령께서 영적인 감각이 생기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조정합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게 합니다. 영적 성장을 위한 기도가 그래서 필요합니다.

복음의 씨가 우리의 마음 밭에 심겨지면 그 복음의 씨도 자랍니다. 우리가 노력하여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라게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자라는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책망 받을 일이 없는 거룩한 자녀로 우리를 회복시켜 갑니다.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있는 영적 감각도 주시고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품고 살게 합니다.

씨는 땅에 들어가 죽어야 합니다. 죽으면 땅이 열매를 맺게 합니다. 자기 스스로를 부정하고 주님만 믿고 따르고 순종하면 주님이 우리를 성장시켜 열매를 맺게 합니다. 오늘 우리 자신을 내려놓고 죽는 연습을 해봅시다.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고 나의 편안함보다 옆의 교우가 신나고 즐겁게 섬겨봅시다.

3. 농사의 목적은 추수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일에도 추수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하나님께서 정하는 일입니다. 택한 사람들의 숫자가 다 차면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추수가 시작되는데 이것이 마지막 심판입니다. 알곡과 죽정이가 나뉘고 영원한 상급과 영원한 심판으로 나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약속한 영원한 시간이 펼쳐질 것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이 땅에서의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원한 집으로 이사하게 된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먹고 어떻게 잘 살 것인가에 삶의 목적을 두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처럼 우리들을 다시 살려 함께 살게 하시는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삽니다. 알곡을 거두어 곡간에 들이는 하나님의 추수 일을 함께 거듭니다. 우리를 만들고 우리의 디엔에이까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부름을 품고 삽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알려주시기 위해서 젊음을 불태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욕되게 한다는 신성모독죄를 쓰고 십자가 사형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메시아가 아니라 그저 볼품없는 과격한 청년에 불과했습니다. 볼품없고 작은 겨자씨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개입하시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 모든 사람이 주로 섬기도록 높여주셨습니다. 죄인을 죽이던 십자가마저 죄를 용서 받고 진정한 쉼을 얻게 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복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 일에 함께 할 일군을 찾습니다.

우리의 먹고 사는 일상이 주님이 사용하는 복의 통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야외예배를 드리면서도 나를 통하여 누구를 섬기기 원하는지를 물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천국 창고에 들여보내려고 하는지를 들여다보십시오. 그리고 주의 사랑으로 섬길 대상을 이곳에서 찾아보십시오. 오늘 우리의 교제가 믿음 성장을 위한 현장 실습의 날이 되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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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18
하나님의 사랑(창 3:1-24)

선교지에서 아들을 잃은 친구 선교사가 오랜 시간 슬픔을 안고 살았습니다. ‘차라리 나를 데려가시지, 왜 하필 내 아들인가. 나는 버림 받은 실패자인가’ 수많은 생각과 몸부림으로 기도하던 어느 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가 너의 마음을 안다. 나도 아들을 잃었다. 너를 구원하기 위해 내 아들을 십자가에 내주었다.” 슬픔과 고통이 컸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헌신과 사랑이 더 깊어졌습니다.

요일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롬 8:33-35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감히 고발하겠습니까? 의롭다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누가 감히 그들을 정죄하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는 죽으셨지만 오히려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하여 주십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38-39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고 삽니다. 그것이 귀하기에 잘 지키려는 것입니다.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사단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입니다. 사단은 때마다 우리의 믿음생활을 방해하고 힘들게 하며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악에서 구하여 주시기를 기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시험은 우리가 영적으로 약해서 받기도 하지만 때로는 영으로 충만할 때에도 찾아옵니다. 그래서 항상 깨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은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구원하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1. 인간의 타락 – 거짓말쟁이 사단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에 있던 첫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접근하여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던 믿음을 흔들고 약속의 말씀을 의심하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로 동산의 모든 나무를 먹지 말라고 했느냐는 왜곡된 질문을 던져 의심하게 했습니다. 하와는 실제로 그 실과를 먹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의심이 생기자 기쁨도 신뢰도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먹으면 죽는다고 금지했지만 사단은 그것을 먹어도 죽지 않을 것이고 눈이 밝아져 선악을 알게 되고 오히려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유혹했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습니다. 결국 여자는 그 실과를 따먹고 남편도 먹게 했습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사단의 말에 설득 당했고 하나님의 금지조항을 어기고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금지한 것은 하나님의 영역을 인정하고 피조물로서의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고 하나님처럼 되려는 교만한 마음을 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단이 주는 생각을 따랐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망각했고 하나님이 정한 테두리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고 눈이 밝아져 선을 더 행하게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자신의 벗은 것을 보고 부끄러워 무화과 잎으로 수치를 가렸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얼굴을 볼 수 없어서 숨었습니다. 서로의 잘못을 따지고 핑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가 끊어졌고 그것은 곧 죽음이었습니다.

2. 하나님의 사랑 – 하나님은 그들을 벌하셨습니다. 뱀은 평생 배로 기어 다니며 흙을 먹도록 저주했습니다. 여자는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감당하게 되고 남편을 사모하고 지배를 받게 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게 되는 출산의 복이 이제는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남자는 땀 흘려 노동을 해야만 먹을 수 있게 했습니다. 땅도 엉겅퀴와 가시를 내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에덴의 풍요를 무상으로 누릴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생령이 이제 흙으로 돌아갈 육체가 되었습니다. 에덴에서 쫓겨났고 생명나무에는 접근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였습니다. 범죄한 인간이 영원히 산다면 그것이 저주일터인데 죄의 결과로 죽게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고 부활하여 영생할 수 있도록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조차 구원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단을 이기고 게 된다는 약속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자 사단은 승리한 것처럼 기뻐했지만 하나님은 죽은 예수를 다시 살려냈고 죄와 사망의 권세를 철저하게 깨뜨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만물을 새롭게 하고 통일하려는 목적을 그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창세기 3:15절의 이 약속을 그래서 원 복음이라고 합니다. 또 20절에서 여자의 이름을 하와라 불러 산자의 어미가 되게 했고 그 여자의 후손으로 메시아가 오게 했습니다. 또 21절에서는 벌거벗어 부끄러워하던 아담과 하와를 위해서 짐승을 잡아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무화과 잎 대신 마르지 않는 가죽옷으로 수치를 가리게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선물입니다. 사람의 행위나 노력의 결과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시는 은혜입니다.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 구원을 위해서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생명을 풍성히 누리게 하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죄와 사망의 짐을 벗고 참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행 16:31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3. 나의 선택 – 요일 2:15-16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속에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체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은 모두 하늘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도 사라지고, 이 세상의 욕망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치고 승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금식하고 배고픈 상황에서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유혹에도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또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사람들의 인정과 박수를 받으라고 명예를 가지고 유혹했지만 아들로서의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며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천하만국을 갖는 영광을 주겠다고 유혹할 때도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귀를 물리치는 공격무기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은 십자가에서 이미 판결난 사단과의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성령의 인도에 순종하기만 하면 승리는 우리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여 하늘 복을 누리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기억하고 그 사랑 안에 거하십시오. 사랑을 받은 주의 백성답게 주의 이름으로 서로 사랑하며 필요를 채워주십시오. 주의 말씀이 우리를 지배하게 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며 승리의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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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18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막 2:23-28)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성경이 이해가 되지 않거나 적용 방법을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만 해석하여서는 원래의 의미를 오해하기도 합니다. 특히 구약성경의 내용과 신약의 가르침이 다른 경우에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할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분명 하나님의 뜻은 하나일 것인데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고민이 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안식일이나 유월절과 같은 절기는 구약에서는 대대로 영원히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 말입니다. 분명 안식일은 대대로 영원히 지켜야만 하는 율법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안식일보다 안식 후 첫날, 즉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이 무용지물이 된 것입니까? 구약은 소용없고 신약만 믿으면 되는 것입니까? 어떻게 바른 이해를 할 수 있겠습니까?

1. 모든 성경은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아는 유월절은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 재앙을 면제받았던 절기입니다. 분명 영원한 규례로 지켜야 하는 절기인데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는 더 이상 유월절을 지키지 않습니다.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는 구원을 위한 예표였고 예수님의 피는 인류의 죄를 용서받게 하는 영원한 약속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모든 내용은 예수님과 연관 지어 해석해야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성전예배가 교회예배로 변했고 할례는 세례로 안식일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로 바뀌었지만 그 정신은 변함이 없습니다.

갈 3:23-25 “믿음의 때가 오기 전에는 우리가 죄의 포로가 되어 믿음이 계시될 때까지 갇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가정교사 구실을 하여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믿음의 시대가 왔으므로 이제는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오기 전까지 율법은 가정교사 역할을 하며 죄를 알게 했습니다. 짐승의 희생과 피로 죄를 용서 받았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보혈을 통해 얻는 구원을 예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도 예수님 안에서 해석되어야 하나님의 구원계획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2. 문자적인 해석보다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라.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 제자들이 함께 가면서 밀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트집을 잡았습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짓을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지만 유대인들에게는 큰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잘 지키고 일하지 않기 위하여 무려 39가지의 금지 사항을 갖고 있었습니다. 자유와 쉼을 누려야 할 안식일을 무겁게 했고 안식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오해하게 했습니다.

“1) 바느질 2) 밭가는 일 3) 추수하는 일 4) 곡식 단 묶는 일 5) 타작 6) 곡식을 까부는 일 7) 곡식이나 거두어들인 것들 가운데서 좋은 것과 버릴 것을 고르는 일 8) 곡식 등을 가는 일 9)키질 10) 반죽 11) 빵을 굽는 일 12) 양털 깎는 일 13) 그것을 빠는 일 14) 그것을 치는 일 15) 그것에 물들이는 일 16) 실을 짓는 일 17) 실을 엮는 일 18) 두개의 고리를 만드는 일 19) 두 개의 실을 엮는 일 20) 두 개의 실을 푸는 일 21) 묶는 일 22) 푸는 일 23) 두 조각을 꿰매는 일 24) 두 조각을 꿰매기 위해 찢는 일 25) 사슴을 덫으로 잡는 일 26) 그것을 도살하는 일 27) 사슴의 거죽을 벗기는 일 28) 그것에 소금을 치는 일 29) 그 가죽을 가공하는 일 30) 그것을 반반하게 만드는 일 31) 그것을 자르는 일 32) 두 글자를 쓰는 일 33) 두 글자를 쓰기 위해 두 글자를 지우는 일 34) 건물을 짓는 일 35) 그것을 부수는 일 36) 불을 끄는 일 37) 불을 켜는 일 38) 망치질 39) 물건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 등이 그것입니다(미쉬나, shabbat 7:2).

안식일의 의미는 쉼에 있습니다. 그러나 쉬는 것은 핵심이 아니라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엿새 동안 일하던 사람이 일곱째 날에 주님을 인정하는 믿음으로 쉼과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의 노예가 되었던 이스라엘이 일과 속박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 자유는 하나님이 먹인다는 믿음이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스스로 생존할 수 있다고 여기는 자기 욕심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공급하고 먹인다는 것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만나로 먹여 살린 그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출 31:16-17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라.” 신 5:12-15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네게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모세는 안식일을 단순히 일하지 않는 쉼의 개념에서 더나가서 출애굽의 구원의 목적을 생각하고 거기에 합당한 삶을 제언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말한 안식일의 쉼이 신명기에서는 구원사역에 동참하는 노동으로 재해석 되었습니다. 바울은 몸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를 강조했습니다.

진정한 쉼은 일의 쉼이 아니라 주님 안에 거하며 그 구원을 다른 사람에게 알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안식일에 베데스다에서 38년간 병으로 고생하던 사람을 치료했습니다. 유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안식일을 어긴 것이지만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며 안식일에도 당연히 할 일을 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성전에 진설된 떡은 제사장이 먹는 음식이었지만 사울에게 쫓겨 배가 고팠던 다윗과 그 일행에게 먹인 제사장의 예를 들었습니다. 정신을 고려하지 않고 문자적인 형식에만 메이면 바리새인처럼 잘못될 수 있습니다.

3 주일을 거룩하게 구별시켜라.

오늘 우리는 안식일이 아닌 주일을 지킵니다. 그러나 그 정신은 동일합니다.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것은 주님의 부활을 인정하는 것이며 재림하실 주님을 기다리는 믿음의 표시입니다. 주중에 하던 일을 쉰다고 주일을 잘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밀린 일을 하고 쇼핑도 하고 한 주간 먹을 음식도 만들고 숙제도 하고 개인적인 용무를 보기도 합니다. 예배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돌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안식일의 목적과는 거리가 먼 나를 위한 생활이며 주님 안에서 자유와 생명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은 나의 필요보다 주님의 요구를 우선하는 구별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주인 역할 하는 세속적인 생각이나 일에서 떠나 내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스스로 다짐하며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우선 구원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준비된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야 합니다. 출애굽의 목적이나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예배를 통하여 함께 거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선택할 때에 함께 거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신 이유도 우리와 함께 생각하고 함께 일하기 위해서입니다. 수동적인 예배참석으로는 영적 성장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적극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관계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고 돌보는 섬김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구원의 기쁨을 전하고 가르치는 전도와 심방과 양육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병든 자, 귀신 들린 자, 묶인 자, 고통당하는 자들을 회복시키던 예수님의 일을 오늘 우리가 대신하는 것입니다. 주일은 우리의 일을 쉬고 주님을 위해서 일하는 날입니다.

성령 강림을 경험한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목숨을 걸고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변증했습니다. 날마다 모여 떡을 떼며 교제했습니다. 뜨겁게 기도하고 열심히 말씀을 배우고 실천했습니다. 그들의 변화와 뜨거운 사랑이 소문을 탔습니다. 구원 받는 자의 수가 날마다 증가했습니다. 교회는 부흥했고 하나님의 뜻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우리 교회도 기관별로 구역별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주님을 대신하여 서로를 섬기며 일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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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 안식일법의 39가지 범주들/ Jewish 39 Melachot/ 편역 조동호 목사
출저: http://www.torahtots.com/shabbat/shabbat1.htm#39melachot

A. 총론 – 멜라카(Melacha)를 구성하는 것들

1. 멜라카(Melacha)

멜라카(Melacha)는 안식일에 금지된 활동의 39개 범주를 말한다. 멜라카는 “일”이 아니다. 적어도 사전적 의미의 “일”은 아니다. 안식일에 바늘을 들고 거리로 나갈 수는 없지만, 방 안에서 무거운 소파를 끌어 옮길 수는 있다. 그렇다면 무슨 멜라카가 안식일에 금지되는가? 안식일에 금지된 활동의 39개 범주는 공통적으로 무엇인가를 하는 모든 노동들이다. 그것들은 곧 자기 환경을 통제하는 창조활동들이다. 특히 탈무드는 토라(율법)가 출애굽기에서 미쉬칸(Mishkan, 성막)을 짓는 방법에 관한 상세한 지시들과 출애굽기와 특히 31-35장에 기술된 대로 그것의 구성요소들의 준비와 함께 안식일에 일을 하지 말라는 계명을 관련시켜서 이들 39개의 범주들을 이끌어낸다. 성막을 만드는 39개의 과정에 연관된 일들이 우리가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멜라카 곧 창조활동이라고 탈무드(Shabbat 49b)는 설명한다. 그러니까 성막 만드는 39개의 창조행위가 안식일에 금지된 일을 대표하는 범주라는 것이다. 이들 범주들을 토라에서는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로 금하고 있다는 것이다.

2. 톨톳(Toldot)

미쉬칸에서 행해진 것과 다른 일이지만 동일한 결과에 도달한 일을 말한다. 이들 형태의 멜라카 역시 토라에서 금하고 있다.

3. 랍비들의 법령

이것들은 랍비들이 금한 많은 수의 추가 활동들을 말한다. 몇 개의 금지법령의 범주들이 있다.

1)토라의 금령을 위반하게 할 소지가 있는 활동들.
2)안식일 사용(muktzah)을 위해서 지정되지 아니한 것들의 사용.
3)금지된 활동이 허용된다고 생각하게 할 만한 활동들.
4)기술적으로는 허용되는 것일지라도 안식일에 적절치 못한 활동들. 선지자 이사야(58:13-14)는 사사로이 말하는 것과 주중에 하던 활동을 금하라고 기록하였다.

4. 멜라코트의 구성

39개의 멜라코트는 다음과 같이 여섯 개의 그룹으로 나눠진다.

1)그룹 1 = 1-11번. 들일에 관련된다.
2)그룹 2 = 12-24번 소재 커튼을 만드는 일에 관련된다.
3)그룹 3 = 25-31번 가죽 커튼을 만드는 일에 관련된다.
4)그룹 4 = 32-33번 크루쉼 곧 미쉬칸의 빔에 관련된다.
5)그룹 5 = 34-35번 미쉬칸의 벽을 세우고 눕히는 일에 관련된다.
6)그룹 6 = 36-39번 미쉬칸의 최종 손질에 관련된다.

B. 미쉬나(Shabbat 73a)에 실린 안식일에 금지된 39개의 멜라코트(Melachot)

1. 조레아(Zoreah) – 씨뿌리기

씨앗 심기, 씨뿌리기, 물주기가 금지된다. 그러나 안식일을 범하는 일은 씨앗이 자랄 수 있는 곳에서만 이뤄진다. 따라서 사막이나 통행이 빈번한 도로에 떨어진 씨앗이나 닭장의 먹이로 뿌린 씨앗은 조레아에 해당되지 않는다. [물주기 방법] 안식일에 물주기가 금지된다. 그러므로 안식일이 되기 전에 자른 꽃들은 물속에 담가두고, 식물에 물을 준다. 만약 안식일이 시작된 후에 누군가가 자른 꽃들을 가져오면, 그것들을 물이 없는 꽃병에 그냥 꽂아둔다. 그렇게 나뒀다가 안식일이 끝난 후에 물을 부어준다.

2. 코레쉬(Choresh) – 밭 갈기

씨앗을 뿌릴 목적으로 밭을 갈거나 골을 파거나 구멍을 내는 것이 금지된다. 만일 잔디정원에 놓인 아주 무거운 의자를 끌어 땅이 파인다면 코레쉬로 간주된다. 그러나 휠체어나 유모차 자국은 허용된다.

3. 코짜이르(Kotzair) – 추수하기(자르기)

땅에서 나서 자라는 것은 무엇이든지간에 가지나 잎 하나도 뽑거나 잘라서는 안 된다. 꽃을 꺾거나 과일을 따거나 채소나 버섯을 채취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포도송이를 따는 것은 허용된다. 포도가 열리는 가지는 생명의 원천인 땅에 뿌리를 박고 자라는 줄기로부터 이미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잔디를 깎지 말아야 하며, 자라는 꽃과 식물을 손으로 다뤄서도 안 되고 나무에 오르거나 매달린 과일의 냄새를 맡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단 자라는 꽃은 냄새 맡는 것이 허용된다.

4. 마마이르(M’amair) – 거두기(묶기)

자연에서 생산되는 것을 거두거나 단으로 묶는 것이 금지된다. 흩어진 과일을 모아쌓거나 꽃다발을 쌓거나 무화과 열매를 묶거나 나뭇가지를 모우는 것이 금지된다(민 15:32-36). 그러나 사탕봉지와 같은 가공 생산물을 거두고 묶는 것은 허용된다.

5. 더쉬(Dush) – 타작하기

쭉정이로부터 알곡을 거둘 목적이나 자연 상태에서 원치 않는 것에서 원하는 것을 분리해 낼 목적의 타작이 금지된다. 안식일에 과일을 짜서 주스를 만드는 것도 금지된다. 단 주스를 빨아내거나 주스를 보관할지라도 순수하게 과일 맛을 개선할 의도로 주스를 짜거나 주스를 흡수할 고체위에 직접 짜는 것은 허용된다.

6. 조레흐(Zoreh) – 까부르기

타작한 후 쭉정이를 바람에 날려서 알곡을 고르는 행위가 금지된다.

7. 보레르(Borer) – 고르기

손으로 원치 않는 것을 골라내는 행위가 금지된다. 안식일에는 상한 과일이나 음식은 물론이고 더러운 그릇을 골라내는 것조차 금지된다. 그러나 손으로 원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으로부터 고르고(원치 않는 것을 골라내는 것은 안 됨.), 골라낸 것을 즉시 사용하는 경우에는 허용된다. 예를 들어서 아몬드와 건포도가 섞어 있는 그릇이 있고, 그 그릇에서 건포도를 먹고자 한다면, 반드시 손으로만 골라야 하며, 아몬드는 남기고 건포도만 골라야 하며, 골라낸 즉시 먹어야 한다.

8. 토카인(Tochain) – 빻기

손으로든 도구로든 알곡을 빻거나 찧거나 부수거나 해서 가루로 만드는 것이 금지된다. 생명의 위협이 없는 한 약초를 찧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땅에서 자른 것들에만 국한된다. 이미 빻아진 것은 다시 빻을 수 있으며, 즉시 사용할 음식이라면 빻는 것이 허용된다. 또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빻는 것도 허용된다.

9. 미라케드(Miraked) – 체질하기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체나 도구를 이용하여 까불리거나 거르는 것을 금지한다. 보레르(Borer)가 손으로 원치 않는 것을 골라내는 행위를 금한다면, 미라케드(Miraked)는 체나 도구를 이용하여 원치 않는 것을 체질하거나 걸러내는 것을 금한다.

10. 루쉬(Lush) – 반죽하기

가루, 모래, 시멘트 등에 액체(물)를 섞어 반죽하는 행위가 금지된다. 그러나 무교병을 수프에 적시거나 쿠키를 우유에 담그는 것은 허용된다. 이들 음식들은 액체와의 접촉에도 불구하고 분해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1. 오훼흐(Ofeh/Bishul) – 굽기

음식물이나 물질에 열을 가해서 변화를 주는 행위가 금지된다. 날것을 먹을 수 있도록 익히거나 벽돌을 굽는 행위 등이 금지된다. 만일 익지 않은 음식을 불판에 놓았다면, 음식이 익기 전에 그 냄비를 치워야 한다. 일반적으로 단단한 음식물은 먹을 수 있는 최소량으로 되기까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액체는 열을 받으면 즉각 반응하기 때문에, 형태의 변화가 없고, 단지 데워지는 것에 불과할지라도 금지된다. 여기서 최소의 열은 손을 갔다 댔을 때 뜨거워서 손을 떼는 정도, 곧 만지기에 너무 뜨거운 정도를 말한다. [요리하기 방법] 안식일에는 물건에 열을 가하여 어떤 형태로든 변화시키는 것을 금한다. 그러므로 안식일 전에 미리 요리를 해서 스토브의 덮개인 블레치(blech)나 슬로우 요리기(slow cooker)를 사용하여 음식의 보온을 유지시킨다. 물도 전기주전자에 담아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스위치를 꽂아 놓아 따뜻하게 유지시킨다.

12. 고제즈(Gozez) – 털깎기

12번부터 24번까지는 양모소재와 의복을 만드는 과정에 관련된 내용들이다. 미쉬칸의 천덮개들은 양모로 만들어졌다. 이들 가운데 첫 번째 단계가 동물의 털깎기였다. 따라서 안식일에는 산 짐승이든 죽은 짐승이든 신체에서 자라는 것의 어떤 털도 자르거나 뽑는 것이 금지된다. 따라서 안식일에는 머리를 빗어서는 안 된다. 빗이 머리털을 뽑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에 부드러운 털 빗을 부드럽게 사용하는 것은 허용된다. 안식일에 손발톱을 깎거나 자르는 것도 금지된다. 헐렁하거나 죽은 피부를 떼어 내서도 안 된다.

13. 멜라바인(Melabain) – 희게 하기

미쉬칸을 위해서 깎인 양모는 강에서 씻겼다. 희게(표백) 하기는 물에 담그기, 북북 문대기, 짜기의 과정을 거친다. 따라서 안식일에는 깨끗이 씻는 활동이 금지된다. 사워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뻗친 머리칼을 단정히 하기 위해서 물을 뿌리는 것은 허용된다.

담그기 – 옷에 묻은 얼룩을 깨끗이 제거하기 위해서 물과 같은 것을 붓거나 뿌릴 수 없다.

북북 문대기 – 얼룩을 씻기 위해서 옷을 접거나 떼 묻은 곳을 문질러서도 안 된다. 마른 얼룩을 손톱으로 자국을 내서도 안 된다.

짜기 – 안식일에 옷을 비틀어 짜는 것이 금지된다.

14. 메나훼쯔(Menafetz) – 풀기, 빗질하기

양모를 희게 한 후에는 실을 잣기 위해서 손이나 빗으로 엉킨 털을 빗질한다. 따라서 안식일에는 양모를 빗질하거나 아마 줄기와 같이 촘촘한 소재를 때려서 여러 가닥으로 만드는 것, 또 가발을 빗질하는 것 등이 금지 된다.

15. 쪼바야흐(Tzovayah) – 물들이기

물들인 양모는 커튼을 만드는 데와 미쉬칸을 덮는데 사용되었다. 따라서 색깔을 내거나 소재를 검게 하는 것 등이 금지된다. 화장은 피부에 물을 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안식일에 화장하는 것이 금지된다. 피부를 태우는 것도 금지된다. 그러나 음식에 색깔을 넣는 것은 먹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허용된다.

16. 토베흐(Toveh) – 실뽑기

안식일에는 새끼줄 꼬듯이 실을 꼬아서는 안 된다.

17. 마이사크(Maisach) – 베틀에 실 걸기

베틀에 수직으로 실을 거는 것을 말한다. 모든 종류의 직조는 물론이고, 격자 만들기, 간단한 항아리 거치대 만들기, 바구니 만들기 등이 금지된다.

18. 오세 바이트 바타이 네이린(Oseh Beit Batai Neirin) – 헤들 세팅하기(직조 준비하기)

19. 오레이그(Oraig) – 직조하기

안식일에 옷이 못이나 고리에 걸려 옷감이 몰린다든지 실밥이 튀어나온 것을 잡아당기거나 밋밋하게 문지르는 것이 금지된다. 가발머리를 땋는 것도 금지된다.

20. 포짜이아흐(Potzai’ah) – 실 제거하기

안식일에 베틀에서 직조된 실 가운데 잘못된 부분 또는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거나 완성된 제품을 베틀에서 빼내는 것이 금지 된다.

21. 코사이르(Koshair) – 매듭매기

미쉬칸의 커튼을 만드는 과정에서 청색물감을 들이게 되는데, 이 때 하나의 그물에서 끈들을 제거하고 다른 그물에 묶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물을 묶기도 하고 풀기도 하게 된다. 또 꿰매는 작업에서 처음과 나중에 실 끝에 매듭을 묶는 것이 필요하게 되는데 이런 경우의 매듭은 항구적이다. 따라서 안식일에는 항구적이고 나중에라도 그 매듭을 풀 의사가 없는 매듭매기가 금지된다. 그러나 구두매듭이나 장식 매듭에 사용된 나비 모양의 매듭은 대개가 24시간을 넘기지 않기 때문에 허용된다. 다른 한편 매듭을 묶는 상태에서 오랜 기간 두게 되는 경우에는 금지된다. 또 안식일에는 플라스틱 쓰레기봉투를 끈으로 가볍게 묶지 않고 손으로 감아서 매듭을 만들어 봉하는 것이 금지되며, 케이크 상자와 같은 것을 묶을 때에는 같은 날에 풀 의사가 있더라도 이중매듭이 금지된다.

22. 마티르(Matir) – 매듭풀기

안식일에 매듭매기가 금지된 것은 푸는 것도 금지된다.

23. 토화이르(Tofair) – 바느질하기

바느질은 미쉬칸의 덮개 천을 만들 때 조각들을 잇는데 사용되었다. 따라서 안식일에 바느질이나 잇는 행위가 금지되지만, 처음부터 잇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단추들, 지퍼들, 안전핀들, 벨크로 즉 성긴 실코로 서로 달라붙게 된 나일론제의 접착포은 허용된다. 그러나 항구적으로 붙어 있게 할 목적의 접착제나 압침 사용은 금지된다. 접착제가 붙어 있는 일회용 귀저기의 사용은 허용된다.

24. 코레아흐(Ko’reah) – 찢기

찢기는 미쉬칸 커튼에 생긴 좀 나방 구멍을 수선하기 위해서 이뤄지는 행위로써 바느질이나 접착제로 이어진 것이나 하나로 만들어진 것을 두 부분으로 찢거나 분리시키는 행위이다. 따라서 끈이나 실은 바느질이나 접착제로 수선되지 않고 끝부분에 매듭이 만들어져 수선됨으로 허용된다. 옷에 붙은 가격표를 제거하거나 음식포장, 붕대, 냅킨, 의약품, 옷 등의 포장을 제거하는 것도 허용된다. 그러나 접착제로 붙인 종이우유팩을 여는 것은 금지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우유팩의 양쪽 끝 면을 다 열면 가능하다고 한다. [화장지 사용하기] 접착제, 바느질, 심지어 절취선을 통해 붙어있는 것들은 안식일에 어떤 목적으로도 떼어낼 수 없다. 그러므로 안식일 전에 화장지를 미리 떼어놓거나 티슈를 사용한다. 절취선이 있는 티슈박스도 안식일에 개봉할 수 없으므로 안식일 전에 개봉해 둔다. 화장지를 필요한 만큼 떼어놓거나 종이 냅킨을 사용한다.

25. 쭈드(Tzud) – 가두기(덫 또는 올가미 설치)

동물을 코너로 몰아 놀라게 하거나 만지는 것이 금지된다. 애완동물의 경우 이미 덫에 갇힌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방안이나 집안으로 몰아넣는 것이 허용된다. 움직임이 느린 애벌레와 같은 곤충도 이미 갇힌 것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에 덫에 갇히게 할 수 있고, 벌과 같이 위험한 곤충은 특별히 고안된 장치가 아니면 도구를 사용하여 가둘 수 있다.

26. 쇼체트(Shochet) – 죽이기

가둔 짐승을 죽이는 것은 가죽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안식일에는 동물이나 흙에서 오는 것들을 죽이는 것이 금지된다.

27. 마프쉬트(Mafshi)t – 가죽 벗기기

도살한 동물의 가죽을 벗기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안식일에는 새로 잡은 동물의 가죽을 벗기는 것이 금지된다. 그러나 이미 요리된 짐승가죽이나 닭 껍질 등을 벗기는 것은 허용된다.

28. 마바이드(M’abaid) – 소금치기 및 무두질하기

탈무드(Tractate Shabbat 7:2)의 멜라코트의 목록은 가죽에 소금치기와 무두질하기가 별개의 멜라코트로 되어 있다. 탈무드(Tractate Shabbat 75b)는 이들 두 개가 정말 동일한 멜라카들이라고 진술한다. 또 29번째 멜라카에 선긋기를 삽입함으로서 미쉬나를 수정하고 있다.

무두질은 생가죽을 보존할 수 있도록 가공하는 과정이다. 미쉬칸에 쓸 좋은 가죽을 얻기 위해서 강력한 무두질 용액에 푹 담근다. 소금치기 및 무두질하기는 생가죽에는 물론 마무리된 가죽에도 적용된다. 따라서 안식일에는 가죽 방부제가 든 구두광택제를 사용하는 것이 금지된다. 신선한 생선, 고기, 각종 채소 등을 절이거나 소금뿌리는 등의 방부처리가 금지된다. 그러나 이미 절인 것을 돼갔다 넣는 것은 허용된다.

29. 메샤르테이트(Mesharteit) – 선긋기, 표시하기

무두질한 가죽을 제단하기 위해서 선을 긋거나 표시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안식일에는 음식을 제외하고는 피부, 손톱, 양가죽, 종이, 나무 등에 선을 긋거나 표시하는 것이 금지된다. 글씨를 똑바로 쓰기 위해서 편지지에 선을 긋는 것도 금지된다.

30. 메마체이크(Memacheik) – 매끄럽게 하기 및 구김살 펴기

미쉬칸의 벽을 세우는데 쓸 가죽들에서 털을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나무나 가죽처럼 단단한 표면에 사포질을 하거나 매끄럽게 하는 것이 금지된다. 왁스, 크림, 연고 등의 표면을 매끄럽게 문지르는 것도 금지된다. 피부에 크림을 찍어 누르는 것은 허용되지만, 문질러 바르는 것은 금지된다. 음식물은 허용되지만, 터진 입술에 버터를 문질러 바르는 것처럼 먹는 것이 아닌 방법으로 문지르는 행위는 금지된다.

31. 메차테이크(Mechateich) – 재단하여 자르기

미쉬칸에 쓸 가죽을 재단하여 자르는 것을 말한다. 안식일에 물고기나 케이크와 같은 음식물을 원하는 크기로 자르는 것은 허용된다. 설탕, 소금, 커피, 겨자 등의 봉지에 개봉을 위한 절취선이 있는 데, 개봉하는 목적이 기술적으로 또는 의도적으로 깔끔하게 개봉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속의 식품을 사용하기 위한 것이므로 허용된다. 하지만, 티슈의 경우는 깔끔한 개봉을 위해서 절취선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개봉이 금지된다. 메차테이크는 재단하여 자르는 모든 재료에 적용되지만, 24번 코레아흐는 그렇지 않다.

32. 코타이브(Kotaiv) – 알파벳 두 자 이상쓰기

미쉬칸의 벽 판자들은 미쉬칸을 설치할 때 짝 맞춰 세우는 작업을 용이케 하기 위해서 글자들이 새겨졌다. 이것은 종종 단순히 글쓰기가 아니라 의미 있는 형상을 창조하는 행위로 정의된다. 그런데 그 때 사용된 글자가 두자 이내였다. 따라서 안식일에 그림그리기, 나무에 식각(蝕刻)하기, 옷감에 수놓기를 그 이상 하는 것이 금지된다. 또 창유리에 손가락으로 자기 이름을 쓰는 것도 금지된다. 심지어 글쓰기를 하게 할 어떤 행위도 금지된다. 따라서 안식일에는 상거래나 점수를 따져야 하는 게임이, 비록 기록할 의사가 실제로 없다할지라도, 어렵게 된다. [쓰기/지우기/편지 찢기] 안식일에 쓰는 것, 그리는 것, 지우는 것, 심지어 봉투 속에 든 편지들을 찢는 것을 피해야 한다. 펜들, 연필들, 지우개들 등은 무크짜에 속하므로 미리 치워둔다. 그러면 그것들을 사용하지 않게 된다. 안식일에 사용되어야할 어떤 포장들이나 병뚜껑들은 미리 열려 있어야 한다. (혹은 안식일에 조심스럽게 열려야 한다.) 어떤 편지들도 찢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무크짜(Muktzah)는 문자적으로 사용할 의도를 갖기 직전에 치우는 것을 뜻한다. [돈 취급하기] 안식일에 쇼핑과 같은 주중의 활동을 피한다. 그래서 안식일에 돈은 무크짜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지갑이나 손가방 또는 잔돈을 치운다.

33. 모차이크(Mochaik) – 알파벳 두 자 이상 지우기

미쉬칸을 세우는 자들이 실수로 잘못된 글자를 판자에 썼을 경우 이를 고치기 위해서 지우게 될 것이다. 이 창조행위는 의미 있는 형상들을 지우는 것으로써 정의 된다. 율법은 글씨가 쓰인 표면을 깨끗하게 지우거나 글자나 알파벳을 지우는 것을 금한다. 이 원칙은 지우지 않고 찍어내는 것과 같이 비전통적인 지우기 방식에도 적용된다. 따라서 안식일에 글자가 있는 포장을 개봉할 때, 글자가 있는 케이크를 자를 때, 글자가 잘리거나 볏겨지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오직 글자(알파벳)에만 적용되고 낱말을 제거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 글자가 있는 과자(비스킷)처럼 반죽에 새겨진 글자들은 글씨로 간주되지 않는다.

34. 보네흐(Boneh) – 건축하기

안식일에 땅에 붙여서 무엇인가를 짓거나 땅에 이미 세워진 무엇인가에 덧대는 행위를 금한다. 이와 관련된 일들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금지된다. 예를 들어서 땅에 무엇인가를 짓거나 수리하는 것, 집안에서나 마당에서 구멍 뚫는 작은 행위조차 금지된다.

35. 소이세르(Soiser) – 허물기

소이세르(Soiser)는 보네흐(Boneh)의 반대과정이다. 광야에서 성막은 이동에 따라 세우고 해체되는 과정이 반복되었는데, 해체의 목적은 재조립을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안식일에 재조립을 위한 해체는 금지된다. 심지어 재조립여부에 관계없이 해체행위가 금지되기도 한다. 그러나 먹기 위해서 또는 먹는 동안 과자와 같은 음식물을 부서뜨리는 것은 허용된다.

36. 메차베흐(Mechabeh) – 불끄기

37. 마아비르(Ma’avir) – 불 지피기

불은 미쉬칸 건설 때 물감을 끓이는데 사용되었다. 따라서 불을 끄고 켜는 것이 금지된다. 안식일에 전기 스위치를 켜고 끄는 행위나 자동차의 시동을 켜고 끄는 행위가 금지된다. [등 켜기]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어떤 등을 켜놓고 또 어떤 등은 꺼놓을 건지를 결정한다. 화장실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곳에는 꺼놓기를 원하는 등의 스위치에 테이핑을 해놓으면 도움이 된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부주의하여 불을 켜거나 끄지 않게 된다. (한밤중에 잠이 덜 깬 상태에서 화장실을 오고가다보면 종종 자기도 모른 새에 스위치를 건들 수 있다.) 센서 등을 설치하거나 안식일 내내 자동으로 등불이 켜지거나 꺼질 수 있도록 타이머를 설치하여 사용할 수 있다.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타이머를 미리 조정해 놓으면 된다. [운전하기] 안식일에는 불을 피우거나 끌 수 없다. 운전하기는 자동차 엔진에 스파크를 일으켜 연료를 태워야하기 때문에 불 피우기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안식일에는 도보를 이용한다. 그냥 평범하게 걷는 것보다 더 좋은 느낌은 없다. 걷는 것은 완전하게 속도를 줄이는 것이며,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며, 숨을 쉴 시간을 주는 것이다. 걷는 것은 우리가 자동차에 의존해 살면서 잃어버린 것들을 놀랍게 찾아준다. 어디든 달려가야 하는 것을 끊어버리는 것을 즐기며, 존재 자체를 즐긴다. 만일 회당이 멀어서 정말 걷기가 어려우면,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인 금요일 오후에 자동차로 그곳에 가서 토요일 저녁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주차해 놓을 수도 있다. 그렇게 하면, 금요일 저녁 돌아오는 길에 한번만 걸어도 된다. 낮 동안에는 회당을 가고 오며 걷는 것이 즐거움일 듯싶다. 회당 근처에 사는 친구들이나 이웃들을 방문할 계획을 세우거나 중도에서 그들과 만나거나 안식일 오후에 공원에서 만날 수 있도록 준비한다.

38. 마케흐 브파티쉬(Makeh B’Patish) – 마지막 망치질하기

이 창조행위는 미쉬칸의 빔을 세우는데 뿌리를 두고 있다. 이때의 빔은 금을 입힌 나무기둥을 말하며, 금박은 망치로 금 못에 박혀 고정되었고, 최종 망치질로 완성되었다. 따라서 이 창조행위는 망치질로 이뤄진 일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어떤 완성도 금지된다. 그러니까 과정에서 일어나는 행위보다는 어떤 행위의 결과를 문제 삼는다. 예를 들면, 안식일에 처음으로 구두에 끈을 끼우는 것이 금지된다. 그러나 물건이 본래 있던 대로 환원시키는 것은 허용된다. 예를 들면, 목걸이에 매단 펜던트가 떨어졌을 때 다시 고정시킬 수 있다. 구두에서 빠져나온 구두끈을 다시 끼울 수도 있다. 그러나 안식일에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 금지된다. 랍비들은 사람들이 악기를 연주하거나 우발적으로 조율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금지시켰다. 그러나 노래하거나 휘파람을 부는 것은 허용된다. [전화하기] 안식일에 해머의 마지막 망치질 같이 순환완결을 포함한 일들을 완결시키는 것을 금하고 있다. 전화는 이 범주에 속한다. 라디오, 텔레비전, 그리고 모든 전기도 마찬가지이다. 드러난 대로 그것은 안식일의 가장 유쾌한 측면들 가운데 하나를 준비하는 분야일 수도 있다. 도달하고 싶은 평화의 섬은 오로지 전화벨이 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침묵을 통하여 이뤄질 수 있다. 그러므로 가족과 친구들에게 안식일에는 전화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사람들은 토요일 저녁까지 기다렸다가 전화를 사용해야한다는 것을 언제나 재빨리 이해할 뿐 아니라 수월케 참아낸다. 유쾌한 안식일 분위기를 정말 원한다면, 전화코드를 뽑아놓는다. 그래야 벨소리로 인한 방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39. 호짜아흐(Hotza’ah) – 운반하기

율법은 안식일에 개인영역에서 공공영역으로 혹은 그 반대 방향으로 물건을 옮기기, 운반하기, 던지기, 밀기 등을 금지한다. 공공영역의 한 장소에서 대략 2미터 이상 물건을 운반할 수 없다.

http://kccs.pe.kr/jewishcal9.htm 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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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7/18
일어나 빛을 발하라(사60:1-7) 문인호 목사 청장년부헌신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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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0/18
연합(행 2:1-21)

This morning’s bible lesson begins with words of unity. “When the day of Pentecost had come, they were all together in one place.” It was divine theater established and directed by God for God’s purposes. And the cast was gathered for their very unexpected roles as assigned by God. We are told that very religious people from other nations had come to settle in Jerusalem. The transplanted Jews with the local crowd were sitting together when God’s life giving Spirit of wind and fire entered their lives. And “filled with the Holy Spirit” they spoke languages other than their own. And their shared message was “about God’s deeds of power.” Peter preaching from the words of the prophet Joel summarizes God’s work as that of visions, dreams, prophecy and creation transformed in expectation of the Lord’s return. All for the purpose of God’s project of salvation.
This Pentecost Sunday morning members and friends of Boston Central Korean Evangelical and Belmont-Watertown United Methodist Church have come together in one place. It is good and right that we are sitting together in anticipation of what God has in store for us. We are here as members of the one Body of Christ with one shared purpose to proclaim “God’s deeds of power” and participate in our own way in God’s project of salvation.

오늘 아침 성경은 연합에 대해 말합니다. 오순절이 되자 그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연출하시는 하나님의 극장을 소개합니다. 연출자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감독의 지시를 받습니다. 그것은 종교심이 있는 사람 들이 외국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몰려온 것입니다. 개종한 유대인들이 그 지역 사람들과 함께 앉아 있을 그때에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성령이 바람과 불로 그들 가운데 임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사람들은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하신 일에 대해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요엘선지자의 말을 인용하며 하나님의 일을 설명했습니다. 비전과 꿈과 예언을 말하며 주의 다시오심을 준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아침 보스톤중앙교회와 벨몬트 워터타운 감리교회가 한곳에 모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은혜를 기대하며 여기 모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로 모였습니다. 또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하시는 능력의 일을 전파하려는 같은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각자의 방법대로 전파하고 있습니다.

The apostle Peter steps forward to contest the sneering onlookers who dismissed the Spirit-filled believers as those who had consumed to much new wine for breakfast. Peter, the one who three times rejected Jesus has now assumed the role of preacher-in-charge. Peter turns to the ancient prophet Joel to proclaim God’s promise of creative power. What was witnessed by the non-believers was God at work establishing and directing new roles for God’s people. Regardless of age and social status God’s promise spoken by the prophet was now before their eyes. Unity revealed through God’s acts in the past and present and to be expected for the future.

베드로사도는 회중앞에 섰습니다. 성령 충만하여 다른 말을 하는 사름들을 술에 취했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에게 변론을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세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그 베드로가 지금은 회중앞에서 설교자로 선 것입니다. 베드로는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설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어떻게 세우고 새 일을 행하시는지를 불신자들에게 보여주는 일이었습니다. 선지자를 통하여 약속했던 하나님의 약속이 나이나 신분에 상관없이 그들의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연합은 하나님의 일을 드러냅니다. 이것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Today on this Pentecost Sunday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might we pause and ask not what makes us unique and diverse in life , all to be celebrated, but to ask what unites us and gives us a true and holy sense of being part of the one body of Christ.
What then my friends in Christ are your visions and dreams? What visions and dreams do we share for our local churches and for our shared ministry in the name of Jesus Christ? What binds our hearts together? Pentecost is the Jewish celebration of the first of the harvest season fifty days after the Passover. What is the blessing of the harvest we can bring together to God’s holy altar? These are not rhetorical questions but questions that we ought to answer as a way to draw ourselves closer in Christian fellowship and service.
Friday morning Santa Fe High School suffered the horrific loss of l0 lives and others injured. Countless visions and dreams were lost with each life and the shared life of learning broken but not beyond healing. As Christians we must unite to cast our vision and dreams for our children and their schools. As followers of the Prince of Peace we must work together to reflect through work and words the sacredness of every human life. And as Pentecost People we must be open to the Spirit’s direction to confront the powers of violence with the power of love.

오늘 성령강림주일에 우리가 함께 모여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독특하고 서로 다르게 사는지를 아는 일도 의미 있겠지만 어떻게 연합하고 힘을 합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갈 수 있을지를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주안에서 형제된 여러분,
여러분의 비전과 꿈은 무엇입니까? 어떤 비전과 꿈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교회 사역에서 나눠지고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힘은 무엇입니까? 오순절은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내고 50일이 되는 날에 수확물로 감사하던 날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주님의 거룩한 제단에 드릴 수 있는 수확물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은 성도의 거룩한 교제와 예배로 나가기 위해서 진실되게 대답해야 할 질문입니다.
지난 금요일에 텍사스의 산타페 고등학교에서는 10명이 총에 맞아 죽고 많은 사람이 다치는 일이 있었습니다. 셀수없는 꿈과 비전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예수 믿는 신자로서 우리는 서로 연합하여 우리들의 꿈과 비전을 자녀들과 그들의 학교에 보여줘야 하겠습니다. 평화의 왕이신 주님을 따르는 자로서 우리의 말과 행동을 보여주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순절을 경험한 신자들처럼 우리들도 성령의 인도를 받아 폭력의 힘앞에 사랑의 힘으로 대항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Pentecost Sunday does not have a secular counterpart. We will not find Pentecost cards in the CVS card aisle. Pentecost Sunday is the celebration of God’s gift of life giving power. The shared gift of God’s individual and share gift of the Holy Spirit. The celebration of praise and thanks for God’s deeds of power. Friends in Christ, we are the instruments that God has gifted for making known God’s deeds of power in Christ Jesus and carrying out deeds of power in his name. it Our task is an awesome task and one that we cannot do alone. It is God’s will and plan that we work at the work of living a shared life in Christ. And for this task I am grateful and for this day I praise and thank God for our time together. May the Holy Spirit guide us into new opportunities to unite our voices and work in making God’s deeds of power known to the world near and far. Amen.

성령강림주일은 세상기념일이 아닙니다. 성령강림절카드는 CVS에서 팔지 않습니다., 이날은 능력있는 생명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날입니다. 각자에게 생명을 주신 일과 하나님의 성령을 선물로 주신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능력으로 행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경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주안에서 친구된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있는 일을 배우고 전하는 일을 위하여 부름받은 일꾼들입니다. 이 놀라운 일은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어주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오늘 우리가 함께 모였고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성령께서 우리들을 새롭게 인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이곳과 더 넓은 세상에 하나님의 능력의 일을 알리는 데 힘을 모으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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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3/18
하늘 아버지의 사랑(요 17:11-26)

요한복음 17장에는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돌아갈 것을 준비하며 뒤에 남겨질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인 것처럼 제자들도 하나가 되게 해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제자들을 악에서 구하여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과의 만남을 보통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만큼 소중한 분신으로 여겼습니다. 그동안 아버지의 이름으로 제자들을 돌보며 보전해 왔으니 이제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을 하늘 아버지께서 지켜주시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얼마나 애틋하고 간절한 기도인지 모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주님과 같은 생각을 품고 살도록 훈련시켰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었고 하나님 나라를 품게 했습니다. 그 결과 제자들도 더 이상 세상에 마음을 두지 않게 되었으며 그래서 세상의 미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하늘 아버지께서 제자들을 보호하여 주시고 악에게 빠지지 않도록 돌보아주시고 또 진리로 거룩하게 구별해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제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세상에게 알게 하도록 기도했습니다.

요한은 요일 5:10-15에서 하나님의 증언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의 증언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이 자기 아들에 관해서 증언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증언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것과 바로 이 생명은 그 아들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아들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생명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아들을 모시고 있지 않은 사람은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인 여러분에게 이 글을 씁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가지는 담대함은 이것이니, 곧 무엇이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이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하나님께 구한 것들은 우리가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주십니다. 하늘 아버지의 마음은 아들을 통하여 주시는 영원한 생명과 천국의 기쁨을 성도들이 누리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하게 누리며 아버지를 세상에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아버지의 뜻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요 10:10에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말씀했습니다. 이런 하늘 아버지의 마음은 누가복음 15장에서 더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잃어버린 약혼 기념 동전을 찾기 위하여 수고하다가 그것을 찾고 나서 잔치를 열고 기뻐하는 여인의 마음, 잃은 양 하나를 찾으려고 아흔 아홉은 남겨두고 하나를 찾아 나서는 목자의 심정, 집나간 아들을 기다리다가 돌아온 아들을 위하여 잔치를 열고 기뻐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통하여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설명했습니다. 선택한 자기 백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 49:8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를 백성의 언약으로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에게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하게 하리라.” 약속하시며 15절에서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다시 말씀했습니다. 비록 우상숭배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강대국의 횡포와 압제에 시달리게 되지만 결국은 회개하고 돌아와 하나님이 손에 사용될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자식의 모든 것을 품고 덮습니다. 하나님께서도 타락한 세상을 회복시키려고 아들을 세상에 보내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고 우리들을 죄에서 자유롭게 했습니다. 롬 5:8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원합니다. 이 세상에 어떤 부모가 아들이 떡을 달라고 할 때에 돌을 주고, 생선을 달라고 할 때에 뱀을 줄 사람이 있겠습니까? 모든 부모는 자식에게 좋은 것을 먹이고 입히기를 원합니다. 자신이 희생해서라도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의 마음인데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응답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좋은 선물은 보혜사 성령님입니다. 성령님 안에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선물로 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로 믿음을 갖게 하며 하나님의 비밀스런 것을 알게 해주십니다. 우리가 약할 때에 위로하며 힘을 주십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못할 때에라도 친히 안타까워하며 대신 중보해주십니다. 우리가 성령님과 함께 살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뿐 아니라 신앙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영혼도 잘되고 우리 생활에 필요한 육적인 것도 공급받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자랑하는 복 받은 자녀로 살게 됩니다.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하늘 아버지를 섬기는 우리들은 육신의 부모에게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모를 통하여 육신을 물려받게 했고 부모를 통하여 세상을 배우게 했으며 부모를 통하여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지나 우리가 부모가 되어 자녀를 양육하면서 부모님의 마음을 더 깊이 경험합니다. 그래서 부모님을 더 사랑합니다. 그 부모님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창 49장을 보면 이삭이 아들들을 불러놓고 그들의 분량대로 복을 빌었습니다. 부모는 자식의 필요를 알고 그의 장단점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자식을 위해 복을 빌 수 있습니다. 이삭이 자녀들의 분량대로 축복하고 예언했더니 하나님께서 그 기도대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런가하면 노아가 술에 취해 벗고 잘 때에 아비의 수치를 가려준 셈과 야벳은 복을 받았고 아비의 수치를 들추어낸 함은 형제의 종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비는 복과 저주가 그대로 자식들에게 이루어진 실례입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을 위하여 주의 이름으로 마음껏 복을 비십시오. 자녀와 그들의 자녀들이 대를 이어 여러분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자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은 부모를 존중하며 효를 다하십시오. 부모님을 통하여 오늘 여러분이 여기에 있고 또 여러분의 자손들이 태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았던 부모님을 사랑하고 때가 되면 여러분도 부모가 되어 믿음으로 살아갈 것을 계획하십시오. 이 아름다운 결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진행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게 알려질 것입니다.

출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엡 6:1-3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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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18
경건한 자의 순종 (행 10:1-8, 39-48)

로마 군대의 백부장인 고넬료는 이방인이었지만 경건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많은 사람을 구제하며 기도에 힘쓰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와 구제를 받으시고 베드로를 초청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주님 되심을 듣게 했습니다. 자신 뿐 아니라 온 식구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고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쓰임 받은 일을 살펴봅니다.

1.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하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행 10:2은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라고 소개합니다. 경건은 하나님을 존경하고 두려움으로 섬기며 은혜에 감사하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밖으로 나타날 때에 예배가 됩니다. 딤전 4: 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라고 했습니다. 경건은 자기 욕심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스스로는 경건하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알 수 있듯이 경건도 열매로 증명해야 합니다.

고넬료가 경건한 사람이라는 것을 베드로를 초청하여 말씀을 듣는 태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를 하나님의 일군으로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들으려고 했습니다. 마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처럼 경외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33절에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나갔으며 베드로를 통하여 듣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겼습니다. 이것이 경건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교회를 하나님의 집으로 여기는 믿음이나 말씀 사역자들을 주의 종으로 존중하고 대우하는 일이 믿음생활에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향한 마음을 보여주는 거울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단순한 모임장소로 여기거나 사역자들을 월급쟁이로 여기는 사람에게서는 하나님의 임재와 경건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예배생활에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의 임재 가운데 서는 것이 예배의 핵심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자유롭게 거하며 일하도록 순종하십시오. 경건이 몸에 베이게 자신을 훈련하십시오.

2. 고넬료의 경건생활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증명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하듯 이웃을 대했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구제에 힘썼습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고넬료에게는 주변의 식구들이나 일하는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일군이었습니다. 이웃의 필요를 채워주는 일을 하나님을 돕는 것으로 여겼기에 지갑을 열어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일에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들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베드로를 초청하러 가는 일군이나 말씀을 들으러 모인 친구와 친척들도 이런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혼자만 신앙생활하지 않습니다. 영적 생명력을 주변사람들과 함께 나눕니다. 고넬료는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예배했고 일군들도 같은 마음으로 일하게 했습니다. 영적 능력은 생활에서 증명되어야 합니다. 남을 돕는 구제나 주의 이름으로 행하는 나눔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은혜가 흘러가게 하는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약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우리교회가 문화학교를 운영하며 이웃을 섬기고 복음의 문을 열어가고 있습니다. 유학생들을 먹이며 전도하고 선교사들이 힘을 내서 일하도록 격려합니다. 교회내의 후배들을 돌아보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일입니다. 이런 선한 열매들을 통하여 사람들과 하나님께 칭찬을 듣게 될 것이고 그것이 우리의 경건을 증명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3. 고넬료의 순종으로 이방인 전도의 문이 열렸습니다.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욥바에 도착했을 때에 베드로도 기도하다가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큰 보자기 같은 것이 내려오는데 먹을 수 없는 부정한 짐승이 들어있었습니다. 먹으라는 음성을 들었지만 베드로는 그럴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한 것을 더럽다고 하지 말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이 일을 세 번이나 겪으면서 무슨 뜻인지를 생각하고 있을 때에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으로 해석했고 성령께서도 그들을 따라가라고 지시했습니다. 고넬료의 집에 가서 자초지종을 듣고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모인 사람들이 말씀을 들을 때에 성령 충만을 받고 방언을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방인에게도 동일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베드로는 지금까지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는데 이 일로 이방인 전도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 일후에 할례자들의 비난을 받게 되자 그의 경험을 11장에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행 11:15-18 “내가 말하기 시작하자 성령께서 처음 우리에게 내려오신 것처럼 그들에게도 내려오셨습니다. 그때 나는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군데 하나님의 일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이 말을 듣고 의심이 풀어져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이 아닌가’ 하였다.”

또 스데반의 순교사건 때문에 두려워하던 교인들이 이방지역으로 피신했는데 그들이 안디옥에서 이방인에게 전도했습니다. 행 11:20-21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예루살렘 교회는 사울을 데려다가 안디옥 교회에서 가르치게 했고 본격적인 이방인 전도가 시작되었습니다. 복음이 예루살렘의 벽을 넘어 이방인들에게 전해지게 되었고 오늘 우리도 그 복음을 믿게 된 것입니다.

어린이 주일입니다. 가정마다 부모를 통하여 자녀에게, 교회에서는 선배들을 통하여 후배들에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건하게 사는 믿음의 유산을 물려줍시다. 요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때에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믿음으로 순종하여 능력 있게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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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18
주님 안에 거하십시오(요 15:1-8. 행 8:26-40)

구약에서 포도나무는 하나님이 선택한 이스라엘을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렘 2:21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찌 됨이냐.” 사 5:2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었도다.” 시 80:8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한 포도나무였고 이스라엘은 마땅한 열매를 맺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복을 주기로 약속한 하나님은 그와 그의 후손들이 좋은 포도열매가 되기를 기대했습니다. 제사장 나라가 되어 열방을 구원받게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와 형식주의로 변질되었고 하나님은 들 포도를 맺은 이스라엘을 뽑아버리고 참 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를 심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참 포도나무라고 하고 제자들을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로 비유하며 농부이신 하나님께 좋은 열매로 기쁨을 드릴 것을 말씀했습니다.

1. 하나님의 마음

농부인 하나님은 좋은 열매를 원합니다. 참 포도나무인 예수님을 통하여 수액을 먹고 맺는 포도 열매입니다. 이것은 바른 관계 안에 있을 때에 가능한 일입니다. 성경 여러 군데서 성도와 주님과의 관계를 몸과 지체로, 신랑과 신부로, 양과 목자로 표현했습니다. 모두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농부인 하나님은 우리들을 말씀으로 이미 깨끗하게 했습니다. 참 포도나무인 예수님께 붙어 좋은 열매 맺기를 기대합니다.

말씀에는 선택권이 있습니다. 순종하여 복을 받는 것과 불순종하여 저주에 이르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멸망과 저주보다는 생명을 주고 더 풍성히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경고의 말씀은 더 깊은 사랑의 관계로 들어오라는 안내판입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는 잘라내고 불에 태워 버린다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긍정적인 면으로 순종하면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살다가 결국 뽑혀버렸습니다. 열방을 위한 제사장 나라로 부름 받았지만 그 사명을 잃어버리고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우상을 숭배하고 욕심대로 살다가 뽑혀 버림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참 포도나무인 예수님을 다시 심어 그를 통하여 영혼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닮은 선행과 사랑의 열매를 맺기를 기대합니다. 그 열매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또 다른 사람이 농부의 손에 들어오게 합니다.

2. 좋은 열매 맺는 방법

가지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원 줄기에 붙어있어야 합니다. 거기서 양분을 공급받습니다. 이 열매는 우리가 노력하여 맺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수액을 먹고 자연스레 맺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약속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그의 영인 성령과 함께 우리 안에 거하며 우리를 통하여 생명 살리는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열매를 맺으려는 노력보다는 원 줄기에 붙어있으려는 노력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죄의 노예가 되어 묶여있던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그 아들을 보냈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게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씻음 받아 거룩한 성도가 되었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삽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시는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4, 5절에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말씀했습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과거 어느 때에 주님을 만났던 일도 중요하지만 오늘 그 감격을 누리고 있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맺는 열매는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3. 열매의 목적

가지에서 열매를 취하는 농부를 향하여 욕심쟁이나 인색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농부가 열매를 위해서 얼마나 수고하고 땀을 흘리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농부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영혼구원의 열매를 내가 노력하여 맺는 것으로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농부의 돌봄을 받으며 원 가지에 붙어있기만 하면 열매는 맺힙니다. 7-8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이것은 열매를 위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만 하면 원하는 것을 다 이루어주겠다는 약속입니다. 기도가 응답되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그대로 따라할 수 있는 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열매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또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합니다. 10절에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예수님과 영적 사귐을 지속적으로 갖고 사는 성도는 작은 예수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닮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 열매는 자식이기도 하고 이웃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게 합니다. 예수님의 또 다른 분신이 되게 합니다.

빌립은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나서 그가 읽는 이사야의 글을 해석하여 주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했습니다. 내시가 어둠과 무지에서 벗어나 빛이신 주님을 만나게 했습니다.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의 가지가 되게 했습니다.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천사의 지시에 순종할 수 있는 영적 예민함이 빌립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광야로 나가 에티오피아 내시를 만난 것도 주의 사자의 명령을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접근하여 복음을 전하게 된 것도 주의 영의 이끌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순종을 통하여 복음이 전해지게 합니다. 만남도 주선하고 사람의 마음도 움직이고 구원받아야 할 사람을 구원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순종입니다. 일하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주 안에 붙어 좋은 열매를 맺어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는 존귀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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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2/18
성경의 목적 (딤후 3:15-17, 요 5:39) 남선교회 헌신예배 김갑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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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18
성령께 순종한 전도자들 (행 3:11-26)

부활하신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부활의 증인으로 살 것을 당부했습니다. 눅 24:46-47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라고 했습니다. 부활의 복음이 예루살렘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그리고 이방인들에게까지 전해지게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초기의 제자들뿐 아니라 우리들에게까지 동일하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성령 강림으로 능력을 체험한 제자들 중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문에서 앉아 구걸하던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평생을 스스로 걷지 못하고 남의 힘에 의존해야 하는 그의 아픔과 영적 필요를 보았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따라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명령하고 그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앉은뱅이가 걷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기적은 사람들의 마음을 한곳으로 모으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그런 기적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주 가끔 특별한 경우에 경험하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매번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거나 기적을 일으킨 특정한 사람에게 관심을 두면 쉽게 실망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기적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무엇을 행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기적은 성도들에게 믿음을 주고 위로와 확신을 줍니다. 비록 눈에 보이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도 우리에게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니 그 말씀에 근거하여 믿는 건전한 신앙이 필요합니다. 사실 이것 또한 기적입니다.

1. 전도자들은 성령의 감동에 바로 순종했습니다.

모두가 아는 걷지 못하는 장애자가 걷고 뛰고 찬송하고 있으니 누가 이 사람을 바꾸어 놓았는지에 사람들의 관심이 모아졌습니다. 걷게 된 사람이 베드로를 지목하자 모두의 시선이 베드로에게 쏠렸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스스로 영광을 취하지 않았고 사람들의 관심을 주님을 증거 하는데 지혜롭게 사용했습니다. 행 3: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베드로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부활하게 하여 영화롭게 하셨고 그 예수의 이름을 믿어 걷게 되었다고 지혜롭게 설명해 나갔습니다. 로마의 황제 대신 또 다른 왕을 섬긴다고 오해받아 목숨을 잃기까지 하던 시대적 위기 속에서도 성령과 함께 하는 전도자는 담대하게 부활하신 주님을 전했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 청중을 향하여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했고 다시 살렸다고 말했습니다. 예언자들이 예언했던 메시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설명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임을 알아보지 못하고 죽였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죽은 예수를 다시 살려 영화롭게 했다고 복음의 핵심을 설명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지식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거주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믿게 합니다. 구원 받은 사실을 확증하고 보증하며 인 쳐주십니다. 진리를 알게 하며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합니다. 구원받아야 할 사람의 영적 필요를 살피고 돕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했던 생명 살리는 사역을 계속하게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장애자의 필요를 분별하고 담대하게 예수의 이름을 선포한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감동에 순종한 결과였습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영적 생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러 가다가 이 일을 행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비록 은과 금은 없었지만 그보다 더 귀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그들 안에 살아계셨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아야 할 사람의 필요를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감동에 순종하여 예수 이름을 선포하고 그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예수님은 요 14:12에서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말씀했습니다. 사도행전과 기독교 이천년의 역사는 믿는 자들을 사용하여 사람을 변화시키고 구원한 성령의 일로 가득 차있습니다. 동일한 성령은 우리들과도 함께합니다. 우리가 전도에 대한 부담을 갖고 때를 얻는지 못 얻는지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사실은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이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복음의 능력과 기쁨이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도록 믿음으로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2. 전도자들은 복음의 핵심을 바로 증언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던 유대인들은 예수의 이름을 듣고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들은 구약과 예언자들이 말한 예시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모르고 한 일이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다시 살려 영화롭게 했고 구원의 일을 완성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사야가 예언한 고난 받는 종, 모세가 예언한 대제사장, 땅의 모든 족속을 복 받도록 하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신 분, 세상을 구원하는 구세주입니다. 그가 믿는 자들의 죄를 깨끗하게 하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합니다. 베드로를 만나 걷게 된 이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걷게 되었습니다. 16절에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도덕적인 범죄나 어떤 정해진 법을 어긴 것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벗어난 원론적인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과 교통하며 살아야 했지만 죄가 들어와 관계가 깨지고 그 죄의 결과로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 깨어진 관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으면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됩니다. 요일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여 청중이 회개하고 예수를 주님으로 믿게 했습니다.

복음에는 힘이 있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서고 벙어리가 말을 하고 소경이 눈을 뜨게 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합니다. 죄인을 변화시켜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령의 내주와 인도가운데 살게 합니다.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움과 자유를 누리게 합니다. 행 3:19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베드로의 설교는 오천 명의 마음을 주님께 돌려놓았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왕성하게 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도 앉은뱅이 같은 나를 변화시켜 새 삶을 살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말하고 보여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령께 순종함으로 구원받아야 할 또 한 사람을 복되게 세울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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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18
부활의 증인으로 살자 (요 20:19-31)

십자가 사건이 있은 후에 제자들은 낙심하고 무서워했습니다. 어떤 제자들은 이전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 버렸습니다. 남아있던 제자들도 문을 잠그고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심각한 어려움에 처한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먼저 찾아와 평강을 묻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놀랐고 한편으로 얼마나 힘이 났을 지를 생각해 봅니다. 신앙생활은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을 환영하여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계 3:20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생명을 얻게 하려는 목적으로 부활사건을 기록했습니다.

1. 믿음을 새롭게 하자.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던 장소에 도마는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 손의 못 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에 자신의 손가락을 넣어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주님은 며칠 후에 도마에게 나타나 그것을 허락했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 그러자 도마가 환호합니다. “나의 주님이고 나의 하나님이시군요.“ 얼마나 감동적인 신앙고백입니까?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말씀했습니다.

히 11:1-3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선조들은 이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훌륭한 사람으로 증언되었습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그의 완전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상주시는 분임을 믿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부활하신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삽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어제 가정방문하면서도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처음 방문한 여행지에서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지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행자들에게 검증된 믿을만한 지도가 있다면 아무런 염려가 없습니다. 성경은 믿음의 선배들이 검증해준 하나님을 찾는 지도입니다. 기원전 4천년의 아담과 기원전 2천년의 모세 이야기를 담은 히브리 민족의 역사는 하나님에 관한 증언과 예언의 성취를 확인해줍니다. 예수 탄생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신약의 역사는 지금까지 2천년의 세계교회역사 속에서 전해지고 또 확증되었습니다. 이정도 검증을 거친 것이면 믿을만하지 않습니까? 믿음의 선배들이 물려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도 믿을 만하지 않습니까? 지도를 검증하는 일보다 그 지도를 활용하는 것이 여행을 잘하는 방법입니다.“

주님은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주십니다. 마음이 상한 자를 고쳐주십니다. 포로 되어 갇힌 자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십니다. 슬픈 자를 위로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십니다. 그를 믿는 자에게 생명을 주고 더 풍성히 누리게 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죄와 죽음에서 자유하게 합니다. 먼저 찾아와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평강을 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증언하십시오. 여러분 인생의 주인이 되어 모든 일을 결정하게 하십시오.

2. 사명을 새롭게 하자.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며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영적 권위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던 구원사역을 대신 맡겨주신 것입니다. 감히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의 용서를 선포하게 합니다. 구원 받는 자가 많아지고 주님의 왕국이 넓어지게 합니다. 성령과 함께 일합니다. 이 사명은 제자들에게뿐 아니라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오늘의 성도들에게도 주어진 사명입니다.

행 1:8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엡 2:6-7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로 베풀어주신 그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장차 올 모든 세대에게 드러내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벧전 2:9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주로 믿어 구원받은 성도들은 다른 사람을 살리는 제사장으로의 삶을 삽니다. 죄의 용서를 선포하고 자유를 누립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강을 일상에서 누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나누어 줍니다. 그래서 또 다른 사람이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우리가 사도로 부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사도들에게 주셨던 동일한 권세로 일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둠을 물리치고 주님 나라를 일구고 확장합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과 함께 일합니다.

3. 담대함으로 지속하자.

부활 증인의 삶에 항상 승리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도 제자들이 상심하고 흩어질 것을 미리 아셨기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6:32-33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제각기 자기 집으로 흩어져 갈 때가 올 것이다. 그 때가 벌써 왔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기 전에도 제자들을 격려하셨고 부활이후에도 낙심하고 두려워하던 제자들에게 찾아와 평강을 주셨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십시오. 그가 주는 평화를 누리고 널리 자랑하십시오. 십자가 보혈의 능력을 날마다 선언하십시오. “나는 생명을 얻었고 죄에서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연약한 존재임을 잊지 마십시오. 혹 넘어지더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실패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며 주님을 더욱 의지하게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울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한 마음 한 뜻 된 거룩한 교회와 성도들이 여러분 옆에 있습니다. 그러니 부활 증인으로 힘차게 사십시오.

바울이 고전 15장에서 외치는 소리를 들으십시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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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8
부활신앙을 새롭게 하자 (출 15:1-8, 고전 15:16-20, 막 16:1-8)

복음서는 안식일이 지난 다음 날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예수님의 무덤을 방문한 여인들이 이야기를 각기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안타까움이 남아있었습니다. 사랑하며 따르던 주님의 죽음도 인정하기 어려운데 그의 시신을 정성껏 장사하지 못한 것이 마음 아팠습니다. 안식일이 지나기를 기다렸다가 다음날 날이 채 새기도 전에 이들은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향품을 들고 무덤을 찾았습니다. 무덤은 열려있었고 시신은 간곳이 없었습니다. 마가는 여자들이 얼마나 놀랐던지 떨면서 무덤에서 도망했고 무서워서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기록했습니다. 무서워 떨던 그들에게 예수님이 먼저 찾아오셨고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는 슬퍼하던 다른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했지만 그들은 마리아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두 제자는 길에서 예수님과 대화하는 몇 시간 동안에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생전에 여러 차례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에 대해 말씀했지만 제자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마음에 두지도 않았습니다. 부활을 기대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부활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부활을 믿고 대비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무거운 돌로 무덤의 입구를 막아놓고 병사들을 동원하여 무덤을 지키던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주님이 다시 살아날 것에 대해서 말했던 것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믿지 못했던 그 말을 반대자들은 믿고 대비했습니다. 참 아이러니합니다. 마치 우리가 사는 세상은 교회를 향하여 세상과 구별된 거룩함을 요구하는데 교회와 성도들은 세상과 비슷하게 어울려 살고 싶어 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부활신앙은 생활의 원칙을 점검하게 합니다.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사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농사가 아주 잘되어서 소출이 많아지자 좁은 창고를 헐어 버리고 다시 크게 지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이제는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안락하고 여유로운 생활을 준비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생명의 주인인 하나님의 기대보다 자기의 성공과 부에 더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어리석은 부자라고 불립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눅 12장에서 이 비유를 들면서 ”자기를 위하여 보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않은 자가 이와 같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오늘 아침 새벽예배를 마치고 세미터리에 가서 먼저 가신 분들을 생각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서너 분의 무덤을 돌아보며 나의 삶을 돌아보고 기도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업적과 성공을 이루는 것도 필요하지만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노력하는 영적인 일에 더 마음을 두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가족을 먼저 보낸 분들에게는 늘 아쉬움이 있습니다. 베다니 동네의 나사로의 동생인 마르다와 마리아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조금만 더 일찍 도착했으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부활신앙을 알게 하려고 나사로가 죽은 지 며칠이나 지난 뒤에 방문했습니다. 포기하고 낙심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11:25-26) 생명의 주인이신 그 분이 곧 부활이며 생명이라는 말씀입니다. 마르다는 재림 때에 죽은 자들이 다시 살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했지만 예수님은 현재 경험할 수 있는 부활을 말씀했습니다. “내가 곧 부활이고 생명이다.” 생명을 주관하는 주님이 그날에 거기서 나사로를 살렸습니다.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신 것은 마치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말씀하실 때에 “스스로 있는 자”(I am that I am) 라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Be 동사를 사용하여 존재 그 자체를 말씀했습니다. “내가 부활이고 생명이다.”(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주님은 재림 때에 일어날 나중의 부활이 아닌 현재, 지금의 부활을 보여주시려고 나사로를 그날에 살렸습니다. 재림 때의 부활도 필요하지만 지금 나와 함께 하는 부활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누리게 하는 주님의 임재가 오늘 우리들의 일상에서 경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서 천국을 누리고 살아야 합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과 함께 하면 사나 죽으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분과 함께 하는 것 그것이 영생이고 곧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시어 모든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었습니다. 죽은 자들이 다시 살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죽음 너머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도 알려 주셨습니다. 죄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린 주님처럼 우리도 오늘 부활의 능력가운데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죽어도 잠시 쉬다가 부활할 것이고 살아서 주님을 맞으면 순간에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되어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먼저 보낸 슬픔을 이길 수 있는 힘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도 부활에 대한 소망 때문입니다. 살아도 죽어도, 건강할 때도 약할 때도, 성공해도 실패해도 우리는 주님과 함께 하는 승리한 사람입니다. 부활의 능력을 이미 경험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부활신앙은 고난과 어려움을 극복하게 합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노래했습니다. 바로의 병거와 군대를 바다에 던진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깊은 물이 적군을 삼키고 주님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이 신앙을 가지면 문제를 만나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문제 너머의 하나님의 해답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좌절과 두려움가운데 있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는 담대해졌습니다. 의심 많던 도마도 확신 있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사울의 변화를 보십시오. 그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 그는 앞장서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로 변했습니다. 고난마저 기쁨으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고전 15:16-20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롬 8:37-39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부활신앙으로 무장하십시오. 오늘 주시는 부활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볼품없는 씨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아름다운 꽃을 피웁니다. 썩을 육체를 심어 영광스러운 부활로 주 앞에 설 것입니다. 부활 생명을 얻은 자로 담대하게 살면서 그 생명을 나누어 주십시오. 하나님을 높이고 사람을 복되게 하는 영적 승리를 누리십시오. 고난 가운데서라도 승리하게 하시는 부활신앙의 능력이 모두에게 넘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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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18
종려주일의 교훈(요 12:12-16)

우리는 지난 몇 주간동안 사순절을 보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십자가에 초점을 맞춰 묵상하고 기도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간 날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의 교훈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1. 영적으로 깨어 있으라.
큰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 때라서 예루살렘에는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때마침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개선장군을 환영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행렬을 맞았습니다. 종려나무가지를 손에 들고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면서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중들의 환호에 어울리지 않게 새끼 나귀를 타고 초라한 모습으로 성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요 12:14-15은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기록된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라고 말하면서 스가랴의 예언을 성취시킨 예수님을 설명했습니다. 슥 9:9-10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조금 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맞은 편 마을에 가서 매어있는 나귀를 끌고 오라고 했습니다. 나귀 주인이 물으면 주께서 쓰시겠다고 대답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했고 나귀주인은 선뜻 자신의 나귀를 내주었습니다. 스가랴가 예언했던 메시아는 공의로운 왕으로 오셔서 이방인과 땅 끝까지 구원을 베풀고 화평을 전할 분입니다. 그분은 겸손하여서 나귀새끼를 타고 오실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예수님이 자신의 나귀를 쓰겠다니 드디어 메시아의 예언이 성취되는가 하여 기쁨으로 자신의 나귀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예언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그 시간을 감지할 수 있는 영적 예민함이 있었습니다. 자기의 전 재산인 나귀를 드리면서도 예언이 성취되는 일에 사용된다는 기쁨과 감격이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은 주님과 함께 일하는 기쁨을 누립니다. 주님은 지금도 성령을 통하여 세상역사에 관여하며 구원역사를 진행해갑니다. 먼저 구원받은 사람들을 불러 또 다른 사람을 구원해 갑니다. 주께서 쓰겠다고 할 때에 선뜻 내드리는 깨어있는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2. 생각과 기대의 차이를 극복하라.
메시아에 대한 예언은 구약역사에 반복적으로 나타났는데 왕으로 임하여 백성들의 억압을 풀어주는 해방자의 모습으로 예언되기도 했고 고난 받은 종으로서의 모습으로도 예언되었습니다. 특히 이사야는 고난 받는 종에 대하여 예언했습니다. 사 53:2-5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시간이 지나면서 영광스런 왕의 모습으로 임하는 메시아에 대한 기대는 점점 커진 반면에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모습은 잊혀져갔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던 사람들이 종려가지를 흔들며 외친 함성도 ‘호산나’였는데 그 뜻은 “제발 구원해주십시오, 이스라엘의 왕이시여”였습니다. 왕으로 오시는 그가 자기들의 한을 풀어줄 것을 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적 능력을 가진 분이니 로마의 압제에서 자신들을 능히 구원해 주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잃어버린 다윗왕의 영광도 되찾아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겸손히 나귀를 타고 고난당하러 가는 예수님은 생각이 달랐습니다. “겸손하다”는 말은 “비천하게 되다”, “가난하게 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사람들의 존경과 추앙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가난하게 되어 십자가에서 죽기 위함이었습니다. 왕의 위엄이나 무력으로 세상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대접 받기를 원하지 않았고 스스로 낮추어 사람이 되었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복종했습니다. 마 20:18~19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삼 일에 살아나리라.” 말씀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여 승천하신 이후에야 비로소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나귀 새끼를 타신 겸손하신 왕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요한은 요 12:16에서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라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이 고난의 현장에 있던 예수님을 뒤로하고 떠나버렸던 이유가 바로 이 생각과 기대의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자기 판단과 기대보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를 따라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예수님과 함께 생각하고 함께 행동할 수 있습니다.

3.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
눅 9:23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죄 없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죄인들 가운데 들어왔고 죄인들을 살리기 위해 죽었다면 이 은혜로 새로운 삶을 사는 성도들은 자신에게 위임해주신 자신의 십자가를 날마다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는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주님의 뜻을 수용하면서 겪는 어려움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할 때에 겪는 손해와 아픔입니다. 남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고 용납하기 위한 고난입니다. 화해와 사랑을 나누기 위한 자기 포기입니다. 배고프고 소외된 사람, 상처받고 깨져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한 자기희생이 곧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때에 예수 십자가 보혈의 죄 용서가 또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게 됩니다. 십자가는 부활이 있기에 의미 있습니다.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은 또 다른 사람에게 부활과 구원을 맛보게 하는 주님과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빌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번 주 한주간은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더 깊이 묵상합시다. 각자에게 맡겨진 주님의 일을 바로 감당하려는 돌아봄과 헌신이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 목요일과 금요일 저녁에는 함께 모여 기도합시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원을 이루신 주님을 더 사랑하고 그에게 진심으로 충성을 다하는 믿음의 진보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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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18
주님을 섬기는 기쁨(눅 8:1-3, 막 15:39-41)

헌신예배를 드리는 여선교회 회원들과 함께 헌신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주님께 드리는 헌신은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마음과 정성을 드리는 행위일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드리는 행위이기에 마치 종이 주인을 대하는 것처럼 주님을 향한 감사와 사랑과 충성이 충분히 전달되도록 몸과 마음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내 것을 드리는 것이지만 조금 힘에 겹도록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도네이션하는 것처럼 드리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 우리의 물질과 시간과 생명까지라도 주님의 것이라고 소유권을 인정하며 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런 헌신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고 보상해 주십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요 12:24-2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롬 14:17-18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 중에 여자들도 많았습니다. 갈릴리에서 사역할 때부터 예루살렘 수난의 장소까지 함께 따랐던 여인들도 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운명하는 가슴 아픈 장면도 지켜보았고 안식일 때문에 서둘러 장사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는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날이 채 새기도 전에 무덤으로 찾아가 시신을 다시 수습하려고 했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누구보다도 먼저 만났습니다. 이들은 어느 제자보다 더 훌륭한 제자의 모습을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눅 7장에는 예수님의 발에 비싼 향유를 부은 이름 없는 여인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한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받아 식사하실 때에 한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입 맞추고 눈물을 흘리며 머리로 예수님의 발을 문지르고 그 발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이 여인은 동네사람 모두가 비난하고 무시하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식사 자리까지 나간다는 것은 많은 고민과 갈등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향한 헌신과 사랑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께 받은 죄 용서의 은혜와 사랑이 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비난하는 부자 바리새인에게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라고 비유로 말씀하시고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부자는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지만 그녀는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겼습니다. 부자는 입 맞추지 않았지만 그녀는 예수님의 발에 입 맞췄다고 칭찬했습니다. 그녀의 행동은 죄 사함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난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헌신이었습니다. 눈물과 입맞춤으로 드리는 그녀의 헌신은 최고의 사랑 고백이며 사죄의 은혜에 감사하는 행위였습니다. 주님은 ”네 죄가 사해졌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라고 그녀의 헌신을 기뻐 받으시고 죄 용서를 다시 확인해 주셨습니다.

눅 8:1-3에도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라고 말합니다. 이런 여인들도 자신이 경험한 주님의 은혜 때문에 주님과 함께 하는 일이 즐거웠고 그 일이 우선순위가 되었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자원하여 주님을 따르며 그의 필요를 채우고 도왔습니다. 인간적인 사랑이나 인기 연예인을 좋아하는 정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 가시는 구원사역을 위한 협력자가 된 것입니다. 적지 않은 시간과 물질을 사용했을 텐데도 그들의 행적조차 구체적으로 기록되지 않았고, 심지어는 이름조차 거론되지 않았지만 진정한 섬김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후 5:14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강권한다’는 것은 ‘에워싸다, 사로잡다, 통제하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바울이 얼마나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받은 은혜가 컸던지 그리스도의 사랑에 포로가 되었다고 표현했습니다. 그의 수고와 고난이 아깝지 않았고 삶 전부를 드리고도 오히려 감사할 만큼 그가 받은 주님의 사랑과 은혜는 컸습니다. 이 마음은 바울의 동역자들에게도 그대로 전수되었습니다.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고린도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났는데 천막 만드는 일을 하던 그들은 바울 사역의 거의 모든 시간동안 함께 했습니다. 바울의 경제적인 필요를 공급한 것뿐 아니라 복음 전도 사역에도 최선을 다하여 협력했습니다. 자기 집을 열어 교회를 개척하기도 했습니다. 롬 16:4에서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라고 할 만큼 헌신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헌신은 주님의 십자가 사랑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죄에서 자유하게 하고 생명을 누리게 하려고 십자가에서 죄의 결과로 오는 죽음을 자초하셨습니다. 이 대속의 죽음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 값을 더 이상 묻지 않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 구원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여 예배로 우리의 마음을 표시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몸과 마음으로 표시하고 실천하는 봉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입니다. 교회를 힘 있게 세워가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진행시키는 것입니다. 은사를 따라 여러 기관과 부서에서 책임을 감당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는 말입니다. 주방에서, 기도로, 성가대로, 교실로, 안내위원으로, 청소하고 쓰레기 치우는 일로, 음향과 파워포인트로, 재정부에서 협력하여 일로 주의 몸인 교회를 세워갑니다. 구역에서 모여 기도하고 음식을 먹고 서로 격려하며 마음을 나눕니다. 새 가정을 환영하고 관심을 기울입니다. 한글학교와 문화학교를 통하여 생면부지의 이웃들을 섬깁니다.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일이 없습니다. 모두가 주의 은혜에 감사하여 드리는 자원봉사입니다.

롬 12:8: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수고는 기쁨으로 주님께 드리는 적극적인 감사 표현입니다. 주님을 기쁘게 하고 믿음이 약한 지체들을 격려하고 복음이 필요한 사람을 주님께 안내하는 사역입니다. 역사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우리가 손과 발로 쓰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는 귀한 일입니다.

감사는 제 시간에 해야 그 의미가 제대로 전달됩니다. 감사나 헌신은 내일로 미룰 것이 아닙니다. 자녀양육이 끝나고 시간여유가 있을 때나 혹은 경제적인 안정을 이루고 나서, 졸업 후에, 좋은 직장이 생기면 봉사하겠다는 사람도 있는데 사실 내일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오늘 호흡이 있을 때에 주님께 감사하고 기쁨으로 사는 것이 부름에 합당한 자세입니다. 내가 처한 형편이 어떠하든 오늘, 지금, 여기서 정성을 다하여 드리는 헌신이 값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그것을 귀하게 인정해 주시고 칭찬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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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18
나무에 달린 구주 예수님(민 21:4-9, 요 3:14-21)

애굽에서 해방되어 가나안을 향하여 이동하던 여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40년간의 황량한 광야생활을 우리는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여러 차례의 전쟁과 넉넉하지 않은 먹 거리, 낮의 더위와 밤의 추위는 견디기 쉽지 않았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을 이미 경험했지만 현실문제에 부딪히면 그들의 믿음 없는 마음이 쉽게 드러나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루셨고 곧 회개하게 했습니다.

한계를 지닌 인간
민 21:4-5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에돔 땅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두 차례나 그 땅을 통과하게 해달라고 에돔 왕에게 간청했지만 거절당했고 오히려 이스라엘을 공격하겠다는 협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척박한 남쪽 길로 돌아 한참을 더 여행해야 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상했고 불평은 점점 커졌습니다. 결국 음식에 대한 불평으로까지 번졌습니다. 광야에서 목숨을 유지하게 했던 만나까지 보잘것없는 떡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을 약속으로 받았지만 수십 년을 광야에서 떠돌았고 아직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상태입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광야생활은 두려움으로 다가왔고 약속에 대한 믿음도 흔들렸습니다. 현실문제에 빠지면 영적인 기준도 흔들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평소의 영적 훈련이 더 필요합니다. 거기다가 부정적인 것들은 전염병처럼 빨리 번집니다. 불평과 원망은 패망의 지름길입니다. 이들을 보십시오. 은혜에 대해서 감사는커녕 당장의 불편한 것 때문에 모든 것을 부정하는 믿음 없는 행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만나를 먹고 광야 생활을 해왔고 특별한 보호와 인도를 경험했습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무엇인가 하고 만나를 보며 놀라고 감사했고 40년 동안이나 먹던 것인데 문제 가 더 크게 보이자 그것이 하찮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들의 불평은 단순한 불평이 아니었습니다. 출애굽 이전의 애굽의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불신앙이었습니다. 참으로 인간은 거룩한 것을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부패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회개를 위한 도구
공의로운 하나님은 사랑하는 그의 백성들을 죄 가운데 그냥 두지 않고 깨닫고 회개하게 했습니다. 광야에 흩어져 있던 독사인 불뱀을 불러서 불평하던 사람들을 물게 하셨습니다. 뱀은 애굽인들이 섬기던 신들의 하나이기도 하니 애굽을 그리워하던 그들의 생각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뱀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나라를 방해하던 사단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영적 성장보다는 현실 문제를 더 중요하게 여기도록 하고 세상 재미에 마음을 빼앗기게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일에 마음을 두지 못하게 유혹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부정적인 동물까지도 심판의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불평하던 사람들이 뱀에 물려 고생하다가 죽는 것을 보고는 자기들의 잘못을 회개했습니다. 모세에게 와서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라고 부탁했습니다. 인간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하면 말문을 닫아버리거나 아니면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토설하게 됩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고통을 통하여 자신을 깊이 돌아보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모세와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다는 것은 큰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치유
모세는 백성들의 죄를 위해서 다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구원에 관심을 갖고 그것에만 눈을 두어야 합니다. 변덕스런 사람의 마음을 보면 실망하기 쉽습니다. 이런 믿음 없는 백성들을 위해서 다시 중보 할 수 있다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서로를 인정하고 기도하며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성도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도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고 그것을 보는 자들을 살려주셨습니다.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고 그 뱀을 쳐다보게 하는 것이 해결책이었습니다. 민 21:1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 즉 모두 살더라.” 구원의 길은 단순합니다. 믿음은 단순해야 합니다. 장대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면 생명을 얻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를 분석하거나, 약효를 검증하려고 한다거나, 다른 권위자의 설명을 들으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놋뱀 자체에 기적을 일으킬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지가 관건이었습니다. 불뱀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개시키려고 하나님께서 사용한 도구였고 놋뱀은 그것을 바라보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치료책이었습니다.

나무에 달린 구주 예수님
예수님은 놋뱀처럼 십자가에 달렸고 그를 믿는 자를 구원해 주십니다. 요 3:14-15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미 구약에서 나무에 달린 놋뱀을 통하여 생명 얻는 일을 예시적으로 보여 주신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려 대신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는 사람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믿는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롬 3: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생명을 얻습니다. 하나님을 반역하다 불뱀에 물린 자는 누구든지 놋뱀을 바라보면 살았습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던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 어떤 문제에도 불평하지 말고 주님만 바라보십시오. 그가 주시는 영생의 기쁨을 일상에서 누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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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8
복음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요 2:13-17)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공급하심을 경험하며 애굽이 아닌 하나님께만 마음을 둔 생활이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십계명을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원리를 배웠습니다. 하나님만 섬기고 예배하는 원칙과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것은 세상에게 하나님을 보여주는 제사장나라로 살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경험한 초대교회도 하나님이 하시는 구원역사를 세상에게 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구원받은 우리들은 성령을 모신 하나님의 집이며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거룩한 성전입니다.

예수님은 기능이 바뀐 성전을 보고 분노했습니다. 채찍으로 양과 소를 다 성전에서 몰아내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엎어버렸습니다. 성전에 예배하러 오는 사람들의 편리를 위해 돈을 바꿔주고 희생제물을 팔던 일이 아예 본업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가 도적의 소굴이 되어버렸으니 화를 내고 짐승들을 내몰고 상을 뒤엎는 일은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며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의 구원을 전하는 장소입니다. 구약시대는 성전에 직접 나오지 못해도 그곳을 향하여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둔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에 잡혀가서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했던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성전에서 드리는 희생 제물의 피가 죄 용서와 기도응답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신약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믿고 하나님께 나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모시고 사는 우리들은 이 시대를 위한 성전입니다. 세상의 소망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한 것은 죄의 책임과 벌이 다 해결되었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은 황소와 염소의 피로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으로 드린 그 희생으로 우리가 거룩함을 얻고 영원히 온전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은혜는 믿음으로 받습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어떤 사람에게는 별 의미 없는 것이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수치스런 것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과 능력이 됩니다. 그 결과로 오는 자유와 기쁨도 함께 누립니다. 고전 1:18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기에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변화된 삶의 열매를 보고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름에 합당한 삶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보여준 것입니다. 공의로운 하나님은 죄를 결코 묵인할 수 없으며 반드시 벌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롬 3장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심판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그 심판을 우리 대신 받았습니다. 동시에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증표입니다.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 아들을 십자가에서 대신 죽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 은혜는 믿는 자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믿게 될 수많은 사람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자랑하며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는 일을 우리에게 위임해 주셨습니다.

고전 1:30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시며, 의와 거룩함과 구원이 되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혜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하여 알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혼돈 가운데 있던 우리가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과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며 그 후에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사는 부활이 약속되어 있고 주님과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어진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복음을 함께 나누는 증인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서게 되고 거룩한 삶을 살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 우리의 구세주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믿고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이 믿음은 우리를 움직이게 합니다. 단순히 교회에 출석하고 지식으로 아는 정도에 머무르게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하게 하며 변화된 삶의 열매를 맺어 다른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합니다.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했습니다. 열매는 삶의 변화입니다. 죄인이 의인된 변화에서 오는 열매입니다.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고 나누는 삶의 변화입니다. 이 열매는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통로가 되고 농부이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증거가 됩니다.

여러분은 어떤 변화를 경험했고 지금 진행 중에 있습니까?
용서받은 자의 빚진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있습니까?
사랑받은 자답게 사랑할 수 없는 사람까지 품고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모습은 바뀌었습니까?
속마음을 나누고 문제를 상의하고 싶은 푸근한 사람이 되었습니까?
이해타산 없이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믿음의 사람입니까?
믿지 않는 사람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고 싶은 제사장입니까?

주님의 삶과 사역을 묵상할 때에 성전을 깨끗하게 하셨던 주님의 마음이 이해되기를 원합니다. 이시대의 성전으로 부름 받은 우리들이 그 부름에 합당하게 살고 있는지 바른 방향조정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복음을 믿는 일과 열매를 맺는 일에 대한 객관적인 점검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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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18
믿음으로 삽시다 (창 17:1–7, 15–16, 롬 5:6-10)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은 점점 하나님에게서 멀어졌고 홍수 심판 이후에도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그들은 교만해져서 바벨탑을 세우고 하나님의 권위에 대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불러 하나님만 인정하는 믿음의 공동체, 하나님의 백성을 다시 일으킵니다. 아브람에게 자기가 살던 땅과 민족과 섬기던 신들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며 열국의 아비,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이 약속은 이삭과 야곱을 지나면서 점점 현실화 되어 갔고 요셉 이후에 큰 민족으로 발전하고 모세를 통하여 가나안 땅을 보게 됩니다.

창 15장에 하나님께서 환상 가운데 아브람에게 나타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네가 받을 보상이 매우 크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별을 보여주며 아브람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아브람은 그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창 15:6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의로 여겼습니다. 창 15:18 “바로 그 날, 주님께서 아브람과 언약을 세우시고 말씀하셨다. “내가 이 땅을, 이집트 강에서 큰 강 유프라테스에 이르기까지를 너의 자손에게 준다.”

아브람에게 주신 언약은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될 것과 가나안의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를 통하여 민족을 세우고 모든 민족이 복을 얻게 하는 제사장 나라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창 17:2-4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아브람에게 반복하여 확인해 주시는 언약은 비록 그 언약이 일방적인 은혜로 주어진 것이지만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진행하는데 절대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약속대로 400여년의 시간이 흐르자 이스라엘은 민족을 형성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가 늘어나자 애굽은 두려워 그들을 압제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가운데서 부르짖는 이스라엘의 소리를 듣고 모세를 통해 구출하여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그 땅으로 인도했습니다. 홍해의 기적과 광야훈련을 마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기 24장에서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받은 말씀과 법규를 말하자 모든 백성들은 그 말씀을 지키겠다고 약속합니다. 모세는 청년들에게 산 아래에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합니다. 그리고 짐승의 피를 받아서 반은 제단에 뿌리고 반은 백성들에게 뿌려 약속의 표로 삼습니다. 그들이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신명기 5:1-3에 출애굽 2세대들이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에 모세는 하나님이 주신 계명의 말씀을 다시 가르칩니다. 신 5:1-3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아 오늘 내가 너희의 귀에 말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그것을 배우며 지켜 행하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와 언약을 세우셨나니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조상들과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 과거 그들의 부모와 맺은 하나님과의 약속이 과거의 사건으로만 끝나지 않고 오늘 자신들과 맺은 약속이라고 말합니다. 그런가하면 신 29:14-15에서는 “이 언약과 맹세는 주님께서 당신들하고만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이 언약은, 오늘 주 우리의 하나님 앞에 우리와 함께 서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오늘 여기 우리와 함께 있지 않은 자손과도 함께 세우는 것입니다.”라고 말하여 자기들의 신앙고백이 후손들에게도 대물림되게 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갈 3: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행 2:39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와 또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사람, 곧 우리 주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사람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이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과 복을 어떻게 취할 수 있는가 하는 근거가 됩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일들이 오늘 나의 신앙고백을 통하여 내 것이 됩니다. 이것은 나의 신앙고백이 후손에게 흘러가게 하겠다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만물이 존재하기 이전에 우리를 계획하셨고 믿음의 선배들과 약속하실 때에 이미 우리와 후손들까지 염두에 두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나 현재나 미래의 모든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고백할 때에 그 언약 안에서 구원을 누리게 됩니다. 비록 사람들은 그 언약을 놓치는 때가 있지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언약을 완전하게 이루셨습니다. 예수께서 마지막 유월절 음식을 드시며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 이라고 말씀하시며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선언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과 복은 오늘 우리들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 밖에 있던 우리들을 예수 믿게 했고 그 믿음을 보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복이 되게 했습니다. 성령님을 보내 구원을 보증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게 하고 죄를 이기고 거룩하게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우리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또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합니다. 항상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성령을 통하여 지켰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이렇게 진행된다면 오늘 우리는 단지 구원에 대한 감사에서만 머물 수 없습니다. 그 감격이 또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믿음의 열매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한 가정의 아버지인 아브람을 여러 민족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이 되게 하고 한 남자의 아내였던 사래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인 사라가 되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그렇게 바꿔주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품는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했습니다. 1900년경 프랑스 추기경 수핸드는 “증인이 된다는 것은 선전에 몰두하거나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이 아닌 살아있는 신비함이 되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것이 살아있는 신비입니다.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을 따라 순종하는 것이 믿음의 생활입니다. 사순절의 기도와 묵상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이 더 굳게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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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18
너희 구원을 이루라 (막1:9-15)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라고 말합니다. 구원이 사람의 노력이나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빌 2:12에서는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구원 받은 것에만 만족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며 성장하여 하나님과 함께 일할 수 있는 믿음의 지경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자세와 그 하나님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섬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구원을 이루기 위한 자기관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회개의 설교를 하며 세례를 베풀고 있을 때에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러 왔습니다. 세례요한은 자기가 예수님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형편인데 오히려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세례를 받겠다니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세례 받는 일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 3:13-15″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자 하늘이 열리고 성령께서 비둘기같이 내려와 예수 그리스도께 임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예수님의 공적 사역을 인준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늘 영광을 버리고 육체를 입고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겸손하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수용했습니다. 죄가 없으면서도 죄인들이 받는 회개의 세례를 받기 위해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죄가 없었지만 인류 구원을 위해서 대신 죽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우선하며 살았기에 가능한 영적승리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이 타락하여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찾게 해주셨습니다. 에덴의 기쁨을 다시 누릴 수 있게 했습니다. 더 이상 죄와 어둠에 머물지 않고 빛에 거하며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했습니다. 우리가 세례 받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은 이 모든 일들이 나에게 적용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주장이나 생각으로 살던 옛 생활을 떠나서 변화된 사람으로 사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롬 6:3-4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바울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여정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홍해사건을 세례로 해석했습니다. 고전 10:2-4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신앙생활은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고 그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며 구원을 받았지만 곧바로 가나안으로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광야의 어려움 속에서 생활습관을 바꾸는 훈련을 시켰습니다. 광야의 훈련은 고통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해결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려는 것입니다. 애굽의 우상숭배와 세상적인 가치관을 버리도록 훈련한 이후에야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비로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입니다.

구원받은 신자는 성품이 변해야 합니다. 구원은 신분의 변화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배워가며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능 따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성막을 중심하여 하나님과 매 순간 교통했던 것처럼 구원받은 우리들은 성령의 교통하심 가운데 매일이 예배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약한 어린아이 단계에서는 먼저 찾아와 주시고 일방적으로 은혜를 주시지만 구원받은 이후에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응답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 살려는 의지적인 자기 경영이 꼭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말씀하신 곳에 번제 단을 만들고 이삭의 어깨에 있는 장작을 내려 단을 쌓습니다. 그리고 묵묵히 아들을 묶어 그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하는 순종을 기뻐하십니다.

구원받은 사람들도 종종 욕심에 미혹되어 넘어집니다. 욕심을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더 장성하면 사망을 낳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욕심에 결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로 나가 금식하신 후에 사단에게 시험을 받았지만 그 싸움에서 모두 말씀으로 이겼습니다. 시험을 당할 때에 어떻게 이길 수 있는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약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라고 했습니다. 생명의 면류관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이 우리로 인내하게 합니다. 구원의 확신과 감격이 있는 우리들은 약속된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보며 구원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사순절 첫 주일 입니다. 사순절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고난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기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의미를 묵상하고 그를 따르는 제자로서의 생활을 훈련하는 기간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님을 통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연습해 봅시다. 내가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스스로 절제하고 이웃의 필요를 위해 자신의 것을 나눠봅시다.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말씀과 기도에 집중해 봅시다. 주께서 이미 이루어놓은 그 승리를 우리 생활에서 경험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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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8
우리가 믿고 전하는 것 (막 9:1-8)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바른 신앙을 고백을 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베드로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고 죽었다가 부활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자 그럴 수 없다고 항변했습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이해하기도 어려웠고 수용할 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고 베드로를 꾸짖었습니다.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의 일을 판단한 실수입니다.

며칠 후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오르신 예수님은 얼굴이 해처럼 빛나며 옷이 눈과 같이 희게 변했습니다. 3절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 마치 모세가 하나님과 대면하고 산을 내려왔을 때에 그의 얼굴이 밝게 빛나서 사람들이 두려워했던 것과 같았습니다. 모세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서야 시내 산에서 받은 율법을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자신의 영광스러운 원래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잠깐 보여주었습니다. 부활 때의 모습이나 재림 때의 모습도 이런 모습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줌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신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율법과 선지자들의 대표로 이해되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대화를 나누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눅 9:30-31에서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 새.” 라고 대화의 내용을 소개했습니다. 구약의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와 선지자를 대표하는 엘리야가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들이 존경하던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을 보니 예수님이 율법과 예언의 성취를 위해서 오신 메시아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이해하지 못하고 반대하던 제자들의 눈을 열어주려는 예수님의 배려였습니다. 베드로는 이 황홀한 체험이 얼마나 좋았던지 예수님께 초막 셋을 짓고 더 머물자고 조심스럽게 제안했습니다.

때마침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음성도 들렸습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의 표시입니다. 그러니 이 소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제자들 앞에서 인정하고 세워주는 확실한 증거였습니다. 이 음성은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들리던 음성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왕권을 가지고 오신 분이라는 것을 확신시켜 준 것입니다. 1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가 있다.’고 하신 말씀이 바로 앞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적 체험은 참 신나는 일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담대하게 합니다. 엘리야는 우상 숭배자들과 싸워 이겨 사람들의 마음을 여호와에게 돌아오게 했습니다. 기도하여 비도 그치게 했습니다. 불 병거와 불 말을 타고 승천했습니다. 엘리사도 능력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며 일했습니다. 모세도 하나님의 능력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우리와 같은 보통사람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자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일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며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는 것은 신비이며 큰 감격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말하며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구약에서 제한된 사람에게만 주어졌던 하나님 영광의 비밀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벗겨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으로 모든 죄의 값이 치러진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은 구원을 위한 준비가 다 끝났다는 것이며 이제 믿는 자 누구나가 죽음에서 벗어나 생명을 얻게 된다는 선언입니다. 예수께서 운명하실 때에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찢어져 지성소와 성소의 구분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밝히 드러나 믿는 자들이 담대히 하나님을 뵈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사장들만 드리던 제사를 이제는 예수 믿는 사람 누구나가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 예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중보자가 되고 대제사장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 안에서 누리는 특권입니다.

그러니 오늘 그 은혜가운데 있는 것이 필요합니다. 과거의 경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황홀한 영적 체험을 한 제자들마저도 부활을 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만났고 올바른 신앙고백도 했던 사람들입니다. 귀신을 내쫓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사역을 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도망치고 무서워 숨었습니다. 이것이 한계입니다. 많은 체험과 배움이 있었지만 여전히 자기 욕심과 한계를 넘어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변모산의 경험 직후에도 누가 더 큰가를 다툼했으니 말입니다. 나 중심의 신앙생활에서 오는 한계를 보여준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기도한 것을 들어보십시오. 엡 1:17-1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신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믿는 사람들인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여러분이 알기 바랍니다.”

인간의 한계를 가진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고 나서야 비로소 주님을 바로 알고 자기사명도 알고 능력 있게 일할 수 있었습니다. 행 5:41을 보니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고서도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것을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고백하며 자기가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성령께서 알려 주고 경험하게 한 은혜였습니다. 자기 경험과 의지보다 성령의 인도에 순종한 결과였습니다.

우리들의 신앙고백은 어떤 것입니까? 이번 주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묵상하는 절기입니다. 우리가 믿고 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정리해 봅시다. 오늘 내가 경험적으로 만난 주님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도와주시는 성령의 은혜를 날마다 구하고 따라갑시다. 오늘의 승리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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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8
하나님의 일꾼(사 40:21-31, 고전 9:16-27, 막 1:29-39)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을 구출하는 일을 맡기며 하나님은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 여호와로 소개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열방을 구원하는 제사장 나라로 사용하려고 이스라엘을 불렀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그 뜻을 온전하게 따르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은 이 일을 포기하지 않고 인내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따르는 사람들을 때마다 불러 필요한 은혜를 주시며 함께 일했습니다.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셨고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주셨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는 말씀이 그것을 증명해 줍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이 인간 구원을 위해서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셨습니다.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육체를 가진 사람으로 살면서 인간의 한계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희생양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을 받들었습니다. 보냄을 받은 자로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했습니다.

사역을 시작하면서 야고보와 요한, 시몬과 안드레를 불러 함께 일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열병을 꾸짖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열병이 떠났고 그녀는 주님께 수종을 들었습니다. 이 일은 베드로의 장모 뿐 아니라 제자들이나 주변 사람들의 관심을 예수님께 향하게 했습니다. 이 소문을 듣고 환자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곳에 머물지 않고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라고 말씀하며 복음전도의 일을 우선했습니다.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쫒는 기적을 행하는 일에 묶이지 않고 복음을 먼저 전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처음 설교하면서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외쳤습니다. 사역의 방향과 목적이 결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아침이 밝기 전 새벽에 한적한 곳에 나가서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사역의 원동력이 기도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었지만 틈만 나면 기도했고 아버지의 계획을 확인하고 도움을 구했습니다. 육체를 입은 아들의 위치에서 아버지의 권한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그 뜻을 받들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만족시켜야 하는 뜻에 따르기 위해서 인간적인 고민을 드러내는 솔직한 기도도 했습니다. 바쁘고 중요한 일을 위해서는 더 열정적으로 기도했습니다. 겟세마네의 기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기도해야했다면 믿음으로 살기를 작정하는 우리들은 더할 나위가 없습니다.

부름 받은 사람들은 생각이나 행동이 부름에 합당해야 합니다. 바울이 고난을 무서워하지 않았던 것은 자기 사명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많은 일을 하고도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한 것은 그 부름을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질그릇과 같이 연약한 자신에게 귀한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것을 오히려 감격해 했습니다. 자신의 약함을 통하여 능력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는 복음 사역을 위해서 결혼도 하지 않았고 의식주도 스스로 해결하며 자기가 사용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마저 포기했습니다. 한 영혼이라도 더 얻으려는 마음으로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처럼 눈높이를 맞추며 전도했습니다. 롬 9장에서는 골육친척이 믿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그것이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딤후 2장에서는 예수의 군사로 부름 받은 자로 설명했습니다. 자기의 생활에 얽매이지 않고 불러주신 분의 의지를 따라야 할 것을 말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자기 권리를 주님께 맡기고 주님을 우선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그분의 필요를 채우면 그분이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성령께서 교회를 세우고 우리를 불러 예수님이 길과 진리이시고 생명이라고 증언하게 했습니다. 우리가 이 부름 안에 있으면 진정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이 시대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대리자들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사역하던 리빙스턴이 오랜만에 영국으로 돌아와 박사학위를 받고 답사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선교지에서 겪었던 어려운 일에 대해서 듣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리빙스턴은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가서 할 일들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나이 많고 병든 선교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염려했지만 오히려 리빙스턴은 이렇게 사람들을 위로했습니다.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혼자 가는 게 아닙니다. 세상 끝날 까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 살아계신 주님이 나의 친구로 아프리카의 모든 길을 동행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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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18
사람을 사랑하는 하나님 (막 1:21-28)

하나님의 인간사랑은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아담과 그 후손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지금까지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그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한 구원의 길을 준비하고 믿는 사람 모두를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십자가에서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여 이방민족과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게 했습니다. 바로와 그가 믿는 신보다 하나님이 더 크신 분이라는 것을 모두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고 사역을 시작할 때에 먼저 사단에게 시험을 받게 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이 일을 통하여 예수님은 말씀으로 사단을 물리쳤고 사단의 권세보다 크신 하나님임을 공개적으로 드러냈습니다. 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게 되자 사단은 스스로 이겼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죄를 해결하고 구원하실 완전한 길을 여셨습니다. 불의가 득세하고 정의가 사라진 것 같은 오늘의 현실에서도 하나님은 구원의 일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방법대로 신실하게 구원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요 10:10에서 예수님은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마귀는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일을 멸하고 마귀에게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풀어주려고 오셨습니다. 마귀를 능히 이길 수 있는 주께서 마귀에게 방해를 받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를 사용하여 크신 하나님을 드러내고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게 하신 하나님을 보면 이해가 갑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영적인 긴장을 남겨놓은 것도 우리를 깨어있어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또 다른 사람까지 구원받게 하려는 하나님을 의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 읽은 마가복음의 기록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가르칠 때에 서기관들과는 달리 권세 있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귀신들린 한 사람이 소리를 지르고 말씀사역을 방해했습니다. 귀신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묘하게 예수님이 별 볼일 없는 나사렛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흩어 놓았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귀신을 내쫓았고 그 사람을 고쳐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되었고 이 소식은 삽시간에 소문을 타고 퍼졌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했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더 흥왕하게 되었습니다.

사탄은 마귀라고도 불리는데 단지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차이입니다. 귀신은 단수 혹은 복수로 성경에서 사용되었는데 사단의 졸개로 이해하면 됩니다. 용어가 어떻든 마귀는 영적인 존재이며 인격체라는 것을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던 천사가 스스로 교만해져서 타락했고 죄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나라를 방해합니다. 그러나 결코 승리하지 못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영적인 부흥이 있는 곳마다 마귀의 방해가 나타납니다. 때로는 우는 사자처럼 공격적으로 방해하기도 하고 때로는 광명한 천사처럼 위장하고 성도들을 괴롭혀 죄를 짓게 합니다. 그리고는 그 죄를 참소하고 고소합니다. 죄책감에 사로잡혀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결국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떠나도록 유혹합니다.

막 5장의 군대귀신 들린 사람, 9장에 거품 물고 쓰려져 말 못하던 사람,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고쳐준 점치는 여종을 묶고 있던 존재, 예수님을 팔도록 유다의 마음을 움직인 것, 베드로에게 들어가 십자가 사역을 방해 한 것, 모두 마귀의 장난입니다. 예수님은 기쁨과 평안을 주지만 마귀는 불평과 불만을 줍니다. 감사가 사라지게 하고 영혼을 마비시켜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고 예배 생활을 흩어 놓습니다. 분주하게 하고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일에 관심을 갖게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순종하지 못하게 하고 내일로 미루게 합니다. 결국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가있지 못하게 합니다.

어떻게 마귀를 이길 수 있습니까? 약 4: 7는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벧전 5:8-9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엡 6:10-11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마귀는 대적하고 물리쳐야 합니다. 주께서 재림하여 마지막 심판하시는 날에 마귀는 결박되어 바닥없는 감옥 곧 무저갱에 영원히 갇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시간이 끝나는 것이지요. 그 날까지 우리들은 영적싸움을 계속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피의 공로를 믿고 하는 싸움입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룬 예수님의 승리를 지켜내는 싸움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허리 띠, 의의 호심경, 평안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암송하여 생활이 되게 하고 전투적인 기도를 하여 어둠의 세력과 상관없는 생활을 지속해갑니다. 십자가 앞에 자신을 내려놓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날마다 순종하며 살기를 훈련합니다. 우리는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고 성도 가운데서 일하시는 성령님을 믿습니다. 그분은 만물을 만드신 분이며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영으로 우리 안에 거하며 도와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승리를 바라보는 또 다른 사람에게 구원의 일을 행하십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일에 사용되고 있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눅 9:1-2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
마 28:18-20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롬 8:26-27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요일 5:18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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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18
나를 따라오라 (욘 3:1-10, 막 1:14-20)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을 구원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요나를 통하여 그소식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순종하지 않았고 멀리 도망쳤습니다. 니느웨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었고 더구나 자기나라를 괴롭히는 당사자였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부름을 외면하고 도망치다가 풍랑에 시달리고 뱃사람들에게 혼나고 결국 바다에 던져져 고기 뱃속에서 삼일을 보내며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은 물고기를 명하여 니느웨 해변에 요나를 토하게 했고 니느웨 사람들에게 다시 말씀했습니다. 그 일은 여전히 어려웠고 적국을 이롭게 하는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주의 부르심을 일하는 부름으로만 이해하면 어렵습니다. 부름의 이유와 목적을 알면 하나님과 함께 생각하고 함께 일하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생명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마지못해 메시지를 전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사용하여 온 성이 구원받게 했습니다. 성경은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었다고 말합니다. 왕도 권좌에서 내려와 베옷을 입고 회개했고 심지어 짐승까지도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재앙을 거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구원에 있습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요나는 자기 욕심을 따라 니느웨가 망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행하는 구원조차도 불합리하다고 불평했습니다. 성이 어떻게 망하는지 지켜보려고 동산에 올라가 초막을 짓고 지켜보던 요나에게 하나님은 박넝쿨로 그늘을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요나가 좋아할 때쯤에 벌레 먹어 말라버리게 하고 뜨거운 동풍까지 불어 그를 괴롭게 했습니다. 불평하는 요나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욘 4:10-11).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첫 설교에서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메시아의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예언했던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그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라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 나라의 사람으로서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생활을 청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삶을 정비하는 것입니다. 경건하지 않은 것이나 도덕적이지 못한 것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더나가서 생각의 틀을 완전히 바꾸는 일입니다. 자기가 주인 되어 판단하고 생각하던 것에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 뜻을 우선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거룩하게 살려는 열망까지를 포함합니다. 죄인들만이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죄 용서를 받은 성도들도 회개해야 합니다. 교회가 생명력을 잃는 것은 거룩함에 대한 열망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숙해 지려는 의지가 약해지고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 자리를 지키려는 열심도 약해졌습니다. 첫사랑을 잃어버리고 세상살이에 도취되었습니다. 아담에게 사단의 유혹은 맛있어 보이고 보기에도 좋고 하나님처럼 될 수 있는 보장된 출세의 길로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때마다 회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고 약속합니다. 예수를 주로 믿으면 아담이 빼앗겼던 기쁨을 다시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생각하고 함께 일하게 됩니다. 자녀의 권리를 누리게 됩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고 영생의 기쁨을 누립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나라에서 그의 백성으로 살게 됩니다. 이 땅에서도 천국을 누립니다. 이것이 주안에서 누리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요 5:24은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맛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답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활을 누립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보고 계시록을 마무리하면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소리쳤습니다. 복음의 신비와 능력을 맛본 후의 외침입니다. 우리도 이 기쁨을 날마다 누리다가 주께서 재림 하실 때에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으로 ‘마라나타, 아멘 주예수여 오서 오시옵소서.‘를 외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 기쁨을 주시려고 제자들을 불렀습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라는 부름은 일에 대한 부담을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동역의 기쁨을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부름에 응답했던 제자들이 단순히 지식적인 배움이 부족한 어부들이라서 그리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배와 어구가 있었고 인부들도 부릴만한 재정능력이 있었습니다. 안정된 생활을 하던 그들이 더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내가 드디어 메시아를 만났다. 너도 와서 그를 만나보라.’고 형제를 초청했던 제자들의 모습을 요한복음이 소개했습니다. 로마 제국으로부터의 해방을 기다리던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를 만났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 것이며 그가 부르시는데 어찌 배와 그물이 더 중요했겠습니까? 아버지와 일꾼들까지 남겨두고 즉시 따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습니다.

믿음은 더 가치 있는 것을 위해서 덜 가치 있는 것을 버리는 일입니다. 영원한 것을 위해서 일시적인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거룩한 것을 위해서 세상적인 것을 버리는 일입니다. 좁은 길이지만 주님과 함께 하는 기쁨이 있는 그 길을 선택하는 일입니다. 나의 힘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일하시는 현장에 함께 있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동역의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 모두를 이 기쁨에 초청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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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18
자신을 보여주시는 하나님 (삼상 3:1–10 시 139:1-10 요 1:35–51)

어느 날 세례요한이 제자 안드레와 요한과 함께 길을 가다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이 분이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세례요한의 소개에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디에 묵고 있는지 궁금했고 결국 그날 오후 4시쯤에는 예수님과 함께 묵게 됩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잘 설명해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육을 입고 오신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예수님과 한 집에 묵었다는 것은 메시아이신 그 예수님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일 년에 하루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제사를 지내고 속죄소를 통하여 주시는 용서를 받고 하나님을 경험하던 황홀한 영적 경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랍비 곧 선생님이라고 부르던 그들이 ‘우리가 드디어 메시아를 만났다.’라고 환호성을 지르는 것을 보어서 그렇습니다.

신앙은 신비입니다. 이론과 철학으로 설명 할 수는 있지만 많이 배우고 안다고 이 맛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체험입니다. 만남입니다. 믿음입니다. 계산하고 분석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입니다. 우리 내면에 하나님의 임재가 일방적으로 침범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성령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 뿐 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을 경험하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이 경험 때문에 모든 삶을 바뀝니다. 다른 사람을 변하게도 하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일하게 됩니다.

안드레는 자신이 경험적으로 알게 된 메시아를 만난 기쁜 소식을 형제 시몬에게 말합니다. 그리고 그를 예수님께 소개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의심쟁이 시몬은 반석을 의미하는 베드로로 불리는 변화를 경험합니다.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그의 삶 전체의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음날 예수님은 갈릴리로 가는 길에 빌립을 만나 자신을 따르라고 부릅니다.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었습니다. 이미 친구에게서 들었던 그 메시아를 드디어 만나게 된 것입니다. 빌립도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나다나엘에게 메시아를 만난 소식을 전합니다. 나다나엘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직접 와보라고 끈질기게 권면하여 예수님께 데리고 갑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보자마자 정직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칭찬해 주십니다. 자신을 먼저 알아보는 예수님 때문에 놀랐는데 예수님은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던 것까지를 다 알고 있었습니다. 나다나엘은 신적 권위를 가진 메시아를 경험적으로 알게 됩니다. 결국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예수님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신비도 보게 될 것이라고 칭찬을 듣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이 바뀝니다. 생각이 바뀝니다. 삶의 방향과 목적이 바뀝니다. 예수님이 신적 권위를 가진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거론한 성경 인물들은 자기 역사 안에서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아를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으니 어찌 소원을 이룬 것 같은 감격이 없겠습니까? 마음속의 기쁨이 친한 친구들에게 알려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말하는 것뿐 아니라 친구들도 주님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막을 수 없는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구원의 감격을 경험적으로 맛보게 되면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만나 변화된 확증이 있는 사람은 혼자만 가지고 있을 수 없습니다. 친구들에게 말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친구들도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전도요 교회부흥입니다.

구원의 감격을 새롭게 경험하고 입을 열어 말하고 친구들을 주님께 인도하면 그들을 변화시키는 일은 주께서 하십니다. 마가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이 거라사 땅에서 군대 귀신 들린 청년 하나를 고쳐줍니다. 청년은 감사한 마음에 예수님과 동행하기를 원했지만 예수님은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 주께서 하신 일을 식구들에게 말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막 8장을 보면 데가볼리 지역에서 말씀을 전할 때에 사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바로 이 청년의 간증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변화된 삶의 간증은 자신을 신나게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예수님께 관심을 갖게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연히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가운데 진행되는 일입니다. 먼저 부름 받은 사람의 책임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시 139:2-4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제와 오늘 내일을 모두 아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행위를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불러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을 경험한 신자는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이것이 소문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넓어지는 것입니다.

삼상 3:19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성전에서 자라던 사무엘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보여주시더니 때가 되니 하나님을 대신하여 일하는 선지자가 되게 했습니다. 그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은 사무엘을 노하여 일하실 때에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거룩하게 준비하여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도와주십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알고 죄 용서를 받게 하는 제사장적 사명을 감당하게 합니다.

고전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가 할 일은 죄에게 몸을 내주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사는 자기관리입니다. 영적 감동과 체험이 날마다의 원동력이 되게 합시다. 그러면 빛과 소금으로 살게 됩니다. 친구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결과가 만들어집니다. 이것이 우리를 불러 거룩하게 하고 영광가운데 거하게 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건강을 주시며 풍성한 은혜와 복을 주시는 목적입니다.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시는 하나님을 날마다 경험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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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8
소망을 하나님께 (시편 146:1-10)

또 한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세상은 많이 변하여 살기 편해졌고 먹을 것도 풍성해졌고 삶의 질도 높아진 것 같은데 여전히 행복하지 못한 사람도 많고 어려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진 자는 더 가지려고 남의 것을 빼앗고 미워하고 죽입니다. 자연재해와 전쟁난민, 테러의 위협도 끊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큰 나라도 아메리카 우선주의를 주장하며 자기의 것을 지키려고 약자를 윽박지릅니다. 모두가 함께 사는 방법보다는 더 가진 자의 편안함을 누리기를 원하여 서로 경쟁합니다. 결국 돈의 힘을 가지려는 것입니다.

바울은 딤전6:17-18에서 “그대는 이 세상의 부자들에게 명령하여, 교만해지지도 말고, 덧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도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셔서 즐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하십시오. 또 선을 행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낌없이 베풀고, 즐겨 나누어주라고 하십시오. 그렇게 하여, 앞날을 위하여 든든한 기초를 스스로 쌓아서, 참된 생명을 얻으라고 하십시오.”라고 디모데에게 권했습니다. 돈을 따라가지 말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것입니다. 재물은 세상살이에 꼭 필요한 것이지만 자족하지 못하면 유혹을 받고 올무에 빠져 자신을 망치기 쉽습니다. 그래서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라고 합니다.

더구나 경건을 추구하는 신앙인에게는 더욱 조심해야할 것입니다. 앞날을 위해서 든든한 기초를 쌓은 것과 참된 생명을 얻는 일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세상이기에 신앙인의 실제 생활에는 많은 갈등이 있습니다.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힘쓰고 자기 것을 나눠주고 동정하는 것이 매력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우선순위를 정하지 않으면 세상 방법대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물질에 대해서는 자족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영적인 것에는 더 열심을 내야만 우리의 영성을 지탱할 수 있습니다. 공부하는 일이나 직장을 얻는 일, 심지어는 교회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것까지도 하나님의 기대인지 나의 욕심인지를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시편 146:1-2에서 시편기자는 세상의 귀인을 의지하지 않고,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일을 평생 반복하여 실천하겠다는 자신의 결심을 의지적으로 표현했습니다.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5절에서도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합니다. 야곱은 인간적인 약점이 많은 보통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거짓말도 하고 약삭빠르게 자신의 것을 챙기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야곱까지도 선택하여 약속의 반열에 세워주셨고 사용했습니다. 그와 맺은 언약을 신실하게 지켰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이 나를 불러주신 하나님입니다.

6절 이후에서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언제나 약속을 지키는 분입니다. 억눌린 자를 위해 공정할 판단을 내리시며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갇힌 자를 석방하십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넘어진 자를 일으키시며 의로운 자를 사랑하는 분입니다. 나그네를 보호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하나님입니다. 그런가하면 악인의 계획은 좌절시켜버리는 분입니다. 그러니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께 소망을 두라는 것입니다.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갈 6:7-9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영적 세계의 기쁨을 맛본 우리이지만 거대한 산처럼 버티고 있는 세속의 물결과 유행 앞에서 위축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믿음이 필요하며 의지적인 자기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소망을 주님께 둡니다. 영적인 것을 심어 영생을 거두려는 소망을 갖습니다. 우리가 완전하지 못하지만 그러기에 완전하신 주님께 소망을 둡니다. 정치 경제 사회의 전반적인 부분에서 불투명하고 불안한 마음이 있지만 그러기에 지금도 세상 역사를 다스리는 주님께 소망을 둡니다. 우리의 건강을 장담할 수 없기에 우리 몸을 만드신 창조의 주님께 소망을 둡니다. 우리의 내일을 알 수 없기에 모든 것을 아시는 전능하신 주님께 소망을 둡니다.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의 약함을 아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올해에도 열심히 예배하고 기도하며 영적 성장을 이루고 구역과 소그룹 모임에서 함께 그 사랑을 나눌 것입니다. 문화학교를 통하여 지역사회와 교류하며 주께서 허락하신 영육간의 복을 이웃들과 함께 나눌 것입니다. 직분을 맡아 봉사하는 직원들이나 우리 모두가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우리의 욕심과 뜻을 내려놓고 성령과 함께 생각하고 순종하는 삶의 훈련을 계속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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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1/17
영혼이 잘됨 같이(요삼 1:1-8)송구영신예배

새해가 되면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귀에 듣기 좋은 덕담일 뿐이지 그런 인사를 한다고 복이 들어오는 것은 아닙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알고 바른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이 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 삼서는 사도 요한이 가이오에게 쓴 개인적인 편지이며 신약성경 중에 가장 짧은 책입니다. 나이 지긋한 사도 요한이 가이오에게 ‘사랑하는 가이오’ 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서 둘의 관계가 복음 안에서 아주 가깝다는 것과 가이오가 어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인지를 이미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말했습니다. 가이오는 이미 진리 안에서 영적 삶에 승리하고 있었고 전도자들과 신자들을 섬기는 일에 본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더욱 형통하고 건강하여 복음사역을 계속하라는 격려입니다. 나가서 스스로 교만하여 전도자들을 환영하지도 않고 사도들을 욕하고 교인들을 오히려 교회에서 내쫓기까지 하는 나쁜 영향력을 행사하는 디오드레베의 악행을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고 따라가는지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사도는 성도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것을 듣는 것만큼 기쁜 일이 없었습니다.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라는 표현은 가이오의 신앙생활을 말해줍니다. 영혼이 잘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영혼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세상적인 복을 가지게 되면 그것 때문에 오히려 타락하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힘들게 할 수 있습니다. 영혼이 잘되는 것은 그래서 제일 중요한 복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알고 신뢰하고 따르는 사람이 누리는 복입니다. 이 복은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를 염려하기보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이 누리는 복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던 믿음의 선배들이 누리던 의인의 복입니다. 시편에서 말하는 복 있는 사람이 누리는 복입니다. 하나님과 영적 교통을 누리는 구원받은 우리들이 누리는 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누리는 크고 제일가는 복입니다. 성령과 함께 사는 복입니다. 하나님의 비밀과 깊은 지식도 깨닫고 이해하게 된 복입니다. 하나님의 선하고 온전한 뜻을 분별할 수 있는 복입니다. 제한된 육체를 가지고 살면서도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복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범사가 잘되는 형통의 복이 임합니다. 삶의 모든 부분에 하나님께서 관여하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의 공부와 취직 결혼의 문제도 잘 풀립니다. 일하고 먹고 사는 일도 사회생활의 성공도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먼저 영이 잘되는 것이 범사를 형통하게 하는 우선조건입니다. 히 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도와 함께 거하며 하시는 성령의 일입니다.

요셉은 형통한 복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젊어서부터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지 않고 거룩하게 살려고 몸부림 한 결과입니다. 영적 삶에 승리한 그를 하나님께서 형통한 삶을 누리게 했습니다. 창 39: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창 39: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새해 여러분의 생활에 하나님이 함께 하는 증거가 더 풍성하게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신명기 28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는 자가 얻을 복에 대해 말합니다. 말씀대로 사는 하나님의 사람은 성읍에서도 들에서도 복을 받고, 몸의 자녀와 토지의 소산과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까지도 복을 받고,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습니다. 시편 1편에서도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복 있는 사람은 형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복을 누린다고 노래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부름에 합당하게 삽니다. 제사장적 소명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구원과 하나님의 복을 나눠주는 일에 자신을 헌신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삽니다. 자신의 편리함과 재미보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따라 삽니다. 이런 형통의 복을 누리기 바랍니다.

사도 요한은 가이오가 강건하기를 위해서도 기원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형통을 누리며 즐겁게 살면 건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건강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신명기 28장에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을 때 질병이 있을 것을 경고했으며 반대로 말씀을 순종하는 자에게는 건강을 약속했습니다. 때로 질병을 통해 회개하게 하시고 회복시켜 주시기에 모든 병이 저주라고 말하면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건강하고 형통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복입니다. 잠언 3:7-8,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 했습니다.

새해에도 여러분의 영이 먼저 잘 되는 영적 복을 누리기 바랍니다. 그것 때문에 범사가 형통하고 건강한 은혜와 복을 누리십시오.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며 사는 여러분에게 육적 삶의 필요도 더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며 나눌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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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1/17
신앙의 덕목(엡 4:25-32)

한 해를 마감하는 날입니다. 올해는 루터가 카톨릭 교회의 부패성을 지적하고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며 종교개혁을 시도한지 5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때마침 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지적이 교회 안팎에서 들립니다. 교회가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나 세속화되었다는 지적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이 그를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그래서 적당히 타협하거나 여기까지만이라고 선을 그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적당하게 사랑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스스로의 선택이든 누구의 도움이든 불길에서 벗어나 살아난 사람은 이전의 생각이나 방식대로 살 수 없습니다. 다시 얻은 생명과 기회를 주님의 기쁨이 되기 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한낮의 정오에 해보다 더 밝은 빛이 그를 비췄고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 하느냐‘는 히브리 방언으로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반사적으로 ’주여 누구십니까?‘라고 물었고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자신에게도 몸을 보여주셨다고 증언하는 것을 보아 그의 체험은 너무나 실제적이어서 그를 변화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바울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가 사는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가 중요하게 여기던 이전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죽을 위기를 넘기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그에게 늘 우선순위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의 성도들에게 위엣 것을 찾으라, 새사람을 입으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감사하라고 권하면서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용납, 용서, 사랑, 평강, 말씀, 권면, 찬송, 감사를 언급했습니다. 또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옛 생활을 청산하고 벗어 버리라고 말하며 음란, 사욕, 정욕, 탐심, 분냄, 노여움, 악한 뜻, 비방, 거짓말 등을 말했습니다. 오늘 읽은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변화된 성도의 덕목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엡 4:25-27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바울은 변화된 성도의 새 생활에 대해서 말하며 먼저 거짓과 참에 대해서 말합니다. 거짓은 마귀의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귀를 거짓의 아비라고 표현했습니다. 에덴에서 하와를 거짓말로 속여 죄짓게 한 것도 마귀입니다. 분을 삭이지 못하고 계속하여 품는 것은 마귀에게 지는 것입니다. 화를 내거나 오해하거나 미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빨리 해결해야 합니다. 그것을 계속하여 품고 있으면 기도도 할 수 없고 마귀가 더 큰 문제로 비약하도록 장난질합니다. 비록 상대는 깨닫지 못하고 사과하지 않더라도 원수 갚는 일마저도 하나님께 맡기라고 했으니 그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힘든 과정을 견디며 신앙생활하다가도 순간에 다 망쳐버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엡 4:28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다음은 경제생활입니다. 거짓이나 지나친 욕심, 도둑질은 고생하지 않고 편하게 살려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성도는 정당하지 못한 이익을 멀리하고 오히려 수고하여 얻은 것으로 선한 일에 손을 펴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번 돈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임을 인정하는 청지기 정신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정당하지 못한 곳에 함부로 사용하지 못합니다. 돈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그의 인격과 신앙수준이 보입니다.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알듯 돈을 사용하는 과정과 출처를 보면 그가 어디에 마음을 두고 있는지가 보입니다.

주께서 기대하는 선한 일은 가난한 사람을 유익하게 하고 먹이고 입히며 함께 풍성함을 누리게 하는 일입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일은 하나님이 모두를 먹인다는 사회정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도, 그날의 만나를 매일 먹으며 하나님만 의지하던 광야 백성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손만 바라보는 성도의 자세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영적인 나눔인 전도사업과 물질적인 긍휼사역이 모두 포함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내 것처럼 주장하지 않아야 합니다. 나눠줄 때에 더 채워주시는 복을 받습니다.

엡 4:29-32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다음은 언어생활입니다. 말은 인격과 신앙의 표현입니다. 예수님도 형제에게 ‘라가’(바보)라고 하면 공회에 잡혀가고 ‘미련한 놈’이라고 말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했습니다(마 5:22). 우리의 말이 사람을 세우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선한 말로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일은 중요한 덕목입니다. 잠 10:11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지만,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고 있다.” 잠 12:18 “함부로 말하는 사람의 말은 비수 같아도, 지혜로운 사람의 말은 아픈 곳을 낫게 하는 약이다.” 마 12:35-36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우리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하는지 책임을 물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입에 재갈을 물려야 합니다.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야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구원의 일이 우리에게 적용되도록 보증하고 날인을 해주시는 분입니다. 문서에 도장을 찍어 효력이 나게 하는 것처럼 성령의 인침은 우리로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주심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하는 일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시고 믿음으로 살게 하십니다. 그러니 불건전하고 나쁜 말을 입 밖에 내지 말고 덕을 세우고 은혜로운 말을 하여 성령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경건하고 선하고 진실한 믿음의 말을 해야 합니다. 서로를 인정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도 언어로 나타납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사랑도 언어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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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4/17
은혜를 입은 사람(삼하7:1-17 시89:1-4,19-26 롬16:25-27 눅1:26-38)

구약에서 은혜라는 말은 사랑, 인자, 자비와 같은 하나님의 성품을 말하는 ‘헤세드’ 라는 단어와 하나님이 사람에게 혹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베푸는 과분한 호의를 뜻하는 ‘헨’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단어가 말하듯 은혜란 경건한 자와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을 지켜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말합니다. 신약에서는 ‘카리스’라는 헬라어 단어를 사용했는데 사람을 끄는 매력이나 아름다움, 호의적인 태도나 친절에 대한 감사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말할 때 사용했습니다. 결국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호의와 선물을 말합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와서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라고 문안하며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라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갑작스런 인사의 뜻을 몰라 의아해 하자 천사가 하나님의 계획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제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이름을 ‘예수’라고 불러라. 그는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며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 그의 조상 다윗의 보좌를 그에게 주실 것이니 그가 영원히 야곱의 집을 다스릴 것이며 그의 나라는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아직 남자를 모르던 마리아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천사는 ‘성령님이 네 위에 내려오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너를 덮어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나실 거룩한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라고 하며 친척 엘리사벳 할머니가 나이 늙어 임신했던 사실을 예로 들며 ‘하나님에게는 안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합니다. 마리아는 ‘저는 주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되기를 바랍니다.’ 하고 순종했습니다.

마리아의 말은 자기를 포기하고 죽음도 받아들이겠다는 결단이 있는 순종이었습니다. 처녀의 임신이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때이니 쉽지 않은 결단이었을 것이지만 자신을 종으로 이해하고 주님의 계획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자기 포기와 믿음의 결단이었습니다. 이 결단과 순종으로 인류 구원을 위해 오시는 예수님을 잉태하는 엄청난 은혜를 입었습니다. 보잘것없는 갈릴리 나사렛의 시골 처녀가 하나님의 아들을 낳은 어머니가 되었으니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대개는 우리의 일들이 잘 풀리고 행복할 때에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사람을 선택하고 그에게 능력을 주고 인도하고 보호하며 승리하게 하십니다. 사명을 위해서 은혜와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형편에서든지 하나님의 부름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사람이 은혜를 누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으로 순종하는 우리의 응답이 있을 때 열매를 맺게 됩니다.

구약의 노아도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그는 방주를 지으며 오랜 시간 사람들의 놀림을 받았지만 그것을 믿음으로 견디며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순종했습니다. 믿음으로 순종하여 방주에 들어간 그의 식구들만이 홍수 심판에서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한 장을 써 내려갔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하여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새로운 땅으로 떠났습니다.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할 때에도 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약속대로 큰 민족을 이루고 열국의 아비가 되게 했습니다.

오늘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다윗에게 주시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다윗의 집과 나라가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다윗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는 약속은 다윗이 받은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이 약속 때문에 그가 실패했을 때에도 사울처럼 버려지지 않고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혈통을 통하여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께서 오랜 동안 감추어 두셨던 비밀을 예언자들을 통하여 공개하셨고 모든 이방 사람들까지라도 믿고 순종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 하나님의 신비한 계시를 따르는 일이라고 설명하며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들에게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우리도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날마다 베풀어 주시는 은혜 안에 삽니다. 그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여 우리를 먼저 불러 구원하셨고 은혜를 주셨습니다. 예수 탄생 소식과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소식이 더 많은 다른 사람에게까지 흘러가게 되기를 원하여 우리를 불러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마리아처럼 자기 뜻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우선하여 순종하는 생활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주님의 평강과 은혜를 이웃들과 함께 나누는 복된 성탄절 보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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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7/17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사 61:1-11, 시 126, 살전 5:16-24, 요 1:6-8, 19-28)

메시아는 히브리어이고 그리스도는 헬라어인데 라는 같은 뜻의 말입니다. 남쪽 유다 왕국이 망하고 포로생활을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아가 나타나 다윗왕조를 다시 회복시킬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도 로마의 압제 아래에 있으면서 메시아가 오면 그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해주실 것이라고 믿고 기다렸습니다. 메시아는 하나님이 보내는 구원자입니다.

이사야 61:1-2은 메시아 사역과 그 결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고, 주님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다.” 메시아를 통하여 얻게 되는 구원은 영적인 구원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일상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고 그 결과 누리게 되는 기쁨까지 입니다. 황폐해진 곳을 다시 쌓고 무너진 곳을 바로 세우는 변화입니다. 다른 사람의 일손을 빌려 양도 치고 포도원도 돌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것입니다. 열방의 재물이 손에 굴러 들어와 마음껏 쓸 수 있는 부귀영화의 회복도 포함됩니다. 그동안의 수치가 모두 사라지고 그 대신 갑절의 상속을 받고 영원한 기쁨을 차지하게 되는 회복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꿈을 꾸는 것 같은 기쁨과 감사 찬양이 흘러넘치는 날입니다.

인류구원을 위해서 오신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던 이스라엘 뿐 아니라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은총을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게 했습니다. 우리들을 예수그리스도로 옷 입혀 주시어 죄를 가려주시고 의인 되게 했습니다. 롬 10:4은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끝마침이 되어서 모든 믿는 사람에게 의가 되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주님이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게 됩니다.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니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세어보며 마음껏 기뻐하십시오. 신랑에게 제사장의 관을 씌우듯, 신부를 패물로 단장시키듯, 주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혀 주셨고, 의의 겉옷으로 둘러 주셨으니, 내가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이 당연 합니다.

땅이 싹을 내고 움트게 하듯이 하나님께서 모든 나라 앞에서 의와 찬송을 샘솟듯 솟아나게 하실 것입니다. 구원은 기쁨을 위한 것입니다. 기쁨은 믿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기쁨으로 일상을 살아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기를 힘쓰십시오. 그럴 수 없다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기쁨의 회복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기쁨의 근원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래서 모든 것이 감사할 조건이 되게 만드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인간극장이라는 프로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출연자들이 긍정적이고 기쁜 성격의 소유자들입니다. 평범한 일상을 살며 때로는 갈등과 문제를 만나지만 결국 서로 사랑하고 기뻐하며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마음이 훈훈해지고 영적인 깨달음까지 얻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생활이나 교회 공동체의 생활에서 기쁨을 잃어버리게 하는 그 어떤 말이나 결정은 하나님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희락과 화평이며 성령의 열매도 기쁨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롬 14:15에서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라고 했습니다. 자기에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일을 말하다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사랑하지 못하는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기 위해서나 더 완전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말하고 행동한 것들이 오히려 하나님 말씀과 거리가 생기게 하고 나가서 예수님의 죽음을 무의미하게 만들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

우리는 다 용서받은 죄인들입니다. 그러니 서로를 용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예수님도 형제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동일한 무게로 주신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통해서만 주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안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입술에 파수꾼을 세우십시오. 불평이나 비판, 부정적인 언어는 우리에게서 나오지 않게 하십시오. 대신 기뻐하고 감사하십시오. 그것이 주님이 오신 이유이며 우리를 구원해주신 이유입니다. 무슨 일을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를 따지는 것만큼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의롭게 살고 있는지를 점검하십시오. 주님 주시는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세례요한의 예수님 소개는 그가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행한 일이었습니다. 아니 그의 사역의 처음부터 거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냄새와 같았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요한의 사역을 보고 그가 메시아인지를 물었지만 요한은 뒤에 오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분명하게 소개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를 전도하는 일을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기쁘고 즐겁게 사는 우리들의 변화된 일상생활이 냄새 풍기듯 전해지면 좋겠습니다. 그 냄새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습니다. 능력에 있습니다. 그 능력은 우리의 일상에서 하나님사랑과 형제사랑으로 나타나는 생활의 열매입니다. 그 열매는 기쁨과 감사의 열매입니다. 하나님께 그리고 가까이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 그 열매가 드러나 보여야 합니다. 이것이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의 마땅한 열매입니다. 아직도 메시아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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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0/17
임마누엘 (사 40:1-11 시 85:1-13 벧후 3:8-15 막 1:1-8)

세례요한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미리 준비한 사람입니다. 그는 광야에서 불편한 삶을 살며 회개를 촉구하고 세례를 받게 했습니다. 백성들의 마음과 관심을 오시는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나이 많이 먹도록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어머니에게서 기적적으로 출생했습니다. 제사장이던 아버지 사가랴와 어머니 엘리사벳을 통하여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때가되니 그는 광야에 거하면서 회개하라고 외치는 소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 암흑과 같던 때에 때가 되니 세례요한을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깨우고 회개하고 세례 받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에 부름 받아 메시아의 오실 길을 준비하는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헤롯의 죄를 지적하다가 감옥에 갇히고 결국 목이 잘려 죽는 비운을 겪었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메시아 사역을 준비하는 역할을 잘 감당해 주었습니다. 예수를 위하여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보여준 사람입니다. 자신의 삶을 통하여 예수만 드러내고 사람들의 시선을 예수에게 향하게 하고 자신은 사라진 진정한 제자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피 흘림이 있어야 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 피 흘림으로 죄의 용서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은 죄에 눌려 광야같이 거칠고 황량해진 인간을 자우하게 하고 회복시켜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육체로 오셨습니다. 요 1:14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한 것처럼 은혜와 진리로 가득 찬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우리에게 알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친히 우리가운데 임마누엘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면서 절망가운데 있던 이 땅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적용되도록 오신 기쁜 소식 그 자체입니다. 이사야가 높은 산에 올라 예루살렘에 소리쳐 메시아의 오심을 전하라던 바로 그 소식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강한 자로 오셔서 다스리시고 보응하시고 그의 백성들을 먹이고 보호하며 인도하실 것을 예언했는데 때가 되니 그 약속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성령으로 지금도 우리 안에 계시며 때가 되면 재림의 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시편 저자는 두려움에 차서 주의 인자하심을 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에서 풀려나서 고향으로 돌아와 감격스런 재건을 시작했지만 다시 이방인과 통혼하고 안식일을 범하며 우상을 숭배하는 과오를 반복했습니다. 자신들의 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공의의 마음을 아는 영적인 사람들은 다시 벌을 받게 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자비와 인자를 구했습니다. 구원과 회복을 기도하며 긍휼을 구하던 이들의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메사아의 오심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한 것이며 진정한 회복이 시작된 증표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임마누엘로 우리 가운데 거하게 된 것이니 말입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따릅니다. 그런 우리들에게도 영적 갈등과 고민이 여전히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계명을 순종해야 하는 것을 알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연약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가 그랬던 것처럼 성령님의 도움을 기도하며 자비와 인자를 구합니다. 망령되고 헛되고 어리석은 것에 다시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자아에 묶인 옛 생활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를 기도합니다. 다시 넘어지거나 남을 넘어지게 하지 않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쳐서 주님께 복종하기를 힘씁니다. 말씀을 따라 순종하고 생활의 열매를 맺기 원합니다. 자기에 대하여 죽는 연습을 날마다 반복합니다.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 힘쓰고, 모이기에 힘쓰고, 예배에 우선순위를 둡니다. 우리가 수고하여 거둔 것인데도 주님의 것이라고 고백하며 십일조를 구분하여 돌려 드립니다. 구제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마음을 둡니다. 주변을 돌아보며 서로 사랑하기를 힘씁니다. 나는 죽고 주님이 드러나도록 힘쓰는 내편에서의 노력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한 흠과 점이 없는 성결한 생활이 곧 이것입니다. 거룩한 성도는 불타 없어질 세상에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더 많이 가지려고 경쟁하거나 빼앗지 않습니다. 내가 인정받기 위해서 상대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고 그의 거룩하심 가운데 머물기를 힘씁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품위를 지키고 성령 안에서 거룩함을 연습합니다.

바울은 살전 5:23-24에서 “평화의 하나님께서 친히, 여러분을 완전히 거룩하게 해 주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을 흠이 없이 완전하게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을 부르시는 분은 신실하시니, 이 일을 또한 이루실 것입니다.” 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우리를 찾아주셨고 부르셨고 거룩하게 하셨으니 또한 그가 우리로 승리하도록 도와주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도 노력하지만 결국 구원하시는 분은 절대 능력자이신 하나님임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알기에 두려움으로 섬깁니다. 그러면서도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가정과 교회와 나라의 일상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주십니다. 주의 자녀들이 평강가운데 거하게 하시고 우리의 잔이 넘치도록 채워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은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대림절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 주님을 다시 확인하는 기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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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3/17
깨어 있으라(사 64:1-9 시 80:1-7,17-19 고전 1:3-9 막 13:24-37)

이사야는 주전 740-680년에 활동하던 선지자입니다. 남 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우상숭배와 죄악상을 경고하고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범죄한 나라, 허물 진 백성, 행악의 종자, 부패한 자식, 하나님을 버린 자, 하나님을 만홀히 여겨 멀리 했다고 죄를 지적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평안을 빼앗고 회개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머리는 병들고 마음도 피곤하고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하고 터지고 맞은 흔적을 가진 사람과 같았습니다. 포도원의 망대나 오이 밭의 원두막처럼 조금 남겨둔 은혜가 아니면 벌써 소돔 고모라처럼 망해버릴 상태였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을 떠난 부정한 죄인들의 상태와 더러운 옷과 같은 이스라엘의 의를 선지자는 솔직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영적 상태가 말라버린 나뭇잎과 같고 죄악의 바람이 항상 옆을 스쳐간다고 표현했습니다. 더구나 아무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을 만큼 타락이 극에 달했고 주님을 굳게 의지하려고 분발하는 사람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주님마저도 얼굴을 돌릴 수밖에 없는 총체적인 문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신 토기장이라는 사실에 소망을 둡니다. 하나님은 그는 백성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결국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저자도 고통당하는 삶의 형편을 솔직하게 말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원수들에게 조롱을 당하고 눈물을 밥 먹듯 하는 선민의 한스러운 모습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더욱 하나님만이 구원해 주실 분이라는 것을 바라며 회개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주님을 떠나지 않을 것이니,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새 힘을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사실 구약 선지자들이 하나 같이 죄를 지적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며 회개를 촉구했지만 사람들은 죄에서 돌아서지 못했습니다. 나라를 빼앗기고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지를 못했습니다. 잠깐 돌아서는 듯 했지만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갔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주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설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스스로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습니다. 다행한 것은 죄를 벌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은 또한 사랑을 베푸시고 은혜를 주시고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형편에서든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주시고 그의 얼굴빛을 비춰주시는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기쁨의 소식이 되었습니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오듯이 인간의 죄를 더 이상 볼 수 없어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하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 양으로 이 땅에 보냈습니다. 그의 지상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생명을 주시는 주님으로 믿게 했습니다. 그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도 그 안에서 영생하도록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구분은 오늘도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일하십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부르셨고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갖게 했습니다. 친교는 의사소통뿐 아니라 모든 나눔과 교통을 말합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우리들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그러나 스스로에게는 거룩하게 살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주의 재림의 날에 책망 받을 것이 없는 거룩한 성도가 되기 위하여 영적 싸움을 계속해 가야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만한 힘이 없습니다. 오직 성령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을 소망하며 그의 인도하심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다심오심을 기다립니다. 주님은 큰 권능과 영광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가 처음 이 땅에 오셨을 때는 마구간에서 가난한 모습으로 태어났지만 다시 오실 때에는 권세 있는 왕의 모습으로 오실 것입니다. 심판하는 왕의 권위와 힘을 가지고 오실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며 주님 나라를 위해서 수고한 우리들을 칭찬해 주시고 영광의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주시고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하실 것입니다. 재림을 믿고 기다리는 우리들은 깨어 준비된 자로 오늘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롬 13:11-14 “여러분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압니다.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더 가까워졌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낮에 행동하듯이, 단정하게 행합시다. 호사한 연회와 술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에 빠지지 맙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마십시오.”

살전 5:1-8 “형제자매 여러분, 그 때와 시기를 두고서는 여러분에게 더 쓸 필요가 없겠습니다. 주님의 날이 밤에 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은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고 말할 그 때에, 아기를 밴 여인에게 해산의 진통이 오는 것과 같이, 갑자기 멸망이 그들에게 닥칠 것이니,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아니하므로, 그 날이 여러분에게 도둑과 같이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요,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자지 말고, 깨어 있으며, 정신을 차립시다. 잠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술에 취하는 자들도 밤에 취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낮에 속한 사람이므로,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을 가슴막이 갑옷으로 입고, 구원의 소망을 투구로 씁시다.”

하와이에서는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핵공격에 대비하여 대피훈련을 실시했습니다. 냉전시대 이후에 처음으로 사이렌이 다시 울렸습니다. 공격이 시작되면 주어진 시간인 13분 안에 대피할 수 있도록 미리 훈련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이보다 더 구체적으로 약속된 사실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로 옷 입어 거룩하게 준비된 주님의 신부로 일상을 살아가도록 훈련해야 하겠습니다. 준비된 종처럼 그리고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서 깨어 기다리는 준비된 신부처럼 살아야 하겠습니다.

대림절의 묵상과 기도가 이 일에 도움이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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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17
당신은 주님의 거룩한 신부입니다 (엡 5:16-17) 김천식 선교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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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9/17
감사를 연습하자 (골 3:15-17)

옥중에 갇혀 있는 바울은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평강이 삶을 지배하도록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의 도움을 바라며 의지적으로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처한 환경은 감사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주변에는 바울이 정말 사도인가를 문제 삼는 반대 세력들이 항상 있었습니다. 그를 사도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교인들이 항상 옆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에게도 그럴만한 문제들이 많았습니다. 머리도 벗겨지고 매부리코에 어깨는 처지고 배도 나온 볼품없는 외모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의 언변도 논리적이지 못했고 리더로서 결격사유가 될 만한 지병도 있었습니다. 아마도 간질병 같은 치명적인 병이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의 병을 위해 여러 번 기도했지만 치료받지 못했습니다. 자신을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육체에 찌르는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다면서 그 아픔을 그대로 수용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는 감옥에 갇혀 있는 부자유한 죄수의 몸입니다.

이런 형편에서 감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가 말하는 감사는 감사할만한 좋은 환경에서 드리는 감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드리는 감사는 대부분이 이런 것들입니다. 삶의 문제는 여전하고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고 보니 그것들이 우리의 평강을 빼앗아갈 만큼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뿐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 때문에 문제를 넘어선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밭에 소출이 없고 외양간에 송아지가 없어도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한 분만으로 기뻐하고 감사하겠다는 믿음의 결단이며 표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평강을 위해서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인도하셨고 은혜로 살게 했습니다. 민 6:24-26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시 29:11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시 126: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살전 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누군가에게 감사를 표시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땡큐 카드를 쓰든지 밥을 같이 먹든지 선물로 표시합니다. 어떤 방법이든지 감사한 마음이 잘 전달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물질이든 몸으로 드리는 헌신이든 혹은 입술로 고백하는 감사와 찬양이든 나의 편리보다 받는 분에게 기쁨이 되도록 잘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가 하신 구원의 일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의 유일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키고 우리를 구원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찾아오신 성령님을 환영하고 함께 살아가며 드리는 감사입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여 입술로 고백하고 몸으로 봉사하고 예물을 드리며 예배를 통하여 감사를 표시합니다.

이렇게 감사하면 마음에 평강이 찾아옵니다. 입술로 감사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하나님께 감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그 고백과 노래가 삶의 구석구석을 채우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경험하게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을 경험하게 합니다. 그래서 염려와 근심에게 평안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환경에게 하나님을 넘겨주지 않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승리하게 하고 형통을 누리게 합니다. 그래서 의지적인 감사연습이 필요합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설교에서 인용했던 플로리다 레이크랜드의 제일침례교회 제이 데니스 목사님의 감사에 관한 말씀을 소개합니다.

“당신이 많은 세금을 내야한다면 감사하십시오. 당신에게 안정된 직장과 사업장이 있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 당신의 몸무게가 늘어 옷이 맞지 않는다면 감사하십시오. 당신은 먹을 것이 넉넉한 인생을 살아오신 것입니다. / 세탁할 옷이 집안 한 구석에 쌓여 있거든 감사하십시오. 당신에게는 적어도 갈아입을 옷의 여유가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 당신의 집에 대청소가 필요하고 문고리를 갈아야 하고 창문을 갈아야 한다면 감사하십시오. 당신의 몸을 위탁할 집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 멀리라도 주차할 공간을 찾았다면 감사하십시오. 당신에게 잠시라도 걸어갈 운동의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 당신에게 불평할 대통령이 있다면 감사하십시오. 당신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 교회 뒷자리에 앉아 있는 교우의 찬송 음정이 엉망으로 들려오고 있다면 감사하십시오. 당신의 청각은 정상이기 때문입니다. / 아침에 울리는 자명종 소리가 고통스럽게 들리거든 감사하십시오. 당신에게 일어나 일해야 할 하루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 하루해가 저물어 온몸이 나른하고 피곤하거든 감사하십시오. 당신은 오늘 하루를 생산적으로 사신 것입니다.”

삶에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까? 감사를 먼저 시작해 보십시오.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미 그 문제가 해결되었습니까? 더 많이 감사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할 마음이 생겨날 것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입니다. 그 은혜의 바다에서 마음껏 수영하며 즐기는 일입니다. 찬송가 300장과 301장을 가사를 음미하며 함께 불러봅시다.

시 136편을 찾아서 함께 교독하고 싶습니다. 신실하시고 좋으신 하나님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 사랑과 자비는 영원합니다. 그가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신앙선배들이 고백한 것처럼 오늘 우리도 그렇게 노래합시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주들 중에 뛰어난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스라엘을 그들 중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홍해를 가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스라엘을 그 가운데로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바로와 그의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의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큰 왕들을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유명한 왕들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아모리인의 왕 시혼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바산 왕 옥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곧 그 종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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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17
감사할 이유 (빌 1:20-25)

지난 주간에 택사스의 작은 마을에서 총기사고가 일어나 26명이 죽고 20여명이 다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장모와 갈등을 빚던 총기 범이 장모가 다니는 교회에 가서 사람들을 무차별로 죽였습니다. 가정불화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한 사람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Federal Emergency Management Agency (FEMA)는 재난에 대처하는 일을 하는 기관인데 이번 총기사건을 즈음하여 교회도 위기 대처 팀을 구성하라고 제언했습니다. 만일의 경우에 교회는 회중들을 어떻게 대피시킬 것이며 어디로 피하게 할 것인가, 대피 이후에는 어떻게 위험을 외부로 알려 구조를 받을 것인가 하는 것들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치안 관계 기관과 협의하여 실제적인 대피훈련도 실시하라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가 총기를 소지하는 문제도 주정부와 상의하라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안전문제에 대해서 계획을 세워야 하겠다 싶습니다.

무고한 죽음을 보면서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 되어도 후회가 없도록 항상 준비된 채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바울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자세를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죽음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의연할 수 있었습니다. 죽음을 마지막이나 끝으로 이해하지 않고 새로운 시작으로 보았습니다. 천막을 치고 야영하던 사람이 그것을 걷고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는 것이나 나그네와 순례자로 살던 사람들이 자신의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고후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그는 하나님께서 주실 상급을 확신했기에 죽음을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숨이 멎으면 하나님께로부터 의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혹 그가 다시 살게 되면 교회를 돌보며 선한 열매를 거둘 수 있는 시간을 얻는 일이기에 어느 경우에도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자신만을 생각한다면 죽는 것이 좋지만 성도들을 복음 안에서 살게 하고 함께 선교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사는 것이 유익이라고 했습니다. 빌 1: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이런 정신을 가진 사람은 자신만을 위하지 않고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을 위해서 삽니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런 사라은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를 들어내고 존귀하게 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삽니다. 어떤 할머니는 손자가 대학 가고 결혼할 때까지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오느 분은 내가 우선 잘 되어야 신앙생활도 할 수 있다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나름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성도는 생존의 이유를 하나님의 영광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고백하며 믿음의 여정을 함께 걸어갑시다.
●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살리신 주인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삽니다.
● 나에게 주신 교회에 할 일이 있어서 오늘을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성도들을 신나게 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하겠습니다.
● 아마렉과의 전투에서 손을 들고 기도하던 모세와 그를 도왔던 아론과 훌처럼 중보기도하기 위해서 더 건강하게 살아야겠습니다.
● 사랑과 격려가 필요한 사람들을 돌보라고 나를 아직도 세상에 남겨두셨습니다.

이런 인생관을 가진 사람은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젊은 날에 일찍 주님을 믿게 된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건강할 때에 주님을 따르며 생산적인 일을 하며 하나님나라를 세워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맞이하는 날이지만 오늘에 대해 감사할 수 있습니다. 덤으로 주어진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눈뜨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하나님을 자랑할 기회를 다시 얻었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고난과 어려움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고난은 위장된 축복이라고 합니다. 고난을 통과하면서 주님의 임재와 도움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난은 우리를 정금같이 빛나는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갑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주석가인 매튜 헨리 목사님이 밤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매도 맞고 돈도 빼앗겼지만 오히려 세 가지를 감사했다고 합니다. 첫째는 매를 맞았지만 죽지 않았으니 감사하고 둘째는 남을 해치는 인생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 백성이 된 것을 감사했고 셋째로는 돈은 잃었지만 믿음과 영생을 잃지 않은 것을 감사했습니다.

시편 100:4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하셨고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시려고 영으로 함께 하십니다. 그 은혜를 받은 우리는 주님을 자랑하며 하늘 소망을 가지고 오늘을 삽니다.

또 추수감사주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세어보고 최선을 다해 감사를 표시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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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5/17
성찬예식의 유익 (눅 22:7-20)

1. 성찬예식은 십자가에서 찢기고 피 흘린 주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예식입니다. 이 예식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준비하는 책임 있는 신자로 자라게 합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세례 받은 교인에 한정하여 이 예식에 참여하게 합니다. 세례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고난당한 예수님을 주인으로 믿기로 결단하는 예식입니다. 또한 부활하여 우리 안에 성령으로 계시는 주님을 우선순위에 두고 따르겠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세례 탕에 들어가 몸을 담그거나 혹은 간단하게 물을 뿌리거나 적시는 이 예식은 나는 죽고 예수 안에서 새 생명을 얻었다는 변화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주님과 함께 나에 대해서는 죽고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났다는 것을 교회 공동체 안에서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예식입니다. 교회는 이 신앙고백을 귀하게 여겨 세례 받은 교인을 공동체의 책임 있는 식구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도 등록한 18세 이상의 세례교인을 정회원으로 받아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주고 교회운영을 위한 책임을 함께 나누어집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믿음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세례를 받고 교회의 책임 있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과 책임 없이 성찬을 받는 다면 주님의 대속의 죽음의 의미를 무의미하게 하는 잘못이 됩니다. 초대 교회도 이 예식을 중요하게 여겨 신앙고백이 분명한 세례 받은 교인들만 성찬을 먹도록 했습니다. 이교도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보안에 신경 쓰기도 했는데 그 바람에 사람의 고기와 피를 먹는 이상한 집단이라고 오해를 사기도 했습니다.

2. 성찬예식은 예수님께서 고난당하기 전에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음식을 드시면서 제정해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유월절은 아주 중요했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다가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바로는 유대인들을 쉽게 풀어주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10가지의 재앙을 통하여 바로와 이방 신들을 항복시켰습니다. 그 마지막 재앙이 장자가 죽는 재앙이었습니다. 사람과 짐승의 첫 태생이 죽던 그 밤에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그 피를 보고 건너뛰었기에 때문입니다. 출 12:13은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중요한 절기에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양고기와 무교병과 포도주로 유월절 저녁을 먹었습니다. 그리고는 그가 유월절 어린 양처럼 죽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리는 대속의 피가 죄의 결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 될 것을 말씀했습니다. 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영원한 속죄를 이루기 위해 피 흘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식사를 마친 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눅 22:19-20 “떡을 가져 감사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모세는 시내 산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짐승의 피를 받아 절반은 단에 뿌리고 반은 백성들에게 뿌리며 “이것은 주께서 이 모든 말씀을 따라 너희에게 세우신 언약의 피다.”(출 24:8)라며 언약을 맺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약속이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된다는 쌍방 간의 약속이었습니다. 이 약속은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로 깨어졌지만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을 통하여 새 언약을 세웠습니다. 성찬예식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 피로 새 언약을 세운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3, 그래서 성찬을 먹기 전에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바울은 고전 11:27-32에서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예식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불경건한 모습으로 무질서하게 성찬을 먹다가 징계를 받아 병들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용서받지 못한 상태에서 성찬예식에 참여하면 주님의 죽음을 욕되게 하는 또 하나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을 받기 전에는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여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막힘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만일 자신을 살피고 준비하는데 시간이 더 필요하다면 오늘의 성찬은 사양하는 것이 옳습니다.

성찬에 대한 표현이 다양합니다. 거룩한 식사(the Holy Meal), 성찬(Eucharist), 주의 만찬(Lord’os Supper), 성만찬(Holy Communion)등으로 불립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떡과 포도주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에 감사하고 또 거룩한 주님의 식탁에 우리를 한 식구로 불러 앉혀 주셨다는 공동체의 교감을 가지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려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한 식탁에서 음식을 먹는 식구는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운명공동체입니다. 고전 10:16-17 “우리가 축복 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라는 말씀처럼 성찬을 통하여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한 몸입니다.

4. 성찬예식은 교회의 사명을 확인시켜주는 예식입니다. 바울은 고전 11:26에서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라고 말합니다. 성찬예식은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을 먹고 마시는 일을 통하여 경험하는 신비입니다. 요 6:53, “누구든지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는 자는 영생을 얻지 못한다.” 는 말씀처럼 주님을 몸으로 경험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어 새 생명을 얻는 복음을 실제적으로 경험하고 나누게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어 구원 받은 사건은 과거의 일이지만 오늘 그 은혜를 누리며 사는 현재적인 일이기도 하고 주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지속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성찬을 먹을 때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감사하고 자랑하고 선전해야 합니다.

잘 준비된 마음으로 성찬을 먹으면 주님과 하나 되었다는 은혜를 확증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 영과 육에 활력이 되고 교회 부흥과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큰 보탬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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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9/17
구원 그 이후의 은혜 (엡 5:15-18)

교회는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선택보다 하나님께서 먼저 계획을 가지고 우리를 불러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요 6:44)고 했습니다. 부름을 인식하는 신자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었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알기 원합니다.

예수 믿고 그 사랑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가득했던 때가 있습니다. 죄로부터 해방되어 구름 위에 사는 것처럼 지낼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감격이 점점 식어지고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합니다. 예수 믿는 것이 전부가 아닌 일부가 되어갑니다. 바쁜 일정을 따라 살다보니 열심을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친구들 재미있게 사는 것을 보면 교회에 앉아 있는 시간도 아까울 때가 있습니다. 이런 갈등은 회개하고 구원받은 것으로만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가 있습니다. 구원 그 이후에 주시는 성결의 은혜를 놓치면 세속의 물결을 거슬러 가기가 쉽지 않고 방향을 잃기 쉽습니다. 처음 사랑이 식고 감동도 사라지기 쉽습니다.

결론을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는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은 물론 그 이후에 주님과 함께 거하는 성결한 삶을 위해서 불러주셨습니다. 주님 닮은 제자로 살며 하나님 나라를 함께 세워갈 일군으로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을 협력자로 삼아 모든 나라가 복 받게 하는 제사장이 되게 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하는 일에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거룩한 나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며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것이 구원의 목적입니다. 이 목적을 알면 우리의 몸과 생활을 산 제물로 드릴 수 있습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주인으로 계시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세속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따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부름에 합당하게 살면 우리들의 삶의 필요는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출 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신 6:10-1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마 6:31-33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생활은 한 번의 결단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내가 주인으로 살다가 이제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자신에 대하여는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훈련을 지속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떠나 광야생활을 하며 이방 신앙에 물들었던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 백성답게 살도록 훈련받은 것처럼 말입니다. 홍해를 마른땅처럼 건너고 뒤쫓아 오던 바로의 군대가 수장되는 것을 경험했지만 그것만으로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라에서 쓴물을 달게 하신 일이나 르비딤에서 반석에서 물을 얻게 하신 것 모두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훈련이었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도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어 숭배하다가 혼났습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는 모세가 손들고 기도하여 승리했습니다. 아론과 훌은 피곤한 그의 팔을 잡아 주며 동역했습니다.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세워 사역을 분담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을 배우고 더불어 사는 것을 배웠습니다. 율법을 받고 성막을 지어 살면서 하나님 중심의 삶을 배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는 쉽지 않았습니다. 믿음 없는 일 세대들은 모두 시험에 낙방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다 죽었고 여호수아 갈렙 그리고 다음 세대만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렇다면 다음 세대의 믿음이 더 크다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애굽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광야에서 출생한 새 세대라는 것뿐입니다. 그들도 부모들에게서 배운 대로 믿음 없이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지 않고 자기 판단대로 산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이었습니다. 사사시대를 거쳐 왕정시대를 열어보지만 그 결과도 악했고 결국 나라는 망했습니다. 메시아가 와서 은혜로 구원해 주시는 것밖에는 길이 없었습니다.

우리 중 일부는 아직 홍해의 기적을 감격스러워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과정을 배우고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약속을 성취시키기 위해서 열심히 싸우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갈 길은 아직도 멀기만 하고 거기다가 우리 스스로에게서는 선한 것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면서도 죄의 유혹은 여전하고 스스로는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을 경험할 때면 깊은 무력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성령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뿐입니다. 성결한 삶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가 매순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변화는 우리의 눈을 하나님께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성령께 우리의 모든 결정권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 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바로 사는 지혜이며 성도의 능력입니다. 우리의 눈에 원하지 않는 먼지가 들어오지만 눈물이 씻어내는 것처럼 신자에게 일어나는 죄의 유혹을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씻어내고 승리하게 하시는 성령을 순간마다 의지하는 것입니다.

A W 토저는 “성령으로 충만하려면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버려야 하고, 내적 죽음의 과정을 통과해야 하고, 오랜 세월 동안 쌓인 아담의 쓰레기를 우리의 마음에서 제거해야 하고, 하늘에서 찾아오시는 손님에게 모든 방문을 활짝 열어드려야 한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일군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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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2/17
영적 성장을 위하여 (벧후 1:1-11)

지난 한 주간 담임목사는 부흥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집회에 참석하고 왔습니다. 한번 모임이 5시간 동안이나 계속되는 바람에 놀라기도 했습니다. 예배하는 태도가 아주 열정적이었고 성령의 임재를 간절하게 부르짖는 참석자들에게서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성령 충만을 받았던 초기교회의 모습이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교회부흥과 성장을 무엇 때문에 필요로 하는지를 물으셨습니다. 부흥을 꿈꾸며 기도하는 동기가 무엇인지를 점검하게 했습니다. 자기를 자랑하고 싶은 욕심 때문인지 진정 주님과 함께 하고픈 열망인지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자신의 명성이나 출세를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신적 권능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을 더 사모하며 그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이 우선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생활마저도 자기 자랑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그의 영광과 덕을 누리게 하셨다고 구원의 목적을 말했습니다. 우리를 정욕을 따라 사는 부패한 사람이 되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려고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죄로 죽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리시고 책망 받을 일이 없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했습니다. 더 이상 자기 욕심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 곧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도록 성령께서 도와 주십니다. 신자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순종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갑니다. 하나님이 누구이며 무엇을 기뻐하는지를 배우고 실천합니다. 이런 변화가 곧 부흥이며 성장입니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영광과 덕을 누리게 하셨다고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만큼 우리도 거룩하게 살며 죄의 습성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존재 자체입니다. 감히 함께 할 수 없는 크신 하나님이 우리의 작은 가슴에 넉넉히 들어와 계십니다. 이것이 은혜이고 기적입니다. 그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의 생각과 성품과 인격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삶의 기쁨이 없고 부정적이며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자주 줍니까? 분명한 신앙고백을 하지 못하거나 전도의 열매가 없습니까?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며 고민합니까? 하나님을 우리 주인으로 모시고 살고 있는지를 점검해보십시오. 베드로는 예수 믿는 자의 생활을 점검할 수 있는 일곱 가지를 나열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덕입니다. 덕은 선한 성품을 말합니다. 예수 믿으면 예수 냄새가 나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인격훈련입니다. 자아가 아직도 살아있다면 심각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아는 만큼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기록한 성경말씀을 읽고 배웁니다. 성경을 가까이 두고 읽고 묵상하게 하려고 구역에서도 몇 장 읽었는지를 묻습니다.

셋째는 절제입니다. 절제는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지나치게 알려고 하는 것도 교만입니다. 이미 구원에 필요한 충분한 말씀을 주셨으니 그것을 가지고 감사하고 기뻐하며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넷째는 인내입니다. 갈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말세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이 식어지고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때에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은 인내가 필요한 일입니다.

다섯째는 경건입니다. 거룩 자체이신 하나님을 모시고 그 앞에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예배이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하나님 의식을 갖고 살 때에 죄의 유혹을 과감하게 뿌리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지식으로 판단하고 분석하고 평가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듯 두려움과 경외감을 가지고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경건은 지식이 아니라 순종이며 그 결과 나오는 열매입니다.

여섯째 형제 우애입니다. 바울도 롬 12:10에서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했습니다. 형제우애는 타인의 필요에 대한 관심을 말합니다. 영어에서도 brotherly kindness로 번역했습니다. 형제를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상대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형제의 필요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육신의 형제나 주 안에서 한 형제가 된 교우들과의 바른 관계를 위한 것입니다. 마 6:14-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일곱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신적 사랑의 능력을 갖게 됩니다. 그런 사랑은 율법을 완성시킵니다. 사랑은 모든 은사의 최고봉에 있는 것입니다. 요일 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덕목들이 구원받은 사람의 열매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열매들이 없으면 구원받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것일까요? 열매가 없으면 나무가 죽었는지를 점검해 보는 것은 당연합니다. 다행한 것은 우리의 힘으로는 열매를 맺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이 우리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듯 영적 열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에 나타나는 열매가 곧 성령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그 열매를 맺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을 따라 순종하며 사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을 감사하고 기뻐하며 그분을 주인으로 모시고 순종하면서 따라가면 성령의 열매가 맺힙니다. 성령을 간절하게 사모하고 그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의 전부라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의 생활에 분명하게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벧후 1:10-11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갈 5:16 “여러분은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대로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체의 욕망을 채우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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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5/17
하나님께 택함 받은 일군 (학개 2:20-23)

오늘 분문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역사를 이루시는 날에 택한 사람 스룹바벨을 높여 사용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마침 한 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계획하며 헌신을 다짐하는 직원들에게 주시는 필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스룹바벨이 성전재건의 일을 주도했다는 점을 살펴봅시다. 고향에 돌아온 유대인들이 성전을 재건하는 것은 그들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일이었습니다. 유다가 바벨론의 포로가 되고 나라가 없어지니 그 화려했던 다윗 왕조도 무너져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다윗 자손의 영광이 사라져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전도 훼파되고 성전의 집기와 창고에 있던 보물도 빼앗겨버렸습니다. 성전이 파괴된 것은 그들의 삶의 구심점을 잃은 것이기에 자기 정체성을 다시 찾기 위해서 성전이 꼭 필요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다윗 왕에게 약속한 다윗 왕조의 회복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열국을 심판하시고 원수들을 무찌르는 그 날에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을 높여 사용하실 것입니다. 하늘과 땅이 진동하고 여러 왕들의 보좌가 무너지고 병거와 그 탄자들이 죽게 되는 날 스룹바벨은 하나님의 대리자로 사용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내 종’ ‘인장반지‘라고 불렀습니다. 옛 왕들은 자기 이름이 새겨진 반지를 끼고 있다가 중요한 사안에 그 반지를 사용하여 사인했습니다. 때로는 믿을만한 신하에게 그 반지를 내주어 먼 곳에 가서 왕을 대신하여 사인하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그를 인장반지로 사용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신임이 있다는 것이며 왕권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다윗 왕족이 망하여 바벨론에게 넘어갔던 통치권 곧 인장반지(렘 22:24-25)를 이제 스룹바벨에게 다시 돌려주겠다는 것입니다.

스룹바벨이 성전의 기초만 놓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반대와 정치공격으로 공사를 중단했던 일은 그의 약점으로 드러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와 여호수아 대제사장 같은 협력자들을 주어 공사를 마치게 했습니다. 하나님도 직접 그들과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겠으니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가서 증인되라고 명령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성령께서 함께 하시고 때마다 필요한 능력과 은혜를 주십니다.

직원은 자원 봉사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일하는 것입니다. 내가 자원하여 봉사하는 것이라면 힘들 때는 얼마든지 그만둘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름을 받은 일군은 주인의 명령에 따라 일해야 합니다. 바울은 딤전 1:12에서 주님께서 자신을 충성되게 여겨 직분을 맡기셨다고 말하며 부름 받은 자로서의 소명을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딤후 2:2-3에서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라고 강조했습니다. 직원은 담임목사나 교회의 어른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께 부름을 받고 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믿고 따르며 주님이 드러나도록 인내하며 충성스럽게 일해야 합니다.

직분은 경력을 쌓아서 얻는 직함도 아니고 존경과 대접을 받는 자리도 아닙니다.
직원들은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교회의 영적 사역을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구원의 확신과 성령 충만이 필요합니다. 처음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영적 훈련을 잘 받도록 하기 위해서 궂은일을 나누어 감당합니다. 주인 노릇 하거나 특별한 힘을 가진 것처럼 일할 수 없습니다. 예배 실을 준비하거나 정리하고 청소하는 일을 하고 주차관리나 방문객을 안내하는 일도 합니다. 주방봉사와 친교 준비와 같은 일도 합니다. 신자들을 서로 돌보고 격려하며 전도하는 중요한 영적 사역도 합니다. 교육부서나 성가대 혹은 기관들에서 책임을 맡기도 합니다.

우리교회에서는 22세 이상의 구원의 확신이 분명한 사람을 집사로 세웁니다. 그리고 충성되게 일한 사람들 중에서 5년이 지나면 안수집사나 권사로 세울 수 있습니다. 안수집사나 권사로 2년을 봉사하면 장로로 선출할 수 있습니다. 안수집사나 권사는 조금 더 영적인 사역을 하라고 세운 기도의 사람들입니다. 우환질고와 낙심 중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격려하고 전도해야 합니다. 기도의 깊은 경지에 들어가 하나님 나라와 교인들을 위해서 중보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장로는 목사와 함께 교회의 행정과 권징을 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장로의 생각과 비전이 교회의 영적 분위기와 사역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합니다.

분명한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직함에 어울리는 믿음의 성장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성장 없이 사회경험만을 가지고 일하려고 하면 교회다운 교회를 세우기 어렵습니다. 교회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곳입니다. 그러니 세상이 우리를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따르게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한 성품이 드러나고 서로 사랑하는 냄새가 나야 합니다. 불신자들은 우리들의 생활의 냄새를 맡고 교회 전체를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엡 4장에서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 등의 직분은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고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몸의 여러 기관들이 뇌의 명령을 따라 협력하는 것처럼 우리들도 주 안에서 서로 협력하여 주의 몸인 교회를 건강하게 세워갑시다. 스룹바벨을 높여 사용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를 그렇게 사용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요 6: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마 25:21 “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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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17
복을 주시는 하나님 (학개 2:10-19)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이듬해인 B.C. 537년에 꿈에 그리던 성전재건공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의 방해로 중단되어 무려 15년을 방치해 두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하겠으니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해다가 성전을 지으라고 말씀했습니다. 성전을 짓는다는 것은 건물을 짓는 것이기도 하지만 자기중심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일을 우선적으로 하는 관계의 회복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한지 3개월째가 되었을 때에 학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율법에 대하여 두 가지의 질문을 하라는 것입니다. 첫째는 어떤 사람이 거룩하게 바쳐진 고기를 자기 옷자락에다가 쌌는데 그 옷자락이 빵이나 국이나 포도주나 기름이나 다른 어떤 음식에 닿으면 이러한 것들도 거룩하여지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학개의 질문에 제사장들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두 번째는 시체를 만져 더러워진 사람이 다른 것을 만지면 그것이 더러워지는 지를 물어 보니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부정하게 하는 것이 정결하게 하는 것보다 전염성이 훨씬 강합니다. 이 질문을 통하여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그들의 죄가 그들의 삶 전체를 오염시켰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참된 경건이 없는 형식적인 종교행위조차도 하나님께서 받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그들의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에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라고 학개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내 백성’이라고 하지 않고 ‘이 백성’이라고 표현하여 유다에 대한 실망감을 표시했습니다.

이것은 학개 1:6,9에서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라고 이미 지적받은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비록 성전건축은 중단했지만 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키는 데는 열심이었습니다. 에스라 3:1-6 “이스라엘 자손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인지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이 다 일어나 이스라엘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번제를 그 위에서 드리려 할새 무리가 모든 나라 백성을 두려워하여 제단을 그 터에 세우고 그 위에서 아침 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 기록된 규례대로 초막절을 지켜 번제를 매일 정수대로 날마다 드리고 그 후에는 항상 드리는 번제와 초하루와 여호와의 모든 거룩한 절기의 번제와 사람이 여호와께 기쁘게 드리는 예물을 드리되 일곱째 달 초하루부터 비로소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으나 그 때에 여호와의 성전 지대는 미처 놓지 못한지라.”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께 온전하게 헌신되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도 않았습니다. 부정한 상태에서 드리는 제물도 부정하게 되어 하나님께서 받을 수 없었습니다. 학개는 이것을 지적하며 순종을 독려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런 자들에게도 주어졌습니다. ‘오늘’로 표현된 하나님의 구원의 날을 보십시오. 성전 건축이 재개되는 바로 그날에 임한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붙들고 용기를 내어 성전건축을 시작하자마자 바로 그날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께 마음을 두자 바로 그 날에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과거의 불순종을 돌아보게 했습니다. 배고픔과 재난의 아픔을 기억하게 했습니다. 가뭄과 재해 때문에 먹을 음식이 항상 부족했는데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회개의 기회였다는 것을 알게 했습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와 기쁨으로 성전을 재건하다가 반대에 부딪혀 포기한 일도 회개했습니다. 성전보다 자신들의 집을 짓기에 바빴던 잘못을 돌아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없이 형식으로 드리는 어떤 희생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두지 않던 유대 사람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정당한 열매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경제적인 궁핍과 재해의 피해가 심각했습니다. 이십 석 수확할 곳에서 겨우 십 석을 거두었고 포도즙 50그릇을 수확하던 곳에서 20그릇을 겨우 얻었습니다. 그들의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폭풍과 곰팡이와 우박이 내려 먹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하는 부분에서 복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내게로 돌이키지 아니하였었느니라” (학 2:17).

그렇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그들을 멸망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회복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겪는 어려움이 오히려 하나님의 자비로운 배려였습니다. 실패와 좌절, 가난과 배고픔, 자연 재해와 난리를 겪으며 그들은 회개했고 하나님은 그들을 새로운 길로 인도했습니다. 그들이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어다가 성전을 지으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작업을 시작하자마자 하나님의 형통하게 하는 복이 임했습니다. ‘오늘부터 내가 복을 주겠다’는 것은 농사철에 필요한 적당한 비를 하나님께서 직접 공급하여 농사를 가능하도록 하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풍성한 수확을 보장하는 말씀입니다.

눅 5:5-7에 밤새도록 수고하고도 고기를 잡지 못한 제자들이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리자 그물이 찢어질 만큼 수확을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창 22:15-18에서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하나님게 바치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복을 받았습니다.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에 온전하게 순종하여 믿는자들을 구원하시는 주님이 되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습니다. 그 순종은 절대 순종이어야 합니다. 내 생각으로 이해되지 않아도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순종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믿음이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이런 믿음을 실천하여 형통한 삶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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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7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라 (학개 2:1-9)

1.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성전재건을 기쁨으로 시작했었지만 기초만 놓은 채 반대에 부딪혀 오랫동안 방치했습니다. 우선 자기 집을 먼저 짓고 살다보니 현실에 안주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현실을 핑계 삼지 말고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어다가 성전을 지으라고 독려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선뜻 나서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에 젊은이들은 감격하고 즐거워했지만 과거 솔로몬 성전의 위모와 영광을 보았던 노인들은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자기들이 다시 지으려고 기초를 놓은 성전이 너무 초라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방치했던 일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공사를 위한 재정도 모자랐고 지성소에 두어야 할 언약궤도 없었습니다.

2. 문제 가운데 있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해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과 함께 하며 재정 공급도 하겠으니 힘을 내라고 격려하십니다. 학개 2:4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것은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에게 담대하라고 격려하시던 말씀과 같습니다. 수 1:5,9 “내가 모세와 함께 하였던 것과 같이 너와 함께 하며,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겠다. 너는 두려워하거나 낙담하지 말아라. 내가 너에게 굳세고 용감하라고 명하지 않았느냐!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의 주, 나 하나님이 함께 있겠다.”

함께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만큼 강한 격려는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시내산에서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습니다. 열방을 위해 제사장 나라로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 된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하나님이 된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다시 상기시키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니 얼마나 힘이 나겠습니까?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라고 반복하는 것을 보십시오.

재정의 필요도 채워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들은 조금 있으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나라들을 뒤집어엎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 세상이 열리고 세계의 보배가 예루살렘으로 몰려들 것입니다. 그러니 재정을 핑계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일하라는 격려였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결국 4년 뒤인 BC 516년에 스룹바벨 성전이 완공됩니다. 하나님은 격려와 칭찬을 통하여 낙담한 사람들이 일어나 새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사 43:1-2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이사야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격려하시던 이 말씀이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문제를 넉넉하게 해결할 수 있는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3. 성전은 건물보다 더 중요한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성전은 언약궤 뚜껑의 속죄 소에서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만나는 장소이기에 중요합니다.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어린 양의 피를 들고 들어가 속죄 소에 피를 뿌려 죄 용서를 받습니다. 그래서 솔로몬도 성전을 지어 봉헌하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왕상 8:57-60 “주 우리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조상과 함께 계시던 것과 같이 우리와도 함께 계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버리지도 마시고 포기하지도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기울이게 하셔서 주님께서 지시하신 그 길을 걷게 하시며 주님께서 우리 조상에게 내리신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키게 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주님 앞에 드린 이 간구와 기도를 주 우리의 하나님께서 낮이나 밤이나 늘 기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님의 종과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날마다 그 형편에 맞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세상의 모든 백성이 주님만이 하나님이시고 다른 신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은 그곳에 피 흘림이 있고 죄의 용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만이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성전건축의 의미는 건물을 짓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정리하고 부름에 합당하게 살려는 결단입니다. 더나가서는 주변나라들이 하나님을 알게 하는 제사장으로의 책임을 감당하려는 의지표현입니다.

4. 오늘날의 교회는 성전과 같습니다.
우리의 죄 값을 치루기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용서를 받게 합니다. 주께서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고백하는 믿음 위에 신약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 교회는 솔로몬 성전의 영광보다 더 영광스런 주님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죄 용서의 확신을 가지고 성령을 따라 순종하며 날마다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맛보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서로 칭찬하고 격려하여 살맛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제사장으로 사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는 이 일을 위해서 여러 기관과 일군을 세워 일합니다. 엡 4:12-15 “성도들을 준비시켜서 봉사의 일을 하게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우리는 이 이상 더 어린아이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인간의 속임수나 간교한 술수에 빠져서 온갖 교훈의 풍조에 흔들리거나 이리저리 밀려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살면서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라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배우고 닮아가는 것, 죄와 상관없는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 성령께서 우리 안에 충만하게 거하게 하는 것, 이것이 교회이며 성전인 우리들이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생활을 하여 살맛나는 세상이 되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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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4/17
잃어버린 꿈을 다시 찾으라 (학개 1:1-15)

주전 586년 유다는 바벨론의 침공으로 나라를 잃고 포로가 되었습니다. 포로가 된 유대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 예배하던 성전도 훼파되고 예루살렘에 갈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모든 꿈과 소망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다행히 예레미야를 통하여 70년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것을 약속받았기에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바벨론이 망하고 페르시아가 세력을 잡았습니다. 고레스왕은 유화정책을 폈고 유대인들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풀어주었습니다. 유대 총독에 임명된 스룹바벨과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는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함께 5만의 사람들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당시 200만의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잡혀갔지만 대부분은 그곳에 정착하여 살았고 고향을 재건해 보려는 꿈이 있는 사람 5만 명 만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러니 고향에 돌아온 감격과 열정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꿈에 그리던 성전예배를 위해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일 년 만에 반대에 부딪혔고 그 후 15년 동안이나 방치되었습니다. 진보와 보수의 마찰 때문이었습니다. 포로경험이 있는 바벨론 출신 유대인과 어려운 가운데 조국을 지켰던 유대인의 갈등도 컸습니다. 예루살렘 원주민과 이주민들 간의 갈등도 있었고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갈등도 있었습니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중앙 정부인 페르시아에 성전재건의 부당성을 상소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갈등 때문에 공사는 지연되었고 그러는 사이에 지원받았던 건축물자로 자신들의 집을 먼저 지어버렸습니다. 그렇게 16년이 흘렀습니다. 처음 열정과 꿈은 다 사라져버렸고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노라고 자신을 합리화시켰습니다.

이런 때에 학개 선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았습니다. 성전재건의 꿈을 다시 꾸고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어다가 성전을 재건하라는 것입니다. 16년 동안이나 잃어버렸던 성전재건의 꿈을 다시 꾸라는 것입니다. 꿈을 잃으면 우선순위도 바뀌고 현실에 적응해 버립니다. 우선순위가 바뀌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어렵습니다. 머리로는 생각하지만 몸으로는 실천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에는 결단도 실천도 함께 가야 합니다. 학개 선지자를 통하여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함께 들어봅시다.

“너희는 각자의 소행을 살펴보아라.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베어다가 성전을 지어라. 그러면 내가 그 성전을 기껍게 여기고, 거기에서 내 영광을 드러내겠다. 나 주가 말한다. 너희가 많이 거두기를 바랐으나 얼마 거두지 못했고, 너희가 집으로 거두어 들였으나 내가 그것을 흩어 버렸다. 그 까닭이 무엇이냐?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 나의 집은 이렇게 무너져 있는데, 너희는 저마다 제집 일에만 바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 때문에 하늘은 이슬을 그치고, 땅은 소출을 그쳤다. 내가 땅 위에 가뭄을 들게 하였다. 산 위에도,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 위에도, 밭에서 나는 모든 것 위에도, 사람과 짐승 위에도, 너희가 애써서 기르는 온갖 것 위에도 가뭄이 들게 하였다.”

스룹바벨 총독과 여호수아 대제사장과 모든 백성이 하나님이 하신 말씀과 하나님이 보내신 학개 예언자가 한 말을 따랐습니다. 백성들은 주님을 두려워했습니다. 학개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백성에게 전했습니다. 새 번역 성경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나 주의 말이다.” 개역개정은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라고 번역했습니다. 주님께서 스룹바벨 총독과 여호수아 대제사장의 마음과 모든 백성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래서 백성이 와서 그들의 하나님 만군의 주님의 성전을 짓는 일을 했습니다. 다리오 왕 이년 여섯째 달, 그 달 이십사일의 일입니다.

꿈과 소원은 간절한 부르짖음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도움을 주시는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킬만한 믿음의 결단과 실천도 함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소경 바디매오가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자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라고 외치며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예수님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바라느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합니다.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주십시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러자 그 눈먼 사람이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그에게는 이미 눈을 떠 다시 보게 될 믿음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은 우리를 만드신 분이며 생각까지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하나님 안에서 꿈을 다시 찾으십시오. 개인과 교회의 더 나은 모습을 꿈꾸십시오. 처음 가졌던 그 꿈을 분명하게 그려내십시오.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도 함께 물으십시오. 새롭게 변화되는 일이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다만 자신을 돌아보고 정비하는 것뿐입니다. 누구의 잘못을 탓할 것도 아닙니다. 각자가 하나님의 부름에 합당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돌아볼 뿐입니다. 그리고는 그 가치 있는 꿈을 위해서 조금 덜 가치 있는 것들은 포기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한걸음 발을 내딛는 실천이 필요합니다. 믿음으로 실천하는 결단에는 어려움과 수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모세는 인생을 편안하게 즐기고 누릴 수 있는 환경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상 주심을 바라는 믿음 때문에 자신의 편안함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더 큰 상을 주시는 하나님을 기대했습니다.

히 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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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7/17
청년? 믿음의 사람? (수1:1-18) 청년헌신예배

역사는 사람들의 흔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역사까지 운영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열방을 복되게 할 비전을 주시고 그의 후손이 큰 민족을 이루고 가나안 땅에서 살게 될 것을 약속했습니다. 이삭과 야곱 시대를 지나 요셉의 때에 민족이 형성되었고 모세를 불러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게 했습니다. 모세가 죽자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불러 그 일을 계속하게 했습니다. 시대는 변하고 사람은 바뀌지만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역사는 지속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역사를 보는 큰 눈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시대에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어떻게 어디까지 진행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1. 사명에 대한 인식.

모세가 죽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부르십니다.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 사명을 주시고 그 일을 이루도록 약속을 주십니다. 여호수아가 밟는 땅을 다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라.”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 하나님의 약속이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게 일해야 했습니다. 약속한 땅을 싸워 취하는 일이었습니다.

학생들이 전공을 선택할 때에 어려움을 많이 느낍니다. 너무 많은 분야가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것에서 하나를 찾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계획하고 만드신 하나님의 의지를 묻는 것이 필요합니다.

민족을 구할 사람도, 한 가정을 구원할 사람도 필요합니다. 기업을 경영하여 여러 사람을 막이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조그만 사업으로 한 가정의 생계를 유지하게 하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사무실 요원도 현장 요원도 필요합니다. 넥타이를 멘 사람도 장갑을 낀 사람도 필요합니다. 한 교회를 목회하는 사람도, 세계 선교를 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크고 작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일에 부름을 받았는지가 중요합니다. 내가 좋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름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갖고 사는 우리들은 학업이나 직업을 생존 수단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사명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사명에 대한 인식이 있으면 어떤 어려움도 참아낼 수 있습니다. 감당할 힘이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됩니다.

2. 사명을 위한 자기훈련.

여호수아는 스스로 담대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에게 담대하라고 하시며 위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여호수아는 싸울 때마다 전술을 공부하거나 전쟁 물자를 준비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했습니다. 40년 동안 모세를 따르며 어떻게 말씀에 순종하고 충성하는지를 배웠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는 전쟁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방법을 따라 순종했고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리고성을 함락시킬 때에 엿새 동안 매일 한 바퀴씩 돌았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았습니다.

이것이 합당한 일입니까?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의 합리적인 생각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하여 따르는 것입니다.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보지 못하는 것, 아직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으로 고백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데서 오는 확신입니다.

시 119:9-11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살면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죄를 이기는 것은 물론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일상을 살 수 있습니다. 일하고 공부하는 것조차도 사명을 위한 것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 훈련과 자기 포기훈련이 지속적으로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의 행동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3. 행동에 옮기는 믿음의 결단.

여호수아는 즉각 순종했습니다. “양식을 준비하라 사흘 안에 너희가 이 요단을 건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사 차지하게 하시는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들어갈 것임이니라.” 사흘 안에 요단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겠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요단 동편에 먼저 자리 잡은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의 출정 동의도 얻어냈습니다.

믿음은 과감합니다. 미적거리지 않습니다. 계산하고 따져보며 머리 굴리지 않습니다. 무모하리만치 단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데 더 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담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니 잘 될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을 여러분 인생의 주인이 되게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거나 멀리서 구경만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여러분의 눈과 마음을 두십시오. 부름과 사명을 점검하십시오. 그리고 약속의 말씀을 찾으십시오.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려는 의지를 실행에 옮기십시오. 우리들의 일상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증명하십시오. 믿음은 삶의 열매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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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17

예수를 바라보자 (히 12:1-3)

우리의 신앙여정에는 승리하는 때도 있지만 때로는 흑암과 같은 어두움을 통과해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성공과 실패를 고루 경험했습니다. 그는 75세에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고 약속받은 가나안에 들어갔지만 모든 문제가 형통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세겜과 벧엘을 거쳐 헤브론으로 이사할 때마다 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눈에 보이는 동서남북의 땅을 주겠다고 말씀하며 그의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많게 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더 분명해졌고 그가 받은 은혜도 충분했습니다.

그런 믿음의 사람에게도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그곳에 기근이 심해져서 애굽으로 내려가야만 했습니다. 그곳은 지낼만한 곳이었지만 그곳에서 큰 어려움을 만났습니다. 애굽 왕 바로가 그의 아내 사라를 첩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창12:10-20). 애굽은 하나님께서 약속한 땅은 아니었지만 생존을 위해서 선택한 곳이었는데 그곳에서 어려움을 만난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환경과 조건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사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품 안에서만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큰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늦은 나이에 어렵게 얻은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에게는 가장 어려운 결단을 해야 하는 때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이삭의 목숨이 아니라 아브람의 하나님께 향한 신뢰와 믿음이었습니다. 그가 믿음으로 결단하고 이삭을 죽이려고 칼을 빼어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준비한 양이 눈에 보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었기에 그런 결단을 할 수 있었다고 히브리서는 말합니다. 히 11: 17-19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인간적인 약점이 많았던 야곱의 삶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삼촌 집으로 피신하여 20년을 지내며 성공했지만 막상 집으로 돌아올 때는 형의 보복을 두려워했습니다. 얍복 강가에서 밤을 세워가며 천사와 씨름하던 야곱의 입장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형의 칼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한 것은 야곱의 철저한 자기포기였습니다. 나중에 야곱이 하나님을 만났던 약속의 장소 벧엘로 가서 하나님께 예배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주었던 약속과 복을 그에게 다시 확인해 주셨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가치를 회복시켜 주었고 이스라엘이라 이름을 바꿔주셨습니다. 영적 회복은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새롭게 합니다.

느헤미야가 성벽재건을 마친 이후에 영적 갱신이 일어났습니다. 에스라 선지자가 말씀을 읽을 때에 백성들 모두는 일어서서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느헤미야 8-9장에 보면 6시간동안이나 서서 말씀을 들었고 그동안 잊고 있었던 초막절도 지키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금식도 하고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했습니다. 이방인과의 교제를 끊고 조상들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일어난 변화였습니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습관을 변화시킵니다. 죄 용서의 기쁨과 감격을 누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며 그의 능력가운데 살게 합니다. 이것이 은혜 받은 사람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를 사랑하고 모이기에 힘쓰고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일을 즐거워합니다. 서로를 귀하게 여기며 주의 사랑으로 섬깁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119:105)라고 고백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예수님을 바라보며 인내로 신앙 경주를 계속 해나가자고 말합니다. 초기 교회시대에 유대교에서 개종한 신자들은 유대인들의 따돌림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신앙과 현실 사이에서 늘 고민해야 했습니다. 다시 유대교로 되돌아가고 싶은 유혹도 받았습니다. 믿음을 지키는 일은 늘 손해 보는 일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들에게는 끝까지 인내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일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히 12: 1-3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모든 무거운 짐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목표를 향해 꾸준히 달려갑시다. 그리고 우리 믿음의 근원이시며 우리 믿음을 완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장차 누릴 기쁨을 위하여 부끄러움과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셨으며 지금은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여러분은 죄인들의 이런 증오를 몸소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낙심하지 말고 용기를 내십시오.“

자신의 연약한 부분을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압니다. 무엇을 포기해야 영적으로 성숙해질 것인지도 압니다. 다시 넘어지지 않기 위해 성령의 힘주심을 의지하고 스스로 관리해야 합니다. 불신앙이 만연한 시대에 사는 우리가 주님의 손에 쓰임받기 위해서 더 좋은 신앙의 열매와 성품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예수님을 뒤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끄러움도 십자가의 고통도, 사람들의 저주와 욕설도 참아내며 아버지의 부름에 합당하게 처신했습니다. 우리도 소명을 따라 살면서 믿음의 근원이며 믿음을 완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날마다 바라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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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느웨냐 다시스냐?
성경말씀: 요나 1정 1절 – 3절
박병권 목사님


“하나됨의 은혜” (에베소서 4장 1-6절) 8/27/17
지난 주간에 지방회 목회자 가족들 60명이 모여서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운동도 하고 말씀을 들으며 사명을 새롭게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서로의 문제와 기도제목들을 자연스레 나누며 교제하는 중에 해답을 찾는 경우도 있었고 하나 됨의 기쁨을 나눴습니다. 각자의 삶도 중요하지만 결코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인 것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어느 단체나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찾는 사회적 존재입니다.

행 4: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행전에 기록 된 처음 교회 성도들은 자기 재물을 자기 것이라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서로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사용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공동체 의식이 투철했습니다.

고전 12:26-27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름 받은 교회는 공동체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마치 우리 몸의 각 기관이 서로 연결되어 한 몸을 이루는 것과 같습니다. 어느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온 몸이 고통을 받습니다. 그래서 각자의 믿음의 확증도 필요하고 나가서 서로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각각의 지체가 건강하면 몸을 이루는 교회도 건강합니다.

바울에게는 개인적인 특별한 기도가 있었습니다. 자기 병 낫기를 위해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바울에게 주신 은혜가 이미 넘친다고 하시며 거절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수용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아픔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받은 엄청난 계시들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과대평가 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내가 교만하게 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으로 나를 치셔서 나로 하여금 교만해지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것을 내게서 떠나게 해 달라고,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12:7-10)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겸손하게 인정하며 그가 약함 중에 있을 때에 힘을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질병이 떠난 것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 약함 속에서 주님을 사모하고 의지하면서 도와주시는 주님을 경험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 가운데서 주님의 강함이 나타난다고 말하며 오히려 자기의 약함을 자랑했습니다. 자신의 약함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복이 되었고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용납할 수 있는 겸손을 배우게 했습니다. 이런 은혜를 경험한 바울은 교회 공동체의 부족함을 비판하기 보다는 주께서 지도해 주시기를 기다리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내했습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분쟁 문제가 여전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가지고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고전 12: 8-9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형편에서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했기에 신실한 하나님께 문제를 의탁하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은혜로 용서받은 것이 감사하기에 다른 이들의 약함도 용납하고 기다려줄 수 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약함을 온전하게 해주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에도 꼭 필요한 부분입니다. 연약한 지체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긍정적인 자세로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교회의 필요한 재정과 일에도 책임 있는 구성원이 되어 나누어 감당합니다. 이것들이 믿음과 인내의 열매들입니다. 교회를 사용하시는 주님의 손과 발이 되려는 자원하는 마음도 다 여기서 비롯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완벽함이나 화려한 자랑거리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깨진 모습을 더 원하십니다.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주님의 발아래 내려놓을 때에 회복과 치료의 은혜가 임합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죄의 결과로 오는 죽음을 피하지 못하고 절망가운데 살던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의 속량의 은혜를 입혀주시고 먼저 찾아와 사랑해 주신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우리의 약점을 노출하지 않으려고 울타리를 높이 치거나 과장하거나 포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해서 조심하다가 주님 주시는 기쁨과 즐거움을 제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다 용서받은 죄인들입니다. 조금 더 가진 자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한 몸 된 은혜를 경험한 구속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족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약한데서 온전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도 나의 약함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에게서 더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자기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분쟁 중에 있던 교회에서 나온 성도들 몇 십 명 데리고 예배하고 있었는데 집안일로 한국에 다녀왔더니 다 흩어지고 몇 명만 남았더랍니다. 수 년 간을 함께 생활했는데도 매정하게 떠나버리는 현실 앞에서 많은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상황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부름과 지켜보시는 눈을 의식하려고 한다고 말씀하더군요. 그렇게 자기 고백적인 설교를 하는 목사님을 아무도 업신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공감하는 마음이 생겼고 나의 일처럼 마음 아파하며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의 결심과 믿음의 고백이 참으로 귀하게 여겨졌고 나의 마음도 뜨거워졌습니다. 이것이 한 몸이 된 증거입니다. 한 소망을 가진 교회의 공동체의식입니다. 엡 4:3-4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수련회는 이런 것입니다. 단순한 쉼이나 휴가이기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가는 훈련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 되게 하시는 일을 이뤄가는 것입니다. 한 지체가 은혜를 받으면 온 몸인 교회가 함께 그 복을 누립니다. 다른 지체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며 기도하다가 치유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새로운 성령의 역사를 경험합니다. 이번에도 각 지체를 통해 교회를 새롭게 하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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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있는 사람” (시1편) 8/20/17

지난 주간에 한쪽 눈이 불편한 채로 수년을 살다가 결국 인공 눈으로 교체한 분을 만났습니다. 어차피 한쪽은 시력을 잃은 지 오래였는데 자기 눈을 가지고 있을 때는 느끼지 못한 감정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동안은 두 눈을 가지고 바른 것과 바르지 못한 것, 긍정과 부정을 다 보며 살았는데 이제는 한쪽 눈만 가지게 되었으니 긍정적이고 밝은 것만 보며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살라는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하시더군요.

우리의 신앙생활에 하나님께만 마음을 두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일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만 바라며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으며 열매를 맺는 복 있는 사람에 대한 시편 1편의 말씀이 다가왔습니다. 모두가 복 받기 원하고 행복하기 원하는데 성경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순종하면 복을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이 복은 세상살이에 필요한 물질적인 것과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데서 오는 영적인 복을 다 포함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두 길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신 28: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신 28:1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

신 30:15-18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할 것이니라.”

예수님도 첫 가르침에서 여덟 가지 복에 대해서 말씀하시며 하나님께 마음을 두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마 6: 24-25, 32-33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너무나도 분명한 행복의 길인데도 왜 쉽게 따르지 못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의 가치가 더 크게 다가오기 때문이 아닐까요? 의인과 악인으로 양분하는 것도 싫고 더구나 인생의 성패가 하나님이 손에 달려있다니 자존심이 허락하지를 않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우리들도 하나님에 대하여 말은 하지만 하나님이 나의 생명까지라도 사용하실 수 있는 전적인 권한을 가진 분으로 인정하기 싫습니다. 우리의 자유와 권리가 제한받는 것 같아서입니다. 복을 받는 것은 좋은데 우리의 손에 있는 것을 그분께 내드리는 순종은 어렵습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유프라테스 강 옆에 새로운 수로작업을 하면서 쉬는 시간이면 그들의 역사를 되씹어보곤 했습니다. 모세의 출애굽역사와 사사들의 무용담을 생각했고 위대한 다윗 왕과 솔로몬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겼는지를 기억해냈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그들과 함께 한 그 하나님이 자기들의 현실에도 찾아와 주시기를 바랐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힘과 능력입니다.” 고된 노동에서도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께로 되돌아가 있었습니다. 고통가운데서 되씹는 역사와 율법은 그들의 시와 노래가 되었습니다. 뿌리 채 옮겨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잘 자라고 열매를 맺는 것을 본 그들은 옮겨진 나무처럼 타향살이하는 그들이지만 하나님께 인정받고 형통한 복을 누리게 될 것을 노래했습니다.

의인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도 않고, 오만한 자들과 어울리지 않고, 하나님 말씀의 소중함을 알아 날마다 묵상하는 사람이라고 노래하고 있는데 우리가 바로 그런 의인입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며 인격적인 교제를 깊게 하고 성령으로 충만한 생활을 사모하며 자신의 욕심을 죽이려는 우리들이 바로 의인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 139:1-4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다윗도 원수의 공격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 이런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했습니다.

시 16:8-11 “주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는 분,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주님, 참 감사합니다. 이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차고, 이 몸도 아무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까닭은, 주님께서 나를 보호하셔서 죽음의 세력이 나의 생명을 삼키지 못하게 하실 것이며 주님의 거룩한 자를 죽음의 세계에 버리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몸소 생명의 길을 나에게 보여 주시니,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삶에 기쁨이 넘칩니다. 주님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니, 이 큰 즐거움이 영원토록 이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인들에게 필요한 복을 주십니다. 물가에 심긴 나무가 잎이 푸르고 시절을 따라 열매를 맺는 것처럼 범사에 형통하는 복을 주십니다. 이런 사람은 시편 23편에서 말하는 부족함이 없는 복을 받습니다. 해를 당하지 않도록 보호해주시고 원수를 물리쳐 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창 39장의 요셉이 누린 형통의 복을 받습니다. 고난을 당하더라도 극복하고 견딜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우리 생활의 중심에 두기를 원합니다.

히 4:12-1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 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 하나님 앞에는 아무 피조물도 숨겨진 것이 없고, 모든 것이 그의 눈앞에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앞에 모든 것을 드러내 놓아야 합니다.”

수련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기회입니다. 새로운 것을 배우기도 하고 아는 것을 서로 실천하는 기회입니다. 자신을 벌거벗은 것처럼 말씀 앞에 내놓는 시간입니다. 잠자리도 불편하고 시간도 따로 내야하지만 말씀 앞에 서는 기쁨이 있기에 행복한 시간입니다. 말씀의 시냇가에 뿌리를 내리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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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기쁨” (시 126편) 8/13/17

1. 시 126: 1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바벨론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7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구원의 일을 기억하며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기쁨을 누렸습니다. 힘든 일들은 일순간에 잊어버렸고 구원의 감격으로 웃음이 회복되고 기쁘게 노래했습니다. 자기의 힘으로 되찾은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알았기에 더욱 감사가 컸습니다. 사실 바벨론의 삶은 그들의 신앙과 정체성을 간직하기 어려웠습니다. 다니엘의 이야기를 보면 여호와신앙을 유지하는 일은 사자 굴에 던져지기도 하고 순교를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정체성을 유지하는 길은 오직 하나님께 마음을 두는 것임을 알았기에 열심히 회당에 모여 예배하고 말씀을 배웠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올 때에 90프로 정도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뜻하는 ‘엘‘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을 만큼 신앙적이었습니다. 그러니 꿈을 꾸는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우리 역사에서도 일제 강점기의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해방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며 싸웠습니다. 강대국들의 도움도 있었지만 역사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기에 광복을 맛보았습니다.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일본이 항복했고 드디어 세계전쟁이 끝났습니다. 곳곳에 걸렸던 일장기를 내려오고 대신 성조기가 게양되었습니다. 신탁통치가 끝나자 성조기도 내려오고 태극기가 걸렸습니다. 1948년 제헌국회의 국회의원들은 이 일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된 것을 알았기에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나라를 찾기 위해 기도하며 희생했던 이들이 있었기에 이런 노래를 마음껏 부를 수 있습니다.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이 날이 사십 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꿈엔들 잊을 건가 지난날을 잊을건가/ 다 같이 복을 심어 잘 가꿔 길러 하늘 닿게
세계에 보답될 거룩한 빛에서 나리니/ 함께 지켜 나가세 함께 지켜 나가세.
2. 시 126:2-3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비록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우상을 섬기다가 징계를 받아 남의 나라 포로가 되었지만 회개하고 돌이켜 회복되고 다시 살게 되었으니 그 큰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이렇게 찬양하고 기뻐했습니다. 마치 출애굽 때의 감격과 같았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은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은 기쁨입니다. 롬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예수 안에서의 해방은 죄의 짓누름에서 해방되는 것이며 죄의 결과로 오는 죽음도 부활로 이기는 것입니다.
해방이후의 성도 개인과 교회공동체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한국교회가 폭발적으로 부흥했고 나라의 권위와 경제도 함께 신장되었습니다. 88년 올림픽 이후에 해외여행이 자유롭게 되고 달러도 송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가서는 열방을 섬기며 복음을 전하는 선교의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이제 2만 명의 해외선교사를 보내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도움을 받던 나라가 이제는 다른 나라를 도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난 받는 일들도 있지만 고쳐나가면서 하나님의 손에 계속 사용되기를 기도합니다. 병든 한국교회와 사회를 위해서 해외한인 교포와 교회가 더 열심히 기도하며 중매자와 치료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3. 시 126:4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보내소서.”
민족의 해방을 감사하는 이스라엘은 그 은혜가 모두의 삶에 풍성하게 나타나기를 기도했습니다. 마치 헐몬산에서 눈이 녹아 큰물이 되어 남쪽 네게브 사막의 땅을 적시고 시내를 이루는 것처럼 하나님의 새롭게 하고 생명력 있게 하는 회복의 은혜가 모든 백성들에게 흘러가기를 기도했습니다. 이미 해방의 감격을 맛본 자들이나 형편에 의해 바벨론에 남아있는 동족에게 동일하게 적용되기를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는 진정한 해방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북한 동포들을 생각하는 우리들의 기도입니다. 트럼프와 김정은의 막말대결로 전쟁의 위협이 피부로 느껴지는 때입니다. 미국 안에서도 북침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협상을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북한은 생존권을 보장받기까지는 무기생산을 중단할 수 없는 형편이고 미국은 제재이든 공격이든 협상이든 힘든 싸움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유엔에서 몇 차례의 대북 제재안을 내기는 했지만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을 지지해주고 있는 형편이어서 별 효력을 거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로서는 북한이 무너져서 미군이 코앞에 들어오게 하는 것보다는 북한이 어떻게든 생존하여 완충지대 노릇을 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혹자는 베트남에서처럼 평화협정이 맺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말하기도 합니다. 1973년 베트남에서 평화조약을 맺은 미국이 베트남에서 철수하자 곧 사회주의 통일이 일어났고 결국 많은 지식인과 종교인이 죽었고 100만이나 되는 보트피플이 생겼습니다. 공산화된 후 일 년 동안 죽은 사람의 수가 과거 10년간 죽은 사람의 두 배가 되었다고 합니다. 대량 학살이 일어난 것입니다.
한국과 미국을 위한 기도가 절대 필요한 때입니다. 대통령 개인이 맘에 들어서가 아니라 그가 맡은 직책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사회주의와 다른 것은 서로의 생각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치적 색깔과 주장이 서로 다를 수 있지만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내 생각과 다른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지 못하고 미워한다면 사회주의자들이 행하는 인민재판이나 인종청소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민주당이나 국민의당 모두를 사용하십니다. 트럼프도 김정은도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바벨론과 그들의 지도자들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과 주권이 나타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4. 시 126:5-6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이 눈물은 기도이기도 하고 열매를 기다리는 인내이기도 합니다. 눈물의 기도를 심고 그 열매를 인내로 기다리는 사람을 만족하게 하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을 위한 간절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 소원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동족이 구원 받았으면 좋겠다고 기도했습니다. 모세도 금송아지를 섬기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게 된 동족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걸고 기도했습니다. “이 백성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이런 사랑의 기도가 우리들에게 불타오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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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와 평강” (벧전 1:1-6) 8/6/17

고난과 역경 없이 순조로운 삶을 모두가 원하지만 어느 누구에게나 나름 힘든 과정은 있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마찬가지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생겨난 예루살렘 교회는 기적을 경험하며 급성장했습니다. 변화된 신자들의 생활이 좋은 간증이 되어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지 않아 교회에 핍박의 바람이 불어 닥칩니다. 스데반이 순교 당합니다. 이단의 잘못된 가르침이 교회를 흔들어댑니다. 사도들의 시대가 마무리되어갈 때쯤에는 정치적인 핍박이 심해져서 숨어 지내야 할 정도였습니다. 네로황제는 기독교를 말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로마에서 일어난 대화제의 책임을 기독교인에게 돌려 짐승의 밥이 되게 하기도 했습니다. 2-3세기까지 그 지독한 핍박은 계속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순교를 각오하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전서는 이런 핍박이 시작되던 때의 성도들에게 소망과 위로를 주려는 목적으로 기록된 사도 베드로의 편지입니다. 지금의 터키지역인 소아시아 지방에 살던 이방인 신자들에게 전해진 편지입니다. 벧전 1:1-2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베드로가, 본도와 갈라디아와 갑바도기아와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서 사는 나그네들인, 택하심을 입은 이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미리 아시고 성령으로 거룩하게 해 주셔서, 여러분은 순종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은혜와 평화가 더욱 가득 차기를 빕니다.”
고난 중에 있는 신자들에게 먼저 은혜와 평안을 묻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가운데 부르심을 받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신자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의를 인하여 당하는 고난을 이기게 하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고 선을 행하다가 겪는 고난을 인내하라고 가르칩니다.
6 “그러므로 여러분이 지금 잠시 동안 여러 가지 시련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슬픔을 당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기뻐하십시오.” 8-9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그를 보지 못하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영광을 누리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의 목표 곧 여러분의 영혼의 구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여러분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정신을 차려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이 받을 은혜를 끝까지 바라고 있으십시오.”
우리도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은혜와 선택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를 주님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불러주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그의 피 뿌림을 얻은 사람이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은혜 때문에 우리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고 십자가만 의지합니다.
롬 3: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딛 3:5-6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믿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들을 하나님께서는 상속자로 인정하십니다. 더구나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시는 성령께서 함께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항해중인 배가 파도에 휩싸이면 고통스럽지만 놀이기구를 타는 젊은이들에게 파도타기나 흔들림은 오히려 즐거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믿는 사람에게는 어떤 형편에서든지 주께로부터 공급되는 보장된 평안과 기쁨이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라고 시작하는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을 강조합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어도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살았던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심지어는 기생 라합의 이름까지 하나하나 열거합니다. 그리고 35-37절에서는 인내로 고난을 통과한 선배들을 소개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더 좋은 부활의 삶을 얻고자 하여, 구태여 놓여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을 받기도 하고, 채찍으로 맞기도 하고, 심지어는 결박을 당하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면서 시련을 겪었습니다. 또 그들은 돌로 맞기도 하고, 톱질을 당하기도 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궁핍을 당하며, 고난을 겪으며, 학대를 받으면서,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았습니다.”
예레미야는 나라를 잃게 될 처지에서도 70년이 지나면 회복시킬 하나님의 계획을 알았기에 타국살이에서 슬퍼하지만 말고 농사도 하고 정착하여 살라고 백성들을 격려했습니다. 렘 29:11-1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며 너희를 포로 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나라들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났던 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마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시 119:71-72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는 오히려 유익하게 되었습니다. 그 고난 때문에, 나는 주님의 율례를 배웠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친히 일러주신 그 법이, 천만 금은보다 더 귀합니다.”
벧전 2:9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는 것입니다.”
여름철 폭염은 견디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생명체가 자라고 열매를 만들어내는 데에 꼭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결코 후회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우리의 눈과 마음을 두면 어떤 형편에서든지 감사하며 인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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